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2]홍동근목사 존경했던 홍순호선생//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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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2]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홍동근목사 존경했던 홍순호선생
[태하차피=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홍순호 선생(77)하면 떠오르는 분이 홍동근 목사이다. 홍동근 목사가 통일운동을 하며 로스엔젤레스 지역에서 한 교회 담임목사를 할 때 그를 위해 가장 헌신적으로 옹호한 사람이었다.그는 비록 홍동근 목사의 정치철학이나 종교철학이 자신의 것들과 같지는 않았지만 홍 목사의 순수한 마음과 때 묻지 않은 애국심에 감동되어 그의 교회에서 장로직을 맡고 함께 교회를 운영하는 동반자가 되었고, 그의 부인 김문재 여사(77)도 홍동근 목사의 교회 여성장로로 두분 모두 청렴한 교회간부(제직)로 봉사하였던 사람들이었다.
[기획-1]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이만영 선생:<이현상평전>필독권유
[출처 : 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2011-01-21]
민족통신
[기획-2]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홍동근목사 존경했던 홍순호선생 [태하차피=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홍순호 선생(77)하면 떠오르는 분이 홍동근 목사이다. 홍동근 목사가 통일운동을 하며 로스엔젤레스 지역에서 한 교회 담임목사를 할 때 그를 위해 가장 헌신적으로 옹호한 사람이었다. 그는 비록 홍동근 목사의 정치철학이나 종교철학이 자신의 것들과 같지는 않았지만 홍 목사의 순수한 마음과 때 묻지 않은 애국심에 감동되어 그의 교회에서 장로직을 맡고 함께 교회를 운영하는 동반자가 되었고, 그의 부인 김문재 여사(77)도 홍동근 목사의 교회 여성장로로 두분 모두 청렴한 교회간부(제직)로 봉사하였던 사람들이었다.
홍순호 선생은 홍동근 목사에 대해 "지붕이 새면 우산을 쓰고 책을 읽으셨던 분으로 세상 물정에는 어두웠지만 순수한 학자같은 목회자였다."고 회고하면서 홍동근 목사의 깨끗한 생애를 높이 평가해 준다. 한 때 교회분규사태로 홍동근 목사가 박해를 받으며 어려움을 당할 때 그를 위해 가장 앞장에 서서 홍호하고, 대변하며 준 인물이 바로 홍순호 선생이었다. 그는 한국서 학교를 다닐 때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은 캐톨릭 신자였지만 기독교에 그리 심취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신학에 대해서도 아는게 없다고 말한다. 단지 홍동근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해방신학', '민중신학', '통일신학'이 뭔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것이 홍순호 선생의 고백이기도 하다. 그에 따르면 홍동근 목사는 미국에 와서 목회활동을 하며 한국민주화 운동, 조국통일운동에 깊이 관여하였기 때문에 그를 반대하는 교인들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헐리욷 교회를 운영할 때에는 교인들이 2백여명이나 되었지만 교회내부 분규사태로 15명으로 줄어드는 경우도 있었고, 그 후 산타모니카로 교회가 옮겨진 후 교인들이 다시 50여명으로 늘어나기도 하였다고 그는 설명하면서 "특히 홍동근 목사님이 통일신학에 몰두하면서 북한에 자주 가는 바람에 그의 설교도 통일운동과 관련되는 것들이 많았고, 동시에 이에 대한 교인들의 반발도 적지 않았다"고 돌이켜 본다. 그 후 로스엔젤레스 시내 아담스에 위치한 '선한사마리안' 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할 때에도 홍동근 목사는 크고 작은 시련에 부딪쳤었다고 홍순호 선생은 설명한다. 그래서 홍순호 선생 부부는 홍동근 목사 부부와 가장 가깝게 지낸 사이이다. 홍동근 목사가 2001년 11월10일 향년75세로 평양 방문중 뇌출혈로 쓸어져 세상을 떠난 후에도 홍순호 선생 부부는 그의 부인 백정자 여사와 가까운 친척처럼 지내왔다. 홍순호 선생 부부는 그 만큼 홍동근 목사를 존경했고 정신적 지주로 생각할 정도로 고인의 삶과 뜻을 높이 평가해 주었다. 북녘에서도 고인의 생애 공과를 높이 평가하여 고인의 시신을 애국열사릉에 모시기도 했다.
