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2-20. 아프리카독립운동의 아버지 가나사회주의대통령 느크루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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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독립운동의 아버지
가나사회주의대통령 느크루마
고 류태영 박사
가나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30만년전으로 추정하며 B. C. 5000~B. C. 2000년경에는 농경과 목축 등이 진행됐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런 기록들은 다만 원시적인 기록일뿐이며 오늘의 가나 력사와의 련관성에 대한 정확한 증거는 없다.
8세기에 이르러서 가나지역에 북아프리카상인들의 왕래가 시작되였으며 그 당시 가나에는 아샨티족, 가족, 에웨족 등이 이주해왔으며 그후에는 만딩고족이 들어왔다. 13세기에 최초의 아칸족왕국을 건설했고 다곰바왕국과 맘프루시왕국 그리고 아샨티왕국 등 여러 토착민들의 왕국들이 차례로 가나전역에서 건설되였다.
유럽인들이 지금의 가나에 처음 들어온 때는 15세기부터였다.
그때 가나에 발을 들여놓은 뽀르뚜갈인들은 가나에 금이 많다고 하여 이 나라를 《황금해안》이라고 불렀다.
뽀르뚜갈인들은 《황금해안》을 독점하고 노예무역해안으로도 사용하였는데 15세기-18세기까지 300년동안에 네데를란드, 단마르크, 영국, 스웨리예, 프랑스, 프로씨아 등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황금해안》에 벌떼처럼 몰려들어 금략탈과 노예무역을 경쟁적으로 벌리였다.
그후 1844년에 영국은 가나를 완전히 강점하고 《황금해안》을 독차지하였으며 1895년에는 멀리 북쪽에 있는 아샨티왕국을, 1897년에는 여러 부족들을 포함하여 영국의 보호령으로 만들어놓고 식민지통치를 했다.
유럽의 침략자들은 서아프리카의 길고 광대한 해안을 둘로 나누어 분류하고 꼬뜨디봐르와 리베리아지역 북서해안은 《상아해안》으로, 가나와 또고의 동남해안은 《황금해안》이라는 명칭으로 불렀다.
그 리유는 이 지역들이 명칭그대로 상아와 황금의 보물고였기때문이다.
더우기 가나는 금산지인것으로 하여 이미 16세기에 유럽침략자들은 여기서 세계 금생산량의 15~30%에 해당하는 막대한 량의 금을 빼앗아갔다.
친영국파와 반영국파로 대립되고 분렬된 가나의 독립운동
1895년에 《황금해안》의 마지막왕국인 아샨티왕국이 붕괴됨으로써 영국의 식민지통치는 《황금해안》전역을 장악하고 제국주의침략의 전성기를 누리고있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25년경부터 가나에는 독립운동의 봄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이 독립운동은 침략자 영국을 대항하여 싸우는 새로운 방향으로 전진하고있었다.
1935년에 영국은 식민지통치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가나에 극히 제한된 형식적인 《자치권》을 허용한다는 속임수의 허위제안을 내놓았다. 가나에서 식민지통치의 손을 뗄 의지가 전혀 없던 영국이 내놓은 이 제안은 극히 위선적인것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의 독립운동단체들중에는 영국의 제안을 우선 받아들이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고 나서는 친영국분파가 있었다. 이 친영국적인 분파를 주도한 지도자는 죠세프 단쿠아(Joseph Danquah)였다.
1947년에 죠세프 단쿠아는 재빠르게 영국의 제안에 즉시 대응하여 정치활동을 시작하여 통일골드코스트의회(UGCC)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였다. 당시 죠세프 단쿠아는 영국에서 정치학박사학위를 받은 영국형의 엘리뜨층 지도자로 자처하고있었다.
영국은 매수된 죠세프 단쿠아위원장에게 영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도록 하면서 영국이 강요하는 헌법을 내놓았다. 이를 받아들인 죠세프 단쿠아가 영국이 강요하는 헌법을 그대로 수용할것을 주장함으로써 가나의 독립운동은 초창기부터 영국이 강요하는 헌법을 수용하는 찬성파와 반대파로 대립되게 되였으며 이것은 독립운동로선의 분쟁으로 확대되였다.
한편 1949년에 반영국파로 알려진 크와메 느크루마(Kwame Nkrumah)는 죠세프 단쿠아의 친영국적인 UGCC에서 탈퇴하고 독자적으로 청년층과 전국의 로동자들을 대상으로 사회주의운동을 시작하여 인민대회당(CPP)을 창당했으며 영국이 강요하는 헌법수용을 원천적으로 반대하는 자주와 자립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50년에 영국은 느크루마를 독립운동의 방해자이며 반영파라는 죄명으로 체포하여 감옥에 투옥시켰지만 이것은 오히려 가나의 민중들이 크와메 느크루마를 더욱 지지하고 독립운동의 유능한 지도자로 추앙하는 결과를 가져올뿐이였다.
