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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폰툰
댓글 2건 조회 1,970회 작성일 11-04-15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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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동, 소리와 함께 휴대폰에 콜이 떴다. '15)명동→잠원동'. 15는 1만5000원이란 뜻이다. 프라자호텔 뒷골목에 있다가 잽싸게 이 콜을 잡아 손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롯데백화점 건너편으로 빨리 오라"는 말소리 너머 왁자한 술자리 소음이 들렸다. 소공동 지하상가로 들어가 명동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처음 해보는 대리운전의 첫 번째 콜. 알 수 없는 긴장과 불안감 때문일까. 갑자기 요의(尿意)가 느껴졌다. 다시 한 번 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서울의 대리기사다.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ps@chosun.com
지난 5일부터 11일까지 1주일간 서울 시내에서 대리운전을 했다. 일요일인 10일 하루를 쉬고 6일간 총 22대의 자동차를 술 마신 주인 대신 몰았다. 출근시각은 오후 8시 전후였고 퇴근시각은 매번 달랐다.

대리기사 10만명, 시장규모 연 3조원으로 추산되는 대리운전 시장은 현재 포화상태다. 6~7년 전만 해도 서울 시내 3만원가량이었던 대리 비용은 1만원대로 급락했다. 스마트폰의 출현과 함께 손님과 기사를 직접 연결하는 앱(애플리케이션)도 최근 나왔다.

술에 취한 초면의 손님을 만나 매번 다른 종류의 차를 모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속칭 '진상(술 취해 행패 부리는 손님)'을 언제 만날지 모른다는 스트레스가 컸다. 만취한 40대부터 점잖은 대학교수까지 두루 태웠지만, 다행히 1주일간 '진상'은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대리운전은 보통 먹자골목 같은 번화가에서 출발해 주택가에서 끝난다. 대리기사들은 손님을 데려다 준 뒤 또 다른 콜을 찾아 번화가로 이동한다. 1주일간 대 리운전 체험에 나선 한현우 기자가 서울 홍제동 주택가에서 큰길 쪽으로 걸어가며 휴대폰에 뜨는 콜들을 확인하고 있다. /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등록에서 첫 콜까지

지난 4일 오후 6시쯤 서울 잠원동에 있는 한 대리운전 업체를 찾아갔다. 구비서류는 운전면허증뿐. 대리기사 등록서류와 서약서를 작성하고 서명했다. 서약서엔 "고객이 콜 취소 시 욕설 담은 문자를 발송하지 않겠다", "콜 접수 시 10분 내 처리하겠다" 등의 14개 항목이 적혀 있었다. 이날부터 월말까지 보험료 5만4000원과 콜 수신 프로그램 한 달 이용료 1만5000원을 납부하니 정식 대리기사가 됐다.

대리기사들은 PDA나 스마트폰에 콜 수신프로그램을 다운받아 사용한다. 이 프로그램을 실행시키면 휴대폰에 실시간으로 콜이 뜬다. 콜 정보는 '운행료·출발지·도착지'가 기본이며, 수동 기어 차량은 '스틱'이란 글자가, 여자기사를 원할 경우엔 '여'라는 글자가 추가된다. 도중에 일부 손님을 내려줘야 할 땐 '경'이란 글씨가 붙는다. '경유'란 의미다.

사장은 '초보 기사의 3대 노하우'라며 ▲아는 길부터 다녀라 ▲10분 이내에 손님과 만날 수 있는 콜을 잡으라 ▲도착 후엔 걸어서 번화가로 이동하라고 가르쳤다. 그는 "절대 손님과 싸우지 말고, 상황실(콜센터)과도 싸우지 말라"고 덧붙였다. 만취객과 싸워봐야 자신만 손해이고, 상황실과 사이가 나빠지면 콜을 못 받게 차단해버리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특정 업체 콜을 못 받는 것을 대리기사들은 "락(lock)이 걸렸다"고 말한다. 기사가 고의적 잘못을 범했을 때 그 콜을 발주한 업체는 해당 기사에게 '락'을 건다. 이를테면 스틱 운전할 수 있다더니 계속 시동을 꺼뜨려 손님의 항의를 받거나, 콜을 취소한 손님에게 욕설을 퍼부은 경우다.