고인은 1990년부터는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종교학과 및 평양신학원에서 초빙교수로 활약해 왔다. 고인은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의 활약을 인정받아 캘리포니아 대학 아시아협회(Asia Coalitition)에서 1984년 인권상을 수여받았고 2000년에는 북녘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고인의 저서로는 <혁명시대의 교회>를 비롯 <미완의 귀향일기>, <해방신학>,<주체사상과 기독교>[공저], 그리고 2000년 초에는 김일성 주석의 생애, 혁명, 세계관, 덕성에 대해 연구하여 집필한 <백두산의 노래> 등이 있고 이밖에 <마틴 루터킹 투쟁사>, <장벽을 헤치고>,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혼돈이냐 공동체냐>등의 번역집필서들도 있다. 고인의 부인 백정자 여사는 남편의 성품에 대해 “너무나 따뜻하고 정이 많은 분이셨죠. 또 돈이라는 건 전혀 모르고 사셨어요. 생활은 소박했지만 항상 행복했죠. 찌개 하나만 끓여 드려도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니까요. 우리 집에는 변변한 가구 하나 없이 책만 너무 많아서 발 디딜 곳도 없어요. 늘 일에 열중하다 보니 가난해도 가난한 줄 모르고. ‘빨갱이 목사’다 뭐다 오해도 받고 배척도 당했지만 남이 뭐라 하든 관심 없고 소신껏 일하면 그걸로 만족하는 사람이셨죠.”라고 회고하면서 “목사님은 어떤 주의에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기독교적 이상사회를 추구하던 민족주의자, 기독교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까. 신학자이자 학자였고, 속으로는 또 시인이였죠. 자기가 믿는 복음이 이 세상에 전파되면 오직 평화만 있을 것이라 믿는 분이었어요. 통일문제와 관련해서는 그저 우리 민족이 문화적 재부도 누구보다 많은 참 우수한 민족인데 강대국에 희생되어 오랜 세월 신음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했죠. 남과 북의 좋은 것들을 합한다면 세계에서 가장 강대국이 될 수도 있는데 하는 마음, 그게 전부였어요.”라고 덧붙인다. 백정자 여사는 이화여대 미술과를 졸업한 화가로서 그리고 세계적 피아노 연주가 백건우의 친 누이인데 그 동안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이란 책을 비롯 여러권의 북녘관계 도서들을 출판했다. 홍동근 목사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홍순호 선생, 그는 누구인가?
그는 미국에 오기 전에는 용인초등학교, 서울의 중앙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 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이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원 시절에도 중앙중고등학교에서 물상, 물리, 수학과목 등을 가르치면서 성균관 대학교에서 조교로 강의했고, 동시에 일부학생들 과외지도를 하는 등 일인4역을 하면서 바쁜 생활로 이리뛰고 저리뛰면서 직장생활을 했다고 회고한다. 그는 아직도 손때 묻은 1964년의 석사논문집('음향재료의 수직입사 흡음율 특성에 대하여')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지도 교수가 서울대학교 공대 교수 등으로 되어 있다. 그 당시에는 대학에서 강의하는 교수진들 가운데 석박사의 숫자가 고작 6백명 가량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대, 성대, 동국대, 육사, 공사 등이 서로 교수들을 교환하여 부족한 강사들을 보충했다고 한다. 그는 1957년 군대에 입대했다. 그 당시에 학도병으로 들어가 1년 6개월 근무했다. 학도병으로 군에 입대하였기 때문에 예외없이 최전방 소총소대병으로 배치받아 기관총 사수로 있으면서 군교육계 조수로 일했다. 