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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촉발한 49년 38선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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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그네
댓글 3건 조회 20,767회 작성일 11-06-27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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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에서 소위 보수와 우익을 자처하는 수구냉전세력들이

그들의 역사서술에서 철저하게 공란으로 남겨두거나 아예 백지화해왔던

대목은 49년 38선의 충돌입니다. 이부분을 서술했다간 50년 6월의 남침이

급작스러웠다는 서술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남과 북의 분단 정권이 수립되기 직전까지 38선의 관리는 2차 대전의 전승국이었던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이뤄졌고 양측 모두 정확한 경계선을 긋기보다는 상호간에

편의에 따라 느슨한 관리를 해왔었습니다. 소련군도 미군도 수년간의 큰 전쟁이후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전무했고 어디까지나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편의상의 분할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양측의 분단 정부가 수립되면서 38선의 통제와 관할이 당사자인 남과 북에 넘어오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해방 이후 3년간 좌와 우의 대립은 친일부역세력의 척결문제와 겹치면서

극단으로 치닫았고 그 결과 성립된 분단 정권은 서로를 용인할 의사가 전무했었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럽게 38선의 경계선을 놓고 남과 북은 사사건건 맞서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남의 이승만 정권은 노골적으로 38선 곳곳에서 북을 압박했습니다.

특히나 정부수립과정에서 엄청난 민중의 저항에 직면해 이를 무자비한 유혈탄압으로

억눌렀던 이승만 정권은 38선을 관장하게 되면서 그간 이른바 빨갱이들에게 당해온 것을

38선에서 풀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나 일본육군과 만주군 출신들이 주류를 이룬 한국군의 수뇌부는 전형적인 국경제국주의

수법(일제가 그들에게 교육했었던)으로 49년 내내 공세를 지속합니다. 사소한 트집을 잡아서

계속 긴장과 불안을 가속시키면서 대북압박을 했었던 겁니다. 잘 알려졌으나 조작임이 드러난

육탄 10용사 사건과 같은 일들이 연일 49년 내내 발생했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당초 소대급의 소규모 국지적 충돌은 점차 규모가 커졌고 49년 국지전이 절정이었던 시절에는

연대급 부대가 동원되고 포병의 중화기 사격이 일상화될 정도로 양측의 긴장은 고조되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련의 국지전으로 북과 남은 아주 상반된 상황을 연출하게 됩니다.

먼저 대한민국 이승만 정권과 군부는 일련의 의도적인 국지적 충돌로 인해 미국의 불신과 우려를 낳았고

이 때문에 미군은 한국군에게 공격형 무기(대표적으로 전차)를 일체 제공하지 않는 것은 물론,

한국군의 증강이나 체계적인 훈련에도 제한을 두게 됩니다. 미군의 입장에서 전혀 군대답지도

못한 이런 상황에서도 이토록 공세적이고 호전적인 모습을 보이는 한국군에게 제대로 된 무기와

훈련을 제공했다간 소련과의 3차대전에 휘말릴 수 있다는 걸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반면 인민공화국의 김일성과 박헌영 공동정권은 38선의 충돌을 소련의 스탈린을 설득하는데 활용했습니다.

남의 군대가 노골적으로 북침의도를 가지고 있는데, 더이상 이를 방치하지 말고 이참에 공세로 전환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실질적으로 중국과 소련에게서 도움을 얻어냈습니다.

이승만 정권이 남의 민중에게서 외면을 받고 있다는 사실과 권력기반이 취약하다는 점을 감안해

기습적인 전면전으로 분단을 극복하겠다는 생각이 49년의 국지전으로 현실화 된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실제론 아무런 능력도 힘도 없었던 남한정권과 군부의 분별없는 49년 망동과 방종이

북한 정권과 군의 50년 6월 남침 전면전이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고 어이가 없는

상황의 전개였던 것이지요. 49년 내내 그저 38선에서 남한이 공세를 취하거나 호전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면

북의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무기를 달라고 할 명분을 얻지 못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후 상황은 다르게 흘러갔을

공산이 큽니다.

이 얘기를 다시 꺼내는 이유는 요즘 우리사회 일각의 대북강경의 모습이 49년의 상황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3사단 부대 벽에 내걸린 살벌한 구호들(김일성 참수,김정일 김정은 능지처참)이나 예비군 표적지로 김정일 얼굴을

사용하는 식의 상대를 불필요하게 자극하는, 이른바 자칭 보수와 우익들의, 일련의 계산없고 생각 없는 행동들은

과연 49년 황군과 만군출신들 이른바 공세형 방어전술만 배우고 익힌 초기 군의 주요지휘관들과 뭐가 다른 걸까요?

그들은 전쟁이 나자 탱크가 없어서 육탄으로 막았지만 중과부적으로 일패도지 했다고 반세기가 넘게 변명해왔지만,

전쟁이 나고 일주일이 넘도록 미군이 공여해준 2천개가 넘는 대전차 지뢰를 단 한발도 매설하지 않았을 만큼 이들은

현대적인 전술에 무지했고 싸우는 방법 자체를 몰랐을 만큼 한심했던 자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 발발 전후

한달사이에 저지른 온갖 삽질들, 특히나 정보와 경계를 게을리한 모습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전쟁은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큰 일이므로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는

군사학의 시조 손무의 지적은 수천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명박 정권 들어오면서 우리 군의 모습은 날이 갈수록 큰소리만 쳐대고 실제론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던 40년대 일본 쇼와황군과 그 후예였던 50년 한국군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적개심과 분노로 싸우는 군대는 절대로 그 어떤 전쟁에서도 이길 수 없건만,

조작된 천안함 사고를 빌미로 도로 쇼와 황군 도로 채병덕스타일의 어이 없는 초기 한국군의

양상을 21세기에도 재현하려고 합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더니,

딱 우리가 그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2011년 대한민국의 시민 여러분!

전쟁이 나면 바로 여러분과 여러분의 부모와 아들딸들과 친구들이 먼저 죽습니다.

또한 여러분의 아내와 어머니와 딸과 누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사회에서 북과 한판 붙어보자고 소리를 높이는 것들은

이런 끔찍한 일들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여전히 인식을 못하시는겝니까?

아니면 잊으신 겝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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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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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님의 댓글

역사 작성일

지난 역사에서 교훈을 얻긴 커녕 쥐쉐키의 농단으로 다시 그 처참한 역사를
반복할 지경에 이르렀다.  저런 상황인데도 아무런 의식 없이 남북의 평화무드를
깨뜨리고 한판 붙자는 식의 현정권은 민중의 적일 뿐이다.

귀한 글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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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허님의 댓글

허허허 작성일

유전자속에 인식된, 자칫 죽창에 찔려 죽을 지도 모른다는 근거없는 두려움이
이들을 그토록 생각없이 광분하게 만드는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보다 정상적인 사람들이 권력의 자리에 앉도록 하나씩 조치해 나가야겠습니다.

육이오를 맞아 새롭게 조명하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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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님의 댓글

작성일

님의 글을 늦게서야 보게 되었네요
뒤로 밀려났지만...
질문이 있습니다
님의 글속에 육탄 10용사에대한 언급이 있었네요
조금 더 자세히 알수있을까요?
감은 대충 잡히지만 육탄10용사의 조작성이 어떻게 밝혀지게 되었나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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