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을 제대로 하는 것이 통일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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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③
“남북연석회의” 등 민족구심 역할 주동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공동]북부조국은 우선 그 제도와 실천 양식이 독특하고 독창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남북관계 차원에서 보면
“남북연석회의” 등을 통해 민족구심 역할을 하여 온 것은 조금도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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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민족통신 편집위원 공동 2010-09-04]
민족통신
수 있다. 그래서 이 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남북관계 차원에서 보면
“남북연석회의” 등을 통해 민족구심 역할을 하여 온 것은 조금도 부정할 수 없다.
[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③ "남북연석회의” 등 민족구심 역할 주동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공동]북부조국은 우선 그 제도와 실천 양식이 독특하고 독창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남북관계 차원에서 보면 “남북연석회의” 등을 통해 민족구심 역할을 하여 온 것은 조금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국제 진보사회 측면에서 보면 북조선은 사회주의를 하면서도 과거 소련, 러시아나, 중국과 다른 톡특하고 독창적인 사회주의를 운영하여 왔기 때문에 일반적인 다른 사회주의와 같은 선상에서 볼 수 없는 특수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북 동포들 자신들도 일반적인 사회주의 나라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우리식 사회주의> 또는 <주체사회주의>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북녘 동포들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단순히 자기들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운영하고 유지하고 있는 주체사회주의가 그 내용면에서 그리고 질적인 면에서 우월하다는 자부심도 갖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세번째 기획연재로 이북 정부가 수립될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함께 이북정부의 핵심이며 정점인 김일성 주석이 어떠한 철학에 기초하여 그 절차를 밟아 왔는가를 들여다 봄으로써 이북정부의 정체성을 알아보고자 한다. 우선 이북정부 수립의 과정은 남한의 이승만 정부의 수립과정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러한 차이점은 김일성 주석은 처음부터 통일정부를 수립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이승만 세력과 미국은 그것을 반대하면서 단선과 단정을 고집했다. 그렇기 때문에 김일성 주석은 <단선단정>이 민족을 분열시킨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어떻게 해서든지 남과 북이 하나의 통일정부를 만들기를 염원한 나머지 마지막 순간까지 단선과 단정을 반대하면서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소집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이 모임을 반대했던 세력은 오로지 미군정과 이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이승만 정치세력 뿐이었다. 남북연석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정견과 신앙, 주의 주장을 초월하여 오로지 민족대단결의 기치아래 모인 애국자들이었다. 이들 남북연석회의 대표들은 특히 4월21일 속개된 제2일 회의에 나와 감동적인 연설을 한 김일성 주석에게 뜨거운 박수로 환영했다. 그의 연설 내용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김일성 저작집 제4권, 286쪽) “조국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망국적 단독선거를 단호히 거부하여야 합니다. 이 거족적 투쟁에서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우려하는 모든 사람들은 당파와 종교의 소속, 정치적 견해를 가리지 말고 반드시 단결하여야 하겠습니다. 단결만이 우리의 승리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회합에서 전 민족적 역량의 통일과 단결을 이룩하며 민주주의적 통일정부를 세우는 역사적 위업을 이룩하기 위하여 어떻게 투쟁하며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대책들을 반드시 세워야 하겠습니다.” 이승만 세력과 미군정의 단선단정 수립을 반대하고 조국의 자주적 통일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민족대단결의 회합인 역사적인 4월 남북연석회의는 마침내 우리 민족사에서 ‘반미구국투쟁사’로서 빛나는 성과를 거두고 4월23일 막을 내렸다. 이 역사적인 회합은 첫째로 정치적으로 상반되는 두 지역 애국인사들과 정치세력이 민족공동의 요구와 이익에 기초하여 해방후 처음으로 민족대단결의 회합을 이뤄냈다는 점, 둘째로 이 회합은 민족공동의 이념에 기초하여 북녘의 사회주의자와 남녘의 민족주의자 사이에 단합을 이뤄냈다는 점, 그리고 셋째로 민족분열이냐, 통일이냐 하는 엄중한 시기에 민족운명 개척의 주체로서 온 겨레가 거족적인 단합을 이뤄 낸 점은 우리 민족단결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평가된다. 특히 이 회합을 통하여 김일성 주석과 투철한 반공주의자였던 백범 김구 선생이 손을 잡은 것은 우리 민족 대단결사에 빛나는 역사를 아로새겼다. 