이처럼 가나에서는 죠세프 단쿠아의 통일골드코스트의회의 친영국로선과 이를 반대하는 크와메 느크루마의 민족주의적인 인민대회당의 사회주의로선이 서로 팽팽히 대립되여왔다. 이 량진영이 표방하는 정책을 보면 《죠세프 단쿠아전통》은 친서방자본주의적시장경제의 개방을 주요정책으로 삼고있으며 《크와메 느크루마전통》은 범아프리카주의를 추구하면서 반외세와 민족자주자립주의를 주요정책으로 삼고있다.
가나의 독립운동력사는 8. 15해방후에 조선반도 남녘에서 전개되고있던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력사와 같은 맥락에서 관찰할수 있다.
미국에 매수된 어용독립운동가 리승만은 철저한 친미로선에 따라 미국의 군정이 강요하고있는 《정부》조작방향을 무조건 수용하여 38°선이남에 분단된 단독《정권》을 수립하는데 앞장섰다.
리승만은 가나의 죠세프 단쿠아처럼 매국적정치로선을 선택하여 그대로 실행했던것이다.
가나의 독립과 크와메 느크루마 사회주의대통령
영국이 지원하는 친영국파 죠세프 단쿠아의 모략과 중상으로 크와메 느크루마는 1950년-1951년에 감옥에 갇혀있었다.
1951년 영국의 식민지정권은 죠세프 단쿠아의 어용정당인 통일골드코스트의회를 앞세워 이른바 자치정부수립이라는 명목으로 국민투표를 감행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치정부의 수반으로 친영국파인 죠세프 단쿠아를 당선시키기 위해 꾸며낸 국민투표였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비록 속임수국민투표이기는 하였지만 어쨌든 당시 감옥에 갇혀있는 크와메 느크루마가 가나력사상 처음으로 진행된 선거에서 가나 자치정부의 수반으로서 옥중당선되였던것이다. 이것은 세계력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극히 특이한 사건이였다.
영국의 식민지정권과 친영국파인 죠세프 단쿠아는 닭쫓던 개가 되고말았다.
옥중당선으로 출옥하여 가나자치정부의 수반이 된 크와메 느크루마는 국민투표를 진행하여 그때까지 서방침략자들이 부르던 수치스러운 《황금해안》(Gold Coast)이라는 이름대신 가나공화국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결정하였다.
물론 가나는 여전히 영국에 예속되여있는 자치행정정부에 불과했지만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준비단계로서 크와메 느크루마가 신임수상으로 당선되였으며 그는 투쟁을 계속하여 목적지에 점차 가까이 이르게 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아프리카에 독립의 물결이 파도칠 때 가나는 1957년 3월 6일 제일 첫번째로 크와메 느크루마를 대통령으로 하는 독립국가의 창건을 전아프리카에 선포했다.
하지만 자치정부라는 단어에서 자치를 제거했다고 해서 완전한 독립국이 되는것은 아니였다.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그 헌법에 의하여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 정치를 해야만 민중을 위한 완전한 독립국이 될수 있었다.
그리하여 크와메 느크루마대통령은 용단을 내려 1960년 4월에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그 헌법에 의하여 대통령을 내세우는 선거를 실시했다.
이 선거야말로 가나력사에 있어서 친외세세력과 이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반외세, 민족자주세력들 두 진영이 대결하여 국민의 심판을 받는 매우 중대한 력사적인 선거였다.
다시말하여 친외세파 UGCC진영과 반외세파민족주의자 CPP진영이 맞대결하는 치렬한 선거전이였다.
선거결과는 어떠했는가?
사회주의자인 크와메 느크루마가 절대다수의 득표로 가나의 초대대통령으로 당선되였다. 하여 크와메 느크루마대통령은 가나에 《사회주의전통》을 창조하여 뿌리내리게 하는 새로운 력사적사변을 일으키는데 성공했다.
크와메 느크루마대통령의 6년동안의 통치비망록을 다 언급할수 없는만큼 세가지 에피소드를 추려서 언급한다.
첫째는 그가 임기 4년이 되는 1964년에 가나의 대학에 입학하는 모든 신입생들이 2주동안 사상교육을 받도록 한것이다.