나에겐 '494번 기사'라는 ID가 부여됐다. 내 휴대폰에는 '로지 N그룹' 프로그램이 깔렸다. '로지'라는 프로그램을 쓰는 대리업체들 중 'N그룹'에 속한 수백개 업체들이 접수하는 콜이 실시간으로 내 휴대폰에 뜨는 것이다. 경력이 쌓인 사람들은 이런 프로그램을 2~3개씩 깔아서 쓴다. 이들이 '피뎅이'라고 부르는 PDA를 2~3개씩 들고 다니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날 밤늦게까지 대리기사 인터넷 카페인 '밤이슬을 맞으며'와 '달빛 기사 카페'를 보며 대리운전 공부를 했다.

5일 오후 7시쯤 회사를 나오며 프로그램을 켜니까 바로 "띵동" 소리와 함께 글자가 뜨더니 곧바로 사라졌다. '북창동'이란 글자밖에 보지 못했는데 순식간에 다른 기사가 이 콜을 잡은 것이다. 나는 콜의 범위를 '반경 2㎞'로 지정했다. 나의 위치는 GPS가 자동으로 파악했다. 콜을 잡으면 10초 이내에 취소 또는 확정을 해야 하는데, 취소하면 기사에게 건당 500원의 벌금이 부과됐다. 이 벌금은 다음에 이 콜을 잡은 기사의 운행료에 '과금'이란 이름으로 더해진다.

첫 콜 '명동→잠원동'을 잡은 것은 오후 8시21분이었다. 복잡한 명동 한복판에서 손님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기사에게 "알아보기 쉽게 양팔을 벌리고 뛰어오라"고 주문하는 경우도 있다. 다행히 양팔 벌리지 않고 손님을 만났다. 회사원풍 남자 4명이 1차를 마치고 2차를 위해 강남에 가는 길이었다. 분명 콜에는 '잠원동까지 1만5000원'이라고 돼 있었지만, 조수석에 탄 차주는 "어디 갈지 아직 못 정했고, 일단 한남대교를 넘자"고 했다. 불콰해진 네 명이 쉴새 없이 웃고 떠들었고, 차주는 내 어깨를 툭툭 쳐가며 농담을 걸었다.

그는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아무개 마담 있느냐", "방 있느냐"를 묻더니 결국 논현동 경복아파트 사거리에서 차를 세우라고 했다. 도착지가 더 먼 곳으로 바뀌었는데도 그는 1만5000원만 내밀었다. 더 달라고 할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그들은 '일회용 기사'를 길에 세워둔 채 술집으로 들어가버렸다. 황당했지만, 그들이 웃고 떠드는 통에 첫 콜의 긴장을 없앨 수 있었다고 스스로 위안했다. 이로써 회사에서 떼 가는 수수료 20%(3000원)를 뺀 1만2000원으로 첫 수입을 올렸다.

모두에게 '을(乙)'인 대리기사

대리기사들끼리는 손님을 '손'이라고 부른다. "'님'자 붙이기 싫어서"가 그 이유다. 그 중 '양아손(양아치+손님)'이라고 불리는 손님이 이른바 '진상'이다. 헐레벌떡 뛰어갔더니 전화 안 받고 오리무중인 사람, "한 잔 더 하기로 했다"며 취소하는 사람, 만나서 가격 흥정 다시 하는 사람, 중간에 한 명 내려줬는데 경유비 안 주는 사람 등이다. 물론 반말과 욕설을 하거나 심지어 폭행하는 사람은 '악질 양아손'이다. "뒷좌석에서 로비자금으로 1억원을 썼네, 하루 술값으로 500만원을 썼네 하고 자랑하더니 경유비 5000원 안 내려는 사람"도 '양아손'에 해당된다.

그러나 대리기사들은 웬만해서 손님과 싸우지 않는다. 자칫 경찰서까지 가면 영업도 못할뿐더러 콜센터에서 "손님과 싸웠다"는 이유로 '락'을 걸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양아손'의 반대말은 '매너손'이다. 술도 덜 취하고 팁까지 얹어주는 손님들이 기사들에게 환영받는다.

