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62] <가나> 독립의 아버지 콰메 은크루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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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62]<가나> 독립의 아버지 콰메 은크루마
1957년3월6일 아프리카 최초 독립국 부상
<친영국파 단쿠아 정치노선>과 <반영국파 은크루마 정치노선> 대결서 승리 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62번째 연재글로 '아프리카 독립운동의 아버지 가나 사회주의
대통령 은크루마'에 대해 연구고찰하면서 그의 <반영국파 정치노선> 과 <친영국파 단쿠아 정치노선>간 팽팽히
맞선 두노선의 대립 속에서 54년 동안 가나의 운명을 좌우한 역사적인 소용돌이 상황에서 반제노선을 구축해
왔다. 이에 대한 그의 글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출처 : 유 태영 박사 2011-02-18]
민족통신
대통령 은크루마'에 대해 연구고찰하면서 그의 <반영국파 정치노선> 과 <친영국파 단쿠아 정치노선>간 팽팽히
맞선 두노선의 대립 속에서 54년 동안 가나의 운명을 좌우한 역사적인 소용돌이 상황에서 반제노선을 구축해
왔다. 이에 대한 그의 글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62] 아프리카 독립운동의 아버지
가나 사회주의 대통령 은크루마 <친영국파 단쿠아 정치노선>과 <반영국파 은크루마 정치노선>
8세기에 이르러서 가나 지역에 북아프리카 상인들의 왕래가 시작됬으며 그 당시 가나에는 아칸족, 가족, 에웬족등이 이주해 왔으며 그후에는 금을 쫓던 만딩고족이 들어 왔다. 13세기에 최초의 아칸족 왕국을 건설했고 다곰바 왕국과 맘프루시 왕국 그리고 아산티 왕국등 여러 토착민들의 왕국들이 차레로 가나 전역에서 건설되였다. 유럽인들이 지금의 가나에 처음 들어 온 때는 15세기초에 포르투갈인들이 처음 가나에 상육 했다. 그러데 그들이 가나에 상육한 이유는 가나에 금이 많다고 하는이유 때문이였다. 그래서 포르투갈인들은 가나를 <황금 해안>이라고 불렀다. 포르투갈인들은 황금 해안을 독점하고 노예무역 해안으로도 사용하고 있었는데 15-17세기 까지 300년동안에 네덜란드, 덴막, 영국, 스웨덴, 프랑스, 프러시아 등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황금해안>에 벌떼처럼 몰려 들어 금과 노예무역을 경 쟁적으로 쟁탈하면서 착취하고 있었다. 1874년에 영국은 황금 해안을 독차지하여 직활식민지로 삼았다. 1901년에는 멀리 북족에 있는 아산티 왕국과 여러 부족들을 포함하여 영국의 보호령으로 만들어 놓고 식민통치를했다. 뿐만 아니라 영국은 1919년에 골드 코스트 동쪽에 있는 독일의 식민지인 토고의 서편반쪽 까지 갈취하여 토고를 동서로 분렬시키는 분렬의 역사를 만들어 놓았다. 토고는 처음에는 식민지 독일령 이였는데 제1차 세계대전후 프랑스에게 빼앗껴 서 토고는 프랑스령으로 전환되여 식민통치를 받아 오다 1960년에 프랑스로 부터 독립을 했다. 그런데 영국은 토고를 독일에서 빼앗아 통치 할 때 토고의 서편의 절반을 짤라서 가나에 속하는 영토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럼으로 토고가 1960년에 독립을 쟁취할 때 서편의 반쪽이 없는 동편 반쪽 만으로 독립을 했다. 영국은 토고를 동 서로 갈라 놓은 장본인 이며 토고의 비운은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유럽의 침략자들은 서아프리카의 길고 광대한 해안을 둘로 나누어 명칭을 불렀다. 첫째는 코트디부아르와 라이베리아지역 북서해안을 <상아 해안> 이라 불렀고 둘째는 가나와 토고의 동남해안을 <황금 해안>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가나는 황금의 땅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1500-1800년 사이에 유럽인들은 가나에서 금을 약 150만kg 이상을 채굴했다. 가나의 원주민들의 중요한 문화적 유산인 황금으로 만든 유물들이 수없이 많이발견 됬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칼, 샌들등 화려한 장신구들이 많이 있다. 1902년에 황금 해안의 마지막 왕국인 아산티 왕국이 붕괴됨으로 영국의 식민통치는 황금 해안 전역을 장악하고 제국주의 침략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25년경 부터 가나에는 독립운동의 봄바람이 조금식 점점 일기 시작했다. 