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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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쓰는 것이 아니니 '讀中感'이라 해야 하나?
자연과학적 사고 체계에 익숙한 내게 이 책은 무척이나 난해했다. 나 같은 사람에겐 수학, 물리보다도 어려운 게 철학이니 경제학이니 하는 사회과학 분야이다. 책의 초반엔 머릿속이 교통정리가 되지 않고 헝클어진 채 그냥 읽어 나갔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나 보다, 듣고 보니 그럴 듯 하네, 아니 이건 아까 주장과 반대인데 이 말도 듣고 보니 그럴 듯 하네, 이 사람 이름 들어본 적 있다, 이 얘기 예전에 유시민의 강연에서 들어본거네..' 이러면서 넘어간 거다.
유시민은 그 동안 많은 강연을 해왔었고, 해당 강연의 단편적인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식자(識者)들의 저서와 이론을 많이 인용했었다. 이 책에는 그가 한두번 언급했던 철학자나 경제학자 등이 총출동해서 시대를 초월해 한 링 위에서 논리 배틀을 벌이는 듯하다. 저자는 심판의 역할을 하며 중재도 하고 대립도 시키고, 퇴장도 시키고, 특정 선수의 손을 올려주기도 하는 듯하다.
또 다른 면으로 보자면, 어느 배려 깊은 지식소매상에 의해 고대로부터 최근에까지 시대를 풍미했던 이론가들은 재조명되는 것이다. 저자는 지나치게 도식화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이론의 핵심을 친절히 반복 설명하고 다시 정리하고, 타 이론과 연관지어 다시 설명하는 등, 이미 공부가 되어 있는 독자에겐 다소 장황하다 싶을 정도로 반복하는 경향이 있지만 나 같이 문외한인 독자에게는 더 없이 친절한 글쓰기 방식을 채택했다.
그리고, 각 이론가들의 이론이 나온 개인적, 사회적 배경을 자세히 들려줌으로써 저자 스스로 뿐만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이론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있다. 설혹 후세의 누군가에게 지탄받고 발에 걷어차인 이론가일지라도 시대적 배경을 설명함으로써 대신 변호해주기도 하는 면을 보자니 '배려 깊은 지식소매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총 9章에 걸쳐 일곱가지 질문을 던진다.
하나. 국가란 무엇인가
둘.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
셋. 애국심은 고귀한 감정인가
넷. 혁명이냐 개량이나
다섯. 진보정치란 무엇인가
여섯. 국가의 도덕적 이상은 무엇인가
일곱. 정치인은 어떤 도덕법을 따라야 하는가
첫번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세가지 국가론을 소개한다. 이 세가지 국가론의 장단점에 따른 최선의 국가론을 찾기 위함인지 꽤 자세히 설명하느라 각각의 국가론에 하나의 장(章)을 할애하여 제1장~제3장까지 국가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①합법적 폭력이 가능하다는 이념형 보수인 국가주의 국가론
②공공재 공급자로서의 시장형 보수인 자유주의 국가론
③계급지배의 도구일 뿐 국가는 사라져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도구론적 국가론
각각의 국가론이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저자는 새로운 관점으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을 찾게된다. 이른바 '목적론적 국가론'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제 7장 진보정치란 무엇인가'에 농축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제7장까지 읽은 나는 이렇게 벌써 독후감을 쓰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글 읽을 때의 만족감과 감동이 사라질까봐 그런 것 같다.
얼마 전에 박봉팔님이 '진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었다.
☞진보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답이
바로 『국가란 무엇인가』중 '제 7장 진보정치란 무엇인가'에 있다. 자유진보주의자를 자칭하는 사람들이라면 저자의 주장에 거의 수긍하며 동의하지 않을까? 나는 그 야심한 밤에 질문과 맞딱뜨려 깊은 생각없이 진담반 농담반으로 이렇게 댓글을 썼었다.
한 걸음 더 내딛는 게 진보란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어디로 내딛느냐? 봉팔이는 상식과 정의를 향해 가는구나.
나는 잠 잘 자고 밥 잘 먹고 일 잘 하고, 여기 잘난 애들과 뒷북 치지 않고 상대할 수 있으면 진보하는 거다.
어젯밤에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가볍게 생각한 진보라는 정의가 어느 정도 공인된 이론에 맞다는 걸 깨닫고 놀라움과 흥분을 금치 못했다.
