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피에 굶주린 잔인한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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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기만에 반기를 든 노신학자
나이 80에 이르는 어느 노신학자가 평생 그 자신의 몸과 영혼을 담그고 있던 종교에서 떠난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현실 교회에 대한 매서운 질타이자, 온몸을 던진 반격이며 그 종교의 "죽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그 목소리에 여전히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종교를 팔아 자신들의 배를 살찌우고, 의미 없는 교리와 자기 자랑, 이에 더해 본질적으로는 금전 요구 그리고 세뇌에 가까운 이야기를 설교라고 내세우며 이를 반복하면서 세상과 교인들을 기만하기에 바쁘기 때문이다.
인간을 괴롭히는 악의 정체를 드러내고 그 악이 무력해지도록 함께 손을 잡고 힘껏 일어서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의 실체를 은폐하고 그 악과 대결하려는 이들을 도리어 악마로 모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런 곳에서 부정의한 권력은 둥지를 틀고 약자들의 권리를 박탈하면서 성립되는 특권은 보호받는다. 교회가 그러고 있으니 사탄은 할 일이 없게 된다. 제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교회를 나갈 수 없다.
물론 그렇지 않은 교회마저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들의 존재는 겨자씨처럼 작다. 그래서 언제나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해 있다. 이들을 기필코 지켜내야 한다. 반면에 부하고 강한 교회들은 군단의 세력을 이루고 있다. 예수가 돼지 떼 속으로 몰아낸 레기온 집단이다. 레기온은 로마 군단의 명칭이다. 그것은 죽음의 부대이다. 겉으로는 생명을 외치면서 정작은 인간에게 죽음을 가하는 폭력을 그 안에 감추고 있다.
바로 이들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신학적 깃발을 들지 않고서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인간해방의 길을 열어나간 예수는 끝끝내 실종되고 말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나오는, 이 땅에 돌아온 예수를 배척하고 추방하는 대심문관의 모습과 오늘날의 기독교 또는 그리스도교는 그리 다르지 않다.
한도명의 <나는 어째서 그리스도교를 떠났는가>(신학비평사 펴냄)는 그렇게 현실이 내쫓아낸 역사의 예수, 인간의 진실을 담고 있는 존재를 찾아 나서는 노신학자의 용기 있는 여정의 고백이다.
유월절, 그리고 부활절
이 책을 손에 집어 들고 몰입한 때는 종교력으로도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시기였다. 결단을 하고 일어나 떠나야 할 곳과 무수한 고난이 있다 해도 반드시 이르러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절기였기 때문이다. 평생에 익숙했던 곳을 단호하게 결별하고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을 가는 한 노년의 모습에서 나는 이 절기의 진정한 뜻을 새기면서, 출애굽과 부활의 진실을 새롭게 목격하게 된다.
2011년 4월 19일은 유대교에서 유월절(逾越節)로 지키고, 그것이 끝나는 4월 25일 전날인 4월 24일은 기독교에서 부활절로 기념하는 주일이다. 금년 4·19 혁명이 유월절과 겹친 날짜라는 것도 우연치고는 참으로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둘 다 억눌렸던 민중이 해방을 향해 나간 역사의 경계선이 그어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지난주 4월 17일은 교회력으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알린 종려주일이었다. 종려주일이라고 붙인 까닭은 승전자에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히브리 풍속이 반영된 결과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여기서 사용한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는 "히브리"라는 단어는 "합비루"라는 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합비루는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이리저리 유랑하며 힘들게 살았던 무리에 대한 총칭이다. 따라서 히브리는 본래 혈통적 개념이 아니라 계급 내지는 계층적 개념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폭력적인 국가주의에 의해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단어가 되었지만 2000년도 넘는 전의 시대에 이들은 지금의 팔레스타인과 갈은 처지의 명칭이었다.