대학의 모든 신입학생들에게 사상교육을 시킨 리유에 대해 크와메 느크루마대통령은 강제성이 아니라 하나의 민족적조화를 이루는 기본적훈련과정, 과도적인것이라고 주장했다. 300~400년동안 서방문화에 세뇌된 젊은이들에게 느크루마대통령의 그러한 교육방법은 매우 당연한것으로 판단된다.
둘째로는 느크루마대통령이 집권초기 특별히 지시를 내려 《The Souls of Black Folk》의 저자인 Du Bois를 초청하여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 정착하여 여생을 편히 지내도록 조치를 취한것이다.
Du Bois는 인류의 평화는 인종의 색갈을 초월한 세계에서만 얻을수 있다고 주장한 유명한 평화애호가로서 인디아의 간디와 미국의 마틴 루터 킹목사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명사인데 느크루마대통령은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것이 확실하다. 로인이 된 그런 사람의 마지막생을 돌보아준 느크루마의 마음은 아름답다.
셋째는 그가 1964년에 자기 나라를 방문한 당시 중국의 국무원 총리인 저우언라이(주은래)와 상봉한것이다. 저우언라이의 가나방문은 두 나라 뉴대를 전세계에 과시하는 뜻깊은 방문이였다.
느크루마대통령은 대외적으로 범아프리카민족주의를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영국을 비롯한 서방렬강들의 식민주의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러면서 그 당시 에짚트의 나쎄르, 유고의 찌또 등과 함께 쁠럭불가담운동을 창설하는데서 주동적인 역할을 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미국과 영국 등 서방자본주의국가들은 집권 초기부터 사회주의정책을 내세운 느크루마정권의 내정을 로골적으로 간섭해나섰으며 그중에서도 미중앙정보국의 공작은 느크루마정권의 존재에 대한 큰 위협으로 되였다.
이로부터 느크루마대통령은 단일정당정책으로 외부의 침투를 막으려는 비상한 강경책을 내세우게 되였다.
이렇게 되자 서방언론들은 기다렸던것처럼 일제히 일당독재자라고 느크루마정권에 대한 악선전을 집요하게 벌리였다.
이러한 곤난한 정치적난관속에 처하여있음에도 불구하고 크와메 느크루마대통령은 1966년 2월 24일에 당시 치렬한 윁남전쟁해결문제를 론의하기 위하여 북부윁남과 먄마 그리고 중국을 방문하고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방문기간이 사회주의정권을 타도하려는 미중앙정보국에게 좋은 기회가 될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크와메 느크루마정권은 친외세파인 죠세프 단쿠아당파와 그를 뒤에서 지원하는 미중앙정보국에 의하여 붕괴되였다. 그리하여 가나에서 사회주의정치활동은 당분간 모습이 감추어지는듯 했다.
하지만 가나의 사회주의적정권은 1957년에 옥중당선을 통하여 탄생된 특이한 저력이 살아있는 정권이다. 가나의 《피플파워》는 절대로 뒤로 물러서지 않고 사회주의정치로선의 전통을 재생시키면서 오늘에 이르고있다.
쿠데타로 얼룩진 가나의 우파정권
1966년 2월 24일 영국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안크라는 미중앙정보국의 후원과 죠세프 단쿠아패당의 지원을 받아 군부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1967년 4월에 또 다른 쿠데타가 발생했는데 미수사건으로 끝나고말았다. 이러한 불안정한 사회환경속에서 1969년 10월에 총선을 실시하여 대통령제를 아예 페지해버리고 부시아가 총리가 되여 군정통치를 하게 되였다.
하지만 1970년에 대통령제를 다시 부활시켜 에드워드 애도가 명목상의 대통령이 되고 실권은 군부의 부시아가 정권을 장악하는 기형적인 정권이 등장했다.
1972년 1월 13일에 실권자인 부시아가 영국방문중에 있었는데 아채암풍중령이 또다시 쿠데타에 성공하여 대통령없이 아채암풍이 통치를 하는 군사정권이 또다시 출범했다.
아채암풍은 경험부족과 통치능력무능자로 1978년 7월에 통치권을 사임하고 아쿠포가 통치권을 인수받았다.
하지만 오래된 군정을 인수받은 아쿠포는 악화되고있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비상대책으로 1979년 6월 18일에 총선을 실시하여 군정을 민간정권으로 이양시키겠다고 발표함으로써 민정으로 위장한 군정의 안정을 모색하고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9년 5월 15일에 아쿠포에 대한 암살계획사건이 발생했다. 암살계획은 불발로 실현되지 못했으나 아쿠포가 통치하는 군사정권은 여전히 불안속에 흔들리고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현역장교로서 사회주의신봉자로 알려진 공군대위 줴리 죤 라을링스를 앞세운 군인들이 1979년 6월 4일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아쿠포의 통치권을 페기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쿠데타에 성공한 장병들은 라을링스를 의장으로 혁명리사회를 조직하였으며 혁명리사회는 그동안 외세를 등에 업고 폭정을 행한 부패한 군장성들과 군정에 추종한 고급관리들을 숙청했다.
