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마음의 빚을 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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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강 님의 글..무브온)
73년부터 75년까지 햇수로는 3년 간,
그러나 절반 가까이 화실에 못나갔기에 어쩌면 햇수는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를 기간에 강촌역에서 남춘천역까지 무임승차를 했다.
주머니에 차비가 있을 때는 당당히 표를 끊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그럴 형편이 못됐다. 극빈의 환경이었다.
그런 형편이라 당연히 남춘천역에서 시내 중심가인 요선동까지 버스를
타 본 기억이 전무하다. 버스비도 없었으려니와 그 정도 거리를 걷는 건
일도 아니었다. 멀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버스비가 있어도 타지 않았으
니까. 남춘천에서 아래 샘밭까지도 걸어서 다녀왔다. 시내에선 동서남북
어디를 막론하고 아무리 멀어도 걸으면 됐다. 그만큼 다리 하나는 튼튼
했다. 강촌에 버스가 없던 시절, 구곡폭포며 면사무소가 있는 창촌리며
추곡, 발산, 광판리, 어디든 일이 있으면 걷는 게 생활이었다. 한 동네로
여긴, 가깝다는 구곡폭포도 왕복 20리가 넘었다.
그 연장선이라 시내버스가 흔해도 탈 생각조차 할줄 몰랐다. 강촌놈이
듣지도 못해 모르는 노선을 물어보며 타고 다니는 게 오히려 두렵고 불편
했을 터이다. 주머니는 늘 비어있고 시간은 남아돌았다. 걷는 걸 좋아하는
성정도 한 몫 했고 건각이었으니 자연스러운 습관이였겠다.
무거운 짐을 지고 수십 리를 걷던 사람이 맨몸으로 다니는 건 날아다니는
거나 다름 없었던 요소도 작용했을 것이다.
강촌역에서 남춘천역까지는 차표 검사가 거의 없었다. 마찮가지로 남춘천
역에서 강촌까지도 검표하는 경우가 별로 없어서 궂이 숨거나 피할 필요
성이 안 생겼다. 아주 드믈게 차표 검사가 있으면 화장실로 들어가 잠시
있다가 지나간 후 나오면 됐다. 무임승차로 적발된 일이 한번도 없었다.
다만 기차에서 내려 역사로 나갈 수 없으니까 갱목을 쌓아놓은, 당시 앙고라
실크 공장이 있던 곳으로 나갔는데 기차 후미에서 내리면 거리가 맞았다.
모든 기차가 비둘기호였던 시절이다. 특급이 한두 번 있었는지 모르겠다.
탔던 기억이 안나서다.
강촌역에선 동네청년 몇 명과 강촌역에서 화물하역작업을 했기에
역무원들과 친숙해 어려움이 없었다. 막차를 탈 경우 시간이 촉박할 때
전력을 기울여 달려야 하는 건 드믈지 않게 생겼다. 기차에 오르면 숨이
넘어갈듯 헐떡여야 했음은 물론이다. 어쩌다 막기차를 놓치면 강촌까지
걸어가야 한다. 특히 겨울은 고통스러웠다. 30리 길이라는데 왜 그렇게
멀던가. 점심은 굶었고 저녁을 못 먹은 상태에서 옷도 헐거웠고 거의가
강변길이라 칼바람이 매서웠다. 큰벼루라도 가방에 들어있을 때는 천근
만근이 되어 어깨를 파고 들었다. 희망이 있어서 견딜 수 있었을 게다.
강촌역에서 첫 차를 탔고 남춘천역에서 막차를 타는 생활은 소원하던
그림공부를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소헌선생님께서도 학원비를 안받으
셨음은 물론이고 붓이며 먹, 종이까지 주시며 공부하게끔 만들어 주셨다.
국전에 출품할 때 표구사도 족자 표구비를 안 받고 해주었다. 내 처지를
주변에서 모두 잘 알고 있어서다. 이런 분위기라 나로서는 죽기살기로
붓을 잡아 전력투구하는 것이 유일한 보답으로 생각해 밤낮을 잊고
덤벼들 수 있었다. 그 성과가 1년만에 국전 입선으로 나타났다.
