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우리나라 궁은 너무작고..멋도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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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한양에는 5개의 드넓고 아름다운 궁궐이 있었습니다.
그 아름답고 근엄한 궁궐에 일제가 저지른 극악의 만행!!!
'우리나라 궁은.. 너무 작고 멋도 없어..' '궁이 5개나 있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어려운 글 아니니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짓밟힌 역사와 함께한 아름답고 유려했던 우리의 宮
- 경복궁 -
원래 경복궁은 7200칸으로 330동의 건물이 있던 광활한 궁궐이였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친 후 단 36동의 건물만이 남았고 10분의 1로 궁궐이 극심하게 훼손,
원래 크기의 10%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구한말 경복궁사진으로 높은 담장안으로 수많은 전각들이 꽉찬 모습이 인상적이다
- 1918년에 창덕궁에 대화재가 일어나 침전이 모두 불타자
그 목재를 조달한다는 핑계로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과 강녕전이 헐리고 창덕궁으로 옮겨감.
경복궁과 창덕궁의 훼손을 위한 일본의 고의적인 화재로 추정됨.
- 1929년 5월에 신무문 북쪽의 융무당과 융문당을 헐어 한강변의 용광사를 짓는데 사용함.
- 1932년 10월엔 조선왕조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시던 선원전을 일본인들의 사당인 박문사로 팔아넘겨 창고로 사용함.
- 192번지 남산장 별장을 만드는데에 경복궁 건춘문내에 있었던 비현각을 사용.
- 경복궁 동궁 자선당은 오쿠라라는 사람이 구입해서 바로 건물을 해체하고
일본의 자기집으로 가져가 <조선관>이라는 개인 박물관으로 사용함.
그러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자선당은 불타고
기단과 주춧돌만 남은 그 자리에 오쿠라호텔이 들어서게됨.
자선당의 기단과 주춧돌은 오쿠라호텔의 정원을 꾸미는 돌로 사용함.
1993년 목원대 김정동 교수가 호텔 구내 정원 벚나무가 가득한 산책길에서
버려져 있는 자선당 주춧돌을 발견함.
결국 우리나라의 요구로 95년 12월 한국으로 반환되지만
이미 상태는 최악이였고 쓸모가 없기에 돌려준 것임.
이처럼 일제의 조직적인 훼손으로 헐려나간 무수한 전각들은
일본인들에게 판매가 되어 일본인들의 개인저택 등으로 이용되었습니다.
혹시 경복궁에서 절에나 있을 법한 탑과 조각상들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유교를 섬기는 조선의, 철저히 유교양식으로 지어진 경복궁에 탑과 불교조각상이 있을리가 없어요.
일제가 전각을 다 허물어버리고 궁궐과 유교의 기운을 꺾기 위해
전국 각지에 있던 불교문화재들을 경복궁에 옮겨놓아
궁궐과 관계없는 불탑, 사리탑 등 유물들로 채워놓은 것입니다.
- 일제는 경복궁에서 두 차례의 물산공진회를 치루며 경회루 영역에 휴게실과 미술관을 지었다.
- 자경전 영역에는 수족관과 놀이터를 만들었다.
- 궁궐에는 깔지 않는 무덤에나 깔던 잔디를 경복궁 전체에 깔고, 온돌을 없애버리기도 하였다.
전각들이 거의 헐려 휑한 궁궐과 그 곳을 메운 잔디들,
근정전을 가린 조선총독부건물이 위압적이다
경복궁자리가 명당자리이고 풍수적으로 굉장히 좋은 자리이기에
김영삼 정부에서 총독부를 파괴하기 전에
총독부 밑에 경복궁과 조선의 정기를 막는 말뚝이 박혀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됐는데
실제 총독부 폭파후 총독부 밑에는 커다란 말뚝들이 박혀있었다
- 1912년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이 본격화되면서 수많은 전각이 헐리고
1914년에는 이듬해 이른바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한다는 핑계로
경복궁의 중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전각들이 무참히 헐려버린다.
- 경복궁 전체를 야외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사정전 뒤쪽으로는 일제가 정원과 공원으로 변모시켰다.
- 1935년에는 건청궁을 헐고 그 자리에 대한제국 병탄 25주년 박람회장을 만들었으며,
한 나라의 최고 궁궐인 경복궁을 일반인에 공개하기 시작했다.
- 일제는 경복궁에서 박람회와 진흥회를 열면서
'우리가 이 정도로 조선을 근대화하였다'라는 홍보의 장으로 삼았다.
- 경회루 뒤쪽에는 골프장을 만들고 야외극장, 식당, 맥주회사, 은행, 유흥점 따위를 세우려 한 기록이 발견됨.