따라서 "히브리"라는 단어는 거부되고 몰리고 내쫓기며 내일에 대한 희망을 좀체 가지기 어려운 사람들 모두를 의미한 셈이었다. 유월절은 이런 이들에게 주어진 해방의 축복이었다. 그건 죽어지냈던 이들 히브리인들의 부활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부활이라는 말에는 죽어버렸다고 여긴 존재들의 "봉기"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해방의 사건을 향해
그렇지 않아도 이 글이 '프레시안 books' 지면을 통해 나가는 4월 22일 금요일 저녁은 "성금요일(Good Friday)"이라고 해서 예수의 수난이 십자가에서 정점에 이르는 날을 기리는 시간이 된다. 그래서 기독교 또는 그리스도교는 이 주간을 예수의 고난과 함께 하는 수난절로 지킨다. 수난이 끝나고 부활을 축하하는 시간이 이어지는 셈이다.
조금 더 자세히 풀자면, 유월절은 고대 이집트 제국에서 노예로 짓밟히고 있던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선두로 해서 파라오의 권력에 도전하고 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난 해방절이라고 할 수 있다. 히브리 최대 명절이다. 모세 당시 히브리인들이 믿는 신 야훼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면서 인간을 노예화하고 지중해 세계에서 최대의 강자로 군림하고 있던 이집트 제국에 재앙을 내린다. 그런 강제력 없이는 파라오가 자신의 권력을 손에 놓으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국 전체가 겪게 되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그 집은 그냥 넘어가준다고 해서 넘어갈 유(逾)와 월(越)자를 써 유월절이라고 불렀다. 이는 히브리어 "페사크"를 번역한 단어로 영어로는 "패스오버(passover)"라고 한다. 그렇지 않은 집의 장자는 모두 몰살당하게 되어 있었다. 인간이 죽는다는 점에서 잔혹한 이야기지만, 장자의 죽음은 노예를 밟고 서 있는 체제는 더는 유지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상징해준다. 계승자가 없는 제국의 비극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기독교 또는 그리스도교는 이렇게 떠나온 제국을 제 발로 도로 걸어 들어가 제왕의 영광을 누리고자 한다. 바로 여기에 한국 기독교 내지는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와 비극이 있다. 제국의 모형을 닮고자 하는 교회 안에서 교인들은 자신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잃은 채 하늘이 이미 준 진실된 인간성을 완성시켜나가는 길을 모르게 되고 있다.
<나는 어째서 그리스도교를 떠났는가>의 한도명은 바로 이 점을 집중적으로 질타하고 기존의 신학적 전제를 일거에 타격하고 나선다.
한도명은 누군가?
사실 저자 한도명에 대해 알고 있는 바는 없다. 책은 그가 1933년 생으로 남도에서 태어났으며, "한 평생 그리스도교와 그 교회를 끼고 살면서 신학을 공부하고 가르쳐왔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이제 신학을 내려놓고 일상에서 하느님과 함께 노닐며 사는 법을 익히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실제로 누구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냥 짐작하기로는 평생에 신학을 하면서 인간의 진실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몸과 영혼을 옮겨온 <신학비평>의 편집자 송기득 선생 본인이기도 한 것 같고, 그의 분신과 다를 바 없는 그 누구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두이기도 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의 온 생애를 바쳐 몰두해온 기독교/그리스도교에 대해 "이건 아니다"라고 밝히고, 신 앞에서 솔직한 존재로 돌아가는 그의 결단과 그 모습 자체다. 한도명은 그래서 너일 수도, 나일 수도, 또는 우리 모두일 수도 있는 이름이다. 그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제 나는 아무래도 그리스도교를 아주 떠나야 할 것 같다. 아니 이미 떠났다고 해야 옳다. 교회에 나가지 않은 지가 벌써 오래되었다. (…) 분명한 것은 내가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교를 보다 잘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떠나기 위해서라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그는 본래의 인간 해방의 실체를 가려버린 신학적 고백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비판하면서 그리스도론의 핵심인 대속론을 비판적으로 짚고 나간다. 대속론은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서 죽어주었다는 신앙 고백의 핵심이다. 우리의 죄를 그가 대신 걸머지고 희생되었다는 의미가 담긴 신학 교리다.