강원일보에 6단 박스기사로 '불우한 청년화가 붓 잡은지 1년만에 국전
입선'이란 제묵을 달아 사회면에 내줬다. 2년 째였지만 실제 화실에 나온
기간으로 따져 그렇게 써졌다. 절대절명의 절박한 정신으로 화실에 다녔
지만 막노동 일이 있으면 빠질 수 밖에 없어 절반은 못 나왔었다.
묵촌회 입문해 3년 안에 국전 입선 못하면 삶의 미련을 버리고 내 목숨 끊겠
다는 비장한 각오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그림공부는 내게 주어진 암흑환경
속에서 한줄기 빛이었다. 유일무이의 돌파구였다. 드디어 빛을 잡았다.
지난 4월초, 경춘선복선전철 개통기념 춘천우취회 전시회가 춘천역 로비에서
있었다. 개막식에 참석하러 갔다가 역장실에서 잠깐 다담을 나누는 기회가
있었고 새역사에 그림을 한 점 걸어야 하는데 예산이 없다는 역장님의 말을
들었다. 무임승차에 관한 부담감, 미안함을 어떤 방식으로든 풀어내고 싶어하던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듯 그 사연을 언급하며 내가 작품을 기증하겠다고 덜컥
약속을 해버렸다. 역장님은 내가 화가인걸 모르고 한 말이었지만 마음의 짐을
털어낼 좋은 기회라 여겼기에 자청한 것이다. 생각은 가지고 있었으나 계기가
그동안 없었다. 모든 일엔 다 때가 있는 듯 하다.
지난 며칠간 오봉산 제3봉에 있는 소나무를 소재로 전지 40호크기로 작업해
완성시켜 표구사로 보냈다. '경운산 문수봉 노송[慶雲山 文殊峰 老松],
경춘선복선전철 개통기념[京春線復線電鐵開通紀念]'이라 작품에 병기[倂記]
했다. 송화가 활짝 핀 노송도다. 오봉산 옛 이름이 경운산이다. 3봉이 문수봉,
상서로운 구름이 감싸고 있는 산이름이 경춘선개통축하에 더 어울려 굳이
옛이름을 가져다 달았다. 문수보살의 가호가 늘 푸르며 한결같은 소나무와
함께 오래도록 경춘선을 지켜주리란 염원을 담은 것이다
73년부터 75년까지 햇수로는 3년 간,
그러나 절반 가까이 화실에 못나갔기에 어쩌면 햇수는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를 기간에 강촌역에서 남춘천역까지 무임승차를 했다.
주머니에 차비가 있을 때는 당당히 표를 끊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그럴 형편이 못됐다. 극빈의 환경이었다.
그런 형편이라 당연히 남춘천역에서 시내 중심가인 요선동까지 버스를
타 본 기억이 전무하다. 버스비도 없었으려니와 그 정도 거리를 걷는 건
일도 아니었다. 멀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버스비가 있어도 타지 않았으
니까. 남춘천에서 아래 샘밭까지도 걸어서 다녀왔다. 시내에선 동서남북
어디를 막론하고 아무리 멀어도 걸으면 됐다. 그만큼 다리 하나는 튼튼
했다. 강촌에 버스가 없던 시절, 구곡폭포며 면사무소가 있는 창촌리며
추곡, 발산, 광판리, 어디든 일이 있으면 걷는 게 생활이었다. 한 동네로
여긴, 가깝다는 구곡폭포도 왕복 20리가 넘었다.
그 연장선이라 시내버스가 흔해도 탈 생각조차 할줄 몰랐다. 강촌놈이
듣지도 못해 모르는 노선을 물어보며 타고 다니는 게 오히려 두렵고 불편
했을 터이다. 주머니는 늘 비어있고 시간은 남아돌았다. 걷는 걸 좋아하는
성정도 한 몫 했고 건각이었으니 자연스러운 습관이였겠다.
무거운 짐을 지고 수십 리를 걷던 사람이 맨몸으로 다니는 건 날아다니는
거나 다름 없었던 요소도 작용했을 것이다.
강촌역에서 남춘천역까지는 차표 검사가 거의 없었다. 마찮가지로 남춘천
역에서 강촌까지도 검표하는 경우가 별로 없어서 궂이 숨거나 피할 필요
성이 안 생겼다. 아주 드믈게 차표 검사가 있으면 화장실로 들어가 잠시
있다가 지나간 후 나오면 됐다. 무임승차로 적발된 일이 한번도 없었다.