다행히 양아손은 못 만났으나 분통 터지는 일은 겪었다. 11일 오후 10시쯤 처음으로 '여손(여자손님)'의 콜을 받았다. 회현동 우리은행 본점 지하 2층 주차장으로 빨리 와달라고 했다. 광교에서 택시 타고 도착해 전화하니 "지금 주차장에 내려가고 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5분 후 콜센터에서 콜 취소 문자가 왔다. 손님에게 전화를 걸어 "최소한 미안하다는 말은 해야 하는 것 아니냐. 택시 타고 왔는데 말도 없이 취소를 하느냐"고 항의했다.

이 여성은 "회사에 말했으면 됐지 뭐가 문제냐. 당신이 택시 탄 걸 왜 나한테 따지느냐"고 반말로 소리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밟았다'는 심정으로 돌아가는 길에 주차장 화장실에 들렀는데 벽 건너 여자화장실에서 소리지르는 게 들렸다. 그 여성이 대리회사에 전화하고 있었다. "내가 좀 이따 가겠다는데 왜 지가 택시 탔다고 나한테 뭐라고 그러느냐고!" 귀를 막고 황급히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매일 밤 1시30분쯤부터 두시간가량 서울 논현동 교보타워 사거리엔 대리기사 수백 명이 운집한다. 이곳은 저렴한 요금에 기사들을 실어 나르는 셔틀의 기점이다. 지난 9일 새벽 3시 30분쯤‘강남~수원’구간을 운행하는 승합 차가 대리기사들을 기다리고 있다. / 이명원 기자

대리기사는 모두에게 '을'인 존재다. 기사가 콜을 잡았다가 취소하면 꼬박꼬박 벌금을 내야 한다. 손님은 자신의 콜을 두고 기사들이 벌금 물어가며 경쟁하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손님은 콜을 아무리 취소해도 수수료를 내지 않는다. 대리기사를 '막장 직업'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 수입 규모 때문이 아니라, 지독하게 불리한 근무조건 때문이다. 그것도 거래처나 단골과의 관계가 아니다. 누구나 단돈 1만5000원만 있으면 멀쩡한 사람을 이리 뛰고 저리 뛰게 했다가 거래를 취소할 수 있다. 그리고는 사과는커녕 "내가 그러겠다는데"라고 말한다. 이런 시스템에 항의하는 기사는 '락'이 걸려 결국 시장에서 밀려난다. 21세기에 이런 종노릇이 따로 없다.

여의도 증권거래소 앞에서 만난 기사 조 모(47)씨와 이야기를 하던 중 그가 "먹고 살기 쉬운 일이 없다"고 하기에 "그렇죠"라고 응수했다. 그와 헤어진 뒤 곰곰이 생각해보니 기분이 묘했다.

대리기사 인터넷 카페엔 온갖 양아손들을 만난 이야기가 즐비하다. 대부분 반말과 욕설이고, "대리하면서 우리 집도 모르느냐"고 호통치는 취객도 있다. 운행 도중 "차 세우라"고 하는 경우도 꽤 많다. 너무 얄미워서 키를 뽑아 풀숲에 던져버렸다는 기사도 있고, 차에서 내린 뒤 취객이 직접 몰고 가는 것을 보고 112에 음주운전 신고를 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콜을 받고 가보니 택시이기에 "택시는 운전할 수 없다"고 하니, "대리 주제에 차 가려서 운전하느냐"는 말을 듣고 "택시 주제에 대리를 부르느냐"고 다퉜다는 얘기도 있다.

작년 6월엔 취객이 대리기사를 차로 치어 숨지게 한 사건도 있었다. 운전 도중 뒤통수를 때리는 '양아손'과 시비가 붙었는데, 갑자기 차주가 운전석에 앉더니 차 뒤에 서 있던 기사를 후진해 치어버린 것이다. 이 차주가 1심에서 살인 혐의에 무죄를 선고받은 뒤 대리기사 카페는 이를 성토하는 장이 되기도 했다. 도대체 대리기사는 '갑(甲)'인 경우가 없었다. 이 때문에 기사들 사이에서 '전대협(전국대리기사협회)' 결성 이야기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오지에 빠지고 똥콜에 속 썩고

대리기사들에게 '오지(奧地)'란 수도권 외곽지역만을 뜻하지 않는다. 어디든 도착한 뒤 타고 나올 콜이 없는 곳을 오지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서울 시내 오지가 이른바 '삼릉사계(三陵四溪)'다. '삼릉'은 정릉·태릉·공릉을, '사계'란 상계·중계·하계·월계를 뜻한다. 전형적 베드타운인 이곳에 들어가면 나오는 콜이 없어 대부분 버스를 타고 중심가로 돌아와야 한다. 콜 없이 시간 허비하는 것을 기사들은 '죽는다'고 말하는데, 피크타임에 1시간을 죽어 있으면 최소 2만원 안팎이 사라진다.

