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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후 다시 추억하는 그 6월 - 세상을 바꾼 그 작은 걸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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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종상
댓글 1건 조회 3,161회 작성일 11-06-08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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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초봄의 서늘함이 채 가시지 않은 그런 6월입니다. 1년의 반이 거의 다 흘러가는 셈인데, 날씨는 시간만큼 빨리 변화하지 않는 듯 합니다. 하지만 뒷마당에 잎을 틔우고 어느새 무성해진 포도나무를 바라보며, 화단을 가득 채운 라벤더의 보랏빛 꽃잎과 어느새 향기를 내뿜고 있는 장미를 보면서,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가끔 우편물을 배달하다 보면 이런 일이 있습니다. 저 멀리서 반가운 이웃들이 걸어오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면 저는 손에 든 우편물의 양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건 '얼른 배달하고 인사라도 해야겠군' 하는 마음 때문인데, 제가 적은 양의 우편물을 아파트 우편함에 배달하고 나오면 벌써 멀리서 걸어오던 그 이웃은 오던 방향의 반대쪽으로 한참 가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금방 우편물을 배달하고 딱 문닫고 나왔는데 둘레둘레 돌아보면 사라져 있는 것이죠. 아, 물론 이런 경우는 '예쁜 여성'일 때 더 자주 일어나는 것 같다는 상대성 원리의 체험도 한다는 사실을 덧붙여야겠군요. ^^;

갑자기 이런 뜬금없는 생각이 드는 것은 지금이 6월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1987년, 유난히 더웠던 그해 초여름에 주위의 시민들, 학생들과 함께 서 있던 거리가 문득 생각납니다. 기독청년연합(EYC)의 새내기 회원이었던 저는 선배들의 요청을 받아 기독교 방송국에서 제 가방에 유인물을 잔뜩 넣고 훤히 잘 알고 있는 골목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니면서 경찰을 피해 유인물을 뿌릴 장소로 들고 갔었습니다. 그것은 6월 10일에 있을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를 위한 국민대회'라는 긴 이름의 집회가 있을 것임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위날이 되었습니다. 학생들과 시민들이 하나가 되어 구호를 외치고, 독재 타도와 호헌 철폐를 외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방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백골단은 곤봉을 들고 우리를 쫓아왔습니다. 그 뜨거웠던 거리엔 함성과 최루탄이 난무했고, 눈앞은 최루탄의 하얗고 매캐한 연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 분노와 감동 때문이었는지, 계속해 눈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 6월을 닫기 전에, 우리는 그들의 항복 선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6.29 선언으로 나중에 이름지어진 그들의 항복선언은 시민들에게 백기를 든 한줌 독재 지배세력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과연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당시 재수생이었던 어렸던 제게 대학교에 다니던 선배 용하 형은 제게 확신에 가득찬 소리로 분명하게 말해줬었습니다. "우리가 걷는 걸음이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이게 뚜벅뚜벅 잘 걸어가기만 한다면 세상 누구보다도 멀리 가 있을 거다." 물론 그때 대학생이었던 형 역시 조금은 낭만이 섞인 낙관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겠지만, 그 말은 맞았습니다. 모두가 대오를 이루어 최루탄과 폭력이 난무하던 그 거리를 스크럼을 짜고 걷기 시작하자, 그것은 그들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는 거대한 파도로 바뀌는 것을 목격한 것입니다.

이런 추억을 되새겨 보는 것이 벌써 스물 네 개 성상이 지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시간은 빨리 흘러가 버렸습니다. 그 사이에 제 많던 머리숱은 어디로 가고 저는 지금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머리엔 빈 부분이 많이 생겼고, 철없는 재수생이던 그때의 저는 미국으로 이민왔고, 또 어느새 결혼을 했고, 먼 이역 땅에서 우체부로 일하면서 저를 닮은 두 아들놈의 아버지가 되어 있습니다. 많이 변했을 우리나라에 가 본것도 1991년이 마지막이니 그만큼의 세월의 무게가 제 몸에 쌓여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제 돌이켜보니 그때 우리가 찾아왔던 그 민주화의 과실들이 하나둘씩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때의 기억들을 되새기며 다시 거리에 서야 하는 내 형 누나뻘되는 바로 윗세대들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으면서 역사는 되풀이되는가 하는 진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그런 운동들에 대해 제게 묻는다면, 저는 24년전 제 선배 용하형이 제게 해 줬던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게 될 것입니다. 그 작은 걸음들이 그렇게 큰 걸음이 된다고.

휴식시간 마치고 다시 우편물 배달하러 거리로 나가야 할 시간입니다. 잠깐 추억해봤던 그 해의 6월의 뜨거움은 찾을 수 없는 시애틀 거리지만, 마음만큼은 지금 다시 거리로 나가 있는 그들과 함께 걷고 있습니다. 예, 그 작은 걸음들이 그렇게 멀리 갑니다. 큰 걸음이 됩니다. 그 해는 추억의 해였지만, 내가 추억하는 함께 하는 걸음들은 그때 세상을 '올바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지금 그나마 누리고 있는 민주화의 흔적들이 그때 얻어온 것임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끝까지 가지고 가야 할 것은 희망입니다. 작은 걸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 그해 6월의 뜨거웠던 가슴을 기억하면서 내 가슴의 고동이 치는 것을 느끼는 것은, 저 역시 그 거리에 서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6월에.

시애틀에서...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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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님의 댓글

민중 작성일

세상은 바뀌지만 스스로 바뀌지는 않지요.
민중이 원하고 요구하고 소리치고 끝까지 투쟁하여도
기득권 세력은 최후의 순간까지 내어놓길 거부하려들지요.

그래도 그날은 옵니다.
갑자기, 아무도 모르는 동안에 꼭 옵니다.
그날까지 우리 모두 고삐를 바짝 당겨야지요..

권종상 님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은 날씨마저 화창하군요.  좋은 오후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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