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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 목숨던진 강희남 목사(범민련 명예의장) 추모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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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재미청년
댓글 0건 조회 1,907회 작성일 11-06-06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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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목숨던진 강희남 범민련 명예의장 추모행사



한국 민주화 운동을 위해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친 범민련 강희남 명예의장의 추모 2주기 행사가 마석
모란공원의 묘지 납골당 앞에서 진행됐다. 이날 행사에서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은 추도사를 통해
"오늘 미국과 이명박 정권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전쟁대결 책동과 민중 수탈책동을 극렬히 벌이고
있다. 우리민족끼리의 기세와 북측의 선군정치로 물러날 기미를 보이던 미국은 유례없이 이명박 전쟁광의
사대매국 책동을 활용하여 대화와 협상을 걷어차고 한미합동 북침전쟁연습을 매일같이 벌여댐으로써 이땅은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를 지경이 됐다"며 한반도 위기 상황에 우려를 표하면서 "강희남 선생은 누구보다도
더 양키 군대를 증오하는 진보적 민족주의 입장에서 범민련 운동의 4대 정치투쟁 과정을 견결히 사수한
분"이라고 소개하며 그의 애국정신을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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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신님 뜻이어 반드시 조국통일을 이루겠다는 다짐으로 헌화하는 추모객들.

2년 전 자결한 강희남 범민련 명예의장 추모행사



강희남 의장께 조국통일 승전보 전하자!
범민련 강희남 명예의장 추모 2주기


[마석=자주민보 이정섭 기자]자주 빛 고난의 색으로 활짝 핀 창포 꽃 무리진 6월의 마석 모란공원묘지 납골장 앞에 민족의 자주화와 조국통일을 온 몸과 마음으로 고난 속에 살다 가신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흰돌 강희남 명예의장의 2주기를 추모하는 젯상이 모셔져 있고 그 뒤로 검은 현수막이 걸려있다.

2년전인2009년 6월6일 민족진영과 진보진영에 아니 자주통일을 바라는 모든 국민들의 가슴속에 한장의 비보가 날아 들었다.

아버지와 큰 형님같은 자상함과 형제애의 따뜻함을 지니시고 순결한 양심으로 자신을 송두리째 바쳐 가시던 강희남 목사님, 아니 범민련 명예의장님께서 영면에 드셨다는 소식이었다.

강희남 목사님은 "지금은 민중의 시대다. 4.19와 6월 민중항쟁을 보라. 민중이 아니면 나라를 바로 잡을 주체가 없다. 제2, 6월민중 항쟁으로 살인마 리명박을 내치자."는 외침을 남기시고 떠나신 것이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11년 남북관계, 민생문제, 민주주의는 파탄되고 민족의 운명은 전쟁의 위기로 한치 앞을 내 다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강희남 목사님이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남긴 뜻과 얼은 어디에서 잠자고 있는 것일까? 납골함 속에 갇혀 있는 것일까? 우리의 가슴 속에 갇혀 있는 것일까?

참배객들은 답답한 가슴으로 추모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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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희남 선생님 그리운 마음 조국통일로 달래겠습니다."라는 추도사를 낭독하는 범민련 이규재 의장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이규재 의장은 기다리시라 우리 가슴에 라는 추도사를 낭독했다.

추도사는 "오늘 미국과 이명박 정권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전쟁대결 책동돠 민중 수탈책동을 극렬히 벌이고 있다. 우리민족끼리의 기세와 북측의 선군정치로 물러날 기미를 보이던 미국은 유례없이 이명박 전쟁광의 사대매국 책동을 활용하여 대화와 협상을 걷어차고 한미합동 북침전쟁연습을 매일같이 벌여댐으로써 이땅은 어네 전쟁이 터질지 모를 지경이 됐다"며 한반도 위기 상황에 우려를 표하고 "그러나 민족 민중의 요구에 다 부응하지 못하는 조건에서 우리는 선생의 대쪽 같은 성품, 추상같은 기개가 그리워 질때가 많다. 선생은 누구보다도 더 양키 군대를 증오하는 진보적 민족주의 입장에서 범민련 운동의 4대 정치투쟁 과정을 견결히 사수했다"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강희남 의장을 추모했다.

또한 "우리는 선생이 2주기를 맞이하여 선생의 고결한 애국애족의 선비정신과 기개를 마음속에 재차 다지며 오늘의 반미반제 파쇼 투쟁에서 의연히 폭발시켜 나가겠다"며 고인의 뜻을 이룰 것을 다짐했다.

강희남 목사님과 학생 시절 부터 함께 했던 박창준 목사는 "강희남 목사는 세상에서 가장 물욕이 없는 사람이다. 사람이 물욕 때문에 망하고 양키들도 물욕때문에 망하고 있는데 강희남목사는 물욕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하고 "통일운동과 투쟁하는 사람들 많지만 정직하고 성실하게,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진 운동가는 역시 강희남이다. 명동성당에서 단식투쟁 할 때 미국은 떠나라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라는 간단 명료한 신념에 넘치는연설에는 학생들도 도망갈 정도였다"며 강희남 목사의 투쟁 의지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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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강희남 의장
6.15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권오창 대표는 "오늘 강선생님이 간절히 떠오르는 것으 부러질 지언정 굽히지 않았던 선생님의 지조였다"며 "선생님은 자결이 아닌 사회적으로 타살당했다. 우리는 반드시 선생님 앞에 조국통일의 스언보를 전하겠다"고 다짐했다.

