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2-24. 끝이 안 보이는 중앙아프리카의 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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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안 보이는 중앙아프리카의 참상
지금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정부군과 범죄단체 그리고 정권에 종속된 무장단체들이 곳곳에서 무고한 민중들을 랍치하고 살륙과 략탈, 방화 등의 방법으로 잔혹한 폭력을 자행하고있다.
이것을 지원하고 옹호하는 세력이 다름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서방이라는것이 알려지고있어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분노는 고조되고있다.
중앙아프리카의 집권세력은 친서방적정권으로서 서방의 지원을 받고있다. 만일 이들이 미국 등 외세의 지배를 반대하는 세력이라면 그 상황은 지금과 다른 양상을 띠고있을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은 한편으로는 중앙아프리카정권을 반대하는 반정부무장단체를 육성시켜 막대한 무기와 자금을 제공하면서 필요한 때 내란을 일으켜 자기들의 비위에 맞는 정권을 세우기도 한다.
이 과정에 피해를 보는것은 광범한 민중들뿐이다.
계속되는 내란속에서 지난 50여년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과 재산을 잃고 빈손으로 이웃나라로 거처를 옮겨야 하는 처지가 되였다.
중앙아프리카는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들중의 하나이지만 빈곤보다 더 큰 문제를 안고있는데 그것은 이 나라가 세계에서 소년병들이 가장 많은 나라라는것이다. 교육제도가 빈약할뿐아니라 교재도 턱없이 부족한 이 나라에서는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18살이하의 소년들이 어깨에 총을 메고 전투요원으로 양성되고있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간추린 력사
면적이 62만 2 984㎢인 중앙아프리카는 나라이름그대로 아프리카의 맨 중앙에 위치하고있다.
1600년대를 전후하여 이 지역에 들어오기 시작한 유럽의 노예상인들은 수많은 토착민들을 까히라의 노예시장으로 끌어갔다. 이후 300여년의 오랜 세월동안 지속된 이 노예사냥으로 하여 중앙아프리카는 아프리카대륙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나라들중의 하나로 되고말았다.
중앙아프리카는 1885년부터 프랑스의 침략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1894년에는 프랑스의 완전한 식민지로 되였다. 1910년에 프랑스식민주의자들은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를 형성하고 여기에 중앙아프리카지역을 병합하여 《우방기샤리》라고 불렀다. 1911년 프랑스는 마로끄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를 도이췰란드가 승인하는것을 전제로 하여 우방기샤리를 도이췰란드에 넘겼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도이췰란드가 패망하자 프랑스는 다시 중앙아프리카지역을 점령하였다.
중앙아프리카에서는 1930년대에 들어서서 일련의 반프랑스폭동이 일어나면서 민중들의 저항운동이 일기 시작했으며 민족주의적인 이 저항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더욱 고조되였다.
이러한 투쟁과정에 1958년 12월 1일 프랑스공동체안에서 자치공화국이 선포되고 우방기샤리라고 부르던 나라이름은 중앙아프리카라고 고쳐 불리워지게 되였다. 중앙아프리카민중들은 나라의 완전독립을 위한 투쟁을 계속 벌려 1960년 8월 13일 프랑스공동체안에서 독립을 선포하였으며 그후 여러번의 정권교체과정에 나라이름도 1976년 12월에는 중앙아프리카제국으로, 1979년 9월에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으로 다시 고쳐졌다.
정치적불안과 내전 언제 끝나나
1960년 8월에 독립한 후 중앙아프리카의 초대대통령으로는 다비드 다꼬가 취임하였다.
그러나 다꼬대통령은 집권초기부터 강압적인 독재정치를 일삼다가 6년만에 축출되고 쟝 베델 보카싸가 제2대대통령으로 등장하였다.
집권한 보카싸는 헌법을 페지하고 국회를 해산하여 1인독재체제를 강화하였으며 그후 나라이름을 중앙아프리카제국으로 선포한 뒤 자기를 스스로 《보카싸1세황제》로 칭하였다.
보카싸는 실제로 우간다의 악명높았던 이디 아민과 같은 독재자로서 세계정치력사상 보기 드문 독재와 비행을 남기였다.
한가지 보카싸에 대한 기막힌 이야기가 있다.
보카싸는 중앙아프리카황제로 취임하는 대관식을 수도 방기에 있는 대성당에서 열었는데 그 대관식행사의 총경비에 지출된 자금이 2억US$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앙아프리카의 1년 국가총예산이 4억US$였다고 하니 나라의 1년 예산의 절반을 황제의 임관식에 사용한셈이다. 누구나 선뜻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다. 이러한 보카싸정권은 처음에는 서방의 지지와 비호를 받았지만 나중에는 외면당하고말았다. 결국 1979년 9월에 보카싸정권은 전복되고말았으며 초대대통령이였던 다꼬가 다시 복귀하여 제3대대통령으로 되였다.
국외로 탈출한 보카싸는 1980년 12월에 결석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후 겨우 사면되였다가 1996년에 죽었다.
