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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류영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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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939회 작성일 11-03-27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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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낳은 진인(眞人) 류영모의 생애와 영성 (1)

   
▲ 다석 류영모
류영모는 1890년 3월 13일(경인년 음력 2월 23일) 서울에서 태어냈다. 아버지 류명근은 연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후에 장로가 되었으며, 모친 김완전은 정동교회 권사로 신앙생활을 했다. 두 분이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은 류영모가 16세(만15세)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 들인지 5년 후의 일이었다. 류영모는 어릴적에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고 통감과 맹자를 배웠다. 신식 학교가 생기자 서울에 있는 수하보통학교를 거쳐서 경신중학교에 들어갔다. 그가 기독교계 학교인 경신학교에 들어간 데는 사연이 있다. 1910년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후 절망과 분노를 느끼고 있던 차에, 15세의 소년 류영모는 나라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서울 종료에 있는 YMCA를 드나들었다. 거기서 초대 총무인 김정식의 연설을 듣고 감동되어 기독교에 입신하게 되었으며, 그의 영향으로 경신학교와 관계가 있는 연동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그가 경신학교 졸업반에 있을 때, 남강 이승훈의 부름을 받아 평북 정주에 있는 오신학교 교사로 부임되어 갔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20살이 되던 해였다.

류영모가 오산학교 교사로 갔을 때 그곳에는 여준, 신채호, 윤기섭, 이광수 등이 교사로 가르치고 있었다. 그 때 독실한 신자였던 류영모는 오산학교에 기독교의 정통신앙을 전했으며, 그의 영향으로 당시 교장이던 남강 이승훈도 기독교 신자가 되어, 후에 3.1 운동 33인 가운데 기독교 측 대표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류영모는 3.1 독립운동의 정신적인 산파역 중 하나의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오산학교 재직 중 류영모에게는 사상적인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그는 거기서 톨스토이, 노자, 불경 등을 접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교회의 전통신앙을 넘어서 보다 심층적인 영성적 종교/신앙을 추구하게 되었다.

류영모는 대학에 진학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물리학교에서 과학(물리학과 천문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거기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해 버렸다. 그때 그의 심경의 큰 변화를 일으킨 직접적인 동기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톨스토이의 사상적 영향이 컸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귀국한 후 류영모는 김효정과 결혼하여 슬하에 삼남 일녀를 두었고, 자신은 부친의 사업(피혁업)을 도우면서 당대의 천재들이라고 불리던 정인보, 최남선, 이광수, 문일평 등과 교우하면서 최남선이 발행하는 <청춘지>에 종종 기고하였다.

그후 류영모는 3.1운동으로 인해 폐허되었던 오산학교가 재건되면서 일제에 의해 쫓겨난 고당 조만식 교장에 이어 오산하교 교장으로 취임했으나 일제가 교장인준을 거부하는 바람에 일년 반 만에 물러나야 했다. 이로 인해 류영모는 마음의 아픔을 겪었지만 당시 그 학교 졸업반에 재학 중이던 함석헌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 후로 함석헌은 불과 11년 연상의 류영모를 평생 동안 큰 스승으로 존경하고 극진히 모셨다.

서울에 온 류영모는 YMCA 총무 현동완의 간청으로 월남 이상재의 뒤를 이어 일종의 종교 강좌에 해당하는 연경반(硏經班)을 맡게 되었다. 이 강의는 1928년부터 1963년까지 약 35년간 지속되었으며, 함석헌, 김흥호, 서영훈, 류승국, 박영호 등도 참석하였다. 여기서는 성경 중에서 특히 요한복음이 많이 강의되었으며, 동양의 고전/경전들 즉 도덕경, 반야심경, 금강경, 논어, 중용 등의 내용도 다루어졌다. 한편 류영모는 일본의 우찌무라(內村)에게 영향 받은 김교신, 송두용 등 성서조선지 동인들과 사귀면서 그 모임에도 종종 참석했으며, 성서조선지에 기고도 하였다. 그리고 성서조선사건 때는 함석헌, 김교신, 송두용, 류달영 등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서 감옥살이(57일간)도 하였다. 그런 중에도 때때로 광주(빗고을)에 있는 한국의 토착 수도원이라 할 수 있는 동광원에 내려가 말씀도 전하고 그들과 함께 생활도 하며 지내기도 하였다.