가나의 붕괴된 왕국들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서 왕 국의 재건 보다는 현대적 정치체제로 탈바굼하고 개선되여 침략자 영국을 대향하여 싸우면서 새로운 시대적 독립운동의 방향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1935년에 영국은 식민통치를 그대로 존속하기 위한 수단방법으로 가나에 극히 제한된 형식적인 <자치권>을 허용한다는 속임수의 허위제안을 제시했다. 영국은 가나에서 식민통치의 손을 뗄 의지가 전혀 없는 가장된 자치권의 제안을 했던 것이다. 영국의 속임수 제안 임에도 불구하고 가나의 독립운동 단체들 중에는 영국의 제안을 우선 받아 들이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고 나서는 친영국 분파가 있었다. 이 친영국적인 분파를 주도한 지도자는 <조셉 단쿠아, Joseph Danquah> 이였다. 1947년에 조셉 단쿠아는 재빠르게 영국의 속임수 제안에 즉시 대응하여 정치활동을 시작하여 <통일 골드코스트 의회, UGCC>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됬다. 조셉 단쿠아는 영국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영국형의 엘리트층의 지도자로 자처하고 있었다. 영국은 매수된 조셉 단쿠아 위원장에게 영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지도하도록 지시하면서 <영국이 강요는 헌법>을 제시했다. 조셉 단쿠아는 영국이 강요하는 헌법을 그대로 수용할 것을 주장헸다. <영국이 강요하는 헌법>의 수용 문제에 대하여 찬성파와 반대파로 대립됬다. 찬성파와 반대파로 인하여 가나의 독립운동은 초창기 부터 분렬되여 <친영파>와 <반영파>로 분렬되였으며 여당과 야당이 대립됨으로 독립운동 노선의 분쟁으로 확대됬다. 1949년에 <반영국파>로 알려진 <콰메 은크루마, Kwame Nkrumah>는 할 수 없이 외롭게 조셉 단쿠아의 친영국 노선인 UGCC에서 탈퇴하고 독자적으로 청년층과 전국의 노동자들을 대상하여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하여 <의회 인민당, CPP>을 창당했다. 은크루마는 영국이 강요하는 헌법수용을 원천적으로 반대하는 자주와 자립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50년에 영국은 콰메 은크루마를 독립운동의 방해자이며 <반영파>라는 죄명으로 체포하여 감옥에 투옥시켰다. 하지만 영국의 처사는 오히려 가나의 민중들이 콰메 은크루마를 더욱 지지하고 독립운동의 유능한 지도자로 추앙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였다. 1950년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가나의 정치노선에는 양진영이 대립하고 있다. 조셉 단쿠아의 <골든코스트 의회, UGCC>의 친영국 노선과 이를 반대히는 콰메 은크루마의 민족주의 <의회인민당, CPP>의 사회주의 노선이 서로 팽팽히 대립하여 두 줄기의 전통이 독립 초기부터 50여년 동안 계속하여 대립되고 있다. <조셉 단쿠아 전통>은 친영국파, 친서방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개방을 주요정책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립하여 <콰메 은크루마 전통>은 범아프리카 주의를 추구하면서 반영국-반외세와 민족 자주자립주의를 주요 정책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가나의 독립운동 역사는 8.15 해방후에 코리아반도 남녘에서 전개되고 있던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 역사와 같은 맥락에서 관찰하게 된다. 미국에 매수되여 어용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던 이승만은 친미노선에 튼튼히 서서 미국의 군정이 강요하고 있는 국가창건 방향을 무조건 수용하여 38선 이남에 분단된 단독정권을 수립하는데 앞장섰다. 가나의 조셉 단쿠아의 매국적 정치 노선은 우리나라의 이승만 정권의 성격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승만과는 정반대로 김구와 김규식등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들의 정치적 노선은 이승만의 노선과는 달랐다. 가나의 참된 독립운동가인 콰메 은크루마의 반영반제 자주자립 독립운동 노선은 8.15이후 북녘의 김일성 주석이 추구했던 노선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참된 민족적 애국운동이였다. 