또한 곳곳에 육교와 지하터널을 만들려는 설계도 역시 발견됨.
경복궁 복원도.
원래의 경복궁의 모습으로 지금의 빈 터나 잔디는 찾아볼수 없고 아름답고 거대한 모습이다
일제강점기때의 경복궁 내의 남아 있던 건물들이다.
그냥 거의 다 파괴되었다고 보면 된다
현재의 경복궁의 모습이다. 원래의 30%정도 복원 된 상태이다.
2009년까지 전체의 40%를 복원하는 단기복원이 현재 진행 중이다.
유교양식의 궁궐에 보이는 불교양식의 국립민속박물관(20)이 참으로 언발란스하고 흉물스럽다.
궁궐내에 현대건물이 들어서 있고 심지어 주차장도 존재한다.
하루 빨리 정신차리고 복원하길.
- 창덕궁 -
현재 창덕궁은 한양의 5대궁궐 중 그 보존상태가 그나마 가장 뛰어난 궁으로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기도 하죠.
하지만 창덕궁 역시 일제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고 현재 전각들은 원래크기의 30%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가장 보존이 뛰어난 궁궐이라면 도대체 다른 궁궐들은 얼마나 심하게 훼손됐다는 얘기일까요?
-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큰 화재가 나서 희정당 등 주변의 19동의 건물이 다 타버림.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짓는데 이용함.
이로 인해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이 헐리고, 창덕궁은 크게 변형 훼손되었다.
화재는 단순한 실수로 일어난 화재라기보다는 이 것을 노린 일제에 의한 고의적인 화재로 추정되고 있다.
- 1908년경 일본인들에 의하여 궁전일부가 변형되어 인정전은 서양식 가구와 실내장식이 들어서기 시작,
궁을 내외국인에게 관람을 허가하였으며 상당수의 전각이 철거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어버림.
- 1926년 순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전각을 헐어 전시장과 각종 편의시설을 세우고
일제는 1912년에 창경궁과 함께 창덕궁의 인정전과 후원(금원)을 일반인에게 관람하도록 하였다.
아름답고 신비롭던 후원(금원)은 일반인들에 의해 상당히 훼손되고 만다.
왕조의 궁궐의 위엄을 떨어뜨리기 위한 조치였다.
보통 현재 우리는 창덕궁의 '비원'이라는 말을 자주 쓰고
또한 여러곳에서도 '비원'이라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원래 창덕궁의 후원은 '금원'으로 불리어왔고 '후원'이나 '금원'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지만 비원은 폐쇄스럽고 고립되어진 느낌의 비밀스러운 곳이란 뜻으로
일제강점기때에 일제가 의도적으로 후원을 격하시켜 부르던 말입니다.
앞으로는 창덕궁의 후원을 '금원' 혹은 '후원'으로 올바르게 불러야겟죠?
- 또한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신 선원전을 후미진 곳으로 이전, 의도적으로 창덕궁의 모습을 왜곡했다.
- 창경궁 -
창경궁이 일제에게 당한 만행은 그 어떤 궁보다도 굴욕적이며
치가 떨리는 만행들의 연속입니다.
- 1907년 일제는 고종을 황제위에서 끌어내리고 순종을 황제로 앉힌 뒤 순종을 창덕궁으로 이어하게 함.
순종은 아버지와 떨어진 채 우울하게 지냈고 일제는 순종이 우울해하는 원인은 감추고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창경궁에 동물원을 내는 공사를 시작함.
- 선인문 보루각터에 동물원을 짓고 곰, 호랑이, 사슴, 공작, 타조, 낙타, 원숭이 등 각종 짐승과 새들을
사육하기 시작했고 춘당대 지역에는 식물원을 설치함.
- 1909년 11월1일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의 개원식이 거행되고 일반인의 관람을 허용하였다.
- 1910년에는 궁궐내에 박물관을 설치하고 창경궁 내에 일본인이 좋아하는 벚꽃나무를 잔뜩 옮겨 심었다.
일제가 순종을 창덕궁에 유폐시키고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동물원과 함께 지은
국내 최초의 서양식 온실인 창경궁 대온실
동물원으로 변모해버린 창경궁에 들어선 코끼리,
한나라의 궁궐에 저런 짐승들이 가득차있었다니...
일제의 극악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기가 어디일까, 어린이공원? 아니 바로 창경궁.
저 뒤에 타조가 보이는가? 도저히 궁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충격적인 모습이다.
한 나라의 궁궐을 일개 동물원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 또한 궁궐내에 상상할수도 없는 놀이공원을 만들고 케이블카를 설치하며 창경궁을 오락의 장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일본은 우리나라 궁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리고서는 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개칭하는 등 격하시켜 불렀다.
