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을 제대로 아는 것이 통일이다(6)
페이지 정보
본문
[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⑥
1980년대는 북과 해외동포간 연대활동 활발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공동]남녘 동포들과 자본주의에 거주하는 해외동포들은 남녘 족벌언론들과
미국을 비롯한 일본 및 일부 서방언론들의 왜곡된 보도에 영향을 받아 심지어는 이북을 뿔달린 사람들이
사는 곳, 혹은 미개한 사람들이 사는 사회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원인은 첫째 남녘과
미국 당국의 보수세력들이 건네주는 허위정보들을 그 어떤 검증절차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전달함으로써
사실을 굴절시키는 한편 이북의 형상을 깎아 내린 보도자료들 때문이었다.
[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⑤---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④---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③---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②---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①---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
***[기획]입은 삐둘어도 말은 바로하자⑩---<남북 각 분야별 현주소들>...여기를 짤각해 열람!
***[특집연재]일본과 미국에 희생당한 코리아⑦...여기를 짤각해 열람!
[출처 : 민족통신 편집위원 공동 2010-09-06]
민족통신
미국을 비롯한 일본 및 일부 서방언론들의 왜곡된 보도에 영향을 받아 심지어는 이북을 뿔달린 사람들이
사는 곳, 혹은 미개한 사람들이 사는 사회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원인은 첫째 남녘과
미국 당국의 보수세력들이 건네주는 허위정보들을 그 어떤 검증절차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전달함으로써
사실을 굴절시키는 한편 이북의 형상을 깎아 내린 보도자료들 때문이었다.
[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⑥ 1980년대는 북과 해외동포간 연대활동 활발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공동]남녘 동포들과 자본주의에 거주하는 해외동포들은 남녘 족벌언론들과 미국을 비롯한 일본 및 일부 서방언론들의 왜곡된 보도에 영향을 받아 심지어는 이북을 뿔달린 사람들이 사는 곳, 혹은 미개한 사람들이 사는 사회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원인은 첫째 남녘과 미국 당국의 보수세력들이 건네주는 허위정보들을 그 어떤 검증절차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전달함으로써 사실을 굴절시키는 한편 이북의 형상을 깎아 내린 보도자료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민족통신>은 창간이후 지금까지 이북제대로 알리는 정보들을 수집하여 보도해 왔다. 이번에는 여섯번째 연재기획으로 북조선의 1980년대와 1990년대 통일정책과 그 당시의 해 내외 상황을 통하여 이북의 정체성을 밝혀보고자 한다.
이북의 지도자들과 당국은 언제나 조국통일 정책에 대해서 일관성을 보였다. 즉 민족의 자주 입장을 비롯하여 평화통일의 입장, 민족대단결의 입장을 철투철미하게 견지하여 온 것이 이북정부의 통일정책 기조였다. 이러한 이북 정부의 통일정책은 8.15해방이후 지금까지 단 한번도 빗나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 동안 남녘의 민주화운동과 조국통일 운동을 해 오던 해외동포들은 본격적으로 북녘에 관심을 갖고 이북동포들과 교류를 본격화했다. 이북 당국은 이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이남 정부 당국이 조국통일에 대한 관심이 없을 뿐만아니라 남녘 통일운동 세력을 탄압하자 남녘과의 교류 및 통일관계 사업을 진전할 수 없었던 조건에서 이북 정부 당국은 해외동포 기독자들과 학자 및 통일운동 세력과 적극적인 교류 및 연대활동을 활성화 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대해 미국, 유럽, 카나다 동포 기독자들과 학자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교류사업에 응했다. 