영국이 지원하는 친영국파 조셉 단쿠아의 모략과 중상으로 콰메 은크루마는 1950-51년에 감옥에 가쳐 있었다. 영국의 식민정권은 조셉 단쿠아의 어용 정당인 <통일 골드 코스트 의회>를 앞세워 이른바 “자치정부 수립” 이라는 명목으로 국민투표를 1951년에 감행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자치정부의 수반으로 친영국파인 조셉 단쿠아를 당선시키기 위한 흉계를 꾸미고 있는 국민투표 이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비록 속임수 국민투표 이기는 하지만 어쨋던 현재 감옥에 가쳐있는 콰메 은크루마가 1951년의 가나 역사에서 첫번 있는 선거에서 가나 자치정부의 수반으로서 <옥중당선>이 됬던 것이다. 콰메 은크루마의 옥중당선이란 세계역사에서 찾아 보기 어려운 극히 특이한 사건이 였다. 영국의 식민정권과 친영국파인 조셉 단쿠아는 <닭쫓던 개>가 되고 말았다. 옥중당선으로 출옥하여 가나 자치정부의 수반이 된 콰메 은크루마는 지금까지 서구 침략자들이 부르던 수치스러운 <황금해안. Gold Cost>라고 하는 명칭을 제거하고 <가나 공화국>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국민 투표를 통하여 결정하였다. 국가의 명칭을 가나공화국으로 변경하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한 독립국이 못되고 여전히 영국에 예속되여 있는 <자치 행정정부>에 불과했다. 하지만 완전한 독립을 앞으로 쟁취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서 콰메 은크루마가 신임 수상으로 당선되였으며 그는 게속하여 투쟁을 지속하여 목적지에 점차 가까이 이르고 있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남으로 아프리카에 독립의 물결이 파도칠 때 가나는 제일 첫번째로 1957년 3월 6일에 콰메 은크루마를 대통령으로 하여 독립국가 됨을 전아프리카에 선포했다. 가나의 독립을 선두로 하여 1960년대에 들어서서 아프리카에는 독립운동의 선풍이 강하게 전대륙에 불어 퍼지고 있었다. 아프리카와 가나의 독립의 아버지가 되기까지 콰메 은크루마 대통령의 삶은 어떻 했는가를 간략하게 살펴 본다. 콰메 은크루마는 1909년생으로 21세 때 대학을 졸업하고 캐톨릭 신학교에서 계속 공부했다. 그는 26세 때 가나를 떠나 미국 유학생이 됬으며 Lincoln 대학과 Pennsylvania 대학에서 신학, 교육학 그리고 철학등 여러 전공분야를 전공하여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의 그의 활동은 Lincoln 대학에서 강사, 북미 아프리카 학생회 회장, 뉴욕과 필리델피아의 흑인교회에서 설교, 유럽의 아프리카 정책에 대한 비판 논문들 발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접근 유대 그리고 국제 사회주의 운동가 Trotsky에 대한 연구등 다양한 연구와 활약을 했다. 하지만 콰메 은크루마의 주요 관심사는 <범아프리카 해방운동>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에 대하여 집중되고 있었다. 1945년 그의 나이 36세 때 은크루마는 영국으로 건너 왔다. 영국에서의 그의 활동은 경제와 정치를 연결하는 사회과학원에서 연구에 몰두 했으며 범아프리카 의회의 조직과 서아프리카독립 학생회 부회장 역임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했다. 1947년에 콰메 은크루마는 22년만에 가나로 귀국했다. 은크루마는 귀국하여 즉시 조셉 단쿠아가 회장으로 있는 <통일 골드 코스트 의회,UGCC>의 사무총장이 됬다. 하지만 은크루마는 사무총장 이면서도 영국의 식민통치정책을 원쳔적으로 거부 했다. 영국은 식민정권에 항거한다는 죄명으로 콰메 은크루마를 1950년에 3년형을 선고하여 감옥에 투옥시켰다. 콰메 은크루마는 22년만에 자기 나라에 귀국하여 2년 후에 3년 징역형의 선고를 받았다. 1951년에 영국은 식민 통치하에서 <제한된 가나 자치정부> 수립을 허락했다. 영국은 눈가리고 아웅식의 자치정부를 허락하고 선거를 통하여 친영국파를 앞세워서 자치정부의 수반으로 선정하는 국민 투표를 실시했던 것이다. 그련데 영국 의 속셈은 빗나가고 말았다. 투표는 놀랍게도 콰메 은크루마가 역사에 전무후무한 38: 34의 아슬아슬한 득표 로 “옥중당선”이 되여 영국을 매우 난처하게 만들었다. 옥중당선으로 가나 자치정부의 수반이된 은크루마는 곧 출옥하여 가나의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계속 영국의 목을 조루는 투쟁을 전개 했다. 1957년에 <자치 정부>라고 하는 단어에서<자치>을 제거해 버리고<독립 정부> 를 드디어 성취했다. 