궁이란 말은 왕과 왕실이 사는 곳이란 뜻이지만 원이란 뜻은 사냥과 야유, 놀이를 즐기는 곳이란 뜻이다
황제와 그 황실이 사는 근엄한 장소를
온갖 동물들이 뛰놀고 형형색색 식물이 자라는 곳으로, 놀이기구들이 즐비한 곳으로
사람들의 일개 놀이장소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여긴 정말 놀이공원이라 하면 믿겠다.
저 당시에는 창경원이였으니 놀이공원이란 표현이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궁궐에 저런 놀이기구가 널부러져 있는데 누가 저 곳을 궁궐이라 믿겠는가?
창경궁에 설치된 케이블카가 보이는가?
한때 정원으로 신성히 가꿔졌던 곳에서는 일반인들이 요트를 타며 즐겁게 놀고 있다.
어찌 창경궁에게 죄스러워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잔인한 일본을 원망하고 또 원망한다
- 왕조국가에선 선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 즉 종묘는 사직과 더불어 종사라고 불리며 나라 그 자체를 뜻했다.
창덕궁, 창경궁과 종묘 역시 전체적인 하나의 구역이였으나
지금 종묘는 창경궁과 겨우 옹졸한 육교 하나로 이어져 있을 뿐이다.
일제가 1912년 11월에 광화문에서 안국동을 거치고 돈화문앞을 지나 이화동에 이르는
도로를 크게 내어 종묘와 창경궁을 끊고 궁궐의 맥과 기를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 또한 경복궁에 그래랬듯이 창경궁에도 무덤에만 사용하는 잔디를 궁궐마당에 깔고
건물의 온돌들을 다 갈아없애버렸다.
이 길이 바로 창경궁과 종묘 사이에 일제가 낸 율곡로이다.
원래 이 길은 존재하지 않았고 하나의 산으로써 연결되어있던 곳이다.
저기 옹졸한 육교 하나가 그나마 종묘와 창경궁을 이어주고 있다.
하지만 저 육교마저 일본식으로 지어진 육교이다.
- 대한민국은 광복후에도 창경원을 유지해 동물원과 놀이공원, 식물원으로 사용해오다
1981년이 되어서야 창경궁 복원계획을 세우고
900여마리의 동물들과 2177분의식물을 서울대공원으로 이전시키고 동물원, 유기장시설들을 철거하였다
창경궁은 1983년 12월 30일 창경원에서 다시 창경궁으로 제 이름을 찾게 된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나타낸 동궐도이다. 왼쪽이 창덕궁, 오른쪽이 창경궁을 나타낸다.
원래 창덕궁과 창경궁은 하나로 이어져있던 궁궐로써 '동궐'이라 불리었다.
상당히 크고 아름답고 화려하며 자연경관이 뛰어나다 하였으나
현재는 창덕궁은 약 30%밖에 남지 않았고, 창경궁은 그보다 훨씬 크게 훼손되어 있다.
- 덕수궁(경운궁) -
구한말 대한제국의 고통과 함께한 비운의 궁궐, 덕수궁(경운궁).
- 덕수궁(경운궁) 역시 일제에 의해 궁궐 권역과 건물 규모에 상당한 축소가 있었다.
원래의 덕수궁(경운궁)은 현 조선일보미술관, 덕수초등학교, 구세군본관, 예원학교 옛경기여고 부지를 총괄하는
굉장히 넓고 큰 궁궐로서 원래 40,626평에 이르렀으나
일제에 의해 훼손돼 지금은 3분의1인 18,635평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 미국대사관저에서 덕수초등학교로 넘어가는 덕수궁 돌담길은 일제가 1922년 개설한 것으로
궁궐내에 길을 관통시켜 정기를 끊고 궁궐을 파괴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다.
- 또한 일제는 덕수궁(경운궁)내에 경성제일여고, 경성방송국을 세운다.
- 덕수궁(경운궁)에 1904년에 대화재가 일어나
궁내에 대부분의 전각들이 불타버리고 정전인 중화전마저 불타버린다.
당당한 중층건물이였전 중화전과 대한문 등은 여건상 단층으로 복원되고 만다.
당시 불이 난 원인에 대해 일본의 문헌들은 함녕전 온돌을 수리한 뒤 말리는 과정에서
불을 지나치게 떼어 나무기둥에 옮아 붙으며 큰 불로 번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함녕전 온돌과 나무기둥 사이에 한 자 이상의 돌기둥이 있어 이런 주장은 납득할 수 없다.
또한 일제가 매일 고종과 덕수궁(경운궁)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역시 이 1904년 덕수궁(경운궁) 대화재도 일제에 의한 고의적인 방화로 추정되고 있다.
