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님, 저는 밥상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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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치 가족들 먹을거리와 생필품 등을 구입하러 농협공판장으로, 마트로 돌아다니다가 왔다. 그런데 장바구니 들고 다리 아프게 배회하다가 그냥 돌아서 왔다. 몇 가지를 사서 오기는 했는데 빈털터리가 된 지갑에 비하면 장바구니는 마치 도둑맞은 듯 가벼워서 빈손으로 돌아온 것처럼 허탈하다.
우리 집은 경제권이랄 것도 없는 돈 관리를 남편이 하고 있고, 나는 그때그때 타다가 쓰는데 그러는 것이 편하다. 원래는 나도 착실한 주부처럼 직접 돈 관리를 했는데 언젠가부터 돈이 내 손을 쑥 빠져나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 못내 불안하고 남편이 훨씬 꼼꼼하니 적임자처럼 보였다.
그렇게 남편이 돈 관리를 한 지가 어언 2년째가 되어가고 있는데 누가 해도 수입과 지출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조만간 가정경제가 안정되면 다시 내게 경제권을 넘기기로 약속했는데, 그 기간이 이렇게 오래갈 줄 몰랐다. 늘 이상하다? 뭐 쓴 것도 없는데? 하면서 머리 싸매고 계산기 두드리는 폼이 아무래도 내게 돈 관리가 넘어올 일은 당분간 없을 것 같다.
카드 한 장과 만 원짜리 여덟 장 들고 나가 장 보니
한 번 장을 볼 때마다 생활비 전용카드 한 장과 만 원짜리를 몇 장씩 따로 들고 나간다. 그런데 매번 카드는 카드대로 긁고 현금은 현금대로 다 쓰고 오게 된다. 오늘 들고 나간 만 원짜리 여덟 장도 얼마 안 가 바닥나 버리고 지갑에는 동전만 달랑거리는데 바구니에 들어 있는 찬거리는 글쎄 달랑 배추 한 통 하고 달래 한 바구니 새송이 작은 상자 하나에 자반고등어가 한 손, 당면 한 봉지에 간식거리 몇 개가 전부였다. 이것들로 또 며칠을 버텨야 한다.
부식값이 얼마나 급속도로 오르는지 일주일 전이 확연하고 어제오늘이 다르다. 분명히 2주 전에 2킬로그램에 6500원 하던 새송이가 오늘은 8천 원이다. 새송이는 날씨가 풀릴수록 가격이 내려가야 하는 게 정상인 품목이다. 장사하는 아주머니도 내려야 할 새송이가 글쎄 점점 오르는 것이 자신도 이해가 안 간다며 한숨만 쉬셨다. 고작 500원 남기고 판다는데 그 속은 모를 일이다.
몇 달 전에 7500원을 하던 당면 한 봉지가 이젠 1만 원이란다. 왠지 억울해서 어떻게 가격이 한꺼번에 오를 수 있나 따졌더니 이런 대용량으로 이만한 가격은 자기네 집밖에 없으니 안 살 거면 다른 집으로 가라고 배짱이다. 괜히 주눅이 들어서 착실하게 1만 원을 지불하고 사왔다. 농협공판장 부근 중간상들이라 일반 마트보다는 약간 저렴한 것이 그 정도였다.
건어물 가게의 작은 자반고등어 한 손이 2900원이다. 그나마 이번엔 많이 내린 편이다. 한동안 자반고등어 한 손 가격이 많게는 6900원까지 한 적도 있었다. 대표적인 서민음식이라는 간고등어가 대표적으로 서민들을 우롱하는 품목으로 돌변한 상황이었다.
두부 콩나물 등도 마찬가지다. 마치 착한 가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방송에서는 떠들어대지만 착한 가격이라는 두부, 콩나물들은 거의 수입산 대두로 만든 유전자 변형식품들일 것이다. 꺼림칙해서 웬만하면 국산 콩으로 만든 것들을 사서 먹는다. 제대로 된 국산 콩 유기농 두부와 콩나물은 그렇지 않은 것들에 비해 가격이 두세 배가량 높다.