하지만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그 새로운 헌법에 의하여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 탄생해야 하고 또 그 대통령이 통치를 해야만 민중을 위한 완전한 독립국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콰메 은크루마 대통령은 용단을 내여 1960년 6월에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그 새로운 헌법에 의하여 대통령을 세우는 대선을 실시했다. 이 대선이야 말로 가나 역사에 있어서<친영국 친외세 세력>과 이를 정면으로 대 항하는 <반영국 반외세 민족자주주의 세력>의 두 진영이 대결하여 국민의 심판을 받는 매우 중대한 역사적인 대선이였다. 다시 말하자면 친영국파 <조셉 단쿠아 UGCC> 진영과 반영국파 민족주의자 <코메 은크루마 CPP> 진영이 맞대결하는 치열한 선거전 이였다. 선거결과는 어떻 했는가? 사회주의자인 콰메 은크루마가 절대 다수의 톡표로 가나의 초대 대롱령으로 당선됬다. 콰메 은크루마 대통령은 가나에 <사회주의 전통의 초석>을 창조하여 뿌리를 내리게 하는 새로운 역사적 사건을 이르키는데 성공했다. 콰메 은크루마 대통령의 6년동안의 통치 비망록을 필자는 다 언급할 수 없지만 필자의 머리에 끝까지 남아 있느 세 가지 에피소드를 추려서 언급하겠다. 첫째는 그의 집권 4년째 되는 1964년에 은크루마 대통령은 가나의 대학에 입학하는 모든 신입생들은 2주간 동안 사상교육을 받도록 할것을 제시 했다. 대학의 모든 신입 학생들에게 사상교유을 시키는 것은 강제성이 아니라 하나의 민족-종교적 조화를 이루는 기본적 훈련과정 과도 같은 것이라고 콰메 은크루마 대통령은 주장 했다. 3-4 백년동안 서구 문화에 세뇌된 젊은이들에게 은크루마 대통령의 그러한 교육방법은 매우 당연한 지시라고 판단된다. 둘째로 은크루마 대통령은 집권초에 특별히 지시를 내려 ”The Souls of Black Folk”의 저자인 Du Bois 옹을 초청하여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 정착하여 여생을 편히 지내도록 조치를 했다. Du Bois옹은 인류의 평화는 인종의 색갈을 초월한 세계에서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 유명한 평화 애호가로서 인도의 간디와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명사인데 은크루마 대통령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노인이 된 그런 위인의 마지막 생을 돌보아 주는 은크루마의 마음은 아름답다. 세째는 1964년에 당시 중공의 국가 주석인 주은래가 친히 콰메 은크루마 대통령을 친선 방문을 하였다. 주은래의 가나 방문은 사회주의 두 나라의 유대를 공고히 하는 것을 전세계에 과시하는 뜻 깊은 방문 이였다. 필자는 특히 이 세가지 에피소드를 늘 기억하고 있다. 은크루마 대통령은 대외적으로 범아프리카 민족주의를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의 식민주의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러면서 그당시 이 집트의 낫세르, 유고의 티토등과 함께 <비동맹회의>를 그 때 처음 창설하는데 은크루마 대통령은 주동적인 역할을 했다. 콰메 은크루마 대통령은 집권 초기 부터 사회주의 정책을 추구함으로 서방자본주 의 국가들과의 관계가 날로 악화되여 동구권 나라들을 제외한 서방국가들과의 교역이 극히 감소되여 경제적인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등 강대국들이 은크루마 정권에 대한 내정간섭이 노골적 이였으며 또한 특히 미국 CIA의 공작이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당면한 위기속에서 온크루마 대통령은 할 수 없이 본의 아니게 단일정당 정책으로 외부의 침투를 막 으려는 비상한 강경책으로 부득불 독재정치를 감행할 수 밖에 없었다. 은트루마 대통령의 강경책에 대하여 서방 언론들은 기다렸던것 처럼 일제히 비난하는 언론의 포문을 활작 열어 <일당 독재자>라고 전세계적으로 악선전을 게속 벌리고 있었다. 이러한 곤란한 정치적 난관속에 처하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콰메 은크루마 대통령 은 1966년 2월 24일에 당시 치열한 베트남 전쟁해결 문제를 론의하기 위하여 북 베트남과 미얀마 그리고 중국의 모택동을 계속하여 방문하고 있었다. 그의 방문 기간을 이용하여 사회주의 정권을 타도하려는 CIA에게 좋은 기회가 될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콰메 은크루마의 사회주의 정권은 친영국파 <조셉 단쿠아 당파>와 그를 뒤에서 지 원하는 미국 CIA에 의하여 붕괴되였다. 