그는 당시 군대생활을 하면서 남한 군대의 부정부패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방의 한 군단장이 자기 사람들을 시켜 전방 군사분계선(DMZ)에 미군들이 설치한 철조망 세우기 막대기들을 중간중간 빼어서 시장에 팔아 돈벌이를 했다는 비리 이야기도 있었다"고 돌이켜 보는 홍순호 선생은 또 하나의 일화를 들려 주었다. 바로 그 군단장에게 봉사한 병사들은 한번은 비행기가 추락하여 군사분계선 철조망에 얹혔는데 그것의 부속품들을 하나 하나 뽑아 팔아먹고 그 다음에 분계선 이북 쪽에 있는 비행기 기체에서 부속품을 뽑으려고 하다가 저 이북 쪽에서 사격이 시작되었는데 이 때 그 군단장은 미군의 허락을 얻어 비상령을 내렸던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기억하면서 "도둑질하다가 생긴 비상사태 때문에 국지전이 일어날뻔 했다"고 되돌아 보기도 했다. 홍순호 선생은 대학강단에서 일어나는 비리도 못마땅했다. 일하면서 논문을 썼기 때문에 무려 4년반 걸렸다. 그것도 문헌자료, 실험자료 등이 부족하여 실험기구를 직접 만들어서 시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나의 논문을 근거로 4년간 교수를 도와 공동연구하여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 완성을 이루었으나 논문중에 공동실험 '홍순호' 또는 마지막에 그간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도 없었다는것이 못내 아쉬웠다. 아마도 교수 논문 중에 그 어느 한곳에라도 내 이름이 있었다면 한국을 떠나지 않았고 대학에 남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털어놓는다. 그는 그러한 학계문제를 비롯 군대비리 문제, 사회 부패상을 보고 1972년 한국을 떠나 미국에 오게 되었다. 그의 미국에서의 직장 생활은 비교적 순조롭게 풀렸다. 리어 제트 우주연구소에서 기술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후 1978년에는 웨스트레이커 벙커레이머 연구소에서는 <수중 음향악>을 연구하면서 그는 어뢰같은 소리연구 기술자로 일하게 되었다. 1983년에는 연방정부에서 지원받는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그의 부인 김문재 여사는 1984년 벨리지역에서 바느질 공장을 운영했다. 1988년에는 기술자 면허를 소지하고 유니폼 회사에서 제품 제작지배인으로 일해 오다가 2003년에 퇴직했다.
그는 요즘들어 키타 연습을 부지런히 연마하고 있다. 그리고 과학에 대한 관심과 기술이 많아서인지 8순을 향해 가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홍순호 선생은 컴퓨터를 통하여 음악 동영상 만들기, 음악 이메일 보내기, 크리스마스 및 주요 명절에 음악을 담은 엽서 만들어 보내기 등 전자우편 활동을 전개해 왔다. 고 홍동근 목사의 미망인 백정자 여사는 홍순호 선생과 그의 부인에 대해 "일생을 두고 두고 경의를 표하고 싶은 사람들"이라고 전재하며 이들 부부는 홍동근 목사님을 위해 진심으로 섬기는 교인들이였으며, 교인들을 위해서도 언제나 섬기는 자세를 보였으며, 관계하는 단체들을 위해서도 항상 섬기는 자세들이었다고 평가하면서 "이들은 어디서 일하든지 언제나 주인의식을 가지고 성실하게 일하셔 온 분들"이라고 말한다. 홍순호 선생의 요즘의 근황은 8순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주말에 이틀동안 태야차피의 한 호텔에서 밤일을 하는 한편 거동이 불편한 부인을 위해 밥도 하고, 빨래도 하면서 집안일을 돌보고 있다. 부인 김문재 여사는 1994년 고혈압으로 쓸어져 치료를 받으며 건강을 회복하는 듯 하였으나 2004년에 다시 쓸어져 몸을 마음대로 쓸수 없어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할 정도로 거동이 불편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로 나들이가 뜸해졌고 각종 행사 때 참석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환경에서도 홍순호 선생은 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살아 왔다. 부인을 돌보면서도 짬만 있으면 컴퓨터 두대를 놓고 각종 음악들을 카드에 넣고 좋은 문장들도 편집하여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내어 감명을 주는 주는 일을 꾸준하게 해 왔다. 