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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주일에 생각해 봤던 '혁명가 예수'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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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종상
댓글 3건 조회 2,086회 작성일 11-04-18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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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랫만에 시애틀 지역에 햇볕이 쨍쨍 쪼여 겨울의 기운을 밀어내고, 성당 뒤 연못에선 개구리들이 일제히 합창하는 소리로 가득했던 날이었습니다. 가끔 가슴을 쨍 하고 깨며 내는 것 같은, 조금은 날카로운 휘파람처럼 들리는 붉은가슴 지빠귀의 노래가 개구리들의 합창 가운데서 유난히 톡 튀던 날, 성지주일 미사를 드리면서 저는 내내 한가지 생각만 들었습니다. 어째서 '혁명의 지도자'일 수 있었던 예수는 굳이 비폭력을 강조했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성당 입당 예절을 치르면서도 그 의문은 내내 가시지 않았습니다. 날카로운 끝을 가진 성지가지는 원래 종려나무의 잎. 이것은 그들의 항쟁이 로마 제국주의의 유대아 지역 점령과 그들이 심어놓은 당시의 '매판 파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헤로데의 압제 아래서 무르익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원래 넓은 종려가지나무잎 뒤엔 숏소드 칼을 숨길 수 있다지요. 또 성지가지는 그 자체의 모양으로서도 '항쟁의 의지'를 충분히 읽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성서의 예언대로 '나귀를 타고 오시는 임금님'은 충분히 '반란의 수괴'가 될 수 있었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아마 그 모습은, 유대의 오랜 경전들을 열심히 읽은 이들에겐 틀림없이 예언의 성취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가 가져올 천년왕국의 소식이 전해지자 그동안 자유와 해방에 목말라 했을 그들 민중들은 예수께서 지나가는 앞길에 종려가지와 잎, 심지어는 자기들의 겉옷까지 벗어 깔면서 '왕의 귀환'을 열광적으로 환영합니다. 지배층에겐 이것은 자기들의 종말의 신호탄처럼 느껴졌을겁니다. 그 수많은 군중들이 자기들의 '명목상의 왕'인 헤로데를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여기고 있는지가 그대로 보여졌겠지요. 그때 헤로데의 심정을 짐작해봅니다. 아마 촛불이 광화문 앞거리를 가득 메우자, 청와대 뒷동산에서 아침이슬을 불렀다는 어떤 분 심정이 이렇지 않았을까요?

 

그 결정적인 순간, 혁명가 예수는 비폭력을 선언합니다. 성지주일의 입당예절은 군중의 환호와 희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비폭력 투쟁'의 결정은 그를 이른바 혁명의 '핵심 그루빠'였던 '혁명당원'들의 지지를 잃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들은 '배신자 예수'를 없애기로 결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깁니다. 배신자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가롯 유다, 즉 유다 이스카리옷은 열성적인 혁명당원이었고, '조직 상부'에서 이를 실행하라고 하자 바로 예수를 팔아 넘깁니다. 사실 그는 '프락치'라기보다는 '보다 극렬한 조직의 행동대원'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스승의 사형선고 사실을 알고서는 그가 그간 가졌을 인간적인 유대를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보여줍니다. 성전에 몸값으로 받은 은전을 내팽개치고 목매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 것이지요.

어쨌든, 그 비폭력 선언, 즉 그 나라가 '지금 이 지상의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라고 선언한 예수에게 돌아온 것은 자기를 '왕으로 모시려 했던' 바로 똑같은 군중의 저주와 단죄였습니다. 그 군중은 바로 그 배신감으로 인해 예수를 사형하라고 몰아세웁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심지어는 자기를 지키려 했던 최측근의 무장도 해제할 것을 명령하면서까지. 그리고 그 인간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다 받아들여가면서까지. 그리고 그는 분명히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 왜? 라는 의문이 끊이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그것을 '믿을 교리'로서 믿으면서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저조차도 그 상황에서는 항상 생각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왜? 도대체 왜였을까? 하고 말입니다.

 

물론 그것은 인간이 아닌 하느님의 차원에서 실행된 예언의 완성이며, 이로서 크리스트교의 근간이 세워지는 셈이지만, 그것은 만일 예수를 인간으로 보자면 보다 탁월한 차원의 스스로의 혁명 이념의 완성이 아니었을까요. 이 혁명당원들은 몇십년 후 마사다에서 로마와 직접적인 항쟁을 벌이지만 중과부적으로 결국 모두 자살을 택하는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야 했습니다. 그 뒤로도 대 로마 무력항쟁은 간헐적으로 계속됐지만, 이미 2차 대 로마 항쟁에서 유대아는 더 이상 국가의 모습을 갖출 수 없을 정도로 짓밟혀 버리고 맙니다. 로마는 아예 이곳에 군단을 상주시켰고, 한때 이 지역의 교역과 문화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유태인들은 산산이 찢어져 다시 '디아스포라'가 되고 맙니다.