서방이 복귀시킨 제3대대통령인 다꼬는 태생적으로 서방의 꼭두각시로서 민중의 비난을 면할수 없었다. 하여 다꼬정권은 2년도 못되여 앙드레 꼴링바가 일으킨 무혈쿠데타에 의해 축출되고 만다.
제4대대통령으로 1981년 9월에 취임한 앙드레 꼴링바는 이전의 군사독재체제를 해산시키고 새로운 국가재건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1986년에는 6년 임기의 위치를 공고히 하였다. 꼴링바대통령은 지난시기 친서방정권이 통치해온 력사를 바로잡기 위하여 새 정권의 로선을 친서방외교정책에서 벗어난 자주적인 외교로 전환할것을 전격 표명했다. 그리고 이전 정권들과는 달리 1988년에 이전 쏘련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렇게 꼴링바정권이 반미자주의 길로 나가자 미국을 비롯한 서방은 이 나라에 간섭과 압력을 가해나섰다.
한편 중앙아프리카내부에서는 차기정권을 노린 반정부세력이 극성을 부리고있었다. 때마침 베를린장벽이 붕괴되자 반정부세력은 꼴링바대통령에게 민주화에로의 정권교체를 요구하는 반정부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꼴링바대통령은 1991년 다원주의협상을 위한 헌법개정위원회를 설립하는것으로 대처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큰 실책이였다. 때를 기다리고있던 미국은 드디여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것이다.
미국은 국제적규모에서 꼴링바정권을 압박하고 유엔을 끌어들이는 소동을 일으켰으며 유엔은 중앙아프리카에 국제선거감시단을 파견하는 등 이 나라 내정에 전면적으로 개입해나섰다.
결국 외부세력의 압력에 의하여 진행된 선거에서는 미국이 내세운 빠따쎄가 제5대대통령으로 당선되게 되였다.
하지만 1993년에 빠따쎄정권앞에는 집권초기부터 가혹한 현실이 기다리고있었다. 사회기반이 흔들리고 혼돈이 증폭되는 속에 빠따쎄대통령의 통치능력의 한계점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1996년에는 반정부세력의 무장폭동이 무려 4차례나 일어났으며 불안한 정세속에서 수많은 기업들이 무너지였다.
이렇게 되자 지금까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빠따쎄대통령에게 군사지원을 해온 미국은 빠따쎄정권의 교체를 위한 구상을 고안해내고있었다.
우방기족출신 프랑쑤아 보지제대통령 등장
2003년 3월 중앙아프리카의 8개 종족중에서 제일 큰 힘을 과시하는 우방기종족출신인 프랑쑤아 보지제가 무혈쿠데타를 일으켜 제6대 대통령으로 올라섰다.
집권초기 2년간을 계엄사령관 겸 과도정부의 수반으로 통치해온 보지제는 2005년 5월에 진행된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였다. 정권을 잡은 보지제는 국영방송을 통해 의회해산을 선포하고 야간통행금지를 전국에 선포하였으며 삼엄한 통치를 실시하였다.
그후 1년이 지난 뒤인 2006년 2월 중앙아프리카의 북부지역에서 큰 폭동이 일어났는데 많은 사상자와 피난민들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반정부활동에 참가하였다는 리유로 박해를 받았다.
그래서 2006년이래 정부군의 폭력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국외로 탈출하였다고 한다.
한편 중앙아프리카에는 미국의 지원밑에 보지제정권을 대항하여 싸우는 여러개의 반정부단체들이 존재하고있었다. 그중 두개 조직이 대표적조직인데 하나는 장 마다포스가 이끄는 민주공화회복인민군(APRD)이고 다른 하나는 미셀 디토디아가 이끄는 통일민주련맹(UFDR)이다. 이와 같은 반정부단체들의 투쟁이 날로 강화되고있어 보지제정권은 매우 불안한 상태에 처해있었다.
2006년에 반정부투쟁단체들이 중앙아프리카의 북부지역을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진적이 있었는데 다급해진 보지제정부는 황급히 외국군대의 도움을 받아서야 두달만에 사태를 겨우 안정시키였다. 한마디로 보지제정권은 외국의 도움이 없이는 정권을 하루도 유지할수 없는 처지에 있은것이다.
그런가 하면 2008년이래 공공분야에 종사하고있는 로동자들에게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고있는것을 비롯하여 나라의 경제형편이 날로 악화되는 등 여러 불안정요소들이 보지제정권의 존재를 위협하고있다.
이로부터 보지제정권은 2007년과 2008년에 여러차례에 걸쳐 반정부세력과 협상을 진행하고 2008년 12월에는 수도 방기에서 포괄적인 대화모임을 개최하는 등 정치적안정을 이룩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움직임의 결과는 매번 물거품으로 끝나고말았다.
왜냐하면 아프리카의 여러 분쟁문제들을 제 마음껏 주무르고있는 미국의 관심이 중앙아프리카에 화해와 평화가 정착되느냐, 민주냐, 독재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오직 친미냐, 반미냐 하는 문제에 돌려지기때문이다.
그래서 제아무리 보지제정권이 궁지를 모면해보려고 해도 그 결과는 뻔한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외세종속정권앞에 차례지는 숙명적인 운명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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