그리하여 가나에서 사회주의 정치활동은 당분간 모습이 감추워 지는듯 했다. 하지만 가나의 사회주의 정권은 1957년에<옥중 당선>을 통하여 탄생된 특이한 저력이 살아있는 정권이다. 가나의<민중 파워>는 절대로 뒤로 물러서지 않고 오뚝이 파워로 사회주의 정치노선의 전통을 재생시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6년 2월 24일에 미국 CIA의 후원과 조셉 단쿠아 패당의 지원을 받아 군부 쿠테타를 이르켜서 영국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엥크라 장군이 무혈 쿠테타에 성공 하여 정권을 장악 했다. 하지만 1967년 4월에 또 다른 쿠테타가 발생했는데 미수 사건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러한 불안정한 사회환경 속에서 1969년 8월에 총선을 실시하여 대통령제를 아예 페지해 버리고 코피 부시아 장군이 총리가 되여 군정통치를 하게 됬다. 하지만 1970년에 대통령제를 다시 부활시켜 에드워드 애도가 명목상의 대통령이 되고 실권은 군부의 부시아 장군이 총리가 되여 정권을 장악하는 기형적인 정 권이 등장 했다. 1972년 1월 13일에 실권자인 부시아 총리가 영국에 방문중에 있었는데 아채암풍 중령이 또 다시 쿠테타에 성공하여 대통령 없이 아채암 최고사령관이 통치를 하는 군사 정권이 또 다시 출범 했다. 아채암풍은 경험부족과 통치능력 무능자로 1978년 7월에 최고사령관 통치권을 사임하고 아쿠포 장군이 최고사령부의 통치권을 인수 받았다. 하지만 오래된 군정을 인수 받은 아쿠포 사령관은 악화되고 있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비상 대책으로 1979년 6월 18일에 총선을 실시하여 군정을 민간정권으로 이양 시키겠다고 발표함으로서 민정으로 위장한 군정의 안정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9년 5월 15일에 아쿠포 최고 사령관에 대한 암살게획 사건이 생했다. 암살 게획은 불발로 진압되고 말았으며 주모자를 체포하여 감옥에 투옥시켜 사형선고를 내리고 있었다. 아쿠포 사령관이 통치하는 군사정권은 여전히 불안 속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암살 음모 사건의 주동자는 공군 대위 제리 로링스 이였다. 로링스는 공군 대위 현역 장교로서 사회주의 신봉자로 알려졌다. 로링스는 곧 체포되여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수감되고 있었다. 그런데 쿠테타의 주동자가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죽는 날을 기디리고 있는 로링스 대위를 지지하는 군부 장병들이 1979년 6월 3일 밤에 극적으로 로링스 대위를 감옥에서 구출해 내는데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이 군인들은 출옥한 로링스를 압세우고 다음날 6월 4일에는 군사 쿠테타 를 이르켜서 아쿠포 군부최고사령관의 통치권을 페기시키는 역사적인 큰 사건을 일으켰다. 쿠테타에 성공한 장병들은 로링스를 의장으로 하는 장교와 사병 10명으로 구성 된 혁명평의회>를 조직 하였다. <혁명평의회>는 그동안 13년 동안 외세를 등에 업고 군부의 폭정을 행한 부패한 군장성들과 군정에 추종한 고급 관리들을 단시일 내에 모두 다 숙청했다. 하지만 쫓겨난 아쿠포 군정사령관이 이전에 약속하고 임이 발표했던 총선은 그 계획대로 1979년 6월 18일에 실시하도록 쿠테타에 성공한 청년 장교들은 애국 애국심을 발휘했다. 그리고 쿠테타에 성공한 군인들은 로링스 대위를 포함하여 모두 다 일단 군부대로 복귀하여 계획된 총선이 평화적으로 실시 되도록 협조하고 그들도 총선에 모두 다 참가하는 아름다운 애국적 행위를 과시 했다. 총선의 결과로 힐라 리만이 대통령으로 당선 됬다. 힐라 리만은 영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은 학자 출신이다. 힐라 리만 대통령은 집권 초기에는 반영국 반외세 민족자주파 진영의 대통령으로 자처하고 국민들은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그는 태생적으로 친영국파와 친서방 기질의 학자로서 오직 권력의 소유자가 되고 있을 뿐이였다. 민선 대통령이라는 말 뿐이 27개월간 어렵게 집권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학자적 정직성 보다는 오히려 산적한 경제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영국과 군부를 더 많이 의지하려고 꿈꾸고 있었다. 