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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끝날 때까지 절대로 끝은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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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그네
댓글 2건 조회 1,988회 작성일 11-05-17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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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되찾은 유골-
2003년 프랑스 아비용 지방에서 개스 공사를 하던 중, 2구의 백골이 발견되었습니다.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는 이 2구의 백골주변에는 단추와 모표 그리고 탄환 뭉텅이 몇개도 함께 발견되었고 이것으로 추정한 결과 이들이 거의 90여년 전 1차대전 당시의 유골임을 알아냅니다. 유골이 발견된 지역은 1차 세계대전 당시 비미 릿지 전투로 알려진 능선이었고 1917년 6월 이곳에서는 캐나다 군과 독일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있었습니다.옷은 다 삭아 없어지고 남아 있는 단추와 모표의 녹과 진흙을 털어내자, 백골의 주인공들이 당시 이곳에서 싸웠던 캐나다 육군 에드먼턴 49대대 소속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모표와 단추에 새겨진 선명한 부대마크 덕분이었고 그들의 시신주변에 있던 탄환 뭉치들의 역시 당시 캐나다보병이 휴대했던 탄환이고 시신과 함께 묻혔음을 시사하는 고고학적 근거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과연 누구였을까요?
프랑스 정부의 연락을 받은 캐나다 정부는 이때부터 바쁘게 움직입니다. 1917년 비미릿지 전투 당시의 기록을 뒤져 6월 7일과 9일에 걸쳐 시신이 발견된 지역에서 캐나다군이 공세를 취했고 문제의 에드먼턴 49대대는 해당 지역에서 독일군의 참호를 습격하면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93명이 전사하고 200여명이 다쳤으며 16명이 실종되었음을 알게됩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전투 후 전사한 병사들의 시신을 거두었으나 16명이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을 미뤄볼 때, 이 2구의 백골은 실종된 16명 중 누군가로 추정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캐나다의 법의학자와 고고학자 그리고 생화학자와 유전자 분석학자 등 각계의 전문가들이 총동원되어 백골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기나긴 추적에 들어갑니다.



법의학자들과 해부학자들이 2구의 백골을 분석하여 한명은 30대의 장신이었고 다른 한명은 20대의 단신이었습니다. 이것으로 16명의 실종자 중 8명이 후보선상에 떠오릅니다. 다시 분석을 계속한 결과, 두 구중 단신의 20대 청년은 노동일을 했었음이 분명한 뼈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그 결과 8명의 후보가운데서 교사출신의 20대 청년은 제외됩니다. 그러나 7명의 후보들은 모두 푸주한이나 농사일과 목축을 했던 전형적인 노동자 출신으로 판명되어 이때부터 유전자 DNA분석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여기까지만도 2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작업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유골에 남아 있는 DNA샘플을 추출하는 일도 유골이 너무 오래되고 진흙속에 파묻혀 있었던지라 유효한 정보를 채취하기가 쉽지 않았고 7명의 후보자들의 후손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혈통과 가계조사를 전문으로 하는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캐나다 정부는 캐나다 전역은 물론, 미국과 뉴질랜드 그리고 유럽 전역에 흩어져 사는 후보자들의 후손들을 찾아서 그들로부터 유전자 샘플을 일일이 추출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90여년의 세월이 흘러간 상황에서 이미 7명의 후보자의 직계 가족들이 생존해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이럴 경우 유전자의 일치도는 4분의 1수준으로 떨어져 버리기 때문에 신원을 확인한다고 장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유전자 감식은 빠르면 반년 길게 걸리면 수년이 걸릴 수 있으므로 결과는 아무도 알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다시 2년 세월이 흐른 끝에 단신의 20대 청년이 알버타주 출신의 허버트 피터슨임이 밝혀졌고 실로 90년만에 피터슨은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됩니다. 피터슨은 스웨덴에서 온 이민자 가족출신으로 원래는 미국 캔자스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캐나다 알버타 주로 다시 이민을 온 경우였습니다. 미국에서도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자 다시 알버타주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캐나다 사람이 된 허버트 피터슨 그러나 1910년대 알버타 주는 불경기에 시달렸고 농사일을 돕던 허버트 피터슨 역시 전쟁이 나자 자연스럽게 군에 입대한 대다수 알버타주의 평범한 젊은이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피터슨의 생존한 조카들이 그의 일기장과 유품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피터슨에 대한 많은 것들이 새롭게 밝혀졌지요. 허버트가 적은 마지막 날의 일기에는 '집이 그립고 어서 집에 가고 싶다'라는 애타는 호소로 끝이 나있습니다. 평소 야구를 좋아했고 형과 우애가 도타웠던 허버트는 집을 떠난 지 6개월 만에 실종되었고 그 후 90년 동안 행방이 밝혀지지 않았다가 마침내 비미릿지 전투가 끝난 지 딱 90년 만에 가족들에게 돌아갔습니다. 허버트와 다른 한구의 유골이 발견된 지점은 당시 캐나다군이 작전에 성공해 점령한 지역보다 약 100미터 정도 들어간 독일군 진지 부근이었는데, 그들이 왜 이곳에 쓰러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돌격중에 너무 앞서나갔다가 전사했거나 혹은 전사한 후 독일군들에 의해 시신이 옮겨져 그 곳에 매장된 것이 아닌가 추정할 뿐입니다. 다만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전투 상황에서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고 그 때문에 하룻밤의 전투에서 16명이라는 실종자가 나왔던 것으로 봅니다.



