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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농부들의 흉작걱정과 빈곤의 세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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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종상
댓글 1건 조회 1,702회 작성일 11-05-26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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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닷 새 있으면 끝나는 5월인데, 참 오월답지 않은, 계절의 여왕이란 말이 무색해져 버릴 정도의 그런 날씨입니다. 라 니냐 양이 올해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인데요. 우리나라는 무척 덥다고 들었는데, 여기선 아직도 재킷을 꺼내 입어야 할 정도의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껴 있군요. 간간이 햇볕이 나긴 하지만 그것이 꽃들의 군무를 일으킬 정도로 따뜻하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뒷마당의 포도도 이제 싹이 간신간신히 터서 몇 개인가 잎사귀를 맺고 있을 정도입니다. 다른 때 같으면 벌써 꽃이 핀 후 연록색의 잎이 무성해질 때인데... 올해는 참 이상하네요.

부드러운 미풍이 조금 뜨거운 날을 시원하게 해 주고... 이런 것이 5월의 정취이거늘, 이런 것들이 모두 실종된 계절은 을씨년스럽기조차 합니다. 여름의 뜨거움이 모두 태평양 너머로 가 버렸는지, 한국은 한여름 날씨 비슷한 더위가 계속되고 있다구요.

문제는 이런 을씨년스러운 날씨가 이곳 농부들의 가슴도 멍들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워싱턴주는 미국에서 캘리포니아 다음으로 포도주를 많이 생산하는 주이기도 하지만, 이밖의 많은 농작물들이 유명합니다. 식용 포도인 콩코드의 재배양으로는 뉴욕을 추월해 1등이 된 지 오래고, 밀의 곡창이기도 하며, 소의 꼴먹이로 쓰이는 건초용 알팔파 풀과 사과가 유명합니다. 또 사람들이 잘 모르는 작물로는 박하, 그러니까 '페퍼민트'가 있습니다. 미국 제일의 페퍼민트 산지이자, 이 부산물인 박하유의 최대 생산지입니다. 박하담배에 쓰이는 박하뇌(멘솔)도 거의 워싱턴주 산이고, 껌 등에 들어가는 박하 원료도 거의 이 주에서 생산합니다. 배와 복숭아도 유명하고 맛있습니다. 특히 포도주로도 유명한 왈라왈라는 정말 맛있는 양파가 많이 납니다. '아이다호의 감자'처럼 워싱턴주의 상징이기도 하죠. '스위트 왈라 왈라 어니언' 은 이 주에서 나는 농산물 중의 대표적인 것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꽃도 제대로 안 피고, 흉년을 걱정하는 우려의 소리들이 들립니다. 워싱턴주를 바다 가까운 서부와 내륙의 동부로 나누는 캐스케이드 산맥을 기준으로, 동부는 곡창지대입니다. 이곳은 워싱턴주 와인 생산의 기지라 할 수 있는 프로서란 동네와 가까운 곳이어서 저도 몇번 지나가보기도 했었습니다. 최근 여기를 다녀온 지인이, 이쪽의 농부들이 올해 농사에 대한 걱정들이 많다고 귀뜸해 주었습니다. 영농인들이 올해 흉작이 되면 어쩌나 걱정할 정도로 날씨가 좋지 않고, 그곳도 산 너머 서쪽의 이쪽만큼이나 춥고 봄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라 니냐는 몇년만에 한 번씩 찾아오는 달갑지 않은 손님 정도로 생각될 수 있긴 하지만, 올해는 그것이 심각하게 여겨질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워싱턴주의 밀입니다. 이곳에서의 밀은 사과처럼 대부분 주 경계 바깥으로 수출되고, 해외로 수출됩니다. 그것은 전략사업이기도 하지만, 또 우리나라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기도 합니다. 대부분 러시아의 흑해산 밀이나 캐나다 산, 혹은 중국산 밀을 전량수입하는 우리나라가 지난 몇년 전부터 러시아를 덮친 가뭄과 화재, 그리고 캐나다 지역의 기상조건 악화로 인해 돌린 수입선이 워싱턴주이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지난해 워싱턴주 밀농가들은 꽤 짭짤한 수익을 올렸습니다. 전체 생산량의 85%인 8억달러 상당의 밀을 수출한 것이지요. 그러나 올해의 흉작 가망성으로 인해 농부들이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죠. 주정부 차원에서는 당장 주의 수입이 줄어드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겠지만, 이곳에서도 밀이 흉작을 기록한다면 과자, 파스타, 빵값이 궁극적으로 뛰게 됩니다. 벌써 몇년 전보다도 미국 내의 먹거리 값은 크게 올라 있는 상태인데, 올해에 워싱턴주 밀이 흉작을 겪게 된다면 식료품값의 인상은 불보듯 뻔하다는 것이죠.