대속론의 모순
이에 대해 한도명은 대속론이 하느님이 꼭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해야만 용서하시는 "피에 굶주린 잔인한 신"처럼 만들었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 누군가를 대리해서 처벌받도록 하는 책임회피와 주체성 상실의 결과에 대해 논박하고 있다.
그는 인간이 나약한 존재이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는 반박에 대해 그 나약한 존재가 누군가를 대신해서 벌을 받게 하면 그건 도대체 뭔가라고 묻는다. 뿐만 아니라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죄까지 대속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면, 정의는 어떻게 가능해질 것인지 반문한다.
물론 이러한 그의 견해는 치열한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주목해볼 바는 모두가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교리에 대해, 그는 정면으로 새로운 성찰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교리란 절대적 진리가 아니고, 어느 특정한 역사의 시점에 정리된 생각이자 교리의 위상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압박이 주도한 경우도 적지 않다. 서기 318년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칙령에 의한, 신과 예수와 성령이 하나라는 3위 일체론 공포는 이단자 색출과 함께 자유로운 신학적 논쟁을 봉쇄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한도명은 인간을 참 인간이 되게 하는 역사적 예수와의 만남이 보다 결정적인 길이라고 강조한다. 그런 각도에서 예수는 하느님의 길을 향해 나간 진정한 인간으로서, 그의 길을 뒤따르는 것이 우선이지 그저 신앙의 대상으로 올려놓고 복을 주는 존재처럼 만들어버리는 것은 예수의 실체에 대한 배반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현실에 우리는 예수처럼 살기보다는 예수에게 뭘 좀 달라고 비는 쪽이 신앙의 대세인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허접한 설교들
그러니 그가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고 앉아 있을 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다.
"내가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은 목사들의 설교가 싫어서다.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은혜는커녕 열을 받는다. (…) 심지어 설교를 빌려 자신의 불만 어린 감정을 터뜨린다든지, 하는 짓을 보고 있노라면 열을 받다 못해 화가 치민다."
그러나 그가 모든 설교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사람다움을 말하는 설교가 있다면 그리스도교를 떠난 뒤에도 즐겨 찾아가서 경청하곤 할 것이다." 이러면서 그는 세례가 마치 성찬예식의 자격처럼 되고 있는 것도 못마땅해 한다. 그 뜻에 동참하고 함께 하고 싶은 이들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교와 그 교회를 떠나니까, 역사의 예수의 '하느님 나라'가 보였고, 아울러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넘어선 '참 하느님'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역사의 예수를 넘어서 '민중(다중)'에게서 사람다움(인간화)의 길을 찾으려 하며, 하느님과 함께 노닐며 사는 생천주(生天主)긔 자리를 넘보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교와 그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면, 어찌 이 자리에 올 수 있었겠는가? 내가 그리스도교를 떠나게 된 것, 그저 '하늘'에 감사할 따름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유대인 작가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의 작품 가운데 '바보 김펠(Gimpel the Fool)'이라는 단편이 있다. 내용은 바보 김펠이 사람들에게 계속 기만당하고 농락의 대상이 되면서도 그걸 알고도 그대로 당해주는 모습을 그려냈다. 결국 김펠은 집을 떠나 세상을 다니면서 사람들의 진실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진실을 말하는데 그의 모습은 점차 성자처럼 받아들여지게 된다.
바보 김펠, 바보 한도명 그리고 "봉기"
문학적 전통 속에서는 바보 문학의 흐름의 한 갈래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조롱과 농락이 결국 신에 대한 농락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신의 이름은 인간에 대한 믿음, 정의, 평화, 생명 그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좋다. 우리는 그런 가치들이 농락당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작품에서 폭로되고 있는 것은 인간 또는 신을 조롱하는 자들의 추악함이다.
한도명은 이런 세상에서 바보 또는 어리석은 자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신학자가 그리스도교를 떠나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떠나지 않으면 열리지 못하는 길이다. 신조차 농락하고 있는 기독교에 대해 결별 선언을 하지 않는 한, 진정한 신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그런 정신적 갈림길에 서 있지 않은가?