류영모는 아버지의 반대로 농촌생활을 못하였으나, 부친의 상을 벗은 후 북한산 비봉 아래에서 과수원 농사도 하였다. 그 후 구기동 산자락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계속 생활했다. 그때부터 그는 일일 일식의 금욕생활을 하며 아내와는 해혼(解婚)을 선언하고 잣나무 판자 위에서 혼자서 자며 깊은 사색과 명상의 수도생활을 영위했다. 이것은 류영모가 고대 이집트의 수도사들이나 성안토니와 같은 사막의 수도자의 금욕적 영성생활을 몸서 실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46년 4월 26일에 생애를 마친다고 일년 앞서 선언하고, 그날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30년 동안 쓴 것이 다석일지(多夕日誌)이다. 그것이 그가 남긴 유일한 유저인 셈이다.

그리고 우리가 특히 주목할 일은 류영모는 그의 일지나 강좌에 있어서 깊은 종교적/철학적 사상들을 순수 우리 말 한글로 풀이하여 설명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생전에 노자, 중용, 금강경, 반야심경, 천부경 등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그 중 일부는 김흥호 씨와 박영호 씨에 의해 정리 출판되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류영모는 1981년 2월 3일 33200일을 살고 91세의 나이로 특별한 병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평소에 그를 따르던 사람들 특히 함석헌 김흥호 류달영 박영호 박재순 제씨에 의해 그의 사상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최근(1998년)에는 영국의 에든버러 대학에서 강의되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다.

그는 생전에 특별한 티를 내지 않고 보통사람으로 살았으나 그를 가까이서 보고 따르건 사람들은 그를 보통 사람이 아닌 큰 스승으로 존경했으며, 심지어 한국 땅에 보낸 공자나 노자와 같은 진인(眞人) 혹은 성인(聖人)으로 느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소년시절에 접한 기독교 신앙을 평생토록 간직하고 살았지만, 전통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지 않고, 동양의 전통종교인 유교, 불교, 도교 및 한국의 고유종교사상까지를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상호 조명 내지 통섭하여 웅대한 통전적/우주적 영성으로 승화시킨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류영모는 한국이 낳은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요 또한 심오한 영성(사상)을 지닌 탁월한 영성가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다석 류영모 선생의 인상에 대해 박영호씨의 형 박인호씨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분장되지 않은 예수, 석가, 공자의 본 모습을 알고 싶지만 쉽지 않다. 그 런데 다석 류영모 선생의 모습을 뵙고는 옛 성자들의 본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초라하리만큼 소박한 생활, 송구하리만큼 겸손한 태도, 천진하리만큼 순수한 마음, 그리고 놀라우리만큼 번쩍이는 지혜를 느꼈다."(박영호 엮음, 다석 유영모, 100쪽)

끝으로 우리는 다음의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즉 류영모는 과연 그리스도 신앙인이었나 하는 질문이다. 어떤 이가 예수, 석가, 공자 가운데 누가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했을 때, 류영모는 그런 비교는 하는 것이 아니라고 답하고는, 객관적으로 서열을 매길 수은 없지만 주관적으로 누구를 더 좋아할 수는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자신에게도 의중 인물이 있다고 했으며, 내가 잘못하였을 때 내게 잘하라고 책망을 내리시는 분이 바로 나의 의중지인(意中之人)인데, 그가 바로 자신의 참 스승인 예수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한 자신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그런 점에서 류영모는 아무리 유불선 등 여려 종교 사상들을 섭렵하고 그들 속에 깊이 들어갔다 하더라도 그의 심중 깊은 곳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한국의 종교/교회 지도자들은 다석 류영모에게서 참 종교인의 바른 자세와 영성적 삶의 모범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먼 과거의 사람들이 만든 "교리"(dogma)와 문자주의라는 틀 속에 갇혀서 생명이 깜박거리고 있는 종교 혹은 교회를 살려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또한 그에게서 성경의 심오한 진리들을 깊이 탐구하고 해석해 내는 영적 통찰력을 배워야하지 않을까? 어떤 의미에서 성경 속에 담긴 깊은 사상과 깊은 영적 진리들을 바로 찾아내서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 바로 오늘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사료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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