김구 선생이 연북연공으로 전환한 것은 민족대단결사에서 획기적인 선례가 되었다. 김구 선생은 당시 평양에 머물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관찰한 일화들이 있다. 만경대혁명유자녀학원에 참관했다가 임시정부 시절 교육부장을 지냈던 이종익 선생이 이 학원의 원장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았고, 량세봉을 비롯한 독립군 자녀들이 이 학원에 재학하고 있는 것도 알게되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도 요직에서 일하는 모습을 발견했고, 평양시내 곳곳의 공장들이 활기차게 돌아가고, 거리의 학생들이 명랑하고 씩씩하게 움직이는 모습들을 보며 많은 감명을 받았다. 김구 선생은 평양을 떠나오기 전에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서 일어났던 일화가 있다. 김구 선생은 담화를 마치고 일어서면서 지참하고 갔던 임시정부 국쇠(인장)를 김일성 주석에게 건네주며 “이것은 김일성 장군이 소지하여야 되겠습니다”라고 말하자 김일성 주석은 사양하면서 “저는 인민대중의 두터운 신임만 있으면 그만입니다”라고 반응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이 같은 일화를 남기고 남녘으로 돌아 온 김구 선생은 자주적, 민주적 통일정부를 건설하기 위해 남녘에 와서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반대하며 미소 양군의 철수를 촉구하며 성명전을 벌였다. 그는 한국독립당을 포함하여 민족자주연맹 등 80여개 단체로 이뤄진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하여 “단선단정”을 분쇄하고 민족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투쟁을 벌이던 중 1949년 6월26일 미제국주의 세력과 이승만 정권세력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북녘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남북총선거 실시후 그에 기초하여 수립된 것을 아는 남녘 동포들이나 해외동포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것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단선단정을 반대한 세력들을 탄압하고 살해하면서 모진 압박을 가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남녘에서는 비공개리에 서명형식으로 선거를 실시(1948년 7월6일부터 20일까지)하여 1,080명의 인민대표를 뽑아 이들이 황해도 해주에 8월21일 모여 대표자회의를 개최하고 360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을 비밀투표로 선출했다. 한편 북녘 동포들은 8월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을 선출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러한 과정과 결과에 기초하여 수립되었다. 1948년 9월9일로 결정된 과정은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가 1948년 9월2일 소집되었고, 여기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날자를 1948년 9월9일 결정했다. 북조선 정부수립은 이승만 정부가 날조에 의해 수립된 것에 비하면 사실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북이 참여한 선거에 기초하여 수립된 정부라고 말할 수 있다. 김일성 주석은 정부수립을 선포한 이후에도 분단된 조국을 통합하기 위해 1949년 5월초 전 민족적인 통일전선체 결성준비위원회 제1차회의를 열것을 남녘의 제정당 사회단체들에게 호소하여 5월25일 제1차회의를 갖고 6월26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했다. 그런데 미국은 1949년 10월 우리 문제를 또다시 유엔제4차 총회에 상정시키고 유엔한국위원단의 권한을 군사분쟁과 관련된 감시, 보고의 책임을 지게하는데까지 확대하는 한편 일본기지에 있던 미 극동군의 역량을 강화하고 남한군대를 급격히 강화하여 8개사단 중 5개사단을 38도선에 배치하고 북진태세를 갖추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입만 열면 북진통일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미군은 이미 1949년 한 해동안 황해도 벽산지역으로부터 강원도 양양지역에 이르는 38도선 이북지역에 무려 1,860회에 걸쳐 무장 침습을 강행한 것으로 집계될 정도로 정세를 전쟁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김일성 주석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남북을 통합하기 위한 사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했다. 1950년 6월7일 평양에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확대회의를 통해 <평화적 조국통일방책 추진에 관한 호소문>을 발표하는 한편 8월5일부터 8일사이에 남북총선거를 실시하고 통일적 입법기관을 창설하며 8.15해방 제5주년 기념일을 계기로 제1차회의를 서울에서 소집할 것을 제안했다. 김 주석은 이어 6월1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결정으로 <평화적 조국통일 추진에 관하여>라는 호소문을 발표하며 남북입법기관의 단일기구를 제언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미제국주의와 이승만 정부는 결국 평화제안을 거부하고 말았다.(다음에 계속…) ***김일성 주석과 김구 선생의 일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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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민족통신 편집위원 공동 2010-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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