하지만 쫓겨난 아쿠포가 이전에 약속했던 총선은 그 계획대로 1979년에 실시되였다.
총선의 결과 힐라 리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였다. 힐라 리만은 영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은 학자출신으로서 집권초기에는 반영국반외세, 민족자주파진영의 대통령으로 자처하였고 국민들은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그는 태생적으로 친서방기질의 학자로서 오직 권력의 소유자가 되고있을뿐이였다. 그는 학자적정직성보다는 오히려 산적한 경제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외세에 더 많이 의지하려고 꿈꾸고있었다.
리만대통령에 대한 민중의 원성은 점점 높아졌으며 군부도 리만 대통령의 무능에 대하여 비협조적이여서 1981년에 그는 불명예로운 퇴진을 하고말았다.
가나는 독립이후부터 리만대통령이 퇴진하기까지 여러차례의 우익 군사정권들과 단기정권들이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복잡한 정치적흐름을 거쳐왔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 원인은 미국 등 서방세력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장악한 군부세력들이 내부에서 저들끼리 서로 권력다툼을 일삼은데 있었다. 우익군부정권내에서 정권탈취와 투쟁에 있어서의 승리자는 오직 쿠데타의 성공여하에 달려있었다.
그러니 그동안 가나의 불쌍한 민중들이 당한 고난과 그들의 절망은 이루 다 형언할수 없으며 약육강식의 악순환만 장기화되고있었다.
재등장한 사회주의자대통령 줴리 죤 라을링스
라을링스는 1981년 12월 31일 쿠데타에 성공하여 무능한 리만대통령의 의회를 해산시키고 림시국가방위리사회를 설립하고 위원장이 되였다.
라을링스가 림시국가방위리사회의 위원장으로 집권하고있는 기간에 라을링스를 반대하는 우파군부세력들의 쿠데타시도가 수차례 있었지만 모두 실패하여 라을링스는 계속 집권을 할수 있었다.
1992년 1월에 라을링스는 헌정복귀를 공식발표하고 민정이양일정계획을 발표했다. 1992년 11월에 라을링스는 군복을 벗고 민족민주대회의 대통령후보자로 출마하여 58. 3%의 득표로 제4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96년 12월에 라을링스대통령은 유효투표 57.2%를 획득하여 재선에 승리함으로써 제4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또다시 취임했다.
2000년 12월 19일에 라을링스대통령의 집권은 끝났다. 왜냐하면 가나헌법에 대통령 3선이 제한되여있기때문에 라을링스대통령은 준법정신으로 순수히 헌법의 절차를 통하여 스스로 퇴임을 단행했다.
라을링스대통령은 가나의 10번째 대통령이였으며 제4공화국의 1대와 2대대통령이였다. 라을링스대통령의 집권기간은 군부의 통치기간과 민간정부의 통치기간 모두 18년동안이였다.
라을링스대통령은 18년의 통치기간에 정부의 중앙집권제체제를 반대하고 오직 민중을 위주로 하는 people-power를 주장하고 그대로 실천했다.
반대세력들은 이와 같은 라을링스대통령의 통치방법을 건국의 아버지인 크와메 느크루마의 좌경화사회주의정치로선을 그대로 따르는 불순하고 위험한것이라고 줄곧 비난하고 중상모략을 계속 했다.
하지만 라을링스대통령은 이전의 친서방군부정권들이 이전 쏘련과 중국과의 외교와 교역을 완전히 차단하고 쏘련과 중국의 외교관들을 추방했던 정책들을 모두다 깨끗하게 뜯어고치는 용단을 내렸다.
뿐만아니라 라을링스대통령은 1984년에 쏘련과 중국은 물론이고 동유럽의 사회주의국가들과 문호를 개방하여 외교와 교역을 광범하게 확대시켰다.
라을링스대통령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경제정책에 대하여 소리높여 비판하면서 그것은 아프리카에서 생산되는 특수하고 귀중한 자원들을 착취하기 위한 서방제국주의국가들의 술책이라고 폭로하는 강경한 아프리카의 대변자가 되기도 했다.
라을링스대통령은 건국의 아버지이며 가나의 사회주의전통을 세운 크와메 느크루마 초대대통령을 기념하는 웅대한 기념관을 세웠으며 또한 아프리카흑인의 아버지로 세상에 알려진 Du Bois의 기념상도 건설하여 아프리카에서 사회주의위상을 높이는데 공헌했다.