또 한가지는 워싱턴주의 밀의 상당량은 빈국으로 무상수출(사실은 미국 정부에서 구입해서 빈곤국에 지원하는 형식으로, '원조경제'의 기틀을 만들기 위해 전략적으로 지원되어 수입국을 미국 경제에 종속되도록 만든다는 비난을 오래전부터 사 오긴 했고, 우리나라 역시 60년대에 이런 식의 지원을 받아서 미국 경제와 문화에 크게 종속되는 기초가 됐습니다만) 됩니다. 만일 밀 농사 흉작이 온다면 그나마 아프리카 등의 최빈국들에 어떤 식으로든 지원되는 식량 자체가 줄어들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죠.

제가 다니고 있는 성당에서 청소년 사목담당을 하시던 외방선교회 소속 신부님께서 캄보디아로 사목을 떠나신 것이 1년 정도 전입니다. 이분께서 페이스북을 통해 현지 상황을 종종 알려주시는데, 밀값의 폭등으로 인해 캄보디아의 주식 중 하나인 그 나라 전통 샌드위치 가격이 거의 두 배로 뛴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한 줌의 밀만 있어도 행복할 수 있는 가난한 나라들이 가장 먼저 그 피해를 보고 있는 셈입니다.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창궐 이후 효율성과 생산성만을 목표로 세계가 미쳐 달려온 것이 한 세대를 훌쩍 넘긴 지금, 세계의 모습은 빈부가 극단적인 양극화를 이루어내고 있고,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중산층'이라고 불리우는 계층은 붕괴 일로에 있습니다. 생산성에만 매달리다보니 양적 팽창은 이뤄냈을지 몰라도, 삶의 질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산업혁명 초기의, 인류사에서 가장 인간이 비참하게 착취됐던 그 시대와 비슷한 수준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계층이 가장 많은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이른바 빈곤의 세계화인 셈입니다. 우리가 욕심을 내며, 그 양적 성장에만 매달려 온 동안 세계화된 것들은 많습니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만들어진 '글로벌라이제이션'의 개념이 가장 먼저 세계화시킨 것은 바로 다름이 아닌 '빈곤'인 듯 합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빈곤이든, 정신적인 빈곤이든 간에.

이런 때에 먹거리라도 풍성하게 나눌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날씨까지 도와주지 않는 이 상황에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은 계속해 고초를 겪어야 하고, 먹을 것조차 모자라 곤궁을 겪는다고 생각해보면,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안할 수가 없게 되는군요. 날씨라도 좀 도와줘서, 그나마 세계 각국의 가난한 사람들이 먹을 걱정만큼은 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물론 우리가 세계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함께 풀어갈 수 있는 지혜들을 짜내고 그걸 실천할 수 있는 자각이 들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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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님의 댓글

동부 작성일

워싱턴 주 동부는 보통 3월이면 아주 쨍쨍한 날씨에 기온이 급속히 올라가야 맞는데
거기도 추운가보군요...  이거 올해는 사과 꽃도 이제야 피는데 열매는 잘 안보입니다.
벌 나비 구경도 제대로 못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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