다만 기차에서 내려 역사로 나갈 수 없으니까 갱목을 쌓아놓은, 당시 앙고라
실크 공장이 있던 곳으로 나갔는데 기차 후미에서 내리면 거리가 맞았다.
모든 기차가 비둘기호였던 시절이다. 특급이 한두 번 있었는지 모르겠다.
탔던 기억이 안나서다.
강촌역에선 동네청년 몇 명과 강촌역에서 화물하역작업을 했기에
역무원들과 친숙해 어려움이 없었다. 막차를 탈 경우 시간이 촉박할 때
전력을 기울여 달려야 하는 건 드믈지 않게 생겼다. 기차에 오르면 숨이
넘어갈듯 헐떡여야 했음은 물론이다. 어쩌다 막기차를 놓치면 강촌까지
걸어가야 한다. 특히 겨울은 고통스러웠다. 30리 길이라는데 왜 그렇게
멀던가. 점심은 굶었고 저녁을 못 먹은 상태에서 옷도 헐거웠고 거의가
강변길이라 칼바람이 매서웠다. 큰벼루라도 가방에 들어있을 때는 천근
만근이 되어 어깨를 파고 들었다. 희망이 있어서 견딜 수 있었을 게다.
강촌역에서 첫 차를 탔고 남춘천역에서 막차를 타는 생활은 소원하던
그림공부를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소헌선생님께서도 학원비를 안받으
셨음은 물론이고 붓이며 먹, 종이까지 주시며 공부하게끔 만들어 주셨다.
국전에 출품할 때 표구사도 족자 표구비를 안 받고 해주었다. 내 처지를
주변에서 모두 잘 알고 있어서다. 이런 분위기라 나로서는 죽기살기로
붓을 잡아 전력투구하는 것이 유일한 보답으로 생각해 밤낮을 잊고
덤벼들 수 있었다. 그 성과가 1년만에 국전 입선으로 나타났다.
강원일보에 6단 박스기사로 '불우한 청년화가 붓 잡은지 1년만에 국전
입선'이란 제묵을 달아 사회면에 내줬다. 2년 째였지만 실제 화실에 나온
기간으로 따져 그렇게 써졌다. 절대절명의 절박한 정신으로 화실에 다녔
지만 막노동 일이 있으면 빠질 수 밖에 없어 절반은 못 나왔었다.
묵촌회 입문해 3년 안에 국전 입선 못하면 삶의 미련을 버리고 내 목숨 끊겠
다는 비장한 각오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그림공부는 내게 주어진 암흑환경
속에서 한줄기 빛이었다. 유일무이의 돌파구였다. 드디어 빛을 잡았다.
지난 4월초, 경춘선복선전철 개통기념 춘천우취회 전시회가 춘천역 로비에서
있었다. 개막식에 참석하러 갔다가 역장실에서 잠깐 다담을 나누는 기회가
있었고 새역사에 그림을 한 점 걸어야 하는데 예산이 없다는 역장님의 말을
들었다. 무임승차에 관한 부담감, 미안함을 어떤 방식으로든 풀어내고 싶어하던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듯 그 사연을 언급하며 내가 작품을 기증하겠다고 덜컥
약속을 해버렸다. 역장님은 내가 화가인걸 모르고 한 말이었지만 마음의 짐을
털어낼 좋은 기회라 여겼기에 자청한 것이다. 생각은 가지고 있었으나 계기가
그동안 없었다. 모든 일엔 다 때가 있는 듯 하다.
지난 며칠간 오봉산 제3봉에 있는 소나무를 소재로 전지 40호크기로 작업해
완성시켜 표구사로 보냈다. '경운산 문수봉 노송[慶雲山 文殊峰 老松],
경춘선복선전철 개통기념[京春線復線電鐵開通紀念]'이라 작품에 병기[倂記]
했다. 송화가 활짝 핀 노송도다. 오봉산 옛 이름이 경운산이다. 3봉이 문수봉,
상서로운 구름이 감싸고 있는 산이름이 경춘선개통축하에 더 어울려 굳이
옛이름을 가져다 달았다. 문수보살의 가호가 늘 푸르며 한결같은 소나무와
함께 오래도록 경춘선을 지켜주리란 염원을 담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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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허님의 댓글
허허허 작성일어느분이 옮겨주셨는지 좋은 글을 올려주셨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