리만 대통령에 대항 민중의 원성은 점점 높아 졌으며 군부도 리만 대통령의 무능에 대하여 비협조적이여서 1981년에 불명예로운 퇴진을 하고 말았다. 리만 대통령은 민선에 의하여 대통령이 됬다. 하지만 그의 정권은 여전히 군정의 연장이였으며 또한 <조셉 단쿠아 계열전통>의 친영국 친외세 정권이 되고 있을뿐이다. 그럼으로 힐라 리만 대통령은 운명적으로 반외세 민족주의 쿠테타 세력에 의하여 또 다시 퇴진할 수 밖에 없이 되고 있었다. 가나는 독립 이후 부터 리만 대통령이 퇴진하기 까지 5차레의 우익 군사정권들이 등장 했다가 교체되였으며 또 3번이나 단기 정권들이 잠시 등장 했다가 살아졌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 원인과 이유는 미국과 영국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장악한 군부 세력들의 내부에서 저들끼리 서로 권력 다툼을 일삼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우익 군부정권 내에서 정권탈취와 투쟁에 있어서의 승리자는 오직 쿠테타의 성공여하에 달려 있었다. 그러니 그동안 가나의 불상한 민중들이 당한 고난과 그들의 절망은 이루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으며 약육강식의 악순환만 장기화 되고 있었다. 제리 로링스는 1947년 6월22일 태생으로 그의 나이 32세때 가나의 정치무대에 주요 인물로 등장 했다. 1978년에 공군중위로 진급되여 우수한 최속 비행사로 표상을 받기도 했다. 로링스 공군 중위는 힐라 리만 정권을 공격하는 제 1차 쿠테타에 실패하여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됬다. 하지만 동려 군인들에 의하여 석방되였으며 1981년 12월 31일에 로링스는 제 2차 쿠테다에 성공 하여 무능한 리만 대통령의 의회를 해산시키고 <임시 국가 평의회, PNDC>를 설립하고 의장이 됬다. 로링스가 <임시 국가 평의회>의 의장으로 집권하고 있는 기간에 로링스를 반대하는 우파군부새력들의 쿠테타 시도가 1982-3년 사이에 수차레 있었다. 그러나 모두 다 실패 하여 로링스는 굳건히 서서 집권을 할 수 있었다. 1992년 1월에 로링스는 헌정복귀를 공식으로 발표하고 민정이양 일정계획을 공식으로 발표했다. 1992년 11월에 로링스는 군복을 벗고 <민족 민주회의>의 대 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여 전국 투표인의 58.3%의 득표로 제 4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96년 12월에 로링스 대통령은 유효 투표 57.2%를 획득하여 재선에 승리하여 제4공화국의 2대 대통령으로 또 다시 취임했다. 2000년 12월 19일에 로링스 대통령의 집권은 모두 다 끝 났다. 왜냐하면 가나 헌법에 대통령 3선이 제한되여 있기 때문에 로링스 대통령은 준법 정신으로 순수히 헌법의 절차를 통하여 스스로 퇴임을 단행했다. 로링스 대통령은 역대 대통 차례로 10번째 대통령이였으며 제 4공화국의 1대와 2대의대통령이 되었다. 로링스의 대통령 집권 기간은 군부의 통치 기간과 군복을 벗은 민간 정부의 통치기간 모두 18년동안이였다. 로링스 대통령은 18년의 통치 기간에 정부의 중앙집권제 체제를 반대하고 오직 민중을 위주로 하는 'people-power'를 주장하고 그대로 실천했다. 극우파들의 반대세력들은 이와 같은 로링스대통령의 통치방법을 비난 하여 건국의 아버지인 콰메 은크루마의 좌경화 사회주의 정치노선을 그대로 따르는 불순하고 위험한 정권이라고 줄기차게 비난하고 중상 모략을 게속했다. 하지만 로링스 대통령은 이전의 친영국 친서방 군부정권들이 소련과 중공과의 외교와 교역을 완전히 차단하고 소련과 중공의 외교관들을 추방했던 잘못된 이전의 정책들을 모두 다 깨끗하게 뜯어 고치는 용단을 냈다. 뿐만 아니라 로링스 대통령은 1984년에 소련과 중국은 물론이고 쿠바와 리비아를 비롯한 동구권의 사회주의 국가들과 문호를 개방하여 광범위한 외교와 교역을 확대 시켰다. 로링스 대통령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 경제 정책에 대하여 소리 높혀 비판하면서 그것은 아프리카에서 생산되는 특수하고 귀중한 자원들을 착취하기 위한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의 술책이라고 폭로하는 강경한 아프리카의 대변자가 되기도 했다. 로링스 대통령은 건국의 아버지이며 가나의 사회주의 전통을 세운 콰메 은크루마 초대 대통령을 기념하는 웅대한 기념관을 세웠으며 또한 아프리카 흑인의 아버지로 세상에 알려진 Du Bois 의 기념상도 건설하여 아프리카에서 서회주의 위상을 높이는데 공헌했다. 