요즘 장보기는 주부들에게 기적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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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이렇게 시장을 보는 일은 많은 갈등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요즈음 장보기라는 것은 가정주부들로 하여금 지독하게 적은 돈으로 생활에 필요한 것을 다 구해와야 하는, 일종의 기적을 요구하는 것 같다. 수입은 별 변화가 없는데 큰 차로 벌어진 물가 때문에 다들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그리고 단언하건대 한 번 오른 물건값은 결코 내려가는 법이 없다.
내가 직접 만든 음식을 먹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던 우리 가족들의 나에 대한 의존도는 요즘 들어 영 시들해졌다. 아울러 자타가 인정하던 음식 솜씨 좋은 주부로서의 권위도 적잖은 타격을 입고 있다. 부식값이 너무 올라 원하는 대로 재료를 살 수가 없는 내 처지를 이해시키려 해도 그들은 좀처럼 수긍하려 들지 않는다. 갈수록 구황식품 위주로 꾸려지는 식단에 그들은 강한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물건값을 카드로 결제할 때마다 남편 핸드폰으로 딩동, 문자가 가는 모양이었다. 남편은 문자가 울릴 때마다 내가 장을 보고 다니는 동선을 짐작하면서 그날 밤에 식탁에 오를 음식에 대한 기대로 설레곤 하는 모양이었다. 울금에 된장을 풀어 삶은 목살 수육이 아니면 등뼈를 푹 고아 마지막에 매운 다대기 양념을 풀어 내놓는 뼈다귀 해장국? 아니면 오랜만에 오리탕을? 그가 종일 상상했던 근사한 음식들을 제치고 밤에 상에 오른 음식은 그를 번번이 실망하게 했다.
"아까 정육점이랑 건어물 가게 열심히 카드 긁고 다녔던데 고기는 어디로 간 거야?"
"고기는 없어도 여기 매생이 국에 굴은 많이 있잖아요. 신선한 브로콜리도 있고 달래도 있고."
"아니, 굴 말고 아까 정육점에서 산 건 뭐였냐고."
"오늘만 먹자고 시장 본 건 아니야. 주중에 식구들 기운 없을 때 해먹으려고 주물럭 감은 냉동에 넣어놨지. 여기 매생이 국에 굴 있잖아, 이것만 해도 5900원어치야. 이렇게 보여도 여기 올라온 반찬값만 해도 이만 원어치가 훨씬 넘는데."
이성적인 장보기로는 먹성 좋은 식구들 욕구 충족 못 시켜
먹성 좋은 식구들 욕구를 충족시켜주려면 절대 이성적인 장보기로는 안 된다. 앞뒤 생각 없이 저질러야 가능한 일이다. 지갑 사정 봐가면서는 가족들에게 싱싱한 생선과 달콤한 육고기 맛을 자주 맛보게 하기는 힘들다.
남편과 아이는 내가 손수 만들어주는 음식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무청시래기와 묵은 김치를 넣고 양념한 닭볶음이나 청양고추와 마늘로 밑간을 해서 볶는 낙지볶음, 주꾸미와 삼겹살을 반반씩 넣어 양념한 주물럭, 미리 우려낸 육수에 햄, 소시지, 미더덕이랑 새우 등을 넣고 끓이는 부대찌개는 가족들로 하여금 솜씨 좋은 엄마라는 칭찬을 늘 달고 살게 해줬던 자랑스러운 레시피들이었다.
그런데 식재료 가격이 엄청나게 오르기 시작하면서 이 레시피들은 빛을 잃어가고 있다.
"엄마, 밥 먹기 싫어요. 반찬이 맘에 다 안 들어. 몽땅 파란 것만 있잖아요. 달래, 봄동, 아, 그리고 브로콜리는 정말 저는 먹으면 바로 토해버려요."
