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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일본과 미국에 희생당한 코리아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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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재미청년
댓글 0건 조회 5,362회 작성일 11-02-15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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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특집]일본과 미국에 희생당한 코리아①

<가쯔라-태프트 비밀협약>은 음모공작 증명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공동] 8.15광복 65주년을 맞지만 8.15해방은 잠시 뿐이었다. 역사를 따져보면
지난 100년 동안 우리 민족은 두개의 제국주의 세력들에 의해 온갖 고통과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그 고통은 지금 이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코리아(Korea)는 구체적으로
지난 한 세기 동안 일본과 미국에 의해 희생당해 온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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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은 을사늑약, 미국-일본 음모공작 <가쯔라-태프트>비밀조약이 맺어진 암울한 해였다.

[8.15특집]일본과 미국에 희생당한 코리아①

<가쯔라-태프트 비밀협약>은 음모공작 증명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공동] 8.15광복 65주년을 맞지만 8.15해방은 잠시 뿐이었다. 역사를 따져보면 지난 100년 동안 우리 민족은 두개의 제국주의 세력들에 의해 온갖 고통과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그 고통은 지금 이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코리아(Korea)는 구체적으로 지난 한 세기 동안 일본과 미국에 의해 희생당해 온 나라이다. <가쯔라-태프트 비밀협약>은 이것을 구체적으로 증명해 준 문서 중 하나이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제국주의 세력들에 대한 우리 민족의 주체적인 대응책이 없었기 때문에 강대국들의 희생물이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들은 5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외세들의 침략을 1천여 차례나 받아 온 민족으로서 그 어느 나라보다 민족의 자주권을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민족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근세에 들어와 우리나라가 걸어 온 발자취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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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 음모조약에 가담한 가쯔라
미국은 이미 1866년 셔만호 사건에서 보듯이 그 당시부터 우리 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움직이고 시작했고, 일본은 1876년(고종13년)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조선침략을 위한 본격적인 외교자세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일전쟁(1894.6~1895.4)을 일으켰다. 그 다음에는 1895년 10월8일 일본공사 미우라를 우두머리로 하는 살인폭력배 집단이 조선내부에 있던 친러파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조선왕궁에 기습하여 민비와 함께 수많은 궁녀들, 대신들을 살해한 끔직한 사건, 《을미사변》을 일으켰다.《민비살해사건》은 조선에서 친로파세력을 제거하고 친일파세력을 부식시킴으로써 조선강점야망을 손쉽게 실현하기 위해 일제가 주도세밀하게 계획하고 감행한 용납 못할 범죄행위로 기록되었다.

이 사건발생 후 10년이 지난 1904년 2월8일부터 1905년 9월5일까지 조선반도와 만주(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분할권을 놓고 두나라가 싸웠다. 그 배경에는 영일동맹과 러시아프랑스 동맹이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었다.

이 같은 와중에 일본은 조선을 먹기 위해 안팎으로 공작하여 왔다. 그래서 침략과 식민지를 합법화 시키기 위한 공작을 세밀하게 꾸몄다. 1904년(광무 8) 8월, 일본이 내정개선(內政改善)이라는 구실 아래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실시하기 위해 조선을 강압해서 강제협정을 체결했다. 이것의 공식명칭은 ‘외국인 용빙(傭聘)협정’이며, <한일협정서>라고도 한다. 같은 해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2월 조선정부를 무력으로 강압해서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를 체결하고 조선반도를 그들의 군사기지로서 확보하고, 전쟁이 일본에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기울자 조선의 재정 •외교정책을 쇄신하기 위해서 외국고문을 초빙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에 관한 협정체결을 강요하였다. 강압에 못이겨 외부대신 이하영(李夏榮),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재무장관) 민영기(閔泳綺)는 일본인 재정고문 1명과 일본이 추천하는 외국인 외교고문 1명을 초빙한다는 내용의 의안을 제출하여 이를 토대로 1904년 8월 22일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尹致昊)와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사이에 ‘외국인용빙협정’을 체결하였다. 이것을 제1차한일협약이라고도 부른다.

그 내용은 ① 조선정부는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으로 하여 조선정부에 용빙하고, 재무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 의견을 물어 시행할 것, ② 조선정부는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외국인 1명을 외교고문으로 하여 외부에 용빙하고 외교에 관한 요무(要務)는 일체 그 의견을 물어 시행할 것, ③ 조선정부는 외국과의 조약체결, 기타 중요한 외교안건, 즉 외국인에 대한 특권양여와 계약 등의 처리에 관하여는 미리 일본정부와 협의할 것 등이다.

이 같은 외세들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미국과 일본은 조선과 필리핀을 놓고 두 나라 사이에 야합음모가 진행되었다. 그것이 바로 1905년 7월29일에 이뤄진 이른바 <가쯔라-태프트 비밀협약(The Taft–Katsura Agreement)이다.(아래 비밀문서 영문 요약문 참조바람)

조미사이에 비밀음모가 이뤄진 직후인 1905년 11월17일 제2차한일협약이라고 하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맺어지면서 조선의 운명은 일본의 식민지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어 일본은 1907년 7월 만국평화회담에 간 이준열사 및 조선대표들의 활동과 관련하여 헤이그특사사건을 구실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 7조약(丁未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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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비밀음모 조약에 가담한 태프트
條約)을 강제하여 통감이 입법•사법•행정 전반에 걸친 통치권을 전단(專斷)하도록 하였으며, 조선인 대신(大臣) 밑에 실권을 장악하게 하는 일본인 차관을 두는 차관정치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사법 및 감옥사무위탁에 관한 각서’를 통해 조선의 사법권까지 탈취하였으며, 이어 조선군대를 해산하였고 조선인 경찰관을 통합하여 일본 관헌의 지휘감독하에 두었다.