제리 로링스 대통령은 3선 출마를 금지하는 헌법규정에 순복하여 2000년 12월 19에 후임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를 실시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로링스 대통령 정권에서는 부통령인 아타 밀스를 후임 대통령 후보자로 추천했고 야당 측에서는 존 쿠푸오르를 후보자로 추천했다. 양당의 후보자들이 공명선거를 치르도록 로링스 대통령은 노력했다. 하지만 이번 선거는 로링스 대통령의 정부가 주관하는 공명선거 분위기가 전혀 아니라 그것은 완전히 미국 CIA가 총력을 기울여 주도하고 있는 친미 세력의 야당 후보자의 승리를 위한 일방적 선거전의 분이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미국이 지원하는 신애국당의 후보자인 존 쿠푸오르가 제리 로링스 대통령이 추천한 아타 밀스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 미국이 지원하는 친미 정당인 신애국당의 후보자인 존 쿠푸오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가나의 사회주의 정권에게 오래동안 빼앗겼던 <잃어 버린 군사정권>을 미국의 CIA 공작과 후원에 의하여 승리함으로써 다시 찾은 것을 의미 한다. 가나의 독립역사의 맥락에서 다시 말하면 친영국 외세의존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조셉 단쿠아 전통>이 있고 이 전통을 대항하여 줄기차게 싸우는 반영국반외세 민족 자주자립주의 진영인 <콰메 은크루마 전통>이 있는 것이다. 이 두개의 전통이 서로 대립하여 가나의 둑립운동 역사의 중요한 맥락을 이루고있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관심사는 새로 당선된 존 쿠푸오르 신임 대통령이 이 두개의 전통의 갈림길의 맥락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가 중요한 관심사 이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존 쿠푸오르 대통령은 <조셉 단쿠아 전통>의 추종자였다. 그는 영국 Oxford 대학에서 정치학, 경제학 그리고 철학을 전공하여 학사 학위와 석사 학위를 받았는데 5개의 우수학생상을 받았다. 그는 가나에서 엘리트층에 속하는 정치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존 쿠푸오르 대통령의 경력은 변호사로 시작하여 정계에 들어서서 친영국 보수주의 정당에 입당하여 고위 당직을 맡고 활약했다. 쿠푸오르 대통령은 큰 기업체의 회장과 그리고 Busia 군사정권에서 장관를 지냈으며 UN 대사를 비롯하여 많은 외국의 대사로 활약하여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쿠푸오르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후 곧 국을 방문하여 부시 대통령의 좋은 친구가됨을 확인 했고 미국의 경제지원도 약속 받았다. 쿠푸오르 대통령은 2000년에 취임하여 많은 업적을 인정 받아 2004년에 재선되였다. 미국 부시 대통령이 2008년에 가나를 방문하였을 때 쿠푸오르 대통령이 미국대통령을 극진한 대우로 베풀어 주었고, 가나의 제일 큰 하이웨이를 <부시 하이웨이>라고도 명명했다. 반면 부시 대통령은 쿠푸오르 대통령을 백악관에 초청하여 최고의 국가만찬의 귀빈으로 대접했다. 쿠푸오르 대통령은 그의 통치기간 동안에 60개국을 방문하여 국제적으로 유능한 대통령으로 정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2선의 대통령으로서 극우파의 정치노선에 충성한 존 쿠푸오르 대통령의 통치능력에 대한 결산표는 어떠한가? 그의 통치능력에 대한 결산표는 분명히 부정적인 낙제점으로 나타 났다. 존 쿠푸오르 대통령의 통치기간 8년 동안에 아프리카의 여러 빈곤한 이웃 나라들 보다 나은 점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터네트의 한 자료에 따르면 오늘 가나의 총인구중 40% 이상이 하루에 $1로 살아가는 절대빈곤층에 속해 있다. 존 쿠푸오르 대통령의 집권 기간에 자본주의 경제개방 정책으로 인하여 빈부의 격차가 사상 최고에 이르게 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존 쿠푸오르 대통령은 본인의 통치의 실패에 대하여 모르는척 하고 있으며 또한 그는 비판의 소리에는 귀를 막고 오직 보수주의 추종자들이 칭찬하는 말에만 만족해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쿠푸오르 대통령에 대한 심판의 날은 드디어 오고야 말았다. 2009년 1월 2일에 아타 밀스가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다.