"여기 노란색도 있다, 콩나물. 브로콜리는 몸에 정말 좋다고 해서 샀으니까 참고 먹어."
남편은 젓가락을 몇 번 빨아댈 뿐 참고 먹는데 아이는 아예 숟가락을 놓아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먹는 것만큼은 늘 아끼지 않던 엄마가 요즘 들어서는 계속 채소 반찬만 해주고 그렇게 먹고 싶다는 부대찌개랑 떡갈비는 통 해줄 기미가 없으니.
"우리 집엔 마님 예산이 너무 적게 책정되었단다. 엄마도 어쩔 수 없어. 엄마가 기적을 행하는 예수도 아니잖아. 아빠가 쓰라는 돈으로는 이 파란색 반찬들 사는 것도 힘들어. 내일은 두 사람 좋아하는 생김치 비벼줄게. 그러니 오늘만 참고 먹어."
생김치는 우리 가족이 가장 좋아하는 반찬이다. 그래서 젓갈이랑 무, 양파 등을 통고추와 함께 갈은 양념을 냉동에 뒀다가 그때그때 배추를 한 통씩 사서 생김치로 비벼 먹곤 했다. 그런데 그마저도 배추가 한 통에 5000원에서 좀처럼 안 내려가는 바람에 예전처럼 자주 담그지 못했다. 내일이면 생김치를 먹게 된다는 말로 식구들을 달래는데 사실은 나도 안쓰럽다.
가정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남편은 점점 모자라는 부분을 자꾸 생활비 줄이는 것으로 감당하려고 한다. 하기는 더 이상 줄일 데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시장바구니 챙겨 들고 나서는 나만 보면 절약, 절약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정작 절약을 성실하게 실천한 대가로 식탁이 부실한 것은 또 못 견디어 한다.
"아무리 그래도 싼 고등어 정도는 구울 수 있잖아. 우리가 꼭 비싼 쇠고기 먹자는 것도 아닌데, 참."
"싼 고등어? 아이쿠, 요즘은 고등어도 결코 싸지가 않답니다. 고등어가 한 손에 5900원도 하고 6900원도 하는데 싼 것은 또 얼마나 작은지 몰라. 값도 값이지만 크기가 손바닥만 한 것이 먹잘 것도 없어."
"그래도 꼬박꼬박 부식비는 적잖이 들어가는데 이건 아니잖아."
생활비를 착복하는 것도 아닌데 이런 억울한 원망이 계속되자 나는 급기야 시장 보는데 남편을 동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장보기를 참관하고 나서 남편은 나보다 더 비관적인 입장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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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뭐가 이렇지? 물가가 정말 장난이 아니다. 봄이 됐으면 채소가격이라도 좀 내려가야 하는 거 아닌가?"
"야채도 풀이긴 하지만 남의 살이긴 마찬가지잖아요. 남의 살 먹기가 동물이고 식물이고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
"그냥 나가자. 재래시장 쪽은 좀 나을지 몰라. 말바우 시장으로 한번 가보자구."
"재래시장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야. 뭐 마트보다는 싸다지만 거기도 예전 같지가 않아요. 아무리 하찮은 야채도 한 바구니 삼천 원 이하로는 절대 안 팔지. 이러니 당신이 그동안 마님예산에 얼마나 인색했는지 알겠지?"
흔히 재래시장은 물가폭등의 안전지대인 것처럼 미화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재래시장도 어차피 중간상인 단계를 거쳐 오기 때문에 시세와 무관할 수가 없다. 게다가 재래시장은 장보는 환경이 더 열악하다. 몇 가지 사서 손에 쥐고 이동하다 보면 발도 시리고 손목도 아프다. 주차공간도 여의치 않아서 인근 주택가에 멀찌감치 주차를 해놓고 장을 보다 보니까 내내 모든 짐을 들고 돌아다녀야 한다. 재래시장 활성화 방안을 내놓기는 하지만 아직은 크게 달라진 걸 느끼지 못하겠다. 게다가 정찰제가 아니라 물건을 잘 깎지 못하는 나는 재래시장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천정부지로 솟아오르는 물가 앞에서는 재래시장도 별 대안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딸 하나만 낳고 단종한 내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다니!