이 책은 많은 논쟁이 필요한 대목을 지니고 있지만, 제기하는 문제 자체로 이미 우리의 현실을 보다 통쾌하게 앞으로 밀어내고 있다.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의 실체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죽었다고 여긴 이들이 다시 일어나 봉기를 일으키는 시작은 그렇게 온다.
나이 80에 이르는 어느 노신학자가 평생 그 자신의 몸과 영혼을 담그고 있던 종교에서 떠난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현실 교회에 대한 매서운 질타이자, 온몸을 던진 반격이며 그 종교의 "죽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그 목소리에 여전히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종교를 팔아 자신들의 배를 살찌우고, 의미 없는 교리와 자기 자랑, 이에 더해 본질적으로는 금전 요구 그리고 세뇌에 가까운 이야기를 설교라고 내세우며 이를 반복하면서 세상과 교인들을 기만하기에 바쁘기 때문이다.
인간을 괴롭히는 악의 정체를 드러내고 그 악이 무력해지도록 함께 손을 잡고 힘껏 일어서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의 실체를 은폐하고 그 악과 대결하려는 이들을 도리어 악마로 모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런 곳에서 부정의한 권력은 둥지를 틀고 약자들의 권리를 박탈하면서 성립되는 특권은 보호받는다. 교회가 그러고 있으니 사탄은 할 일이 없게 된다. 제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교회를 나갈 수 없다.
물론 그렇지 않은 교회마저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들의 존재는 겨자씨처럼 작다. 그래서 언제나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해 있다. 이들을 기필코 지켜내야 한다. 반면에 부하고 강한 교회들은 군단의 세력을 이루고 있다. 예수가 돼지 떼 속으로 몰아낸 레기온 집단이다. 레기온은 로마 군단의 명칭이다. 그것은 죽음의 부대이다. 겉으로는 생명을 외치면서 정작은 인간에게 죽음을 가하는 폭력을 그 안에 감추고 있다.
바로 이들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신학적 깃발을 들지 않고서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인간해방의 길을 열어나간 예수는 끝끝내 실종되고 말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나오는, 이 땅에 돌아온 예수를 배척하고 추방하는 대심문관의 모습과 오늘날의 기독교 또는 그리스도교는 그리 다르지 않다.
한도명의 <나는 어째서 그리스도교를 떠났는가>(신학비평사 펴냄)는 그렇게 현실이 내쫓아낸 역사의 예수, 인간의 진실을 담고 있는 존재를 찾아 나서는 노신학자의 용기 있는 여정의 고백이다.
유월절, 그리고 부활절
▲ <나는 어째서 그리스도교를 떠났는가>(한도명 지음, 신학비평사 펴냄). ⓒ신학비평사 |
2011년 4월 19일은 유대교에서 유월절(逾越節)로 지키고, 그것이 끝나는 4월 25일 전날인 4월 24일은 기독교에서 부활절로 기념하는 주일이다. 금년 4·19 혁명이 유월절과 겹친 날짜라는 것도 우연치고는 참으로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둘 다 억눌렸던 민중이 해방을 향해 나간 역사의 경계선이 그어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지난주 4월 17일은 교회력으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알린 종려주일이었다. 종려주일이라고 붙인 까닭은 승전자에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히브리 풍속이 반영된 결과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여기서 사용한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는 "히브리"라는 단어는 "합비루"라는 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합비루는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이리저리 유랑하며 힘들게 살았던 무리에 대한 총칭이다. 따라서 히브리는 본래 혈통적 개념이 아니라 계급 내지는 계층적 개념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폭력적인 국가주의에 의해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단어가 되었지만 2000년도 넘는 전의 시대에 이들은 지금의 팔레스타인과 갈은 처지의 명칭이었다.
따라서 "히브리"라는 단어는 거부되고 몰리고 내쫓기며 내일에 대한 희망을 좀체 가지기 어려운 사람들 모두를 의미한 셈이었다. 유월절은 이런 이들에게 주어진 해방의 축복이었다. 그건 죽어지냈던 이들 히브리인들의 부활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부활이라는 말에는 죽어버렸다고 여긴 존재들의 "봉기"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해방의 사건을 향해
그렇지 않아도 이 글이 '프레시안 books' 지면을 통해 나가는 4월 22일 금요일 저녁은 "성금요일(Good Friday)"이라고 해서 예수의 수난이 십자가에서 정점에 이르는 날을 기리는 시간이 된다. 그래서 기독교 또는 그리스도교는 이 주간을 예수의 고난과 함께 하는 수난절로 지킨다. 수난이 끝나고 부활을 축하하는 시간이 이어지는 셈이다.