강목사님의 차남 강익현 원장은 "단군의 자손이라면 북에 살건 남에 살건 해외에 살건 민족의 핏줄을 뜨겁게 느끼며 조국통일을 염원하고 있다. 선친께서도 민족의 염원을 실현하기 위한 한길을 가시다가 운명을 달리하셨다"고 말하고 "그런데 요즘 젊은 사람들이 통일에 대한 무관심을 보면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선친상을 치르고 남은 조의금이 3,500만원 정도 되는데 이 돈을 인터넷 통일학교를 만드는데 쓸려고 하는데 여러분들이 함께 해주시면 고맙겠다"며 강희남 목사님의 통일의지를 젊은 세대 통일교육으로 이루겠다는 의사로 유족인사를 대신했다.

추모객들은 조국통일을 위해 한결 같이 투쟁 할 것을 다짐하며 고인의 영전에 헌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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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나 곧은 말, 곧은 소리로 강연하시던 강희남 의장



강희남 의장을 추모하는 추모시

올해로 95세를 맞이한 이기형 민족시인이 발표



올해로 95세를 맞이한 민족시인 이기형 선생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추모시를 직접 지어 낭독으로 고인에게 바쳤다. 전문을 소개한다.



강희남 목사 2주기에



이기형(민족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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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시인 이기형 선생이 추모시 낭독
세월의 여류(如流)하야
가신님 돌아 오지 않으니
통일 큰 일꾼 강희남님 가신지도
어언 두돌
가슴이 저리
오장이 찢어져
형제 갈라져 예순 몇해뇨
뉘 작간이냐
뭐 탓이냐
아서라 세상사 못믿을 거여
북천을 바라 호곡하랴
남천을 쳐다봐 통곡하랴
오갈데 없는 혀에
복통이 터져
남남 북녀
손에 손잡고
통일씨를 심자.
강목사님 가신 큰 뜻
잊사 알겠다.
통일이 그냥 온다냐
통일씨가 매냥 떨어 진다냐.
용문산 천이백살 은행나무를 보아라
심고 가꾸고 가꾸고
남북형제 일떠서 손에 손잡고
어기영차
통일씨를 심고 가꾸고
칠천만 송이 통일꽃을 피우자.
아, 통일 큰 열매 앗아올 그날이여.



강희남 선생의 죽음을 자결이라 말해서는 안된다. 강희남 선생은
분단이 죽인 것이고, 외세가 죽인 것이고, 전쟁이 죽인 것이고,
독재가 죽인 것이고, 체제가 죽인 것이고, 사대매국이 죽인 살인이다.
강희남 선생의 부활은 통일을 통해서 올 것이다. 아침이 일출을 통해 오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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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강희남 의장 약력(사람일보 자료)


1920년 1월 13일 전북 김제 농가 강학용 공과 류성녀의 장남으로 태어나다.
1935년 초등학교 졸업 후 한문수학 및 독학의 길로 접어들다.
1935년 정복님과 결혼 후 예수교에 입교하고 슬하에 3남 4녀를 두다.
1947년 한국 신학대 입학하다.
1950년 익산에서 중학교 교사로 부임.
1952년 군산 영명 중학교사로 전임.
1955년 군산교회에서 목사로 안수 받다.
1959년 몇 교회들을 거쳐 전주 영생 중고등학교 교감으로 부임 3개년 경과.
1963년 전주 성광교회를 비롯하여 난산교회 등 목회에 전념.
1977년 난산 교회 시무중 박정희에게 도전하다가 전주감옥에 투옥되어 1980년 초에 출옥.
1977년 전주 감옥 당시 서울에서 (당시 문익환 목사도 함께 있었음) 윤보선씨 량일동 이희호 여사 등 10 여명이 내려왔으나 면회를 못하고 돌아갔다 함.
1977년 9월 광주 고법 첫 공판일 서울에 윤보선 선생 내외 등 1천여명의 방청객들 몰려오니 재판을 연기하는 바람에 경찰과 안기부 직원들과 더불어 민중 난투극이 벌어져 부상자가 났음.
1979년 전주에서 장남 세현군이 항소해서 광주로 오니 강목사는 즉시 대전으로 이감됨.
1980년 초 대전에서 출옥
1983년 문익환 목사와 민통련을 창립하고 대의원총회 의장에 취임. 이 해에 아내와 사별.
1983년 기독교 농민회 이사장을 겸하여 4개년을 지내다.
1987년 전북대 강연으로 2차 투옥되어 전두환의 호헌조치 반대 옥중단식투쟁에 들어가 40여일을 지내다. 그해 6월 민중항쟁으로 출옥하다.
1988년 조성만 열사 장례위원장을 맡다.
1990년 저서 ‘역사속의 실존’을 출간.
1991년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 직무대행을 맡다. ‘령성과 해방’을 번역 출간.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 조문시도 사건으로 3차 투옥
1995년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취임(초대의장). 범민련 관계인사 29명과 함께 투옥 됨. 4차 투옥
1996년 저서 민중주의 출간
1999년 명동성당에서 4개월 동안 농성 투쟁.
2000년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사임. 동년에 몇몇 동지들과 련방통추, 양키추방 공대위 결성하다.
2003년 저서 ‘동북3성을 가다’(력사기행)을 출간하다.
2004년 독일 동포들 초청 강연으로 유럽행을 떠나다.
2005년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 이라크 파병 저지운동으로 목포에서 서울까지 도보행진 시위를 강행.
2006년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철폐를 위해 연방통추 양키추방 공대위를 7개월 동안 천막농성 투쟁을 강행.
2006년 용산 양키기지 앞과 양키대사관 앞 양키추방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하다.
2008년 저서 ‘정리된 상고사’를 출간. 코리아 21연구소 파리포럼 초청으로 2차 유럽행을 떠나다.
2009년 6월 6일 이명박 정권의 반민족적, 반인권적 악정과 파쑈폭압에 항거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음. 향년 89세




[출처 : 자주민보 2011-06-06]

민족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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