그나마 나는 아이가 혼자라서 처지에 비해 사정이 좀 나은 편이다. 아이 둘 이상을 키우는 부모들이 요즘처럼 위대해 보인 적이 없다. 내가 예전에 딸 하나만을 낳고 단종하겠다고 하자 주변의 염려와 비난이 거셌다. 남편이 큰아들이라 더욱 그랬다. 아들도 아니고 딸 하나만 낳고 마는 것은 앞날을 내다볼 줄 모르는 처사라고 손가락질 받기도 했다. 주변에는 늦둥이로 세 번째 아이까지 본 사람들이 꽤 있었다. 혼자는 외로워서 안 된다는 게 사람들의 전반적인 의견이었고 아이들은 날 때부터 제 먹을 몫은 다 갖고 태어난다는 낙관도 필히 곁들였다.
"야, 형제들끼리 서로 놀고 있는 모습 보면 얼마나 흐뭇한지 모른다. 늦둥이라 더 예쁜 거 같아. 너도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늦기 전에 어서 하나 더 낳아."
"너희들 늦둥이 있잖아, 어차피 날짜계산 잘 못 해서 태어난 애들이잖아. 아마 그 애 커서 수학은 잘 못할 거니까 그렇게들 각오하라고. 크큭."
나의 미래를 비관하는 친구들을 향해 궁색한 농담으로 맞받아치곤 했는데 세월이 흘러 요즘은 판도가 완전 바뀌었다.
"네가 참 선견지명은 있었어. 하나만 낳은 것이 너무 부럽다 정말. 나 아이 셋을 언제 다 키워내니. 아, 정말 은행이라도 털어야 할까 봐."
본의 아니게 아이를 하나만 낳은 내가 요즘은 친구들 사이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요즘은 나도 남편의 일을 거들면서 경제활동에 약간 동참하고 있지만 결혼해서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을 전업주부로만 살았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친구들 중에서 경제활동을 안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만나서 수다를 떨 친구들이 단 한 명도 주변에 없다. 그만큼 세상은 각박하고 힘들어졌다.
제 먹을 건 다 갖고 태어난다는 오래된 격언이 요즘처럼 허망하게 그 힘을 잃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부모의 돈과 노력이 없이 거저 자라주는 아이는 없다. 솔직히 아이 한 명을 키우면서도 이렇게 빠듯한데 아이를 둘씩 셋씩 기르는 주변 사람들의 고충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대통령이 머리 조아릴 곳은 조찬기도회 신단 아닌 서민들의 가난한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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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낙관적인 대통령은 새벽시장을 찾아가 한다는 소리가 고작 '하면 된다,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된다'라는 말이었다. 지금 누가 열심히 안 사는 사람이 있는가. 다들 너무 열심히 살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구조적인 모순 때문에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 구조적 모순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새벽부터 찬바람 맞으며 일하는 사람들을 향해 어린아이 가르치듯 무조건 '하면 된다'라니.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의 기획단계에서 철저히 '잊힌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펼 것이라고 천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본가들의 끊임없는 반대 속에서도 꾸준히 경제적으로 소외된 '잊혀진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멈추지 않았다. '부유한 사람들을 더욱 배부르게 하는 것이 아닌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라는 신념을 끝까지 고수한 것이 뉴딜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대형 조찬기도회에서 그들만의 신을 향해 무릎 꿇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퍼포먼스를 보면서 우리들 서민들은 더 이상 그의 기도 속에도 열거되지 않는 '잊혀진 신민'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생활고와 경제난으로 인해 다들 힘들다고 아우성인데 대통령이 머리 조아릴 곳은 조찬기도회의 신단이 아닌 서민들의 가난한 밥상이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2011.03.14 20:01 오마이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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