대리운전 첫날 '삼릉사계 콜'을 잡았다. 논현동에 있는데 '장위동 2만원' 콜을 아무도 잡지 않았다. 잠시 후 이 콜의 가격이 2만5000원으로 오르기에 재빨리 잡았다. 성북구 장위동은 월계동 근처에 있어 '범(汎) 삼릉사계'에 속한다. 장위동에 손님을 내려주고 나니 과연 콜이 거의 뜨지 않거나 의정부나 남양주로 가는 외곽 콜들만 떴다. 버스를 타고 청량리로 이동한 뒤에야 간신히 다음 손님을 잡을 수 있었다. 이후로 '삼릉사계'는 절대 잡지 않았다. 새벽 2시가 넘으면 '삼릉사계'도 인기 콜이다. 집이 그쪽 방향인 기사들이 이 콜을 잡아 귀가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복귀콜'이라고 부른다.

베테랑들은 수도권 전역을 다닌다. 밤늦게 버스는 물론 택시도 다니지 않는 지역에서 기사들은 일단 상가 지역까지 걸어온다. 이런 기사들을 번화가까지 태워주는 '셔틀'도 성업 중이다. 승합차 또는 미니버스로 심야에 '오지'만을 돌아다니며 대리기사들을 저렴한 값에 번화가까지 태워준다. 또는 서울 택시가 일산에서 대리기사들을 1인당 3000~5000원에 강남까지 데려다 주기도 한다. 이도 저도 없을 경우 기사들은 히치하이킹(차를 얻어타는 것)으로 오지를 탈출한다.

어느 날 밤엔 자정 넘어 목동과 부천 경계에 도착했다. 버스 정류장에 있던 대리기사가 휴대폰을 들고 있는 나를 척 알아보고 "여의도 가는 막차가 있다"고 알려줬다. 이 버스 승객 3분의 2가 대리기사였다. 콜이 뜨면 휴대폰마다 각각 다른 소리가 나는데, 이 버스를 타니 "띵동", "철컥", "뻐꾹"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거리에 비해 너무 싼 값에 나온 콜을 '똥콜'이라고 부른다. '상계동→목동 1만2000원', '남대문→상일동 1만원' 같은 콜들이 수없이 떴다. 대리기사들은 "대형 업체들이 저가경쟁을 하느라 똥콜이 많아졌다"고 푸념했다. 나 역시 최대한 '똥콜'을 피하려 했으나, 베테랑들이 다 잡아채간 뒤엔 대부분 똥콜만 남았다.

1만원짜리 콜은 '삥바리'라고 불리는데, 주로 근거리 이동이다. 나도 '강동경희대병원→올림픽공원', '남부터미널→잠원동' 등을 1만원에 운행했다. 기사들 중엔 이런 '단타(短打)'를 많이 잡아 수입을 올리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토요일인 9일엔 오후 8시쯤 나와 자정까지 4시간여를 헤맸으나 단 1콜도 타지 못하고 귀가해야 했다. 일단 콜 수가 극히 적었고 콜이 뜬다 해도 내 주변이 아니었다. 탈 만한 콜은 전광석화처럼 떴다가 사라졌다. 이날 나는 월곡동→왕십리→압구정동→신사역을 버스와 도보로 이동하며 콜을 기다렸으나 밤 12시쯤 막차 버스를 타고 귀가했다. 기사들이 '탄창'이라고 부르는 휴대폰 배터리 2개가 완전히 방전되도록 단 한 건도 실적을 올리지 못했다.

'길빵'은 길거리나 식당, 술집에서 손님을 직접 찾는 것이다. 직거래이므로 대리업체에 콜 수수료를 내지 않는다. 7일 서초동 남부터미널 앞에서 만난 대리기사 원 모(51)씨는 "길빵한테 당했다"며 씩씩거렸다. 개나리아파트 앞에서 콜을 잡고 뛰어오는 사이 손님이 '길빵'을 타고 가버렸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손님한테 전화를 걸면 '매너손'들은 "내가 부른 기사인 줄 알았다"며 다시 출발지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한참 멀리 왔다"며 그냥 가버리는 경우가 많다.