조금 더 자세히 풀자면, 유월절은 고대 이집트 제국에서 노예로 짓밟히고 있던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선두로 해서 파라오의 권력에 도전하고 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난 해방절이라고 할 수 있다. 히브리 최대 명절이다. 모세 당시 히브리인들이 믿는 신 야훼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면서 인간을 노예화하고 지중해 세계에서 최대의 강자로 군림하고 있던 이집트 제국에 재앙을 내린다. 그런 강제력 없이는 파라오가 자신의 권력을 손에 놓으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국 전체가 겪게 되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그 집은 그냥 넘어가준다고 해서 넘어갈 유(逾)와 월(越)자를 써 유월절이라고 불렀다. 이는 히브리어 "페사크"를 번역한 단어로 영어로는 "패스오버(passover)"라고 한다. 그렇지 않은 집의 장자는 모두 몰살당하게 되어 있었다. 인간이 죽는다는 점에서 잔혹한 이야기지만, 장자의 죽음은 노예를 밟고 서 있는 체제는 더는 유지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상징해준다. 계승자가 없는 제국의 비극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기독교 또는 그리스도교는 이렇게 떠나온 제국을 제 발로 도로 걸어 들어가 제왕의 영광을 누리고자 한다. 바로 여기에 한국 기독교 내지는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와 비극이 있다. 제국의 모형을 닮고자 하는 교회 안에서 교인들은 자신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잃은 채 하늘이 이미 준 진실된 인간성을 완성시켜나가는 길을 모르게 되고 있다.
<나는 어째서 그리스도교를 떠났는가>의 한도명은 바로 이 점을 집중적으로 질타하고 기존의 신학적 전제를 일거에 타격하고 나선다.
한도명은 누군가?
사실 저자 한도명에 대해 알고 있는 바는 없다. 책은 그가 1933년 생으로 남도에서 태어났으며, "한 평생 그리스도교와 그 교회를 끼고 살면서 신학을 공부하고 가르쳐왔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이제 신학을 내려놓고 일상에서 하느님과 함께 노닐며 사는 법을 익히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실제로 누구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냥 짐작하기로는 평생에 신학을 하면서 인간의 진실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몸과 영혼을 옮겨온 <신학비평>의 편집자 송기득 선생 본인이기도 한 것 같고, 그의 분신과 다를 바 없는 그 누구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두이기도 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의 온 생애를 바쳐 몰두해온 기독교/그리스도교에 대해 "이건 아니다"라고 밝히고, 신 앞에서 솔직한 존재로 돌아가는 그의 결단과 그 모습 자체다. 한도명은 그래서 너일 수도, 나일 수도, 또는 우리 모두일 수도 있는 이름이다. 그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제 나는 아무래도 그리스도교를 아주 떠나야 할 것 같다. 아니 이미 떠났다고 해야 옳다. 교회에 나가지 않은 지가 벌써 오래되었다. (…) 분명한 것은 내가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교를 보다 잘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떠나기 위해서라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그는 본래의 인간 해방의 실체를 가려버린 신학적 고백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비판하면서 그리스도론의 핵심인 대속론을 비판적으로 짚고 나간다. 대속론은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서 죽어주었다는 신앙 고백의 핵심이다. 우리의 죄를 그가 대신 걸머지고 희생되었다는 의미가 담긴 신학 교리다.
대속론의 모순
이에 대해 한도명은 대속론이 하느님이 꼭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해야만 용서하시는 "피에 굶주린 잔인한 신"처럼 만들었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 누군가를 대리해서 처벌받도록 하는 책임회피와 주체성 상실의 결과에 대해 논박하고 있다.