- 사실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이다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불리된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인데
덕수란 오래 장수하라는 뜻도 있지만 일제가 고종을 폐위시킨 후 격을 낮추어 부르던 말이며
궁궐의 고유명사가 아닌 덕을 누리며 오래 사시라는 보통명사다.
우리는 이제 덕수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바로잡아 불러야 한다.
- 해방 후에도 덕수궁(경운궁)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1961년 정권을 잡은 군사정권은 태평로 일대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이유와 함께
덕수궁을 시민들의 공원으로 만든다는 명분 아래 덕수궁의 돌담을 허물고
돌담이 있던 곳에는 길에서도 덕수궁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한다는 이유로 투시형 철창담장을 둘러놨다.
당시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은 주위의 담이 헐려 6미터 안쪽에 세워지자
도로에 덩그러니 서있는 형상이 되버리고 말았다.
- 경희궁 -
"경희궁?"
보통 서울에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까지만 알지
경희궁이란 이름은 조금 생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경희궁은 일제에 의해 훼손 당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무참하게 100% 파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 원래 경희궁의 규모는 7만평 정도로 지금 남아 있는 면적의 3배가 훨씬 넘었다.
현재 서울시 교육청, 구세군회관 자리도 모두 경희궁이 있던 곳이다.
- 일제가 1910년 경희궁에 일본인자녀들이 다니는 경성 중학교를 세움으로서
궁궐의 거의 모든 전각이 헐렸다.
- 1922년에는 25,500평을 떼어 경희궁 동쪽에 전매국 관사를 짓고 서울고등학교 또한 궁궐내에 짓는다.
- 1927년에서 1928년에는 경희궁남쪽에 지금의 세문안길을 내어 궁궐을 파괴시킨다.
- 그리고 경희궁 정전인 숭전전은 1926년 일본인들의 절인 조계사에 팔아넘긴다.
- 또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해 세웠던 사당인 박문사(博文寺)로 이전시켜 정문으로 사용되었고
광복 후 흥화문은 장충동 신라호텔의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되다가1988년 경희궁터로 다시 옮겨왔다.
- 회상전은 임시소학교 교원양성소의 교실과 기숙사로 옮겨 사용 한 뒤에 조계사로 팔아넘김
- 편전인 흥전당은 소학교의 교실로 사용하다가 광운사라는 절에 팔아넘김
- 1920년대를 지난 경희궁은 단 한채의 전각도 제자리에 남지 못한 채로
한마디로 100% 파괴되고 만다.
빨간색 - 경희궁의 원래 크기
보라색 - 현재 경희궁의 크기
노란색 - 현재 경희궁에 있는 궁궐건물
상당구역이 현재 다른 건물이 있거나 길이 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슴 아프게 초라한 숭정전의 모습을 보니 마음 한켠이 쓰라려온다.
또한 현재 그나마 있는 숭정전 건물과 행각들도 2002년에 복원된 것이다.
경희궁을 나타낸 서궐도이다.
원래는 한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와 신비로움을 간직한 곳이 경희궁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일제는 단 한 채의 전각도 남기지 않고 모두 파괴해버렸으며
궁궐지역의 지형을 깎고 메꾸고 하는 등 궁궐을 두번 세번 무참히 짓밟았다.
- 경희궁의 지하벙커 -
일제는 전쟁 막바지인 1943년에 왕과 왕비의 침전이 있던 자리에
콘크리트를 이용해 무지막지한 지하벙커를 만들었다.
280평에 폭 7m, 길이는 105m로 콘크리트 외벽이 3m씩이나 되는 벙커이다.
왕과 왕비의 침전인 융복전과 회상전이 있던 자리에 지어졌는데
이는 일제가 왕기(王氣)를 차단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서울시가 1980년대 경희궁 복원시에 발견한 것으로
궁궐내에 지하벙커를 만드는 일제의 극악무도함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지하벙커의 사진.
궁궐에 지하벙커를 만들었다면 정말 말 다한 것이 아닌가
1988년부터 시작한 경희궁 복원 사업을 거쳐 현재의 모습이 공개된 것은 2002년부터다
서울시는 애초에 지하벙커를 제거하고 융복전등 침전 영역을 복원할 계획이였으나
예산을 조달할 길이 막연하다 하여
방공호를 일제의 횡포를 보여주는 박물관으로 활용하기로 결정을 내렸으나
현재는 그저 청소장비를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되고 있는 상태다.
우리나라 궁궐에 대해
협소하다 비웃지 마세요
화려하지 못하다 욕하지 마세요
그들이 저지른 만행을,
그 참혹하고 참을 수 없는 행동들을
잊지 않으실거죠?
아 쓰기 힘드네요....
전 도저히 일본을 좋아할수다 없답니다.....
30%뿐이 남은 창덕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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