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가 넘은 흑백사진의 내 모습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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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에서 이분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지나가기가 어렵다고 할 만큼.
그 산골 촌구석에서 세 아들을 대학 공부를 시킬 정도의 재력이 있었으니
어렵고 가난하던 그 시절 복 받은 양반이었다고 봐야겠지요.
이분은 아들 셋을 두셨는데(그중 장남이 저의 조부님이십니다),
특히 막내 아들을 귀애하셨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분이 아들 셋중 가장 총명하고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 내심 기대가 크셨다고 하네요.
하지만 이분은 이상하게 시험운이 없어, 가고 싶은 학교 시험만 보면 떨어지셔서
좌절을 겪으셨는데, 해방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저에겐 증조부가
되시는 아버지를 대신해 향리에서 지세를 받아오시다가 인근 지서의 차석과 시비가 붙어
젊은 혈기에 차석을 거의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패고 야반도주를 감행, 그길로 국방경비대에
입대해버립니다. 평소 의협심이 제법 있었던 이분은 곧잘 찝쩍대는 일제시절의 순사보조원
출신인 지서 차석과 사이가 좋질 않았고 그게 결국 큰 사단으로 발전했던 겁니다.
집안에서는 서울로 대학공부를 보낼 생각을 하고 있다가 막내아들의 갑작스런 군입대를
어찌하질 못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하면 웬만한 사고는
다 무마가 되는 형편이라 별수 없이 세월이 좀 지나길 기다릴 수 밖에 없었지요.
이분은 이후 상병으로 진급해 옹진반도를 수비하던 국군 17연대 소속 연락병으로 근무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배치된지 얼마 안되어 작은 할아버지와의 5월달 면회를 끝으로 이분의 행방을 알수 없게 됩니다.
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옹진에 있던 17연대는 3일도 버티지 못하고
거의 궤멸하였고 워낙 전황이 급박했던 터라 누구도 이분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됩니다.
뜻하지 않은 막내 아들의 행방불명은 집안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고 이로 인해 화병을 얻으신
증조모께서는 결국 전쟁이 끝나던 해에 일찍 세상을 뜨셨습니다. 이후 집안에서 이분의 얘기를
꺼내는 것은 사실상 금기가 되었고 해마다 국방부와 육군에 이분의 행방을 묻곤 했지만 국방부가
해준 것은 70년대에 와서야 국가유공자의 집안이라는 명패 하나와 몇푼의 보조금이 전부였지요.
그런데 제가 이분의 얘기를 제대로 알게 된 것도 결혼하고 나서 선산을 방문하고 나서였는데,
제가 더욱 놀랬던 것은 그때 본 이분의 흑백사진 모습이 저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했다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왜 증조부께서 저를 유달리 귀여워 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은 안하셨지만 내색을 안하시려고 했지만 사랑했던 막내아들의 모습을 손주에게서 찾으셨던
거였다는 설명을 다 커서 고모님들의 설명과 사진을 통해서 알게 되었을 때의 기분은 참 묘했습니다.
제가 한국전쟁에 대해서 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은 분명히 그때 이후라고 기억합니다.
이분이 어떻게 되셨는지는 오직 신만이 아십니다. 어쩌면 포로가 되었다가 북에 살아 계셨을 수도 있고
치열했던 전투의 현장 어딘가에 누군지도 모를 백골이 되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분을 기억하고 잊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상처와 아픔이
저만의 것이 아닌 우리민족 대다수의 것이었고 그 전쟁과 그 전쟁을 야기한 분단 그리고
아직도 계속되는 총성없는 전쟁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이분의 행방이 밝혀질 때까지, 아니 이분과 같은 처지의 잊혀져가는 무수한 영혼들이
편안히 안식을 되찾을때까지 민족의 화해와 평화와 공존을 위한 꿈을 계속 간직하고
키워가는 것 만이 살아 있는 우리들이 이 불안한 평화의 시대를 제대로 영위하는 도리가
아닐까 합니다.
90년이 넘어서도 다시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온 백골도 있었는데,
이제 겨우 60년 조금 넘었을 뿐입니다. 그분들에게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현충일을 맞아 개인적인 소회와 더불어
백여년전 항일의병과 독립군 그리고 이후 자유와 평화와 민주주의, 그리고 민족의 자존을 위해서
스러져가셨던 모든 정의롭고 의로운 분들의 영혼의 안식을 기원하며 이 모든 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영혼들에게 신의 은총과 가호가 더하시길 기도드리면서. 현충일에 부쳐.
오랜 기도
박남수
내가 어둠으로 띄운 새들은
하늘에 암장되었는가
어머니를 향해 삼십년 세월을
기도로 띄운 새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내 나이가 지금
헤어질 때의 어머니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도 그 생사조차 모른다.
하늘이여 이 불륜의 세월을 끊고
아들은 어머니의 무릎에
지아비는 지어미의 품으로
돌아가게 하여라
저들이 함께 웃고
저들이 함께 울도록
하늘이여 무수히 띄운 새들이
이제는 귀소하도록
빛을 밝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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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폰툰님의 댓글
폰툰 작성일
나그네님의 광범한 한국 현대사 공부에 그런 뒷배경이 있었군요.
현충일에 부쳐 좋은글 올려주어 감사합니다.
민중님의 댓글
민중 작성일집집마다 분단의 비극으로 일어난 아픔이 없는 집이 어디 있으랴만 나그네 님의 가족들 또한 그런 아픔이 있었군요. 분단과 전쟁이란 비극으로부터 얻은 것이 있다면 화해와 통일일 것인데 아직도 세계사에 유례가 없이 분단되어 평화가 위태로운 조국이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자멸할 수밖에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