음주단속을 만날 땐 보람마저 생겼다. 1주일간 음주단속을 단 한 번 겪었다. 명일동에서 나를 불러 잠실로 가다가 올림픽선수촌아파트 앞에서 음주단속을 만난 두 남자는 "대리 부르길 잘했네"라며 좋아했다.

총 22건의 운행 중 팁을 준 사람은 세 명이었다.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는 "전업이냐, 아르바이트냐", "출퇴근은 언제 하느냐"고 묻더니 집에 닿자 2만원을 주면서 잔돈(2000원)을 사양했다. 신사동에서 30분 가까이 기다리게 한 40대 남자는 대기료 명목으로 운행료(1만8000원)에 7000원을 보태 2만5000원을 줬다. 팁을 5000원이나 준 사람은 낡은 카렌스의 주인인 30대 남자였다. 용산 전자상가 근처에서 봉천동까지 간 이 남자는 차를 타자마자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죄송하다"고 하더니 헤어질 때 팁까지 건넸다.

황혼에서 새벽까지

휴대폰에는 '수도권 총 콜수'가 표시된다. 그 시각 현재 수도권에서 떠도는 모든 콜의 숫자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쯤까지 이 숫자는 10콜 미만이다. 오후 7시부터 올라가기 시작하는 이 숫자는 밤 10시~자정 전후에 최고치를 기록한다. 밤 1시가 넘으면 다시 줄어들기 시작한다. 대개 평일의 경우 이 수치는 500~600콜까지 올라간다.

목요일인 7일 밤 '수도권 총 콜수'는 무려 1000콜 넘게 치솟았다. 이날은 이른바 '방사능 비'가 내린 날로, 비를 피해 차를 갖고 나온 사람이 많은데다 같은 이유로 일을 쉰 기사들이 많았다. 이날 자정 무렵 신사역 부근에서는 정신없이 올라오는 콜들 가운데 좋은 콜을 골라서 탈 수 있을 정도였다.

매일 밤 1시30분쯤부터 3시30분쯤까지 논현동 교보타워 일대엔 대리기사 수백명이 운집한다. 기사들이 '대리타워 사거리'라고 부르는 이곳엔 기사들을 상대로 영업하는 포장마차·용품점·대리업체 천막이 매일 20여개씩 들어선다. 이곳은 기사들을 실어나르는 셔틀의 기점이기도 하다. 기사들은 싼값에 수도권 각지로 가는 셔틀을 타려고 이곳에 모인다. 이곳에 모이는 기사들은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기도 한다. 대리기사 김 모(41)씨는 "25만원에 부산 갔다가 창원에서 다시 20만원짜리 콜을 잡아 서울로 왔다는 사람도 봤는데 믿을 수 없는 얘기"라고 말했다. 언젠가 TV에서 월 700만원 번다는 대리기사를 소개한 적이 있다. 기사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 해서 자꾸 대리기사만 늘어난다"고 반응했다. 한빛대리 이창근(44) 사장은 "전업으로 대리운전을 하는 사람의 경우 월평균 수입은 150만~200만원 정도로 보면 맞을 것"이라며 "서울시내 운행료가 3만원 수준이었던 6~7년 전만 해도 할 만한 직업이었지만 저가 경쟁이 붙은 지금은 월 200만원 이상 버는 경우가 드물다"고 말했다.

대리운전 마지막 날인 11일 '꿈의 100K'를 찍어보고 싶었다. K는 1000단위를 가리키는 말로, 기사들은 하루 수입 100K(10만원)를 '꿈의 숫자'로 불렀다. 이날 오후 8시30분부터 새벽 2시10분까지 총 5콜을 운전하고 매출 8만5000원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후로는 콜 수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타고 갈 만한 콜을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괜찮은 콜들은 베테랑들이 쏜살같이 찍어갔다.

1주일간 일한 결과 총 수입은 34만3000원, 수수료와 교통비 등 비용을 제외하면 순이익은 18만8100원이었다. 가능하면 실제 대리기사처럼 걷거나 버스로 움직이려 했으나 더 많은 사람을 만나려는 욕심에 무리하게 택시를 탄 적도 있었다.