그 결과 1980년대 10년 동안 해외와 평양에서 공식적인 북과 해외동포간의 통일대회가 평균 1년에 한번 정도 오스트리아, 중국, 핀란드, 독일, 그리고 평양 등지에서 개최되었다. 주요 행사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 결과 제1회 “제1회 북과 해외동포기독자간 모임”이 1981년 11월3일부터 6일까지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 하델스톨프 쉬바이쳐 하우스에서 개최되었다. ▲북측에서는 허정숙, 려연구, 전금철, 김경화, 안병수, 렴국열, 김득룡, 고기준, 김옥선(인민배우) 등 무려 30여명이 참가했고, ▲미주측에서는 선우학원을 비롯하여 강위조, 김운하, 김충자, 이선
제2회 북과 해외동포기독자간 모임은 1982년 12월3일~5일 필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개최되었다. ▲북측에서는 조선기독교연맹 부위원장 김득룡을 위시하여 고기준, 리성봉, 림현달, 김운봉, 김성문 통일신보사 부주필 등 기독자들과 허정숙, 양형섭, 김경화, 려연구, 전금철, 안병수, 한종순 등 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사회과학원 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등 33명, ▲미주측에서는 김성락, 차상달, 선우학원, 노의선, 홍동근, 강위조, 송석중, 최익환, 강광석, 양은식, 최정렬, 김동수, 김운하, 노성걸, 국영길, 예정웅, 최진환, 이세방, 노영희, 폴장, 오봉도, 허응명, 김충자, ▲유럽측에서 이영빈, 김순환, 최기환, 임민식, 강무의, 김영희, 박경희, 김광호, 유은진, 박성옥, 김복순, 이승자, 선경석, 임원섭, 조명훈, 이요한, 오석근, 안상훈, 그리고 ▲카나다 측에서 최홍희, 전충림, 김순영, 김현두, 정해수, 한삼수, 김태정, 신오식, 박정태 및 최홍희, 최덕신, 류미영 등 남북 해외동포 총 1백여명이 참석했다. 이 행사기간 최익환 박사는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김대중 선생의 석방”에 대한 강연이 있었고, 홍동근 목사가 평양에 교회건립을 제언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88년 평양에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이 이북정부 수립기념절인 9.9절에 건립되기도 했다.
제4회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간 대화모임은 1984년 6월15일~18일 중국 베이징 국제구락부에서 열렸다. ▲북측에서는 전금철, 최장룡, 우달호, 리수근, 한인호, 전영률, 김광식, 손종철, 김성률, 차인덕, 안병수 등 15명, ▲해외측에서는 선우학원, 양은식, 김동수, 송석중, 백숙자, 최익환, 노성걸, 장정문, 2세운동가 등 17명이 각각 참석했다. 이 행사기간중 전금철의 “ 3자회담에 대하여”, 선우학원의 “조국의 통일과 평화를 위하여”, 김광식의 “미국의 핵전쟁 정책의 정치적 목적에 대한 분석”, 노성걸의 “평화와 평화적 통일을 성취하는데 필요한 여건”, 우달호의 “대화와 협상의 필요성”, 리수근의 “자주성과 전쟁과의 관계”에 대해 각각 발제하고 토론했다. 제5회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간 대화모임은 1984년 12월13일~16일 오스트리아 비엔나 엘도라도 호텔에서 열렸다. ▲북측에서는 려연구, 전금철, 안병수, 김룡중, 고기준, 김운봉 등 35명, ▲해외측에서는 선우학원, 양은식, 홍동근, 강광석, 김동수, 김기항,
제6회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간 대화모임은 1985년 12월14일~16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렸다. ▲ 북측에서는 려연구, 전금철, 안병수 등 5인, ▲해외측에서는 미주에서 강위조, 노성걸, 선우학원, 양은식, 차상달, 유럽에서 강문의, 공광덕, 박성옥, 오대석, 이영빈 등이 각각 참석하여 “조국통일을 위한 동포사이의 광범한 연대의식 강화”, “자주적 평화통일 촉진”에 대한 문제를 토의했다.