[진보의 범위를 넓게 설정하면서도 그 목표와 방법을 한결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으로는 『진보를 연찬하다』에서 이남곡 선생이 제시한 견해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남곡에 따르면 진보는 인간이 행복을 위해 자유를 확대해나가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것들에서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것을 지향하는 것이 진보주의이다. 인간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얽어매는 것이 세 가지 있다. 불합리한 제도, 물질의 결핍, 낡은 생각이 그것이다.](국가란 무엇인가 p. 198)
내가 말한 '잠 잘 자고(밤 시간이라 이게 가장 먼저 나왔을 것이다), 밥 잘 먹고, 일 잘 하는 것'은 불합리한 제도와 물질의 결핍이 있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여기 잘난 애들과 뒷북 치지 않고 상대할 수 있으면' 나는 낡은 생각을 뜯어 고치고 의식의 변혁이 되는 것이니 진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건 '개인의 진보'에 대한 정의가 아닐까? 박봉팔님이 질문을 던진 '진보란 무엇인가'는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진보' 혹은 '진보정치'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 보면, 논리전개에 아쉬운 점은 있었지만 박봉팔님이 주장한 '진보는 정의(正義)다'라는 결론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좀 더 살을 붙여 표현하자면 이런 게 아닐까? '진보(정치)는 정의를 실현하(게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진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나나 박봉팔님이나 저자나 큰 틀에서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이남곡의 견해가 진보와 진보주의를 이해하고 실천하는데 적합한 '중용적'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진보는 특정한 사상이나 이론, 어떤 구체적 국가정책이나 제도에 대한 특정한 견해와 고정적으로 결합되지 않는다. (중략) 생각이 막히고 닫히는 순간, 기존의 사유습성에 갇히는 순간, 그 사람은 진보와 멀어진다. 중요한 것은 사회관계와 물질, 의식의 모든 면에서 행복을 위해 자유를 확대하고 하는 진보의 방향을 의식하고 유지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진보주의 운동에는 당연히 정치가 포함된다.(중략) 진보주의가 정치와 결합한 것, 또는 정치를 통해 진보적 지향을 실현하는 것이 진보정치다.](국가란 무엇인가 p.188~199)
그리하여 저자는 '정치를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으로 규정한다면, 진보정치에도 그 나름의 국가론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몇 곳에서 저자는 진보 혹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완곡한 비판을 하고 있어서 혹 진보연 하는 사람들이 기분 상하는 대목도 있을 법 하다. 저자 본인의 목소리 보다는 기존 이론가들의 주장을 인용하여 비판하고 있는데 책을 읽다 보면 이것이 타 이론가의 주장인지 저자의 주장인지 헛갈릴 때가 있다.
'진보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란 김상봉님의 견해를 통해서 '진보는 죽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직접적으로 좀 더 세게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기도 한다.
[나는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이 국가를 보는 관점이 몹시 혼란스럽다고 생각한다. 과격하게 표현하면 진보의 국가론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이하 생략. 쉽게 설명했고 많이 공감되는데 여기에 인용하기엔 너무 길다.) 그래서 진보주의자들은 자유주의 국가론과 마르크스주의 국가론 사이를 끝없이 방황한다. 자유주의 국가론은 이념적으로 만족스럽지 않고,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을 따르자니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국가란 무엇인가 p.200)
이건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진보주의자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이며, 진보주의자들이 갇힌 경직된 울타리를 유연하게 넓혀주는 것이며, 일부 자유주의자와도 손잡을 수 있다는 근거를 주는 게 아닐까? 말하자면,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 사이 그 어디에 둘이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이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고 손을 내미는 행위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그리고 저자는 곧장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국가론'을 끌어와서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여기가 아닌가 싶다.
[자유주의 국가론과 목적론적 국가론은 결합할 수 있으며, 그 결합을 통해 각자의 결점을 제거하고 서로를 보완해줄 수 있다. 나는 진보정치세력에게 필요한 국가론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하며, 이 국가론에 바탕을 두고 형성되는 국가에 '미덕국가(美德國家)' 또는 '선행국가(善行國家)'라는 이름을 붙일 수도 있다고 본다. 진보정치는 무엇인가? 진보정치는 국가를 어떻게 바꾸려 하는가? (중략) 이제 대답을 할 수 있다. 진보정치는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려는 활동이다. 직접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줌으로써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가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진보정치의 목표이다. (중략) 선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저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고전적 자유주의 국가론에만 집착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제 자유주의 국가론의 토대 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세울 때가 되었다.](국가란 무엇인가 p.206~207)
나는 여기까지 책을 읽었다. 그리고 마치 다 읽은 듯한 착각에 빠져 있다. 다시 맘 잡고 책을 잡아야겠다.
여러분들이 궁금해할 '정의란 무엇인가'는 다음 제8장에 있다. 살짝 봤더니, 아리스토텔레스의 正義는 '각자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 을 주는 것'이라 했고, '국가로 하여금 어떻게 정의를 실현하게 할 수 있을지를 알라보려면 그 어떤 철학자의 위대한 저서보다 먼저 헌법을 읽는 것이 유익하다'고 했더라. 헌법에 나타난 자유권적 기본권과 사회권적 기본권 등등 역시나 흥미로운 주제들이 이어질 것이다.
나중에 책을 다 읽고 전체적인 새로운 느낀점이 생긴다면 다시 정리해보고 싶긴 한데 잘 될 지 모르겠다.
-- 끝 --
p.s.
저자의 서명이 되어 있다.
"시민은 자유롭게 국가는 정의롭게"
여기서는 국가보다 시민을 앞세웠다.
이것은 참여당의 모토가 되기도 했는데 아마도 이 책을 쓰면서 생각해낸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의 주제를 한마디로 말하라면 이것이 될 수도 있겠다.
참여당의 정체성이 뚜렷해졌다.
목적론적 국라론을 가진 진보자유주의 정당.
"바람을 거슬러 나는 새들에게"
이 책은 진보주의자들에게 읽히고픈 책인가보다.
[진보주의는 새로운 사유습성을 창조하여 지배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운동이다. 진보는 본능을 거슬러 간다. 그래서 쉽게 단결하지 못하며 작은 오류만으로도 쉽게 무너진다. 한번 무너지면 복구하기 어렵다. 진보는 바람을 거슬러 나는 새,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다. 열정과 신념이 무너지면 바람에 날리고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된다.](국가란 무엇인가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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