 

그때의 민중의 처지는 아마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 보다도 더욱 심각한 처지였을 듯 합니다. 왕의 명령 한 마디로 자기의 사랑하는 갓난아기를 피살당할 정도의 인권의 무시가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상황에서,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가져다 줄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겐 절박하디 절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보았던 그 당시의 상황은 자기의 나라인 유대아 뿐 아니라 그 당시 로마 제국주의가 지배하고 있던 지역 어디에서나 마찬가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혁명가 예수'라면 아마 고민을 해야 했겠지요. 이것을 일국혁명으로 가져가야 할 것인가, 혹은 이 혁명을 그 당시의 '세계' 각국으로 가져가야 할 것인가. 그리고 선택은 그 후자였던 것이겠지요. 그 연장선상에서 그는 기꺼이 그 혁명에 자기의 목숨을 내 던집니다. 그의 처형과 관련된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음으로서 자신의 제자들을 오히려 결집시키고, 그 힘은 나중에 제국주의의 총 본산인 로마마저도 바꾸어 놓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시 '지배 이데올로기'의 자리로 들어섰을 때 크리스트'교'는 변질되고 맙니다. 성서는 다시한번 지배계급에 의해 왜곡되고 오늘의 기독교는 처음 그 낮은 자리에서 고통받았던 사람들을 구원해야 했던 현실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때의 예수가 오늘날 세상에 돌아와 자신의 뜻을 설파한다는 자들이 보여주는 행동을 목도한다면 성전에서 번제물을 팔았던 상인들과, 환전상들의 행태를 보고 좌판을 뒤집어 엎었듯 할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이 무서운 '자본의 신'은 일찌기 (그 당시엔 제정신이었던) 지하가 '금관의 예수'에서 그렸듯 그를 금박 딱지를 입혀 꼼짝 못하게 만들려 할 것이지만 말입니다.

 

우리의 눈은 그 시야가 편협하여 결국 우리에게 다가온 시대의 메시아, 예언자들을 늘 박해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 후에야 그들을 기리는 나쁜 버릇도 여전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사후에 퍼진 복음 정신이 어쨌든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의 사상적인 출발점이 된 것처럼, 우리가 지켜가야 할 정신들도 비록 그것이 실체는 없더라도 분명한 목표로서 우리의 현실 앞에 놓여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지난 한 세대 동안 공고해진 현세의 '금권 메테르니히' 들이 끌고 가는 지금의 체제 역시, 지금의 수레바퀴가 한번 더 굴러가고 나면 우리에게 격변과 더불어 '인간적인 변화'를 모색해야만 하는 시간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들의 예언자, 우리들의 메시아를 맞게 될 지 궁금합니다. 성서 안에 '깨어 있으라, 그때가 도적처럼 올 것이다' 라는 구절은, 결국은 우리가 되찾아야 할 상식의 시간들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경고하는 잠언일 것입니다.

 

 

시애틀에서...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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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툰님의 댓글

폰툰 작성일

일정싯점 기존에 형성되어 있는 질서에 변화와 혁신을 기하고자 하는 행위는
동시대 기득권적 일반인들의 눈에는 상당히 비인간적 행태로 비치게 됩니다.

잘 아시다시피 그래서인지 그런 선지자들의 대부분이 35세를 채 넘기지 못하고
비인간적인 죽음을 맞게되는 역사의 흔적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요즘 돌아가는 정황을 보노라면 다시금 그런 변혁이 요구되는 세기가 온듯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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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님의 댓글

민중 작성일

메시야는 이미 왔습니다.

이천년 전에 예수로 이미 왔었고
그 이후 폰툰 님이 언급하셨듯 수많은 선지자들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억울하게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인간은 그러나 그저 메시야가 다시 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치 초능력을 가진 슈퍼맨이나 원더우먼같은 메시야를
애타게 기다리는 어리석은 존재지요.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이미 낮은 곳에 임할 줄 아는 위대한 선구자들로 메시야는 우리 곁에
이미 왔고
지금 또 오는 중입니다.

메시야를 맞이하느냐 배척하느냐는
어리석은 민중에게 달려있고요..

그래 깨어있는 씨알이라야 산다고 했던
함석헌 옹이 생각나는군요.

어리석은 민중은 이명박이나 부쉬를 뽑아놓고
제 죽을 길을 재촉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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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카게산다님의 댓글

차카게산다 작성일

이명박이나 부쉬를 뽑는 정도까지는 양해가 되는데...
선지자들의 뒷통수를 자꾸 때려까니 그게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민중이란 소리를 듣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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