제8회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간 대화모임은 한해 건너 뛴 다음 해인 1988년 7월15~17일 핀란드 수고 헬싱키에서 열렸는데 주제는 “주체사상과 조국통일에 대하여”로 진행되었다. ▲북측에서는 려연구, 전금철, 안병수, 박승덕, 고기준 외 10명, ▲해외측에서는 미주에서 김동수, 강위조, 강은홍, 김광훈, 김정식, 김태종, 김현환, 김영숙, 김수영, 고정옥, 선우학원, 서정자, 신성려, 양은식, 전충림, 전순태, 조덕천, 차상달, 최익환, 최정열, 최장길, 홍동근, 유럽에서 이영빈, 김순환 외 수명이 각각 참석했다. 행사내용은 전금철의 “주체사상과 민족통일”, 선우학원의 “주체사상과 민족문제”, 박승덕의 “주체사상의 원리”, 양은식의 “주체사상과 의식화 문제”, 김동수의 “주체사상에 대한 이해”에 대해 각각 발제하고 토론했다. 제9회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간 대화모임은 1989년 7월9일 “조국통일 촉진대회” 형식으로 남과 북, 해외동포들이 대거 참석하여 진행되었다. 이번 행사는 특히 제13차 세계청년축전에 참가한 해외동포와 평양시민들 1만여명, 그 중에 일본, 미국, 유럽, 중
제10회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간 대화모임은 1991년 1월31일 독일 후랑크후르트 아놀즈하인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열렸다. ▲북측에서는 전금철, 리성봉, 김운봉, 조길남, 정영춘 외 수명, ▲해외측에서는 미주에서 강위조, 고마태오(종옥), 나진복, 선우 학원, 안중식, 조덕천, 홍동근, 유럽측에서 김순환, 이영빈, 권오성 외 수명이 각각 참석했다. 이 행사에서는 선우학원의 “국제정세 변혁에 있어 조국통일과 4대강국”, 전금철의
한편 해외동포사회에는 이와 같은 북과 해외동포사회 교류가 빈번하자 해외동포사회 자체에서 진행되는 <민족통일 심포지움>이 연례적으로 개최되어 통일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1979년과 1980년에 도꾜에서 개최되던 이 심포지움은 1981년 3월14~15일 최초로 워싱턴 디씨에서 제3회 민족통일 심포지움이 열렸고, 제5회 민족통일 심포지움이 스위스 제네바, 1986년 6월27~29일에 로스엔젤레스에서, 1989년 6월22~24일에 로스엔젤레스에서 제11회 행사, 1992년 6월26~28에 제13회 행사를 로스엔젤레스, 93년 9월10~12일 제14회 행사를 로스엔젤레스, 그리고 1994년 9월1일~3일 제15회 행사를 미국 수도 워싱턴 디씨에서 개최되었다. 이 행사들은 처음에는 일본의 최경태의 발기로 시작되었고, 그 후에 미국에서는 주로 선우학원, 양은식, 김현환 등이 참여하여 주동역할을 해 왔었다. 1990년대에 접어 들면서 이북 당국의 통일정책은 1980년대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남북 당국자간의 관계가 90년대 초반에 잠시 화해와 협력 분위기가 있었을 뿐 당국자간의 관계 개선이 여의치 못해 북과 해외동포들 사이에 교류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괄목할 것은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 결성되면서 민간단체의 3자연대운동이 개막의 기치를 올렸다는 것은 우리 조국통일운동사에 또 하나의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다음에 계속…) *문익환 목사가 외친 그 소리^^ |
[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⑤---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④---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③---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②---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①---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
***[기획]입은 삐둘어도 말은 바로하자⑩---<남북 각 분야별 현주소들>...여기를 짤각해 열람!
***[특집연재]일본과 미국에 희생당한 코리아⑦...여기를 짤각해 열람!
[출처 : 민족통신 편집위원 공동 2010-09-06]
민족통신
- 이전글이북을 제대로 아는 것이 통일이다(7) 11.02.10
- 다음글이북을 제대로 아는 것이 통일이다(5) 11.02.1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