마지막 날 새벽인 12일 오전 2시10분. 남가좌동에 손님을 내려주고 이화여대 입구까지 걸었다. 아파트와 상가 불빛이 하나 둘씩 꺼지고, 콜을 알리는 "띵동" 소리도 잦아들었다. 신촌에서 이화여대로 가는 길에 벚꽃이 봉오리를 막 터뜨리고 있었다.

새벽 3시45분, 광화문 한 편의점에 들어가 캔맥주를 하나 샀다. 습관적으로 콜 프로그램을 켜놓고 한 모금 들이켜는 순간, 번쩍하고 콜이 떴다. 'VIP)북창동→포천 내촌면 5만원'. '이걸 잡으면 하루 매출 10만원을 처음 넘는다'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짧은 순간 머리가 맹렬히 회전했다. VIP콜은 금세 사라졌고, 나는 차가운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운전석에서 본 세상

아내 불륜현장 덮치러 가자는 남편…  옛 부하직원을 손님으로 태우기도

좁은 차 안에서 듣게 되는 술 취한 손님들의 넋두리는 세상의 축소판이었다. 세대마다 화제가 달랐고 차종에 따라 말투도 제각각이었다. 가장 젊은 축인 30대 손님들은 주로 어디서 술 마시고 놀 것인가를 화제 삼았다. 40대가 넘으면 '먹고 사는 이야기'가 주종을 이뤘다. 거여동에서 만난 두 40대 남자의 차는 낡은 수동기어 승합차였다. 한눈에도 쉽지 않은 일을 하는 듯했다. 사투리가 걸쭉한 두 사람은 명일동까지 가는 내내 어릴 적 시골 살던 이야기를 나눴다.

압구정동에서 에쿠스 뒷자리에 탄 40대 후반 남자는 "기사님은 뭣 때문에 대리를 하세요? 돈? 자식?"이라고 묻더니 대학에 떨어진 아들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너무 화가 나서 군대 가라고 했다. 나는 정말 차가운 아빠"라고 말했다.

종로에서 논현동으로 가던 50대 초반 남자 둘의 화제는 스마트폰 사용법이었다. 두 사람은 "이제 이거 알아야 사업도 할 수 있다"고 했다. 양재역 근처 횟집에서 태운 60대 후반 남자 두 사람은 건강 이야기만 했다. 이들은 "내 건강이 최고야. 매일 운동해야 돼"라고 말했다.

인터넷 대리카페에는 아내의 불륜 현장을 덮친 남편 이야기가 있다. 초저녁 광화문에서 방이동까지 가자던 남자는 "아내가 수상해서 흥신소에 의뢰했는데 모텔에 들어갔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술은 안 마셨지만 너무 떨려서 운전을 못 하겠다"고 말했다. 방이동에 도착한 남자는 한참 뒤 아내와 함께 모텔에서 나와 차에 탔다. 집으로 가는 차에서 아내는 "이렇게 된 이상 이혼하자. 당신과 산 20여년은 지옥이었다"고 했고 남편은 "애들 위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고 말했다.

떨떠름한 심정으로 두 사람을 내려준 기사는 문득 집에 전화를 걸어 아내에게 "고생시켜서 미안하다"고 말했고, 기사의 아내는 "왜 갑자기 안 하던 말을 하느냐"며 의아해했다. 그는 더 이상 일할 마음이 없어 치킨과 맥주를 사 들고 집에 들어갔다고 했다.

이 밖에도 예전 부하직원을 손님으로 만난 기사, 자신이 대기업 구매과장 시절 납품업체 부장이었던 사람을 태운 이야기, 학창 시절 은사를 만나 눈도 못 맞췄다는 이야기들이 인터넷 카페에 차고 넘친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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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님의 댓글

민중 작성일

참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로군요.

없는 사람 살 길은 저렇게 점점 경쟁이 되어 더욱 힘들어진다니
이거 세상이 어떻게 되어가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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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툰님의 댓글

폰툰 작성일

자본주의 후반기 정점  = 노예경제시대
노예경제 후반기 정점  = 죽창난무시대

21세기 죽창나무시대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 지 자못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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