당시 주체역량을 갖추지 못했던 조선은 결국 1910년 8월 22일 잔학무도한 일제의 날조된 강제합병조약으로 일제의 조선식민화의 어두운 역사속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이 같은 경술국치 사건에는 무능한 조선 위정자들과 사대매국노들이 참여했다. 이완용을 필두로 한 친일내각, 이용구, •송병준 등으로 대표되는 일진회(一進會) 등 매국노들의 반역행위도 큰 몫을 하였고, 미국과 영국 등 열강국들의 암묵적인 승인도 일본의 조선식민화에 도움을 주었다. 일본은 조선병합을 달성한 뒤 종래의 통감부를 폐지하고 보다 강력한 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같은 해 10월1일부터 구체적인 조선의 식민화 작업에 들어갔다. 일본의 효율적인 식민지배를 위한 탄압, 영구예속화를 위한 고유성 말살 및 우민화, 철저한 경제적 수탈 등이었다. 일제의 본격적인 강점기 35년은 첫 단계에서 무단통치시기(1910∼1919), 둘째 단계에서 문화정치시기(1919∼1931), 세번째 단계에서 병참기지화 및 전시동원시기(1931∼1945)의 3시기로 구분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일본과 미국의 움직임에 관한 역사를 철저하고 예리하게 들여다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도 주한미군을 점령군으로 보지 못하고 해방군으로 착각하며 <한미동맹>을 노래부르고 있는 남녘의 정치세력이 뻐젓이 집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정치세력은 심지어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억지 주장하는 일본 당국을 우방국이라고 내 세우면서 최근에 이북을 겨냥한 조국반도에서의 한-미합동군사훈련에 일본고문단을 끌어 들이며 한-미-일 삼각동맹을 노래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상황인가.(다음에 계속)



***꼭 감상해야 할 동영상 보기(아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한 일본 당국에 대한 입장과 자세

---여기를 짤각하여 동영상(8분)을 열람하세요!






[참조:가쯔라-태프트 비밀조약 요약문]



1905.7.29: William Howwrd Taft & Katsura Agreement:

The Taft-Katsura Memorandum (also commonly called the Taft–Katsura Agreement) consists of the meeting notes containing portions of a long, confidential conversation between Japanese Prime Minister Katsura and US Secretary of War Taft held in Tokyo on the morning of 27 July 1905. The memorandum detailing these discussions was dated 29 July 1905.

Three significant issues were discussed during the meeting:
• First were Katsura's views on peace in East Asia which according to him formed the fundamental principle of Japan's foreign policy and was best accomplished by a good understanding between Japan, the United States and Great Britain.

• The second issue concerned the Philippines. On this, Taft observed that it was in Japan's best interests to have the Philippines governed by a strong and friendly nation like the United States; Katsura claimed that Japan had no aggressive designs on the Philipp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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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쯔라-태프트 비밀조약을 루스벨트에게 보낸 자료
• Finally, regarding Korea, Katsura observed that to colonize Korea was a matter of absolute importance to Japan, as Korea was the direct cause of the just concluded Russo-Japanese War. Katsura stated that a comprehensive solution of the Korea problem would be the war's logical outcome. Katsura further stated that if left alone, Korea would continue to improvidently enter into agreements/treaties with other powers which created the original problem. Therefore, Japan must take steps to prevent Korea from again creating conditions which would force Japan into fighting another foreign war.

For his part, Taft concurred that the establishment of a Japanese protectorate over Korea would directly contribute to stability in east Asia. Taft also presented his belief that President Roosevelt would concur in his views in this regard.

Taft, Roosevelt and Katsura later stated in writing there was no agreement of any kind.

[edit] Korean reaction

Some Korean historians (e.g., Ki-baik Lee, author of A New History of Korea, translated by Edward J. Schultz and Edward W. Wagner [Harvard U. Press, 1984]) believe that the Taft–Katsura Agreement violated the "Korean-American Treaty of Amity and Commerce" signed at Incheon on May 22, 1882.

The Joseon Government considered that treaty constituted a de facto mutual defense treaty while the Americans did not. As the Agreement paved the way for recognition of Japanese interests in Korea as later stated in the Treaty of Portsmouth, it can also be considered one of the direct causes of Korean colonization by Japan.

Even today, while the Taft–Katsura Agreement is all but an obscure footnote in history, the Agreement is raised by some left-leaning Korean activists in the media as an example of how the United States cannot be trusted with regards to Korean security and sovereignty issues.

***Former President Roh Moohyun Speech on Dokdo Island and Japan:

Click here to watch this 8 minites Film***




http://www.minjok.com/news/news.php?act=view&code=35445&pNo=1

[출처 : 민족통신 공동 2010-08-09]

민족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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