자신의 노래도 녹음하여 아름다운 풍경 등을 디자인한 카드에 담아 친지들에게 전자우편으로 보내 주는 역할도 해 왔다. 그는 조국통일 문제에 대해서도 긍정적이다. "조국통일이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의 조국통일은 반드시 이뤄진다"고 믿고 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북녘 당국과 이룩한 6.15선언과 10.4선언은 기필코 결실을 보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비록 이명박 정권이 들어와서 그 공적을 배신하는 형편없는 일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잠시적일 뿐이다. 남한은 앞으로 자주적 정부로 갈 수 밖에 없고, 북한 정부는 자력갱생 정신으로 걸어 왔기 때문에 그 두 정부는 반드시 하나로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나는 이 조용한 곳, 태야차피로 이사 온 것은 여러가지 뜻이 있었다. 10년 전 여길 올 때 이곳 인구가 1만4천명 가량 있었는데 지금은 3만여명으로 늘어났다. 공기도 좋고 물도 좋아 우선 휴양지로서도 좋다.(부인의 불편함을 덜어 줄 수 있어 좋다는 뜻도 포함) 그리고 내가 우리 집안의 9대 종손인데 미국에 이민 와서 홍씨 가문의 첫 시조로서 시작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곳을 선택한 목적도 있었다."면서 홍씨 직계 자손들을 기재한 족보를 꺼내 놓고 몇 백년 가문의 발자취를 설명해 준다. "이곳은 또 중국계 사람들이 19세기 중엽에 노동이민을 와서 철도부설 공사에 참여하여 활동한 장소로서 그 들의 피어린 흔적도 볼 수 있어 좋다" 고 말한다. 막내 며느리가 백인계인데도 우리 집안 가족행사가 있을 때 마다 제사를 꼭 지내야 한다고 강조해 주어 흐뭇하다. 게다가 며느리 집안의 한 당숙이 가족의 뿌리(Family Tree)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 논문은 지금으로부터 1천년을 거슬러 올라간 집안 직계 내력을 연구하여 쓴 논문이라고 하면서 그 집안도 뿌리에 대해 존중하고 선조들을 기억하는 전통을 갖고 있어 그러한 점에서는 공통적이라고 말한다. 큰 며느리도 가문의 전통을 귀중히 여겨서 다행이라는 것이다. 하나 밖에 없는 딸은 민족학교 회원이던 사위가 홍동근 목사가 담임 목사로 있던 '선한사마리안' 교회에서 만나 인연이 되어 좋은 사위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자랑하면서 그 사위가 사람관계가 좋아 많은 친구들을 갖고 있어 마음이 놓인다며 자녀들이 모두 출가하여 컴퓨터 박사, 학교 교원 등 전문직 분야에서 나름대로 제 몫을 다하고 있어 자식들에 대하여 만족한다고 말한다. 7년 전 그의 7순잔치 때에는 홍순호 선생의 자녀들이 돈을 모아 고급차 '벤스'를 한대 사서 선물로 주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적도 있었다. 그 만큼 홍순호 선생의 가정은 자녀들, 그 며느리들과 사위 모두가 홍순호 선생을 중심으로 하나의 구심체를 이루고 있어 미국사회에세는 보기 드문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있다. 특히 홍순호 선생은 그의 언어구사력이나, 노래솜씨, 걸음걸이, 행동 모두가 그의 나이 하고는 거리가 멀다. 아직도 30~40대 정열과 체력을 유지하고 있어 누가 보아도 그를 70대 하순에 접어 든 노인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지금도 청년같이 말하고 청년같이 사고하고 청년같이 행동한다. *홍순호 선생의 연락처는 1-661-822-3401 혹은 1-310-357-0776 |
[기획-1]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이만영 선생:<이현상평전>필독권유
[출처 : 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2011-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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