그는 인간이 나약한 존재이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는 반박에 대해 그 나약한 존재가 누군가를 대신해서 벌을 받게 하면 그건 도대체 뭔가라고 묻는다. 뿐만 아니라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죄까지 대속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면, 정의는 어떻게 가능해질 것인지 반문한다.
물론 이러한 그의 견해는 치열한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주목해볼 바는 모두가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교리에 대해, 그는 정면으로 새로운 성찰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교리란 절대적 진리가 아니고, 어느 특정한 역사의 시점에 정리된 생각이자 교리의 위상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압박이 주도한 경우도 적지 않다. 서기 318년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칙령에 의한, 신과 예수와 성령이 하나라는 3위 일체론 공포는 이단자 색출과 함께 자유로운 신학적 논쟁을 봉쇄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한도명은 인간을 참 인간이 되게 하는 역사적 예수와의 만남이 보다 결정적인 길이라고 강조한다. 그런 각도에서 예수는 하느님의 길을 향해 나간 진정한 인간으로서, 그의 길을 뒤따르는 것이 우선이지 그저 신앙의 대상으로 올려놓고 복을 주는 존재처럼 만들어버리는 것은 예수의 실체에 대한 배반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현실에 우리는 예수처럼 살기보다는 예수에게 뭘 좀 달라고 비는 쪽이 신앙의 대세인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허접한 설교들
그러니 그가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고 앉아 있을 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다.
"내가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은 목사들의 설교가 싫어서다.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은혜는커녕 열을 받는다. (…) 심지어 설교를 빌려 자신의 불만 어린 감정을 터뜨린다든지, 하는 짓을 보고 있노라면 열을 받다 못해 화가 치민다."
그러나 그가 모든 설교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사람다움을 말하는 설교가 있다면 그리스도교를 떠난 뒤에도 즐겨 찾아가서 경청하곤 할 것이다." 이러면서 그는 세례가 마치 성찬예식의 자격처럼 되고 있는 것도 못마땅해 한다. 그 뜻에 동참하고 함께 하고 싶은 이들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교와 그 교회를 떠나니까, 역사의 예수의 '하느님 나라'가 보였고, 아울러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넘어선 '참 하느님'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역사의 예수를 넘어서 '민중(다중)'에게서 사람다움(인간화)의 길을 찾으려 하며, 하느님과 함께 노닐며 사는 생천주(生天主)긔 자리를 넘보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교와 그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면, 어찌 이 자리에 올 수 있었겠는가? 내가 그리스도교를 떠나게 된 것, 그저 '하늘'에 감사할 따름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유대인 작가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의 작품 가운데 '바보 김펠(Gimpel the Fool)'이라는 단편이 있다. 내용은 바보 김펠이 사람들에게 계속 기만당하고 농락의 대상이 되면서도 그걸 알고도 그대로 당해주는 모습을 그려냈다. 결국 김펠은 집을 떠나 세상을 다니면서 사람들의 진실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진실을 말하는데 그의 모습은 점차 성자처럼 받아들여지게 된다.
바보 김펠, 바보 한도명 그리고 "봉기"
문학적 전통 속에서는 바보 문학의 흐름의 한 갈래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조롱과 농락이 결국 신에 대한 농락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신의 이름은 인간에 대한 믿음, 정의, 평화, 생명 그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좋다. 우리는 그런 가치들이 농락당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작품에서 폭로되고 있는 것은 인간 또는 신을 조롱하는 자들의 추악함이다.
한도명은 이런 세상에서 바보 또는 어리석은 자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신학자가 그리스도교를 떠나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떠나지 않으면 열리지 못하는 길이다. 신조차 농락하고 있는 기독교에 대해 결별 선언을 하지 않는 한, 진정한 신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그런 정신적 갈림길에 서 있지 않은가?
이 책은 많은 논쟁이 필요한 대목을 지니고 있지만, 제기하는 문제 자체로 이미 우리의 현실을 보다 통쾌하게 앞으로 밀어내고 있다.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의 실체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죽었다고 여긴 이들이 다시 일어나 봉기를 일으키는 시작은 그렇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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