허버트의 형의 아들 중에는 허버트와 이름이 같은 조카도 있었는데, 그이는 자신의 이름이 실종된 삼촌 허버트를 기억하고자 아버지가 붙인 이름이라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후손들은 그들의 조부모가 살아생전 단 한 번도 실종된 삼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들어 보지 못했을 정도로 허버트의 부모들에겐 큰 상처였다고 증언합니다. 허버트의 형 역시도 평생, 돌아오지 못한 채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게 된 동생에 대해서 많은 가슴앓이를 했었다고 합니다. 그랬기에 허버트의 유족들은 실종된 채 거의 100년에 가깝게 행방을 알 수 없던 삼촌의 행방을 알게 된 것을 못내 기꺼워했습니다.
2007년 비미릿지 캐나다군 묘지에서는 영연방의 수장 엘리자베스 2세까지 참여해 허버트 피터슨 이병의 유골이 정식으로 다른 전우들 곁에 안장되었습니다. 캐나다군의 주요인사들와 총리를 비롯한 정부요인들은 물론 많은 참전노병들과 가족들이 다시 그들의 곁으로 돌아온 허버트 피터슨의 평화로운 안식과 그의 희생을 추모했습니다.
안타깝게도 4년이 넘는 길고긴 추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발견된 나머지 30대 장신의 유골은 아직도 누구인지 확인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캐나다 정부는 이 유골에 대해서도 계속 추적을 멈추지 않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90년 묻혀 있었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1차대전중 허버트 피터슨처럼 실종된 캐나다 군인의 수는 무려 1만 1천여 명에 이릅니다.
그들에게 아직도 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런 얘기들을 접할 때면 저는 가슴이 또 한번 무너집니다.가까이로는 5.18광주항쟁으로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의 수가 440여명에 이릅니다.




한국전쟁 당시의 무수한 유골들은 아직도 155마일 군사분계선 주변 비무장지대 내에 수없이 그대로 방치(이들을 발굴하기 시작한 정권은 대한민국 일부에겐 빨갱이 용공좌경이라고 불립니다)되고 있습니다.




보도연맹 학살과 기타 민간인 학살로 자행된 무수한 한반도의 학살 현장에는 도대체 얼마나 되는 유골이, 어디에 다 묻혀 있는지도 알 수도 없습니다.
아름다운 남쪽 섬, 제주의 곳곳에도 이처럼 파묻혀 있는 유골이 도대체 몇구나 될까요?
우리사회 어떤 놈들에게 이러한 엄청난 유골들은 마주 대하기조차 끔찍한 악몽이겠지요. 아니, 소위 대한민국의 정통성이라는 이름하에 정당화되고 당연히 그런 미명하에 잊혀져야 할 풍문이고 한낱 유언비어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고작 60년이 지났을 뿐입니다. 100년이 지나가도 잊지 않고 있는 나라가 허다 하거늘 겨우 반세기 조금 넘었다고 우리가 이 참담한 진실과 희생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아야 하겠습니까?
저들 사회가 선진국인 이유는 저들이 물질적으로 잘 살아서만이 아니라 100년이 지나도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은 기억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감히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이 엄청난 진실을 그대로 묻고 싶어도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너희에게도 그리고 묻혀 있는 그들에게도. 제대로 끝날 때까지 절대로 끝은 나지 않는다! 제대로 끝날 때까지 우리는 계속 싸울 것이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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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저도 아침에 80년 광주에서의 실종자들이 440여명에 이른다는 기사를 읽고는 참으로 어처구니없어했습니다.  당시 군인들이 시위자들을 죽여서 어디론가 무더기로 싣고 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데 그들이 암매장한 곳을 아직 찾지 못하여 숱한 주검들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실종자로 남아있는 것이니까요.  살아남은 자들은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귀한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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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툰님의 댓글

폰툰 작성일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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