줴리 죤 라을링스이후 오늘의 가나공화국
줴리 죤 라을링스대통령은 3선출마를 금지하는 헌법규정에 따라 2000년 12월 19일에 후임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를 실시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라을링스대통령정권에서는 부대통령인 아타 밀즈를 후임대통령후보자로 추천했고 야당측에서는 죤 쿠푸오르를 후보자로 추천했다.
량당의 후보자들이 공명선거를 치르도록 라을링스대통령은 노력했다.
하지만 미중앙정보국은 총력을 기울여 친미세력의 야당후보자의 승리를 위한 일방적선거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결국 미국이 지원하는 신애국당의 후보자인 죤 쿠푸오르가 줴리 죤 라을링스대통령이 추천한 아타 밀즈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였다.
친미정당인 신애국당의 후보자 죤 쿠푸오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가나의 사회주의정권에 오래동안 빼앗겼던 《잃어버린 군사정권》을 미중앙정보국의 공작과 후원에 의하여 다시 찾은것을 의미한다.
가나독립력사의 맥락에서 보면 외세의존정치세력을 대표하는 죠세프 단쿠아전통이 있고 이 전통에 대항하여 줄기차게 싸우는 반외세, 민족자주, 자립주의진영인 크와메 느크루마전통이 있다.
이제 중요한 관심사는 새로 당선된 죤 쿠푸오르 신임대통령이 이 두개의 전통의 갈림길중 어느 길을 선택할것인가이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미국이 내세운 죤 쿠푸오르대통령은 죠세프 단쿠아전통의 추종자였다.
쿠푸오르대통령은 취임후 곧 미국을 방문하여 당시 미국대통령이였던 부쉬와의 《좋은 친구》임을 확인했고 미국의 경제지원도 약속받았다. 이러한 미국의 《덕》에 쿠푸오르대통령은 2004년에 재선되였다.
그러면 쿠푸오르대통령이 2선까지 집권할만큼 통치능력이 있었는가 하는것이다.
굳이 그의 통치능력에 대한 결산표를 낸다면 분명히 락제점으로 나타난다.
인터네트를 통하여 획득한 어느 한 자료에 따르면 가나의 총인구중 40%이상이 절대빈곤층에 속해있다. 죤 쿠푸오르대통령의 집권기간에 자본주의경제개방정책으로 인하여 빈부의 격차가 사상최고에 이르게 되였던것이다.
하지만 죤 쿠푸오르대통령은 본인의 통치의 실패에 대하여 모르는척 하였으며 비판의 소리에는 귀를 막고 오직 보수주의추종자들이 칭찬하는 말에만 만족해하였다. 어쨌든 죤 쿠푸오르대통령에 대한 심판의 날은 드디여 오고야말았다.
2009년 1월 아타 밀즈가 제12대대통령으로 취임을 했다.
아타 밀즈는 사회주의자 줴리 죤 라을링스대통령밑에서 부대통령을 지냈으며 대통령후보자로 두차례 출마했으나 락선으로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쿠푸오르극우파 현직대통령의 통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임이 아타 밀즈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여 당선이 되였던것이다. 아타 밀즈의 대통령당선과 취임에 대하여 일부 언론들은 중도좌파대통령의 등장이라고 평가하고있다.
아타 밀즈는 극우파보수주의후보자를 제치고 승리함으로써 반외세, 민족자주,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크와메 느크루마전통을 다시 계승하는 공헌을 했다.
선거운동기간 미국이 지원하는 우익세력의 폭행과 불법을 자행하는 혼탁한 가나선거운동으로 사회적혼란이 일어났지만 아타 밀즈는 정치적배경으로 가나독립의 아버지인 크와메 느크루마의 후광을 무기로 삼고 줴리 죤 라을링스 전 대통령의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민중들의 적극적인 선거참여와 성원에 의하여 대통령으로 당선되여 취임할수 있었다.
25년동안 대학교수였으며 변호사이기도 했던 아타 밀즈대통령은 젊은 시절의 자기자신에 대하여 말하기를 《나는 사회주의를 선호하면서 민주주의를 따랐으며 동시에 나는 크와메 느크루마의 민족자주정신에 매혹되였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아타 밀즈대통령에게 크와메 느크루마전통을 계승해나가야 할 중임이 맡겨진것이다.
물론 가나의 지나온 력사를 돌이켜볼 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반외세, 민족자주와 사회주의는 가나국민들의 지향이고 념원이기에 반드시 이루어지고야말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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