아타 밀스는 사회주의자 제리 로링스 대통령 밑에서 부통령을 지냈으며 대통령 후보자로 두 차레 출마 했으나 낙선으로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쿠푸오르 국우파 현직 대통령의 실정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임이 아타 밀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여 당선이 되었던 것이다. 아타 밀스 대통령의 당선과 취임에 대하여 일부 언론들은 <중도 좌파 대통령>의 등장이라고 평가했다. 아타 밀스는 50.2% 득표로 49.8%를 얻은 극우파 보수주의 후보자를 근소한 차이로 승리함으로 반외세 민족자주 사회주의 전 대통령 <콰메 은크루마 전통>을 다시 계승하는데 공헌했다. 그렇지만 그의 선거운동 기간에 미국이 지원하는 극우세력의 폭행과 불법을 자행하는 혼탁한 혼란사태들이 난무했다. 하지만 아타 밀스는 그의 정치적 배경으로 가나 독립의 아버지인 콰메 은크루마의 후광을 무기로 삼을 뿐만 아니라 제리 로링스 전 대통령의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민중들의 적극적인 선거참여와 성원에 의하여 비록 근소한 차이였지만 대통령으로 당선되여 취임을 할 수 있었다. 아타 밀스 대통령은 1944년생으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미국 Stanford 대학에서 Fuibright 장학생으로 졸업했다. 가나로 귀국하여 25년 동안 대학 교수였으며 정치인이 되기 이전에 변호사이기도 했다. 아타 밀스 대통령은 젊은 시절의 자기자신에 대하여 말하기를 <나는 사회주의를 선호하면서 민주주의를 따랐으며 동시에 나는 콰메 은크루마의 민족자주주의 정신에 매혹되였다>라고 말했다. 그는 방금 집권 2년째를 시작하고 있으며 이른바 중도좌파라는 평을 받고 있는 학자출신이다. 국제사회 진보계 인사들은 그의 성공을 바라고 있다.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가나 독립의 아버지 콰메 은크루마를 처음 알게 되면서 자꾸만 눈물겹게 생각나는 것은 쿠바의 영원한 혁명가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에 대한 생각이다.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 혁명정신은 남미 전 대륙에 퍼져 <반미반제 전통>의 뿌리를 내려 자라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가나의 사회주의 독립의 아버지 콰메 은크루마의 영원한 반영반제 혁명정신이 가나에서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 전역에 퍼져나가 뿌리를 내려 자라고 있다. 뿐만 아나라 최근 마다가스카르, 튀니지 그리고 이집트에서 아프리카 독립의 아버지 콰메 은크루마가 뿌린 혁명의 씨앗이 뿌리를 내려 <반영반제 전통>이 활발하게 꽃피고 열매를 맺고 있다. 특히 가나 민중들은 매국적인 <조셉 단쿠아 전통>에 대항하여 투쟁하면서 <콰메 은크루마 전통>으로 계승한 이 나라의 혁명적인 투쟁에 집중해 왔다. 그 승리의 결실을 맺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 같은 현상은 마치도 8.15 해방후에 코리아 반도 남녁에서 매국적인 <이승만 전통>에 대항하여 투쟁을 감행한 <상해 임시정부 김구 전통>과도 유사한 현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 두 개의 전통 중에서 이승만 전통은 6.25 전쟁을 불러왔고, 그 이후 박정희 군사 쿠테타-전두환-노태우-김영삼-이명박으로 이여지고 있는데 비해 민족주의자 김구 전통은 4.19 의거-5.18민중항쟁-6월시민혁명의 전통으로 이어져 왔고 그 이후 계승된 김대중 정부-노무현 정부로 넘어 오면서 6.15남북공동선언과 10.4평화번영 선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을 돌이켜 보면 가나가 걸어 온 발자취가 우리 민족의 한면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서아프리카 가나의 면적은 코리아 반도의 1.1배되는 비슷한 나라이다. 반외세와 자주자립 투쟁역사에 있서서도 두 나라는 역시 비슷한 양 진영의 줄기찬 투쟁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두 나라의 투쟁사의 대조는 시공간을 넘어 우리 모두의 양심을 일깨워 주고 있다.(끝) *서 아프리카 가나의 건국아버지 '과메 은쿠루마' |
[출처 : 유 태영 박사 2011-02-18]
민족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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