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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노가다’를 해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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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태우
댓글 0건 조회 2,357회 작성일 11-02-08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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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를 코앞에 둔 지난 1월28일 밤 11시께, 종로경찰서. 밤 12시 보고시간을 앞두고 보고할 만한 사건이 없어서 좌절하다 교통조사계를 찾았더니 형님이 “운 좋네, 방금 음주교통사고에 절도사건 들어왔어~”라는 말을 했다. “차 훔쳐 타고 가다 사고 낸 거에요?”하고 물었더니, 형님은 “응, 노숙잔데 유치장 가고 싶어서 그랬다나 뭐라나. 좀 이따 와봐.”라고 대답했다. 형사계를 들렀다가 다시 왔더니 수감을 찬 이아무개(44)씨가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근데 도무지 노숙인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면도를 좀 안했을 뿐 얼굴도 깔끔했고, 패딩점퍼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비니를 쓰고 불룩한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토미 힐피겨’라는 브랜드 제품이었다. 부랴부랴 사건을 경위를 챙기고 나서 그에게 시선을 돌리니 에이4 용지 한가득 영어로 낙서를 끼적이고 있었다. 짧은 영어실력으로 대충 봤더니 자신의 심경을 담은 듯한 완결된 영어 문장이었다. ‘이사람, 뭐지? 도대체 뭘까?’ 보고든 기사작성이든 뭐든 간에 그냥 궁금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왜 차를 훔쳤으며, 무슨 사연이 있기에 유치장에 오고 싶었는지. 어느새 몰려든 타사 수습기자들이 망설이는 동안 물었다.
 
“선생님, 차는 왜 훔치신 거에요? 노숙인 맞으세요?”
“기자세요?”
“네, 기자에요. 선생님, 혹시 대답해 주실 수 있으세요?”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설을 앞둔 일용직 노동자의 슬픔이랄까요? 그런 거 기사가 되나요?”
순간 당황스러웠다.
“아 네, 기사가 되죠. 저 한겨렙니다”
“아 그러시구나. 제가 예전에 한겨레 기자들 영어도 가르쳤었는데…”
 
더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조사를 해야 되니 그만 물어봐라”라는 형님의 말에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선배에게 보고를 한 뒤 다시 교통조사계를 찾았을 때 이씨는 이미 유치장에 가고 없었다. 형님에게 “그 사람 어찌 됐냐”고 물으니, “‘주거가 부정’하여 내일 구속영장을 신청할 것이다”고 했다. 다음날 실제로 영장은 청구됐고, ‘주거가 부정’한 그는 30일에 서울중앙지법에서 실시한 실질심사를 거쳐 구속됐다.
 
아직 왜 차를 훔쳤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지 않아 30일 낮에 다시 종로경찰서를 찾아 이씨에게 면회를 신청했다. 이미 한겨레라는 이름을 팔아서인지 이씨는 면회에 응해줬고, “무슨 사연이 있으셨길래 차를 훔치신 거에요?”라고 묻자 그는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딨겠어요?”라며 기구한 사연에 대해 담담하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고등학교 때 소년원을 다녀온 이후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제대한 뒤인 1990년 23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4년의 유학비자가 끝나고 미등록 불법체류자로 살아가던 중인 2001년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냈는데, 911테러 이후 강화된 이민법 때문에 미국생활 13년째인 2002년 한국으로 강제출국 당했다. 한동안 망연자실하며 지내다 미국 생활에서 쌓은 영어실력을 밑천 삼아 미군부대 계약직 군무원, 영어학원 강사 등을 하며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고 했다.
 
그런데 2005년 결혼한 이후 사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하고 알코올 의존증이 생겼고 2007년 이혼한 뒤 방황하다, 2010년부터 일용직 노동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제주도에 있는 양어장에서 일하다 베체트 병이라는 희귀질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한 뒤 난치성 질환자 쉼터에서 지내기도 했고, 작년 12월 서울로 올라와 쪽방, 만화방, 찜질방 등을 전전하며 다시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유난히도 춥기도 하고, 건설경기 불황으로 일감도 줄어든 이번 겨울을 ‘노가다 초년병’인 그는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에 동대문 인력사무소에서 일감을 받아 성남에 있는 아파트 현장에서 일을 한 뒤, 서울로 돌아와 만화방이나 찜질방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저녁 8시. 일당 7만원에 수수료 7천원을 떼고 그에게 돌아오는 돈은 6만3천원. 돈도 돈이지만 이런 삶이 아무런 의미를 찾기 힘들었다고 얘기했다. 그나마 일감은 하루걸러 하루씩 돌아왔고, 일이 없는 날은 낮부터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고.
 
범행을 저지른 그날도 일감이 없었고, 혼자 소주3병에 막걸리3병을 마셨으며, 살고 싶은 마음도, 아무런 희망도 없었던 상태에서 시동이 걸린 채로 길가에 서있던 차를 발견하고서는 “이럴 바에야 차를 훔쳐 유치장에나 가자”라고 마음을 먹게 된 것.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도 “왜 시동이 걸려있던 차가 그 자리에 서있었는지 모르겠다”며 말 끝을 흐렸다.
 
조금은 후회가 되는 것 같기도 해서 “영어도 잘 하고, 나이도 그리 많은 편은 아닌데 다시 시작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지만, “새로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아무런 자신이 없다”고 했다. “몸도 안 좋고 주어진 조건이 너무도 불리해 희망을 생각할 상황이 아니”라며, “어찌보면 사회 취약계층인데 사회가 나같은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지 궁금하다”고 말하며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20여분의 면회를 마무리 하면서 “명절인데 생각나는 사람은 없냐”고 묻자, “명절인데 부모님 생각 안할 자식이 어딨겠어요.”라며 “연락 끊은지 1년이 넘은 팔순 노모가 생각난다”고 했다.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어머님한테 연락할 엄두가 나지 않아 연락을 끊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는 그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면회실 4중 유리 너머로 볼 수 있었다. 한사코 사식을 거절하는 이씨를 이길 수 없어,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달라”는 지키기 힘든 약속을 명함 한 장에 담아 경찰에게 건내고서는 면회실을 나섰다.
 
이씨 덕분에 31일 새벽 ‘노가다 초년병’이 많이 모인다는 신설동 인력시장에서 이씨처럼 사연 많은 사람들을 만나 취재를 했다. 공장 사장에서 중소기업 직원까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정적인 밥벌이가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또 이씨처럼 하루 일감을 구하지 못해 무겁게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영하 12도에 걸맞게 날씨는 어찌나 춥던지.
 
설 연휴를 하루 앞둔 1일에 중계된 “대통령과의 대화”도 꼼꼼히 훑어봤다. 문득 ‘이것저것 다 해봐서 잘 안다는 대통령은 노가다도 해봤을까?’, ‘대통령은 과연 이렇게 사연 많은 사람들이 하루 일자리도 구하지 못해 술을 마시고, 유치장에 들어가기 위해 차를 훔쳤다는 사연을 알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통령과의 대화에는 이씨가 이야기했던 ‘사회적 취약계층’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에 대책은 나오지 않았다.
 
설연휴 뒤 날씨가 풀렸다. 새벽 인력시장에 모인 사람들이 좀 더 많은 일감이 고루 나눠가졌기를 기대해본다.


한겨레 사회부 24시팀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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