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한 편을 보았다.'반도체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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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체 소녀' 공연 팸플릿 이 소녀의 미소를 어디서 찾을 수 있나? |
ⓒ 문화창작집단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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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제목을 봤을 때 마음이 불편했다. '반도체'가 주는 그 금속성의 차가움이 싸한 냉기로 나에게 다가왔기에. 삶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꽃집 소녀' '이층집 소녀' '자전거 타는 소녀' 이런 예쁘고 낭만적인 수식어가 어울릴 것 같은 '소녀' 앞에 '반도체'라니? 투덜대는 사이 한 사람이 투덜댐 속으로 걸어 들어 왔다. 누구? 기억의 버프링 현상이 일어났다. 머릿속과 입끝에서 맴도는 황~~~~~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이름, 황유미! 시간은 이렇게 기억의 저장창고를 하나씩 지워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컴퓨터의 검색창에 황유미라는 이름을 넣었다. 수많은 기사들이 주루룩 떴다. 그 중에서 올해 6월 23일 산재 판정을 받았다는 기사에 눈길이 갔다. 황유미 그녀는 '삼성반도체'에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2007년 3월에 이 세상을 떴다. 4년의 세월 동안 거대 재벌 삼성을 향하여 굽히지 않고 싸운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의 애끊는 부정이 이루어낸 승리였다. 삼성에 대항하여 승소 판결을 받다니. 그러나 삼성이 1심 판결에 불복해 근로복지공단과 함께 항소할 뜻을 내비쳤다고 한다. 대법원까지 가는 동안 어떤 판결이 날지는 아직도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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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켓 시위 故 황유미 씨 부친 황상기씨가 승소 판결 이후 기자들 앞에서 삼성의 책임을 묻는 피켓 시위를 벌였다. |
ⓒ '미디어 오늘' 최훈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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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죽어간 한 소녀의 이야기가 모티프가 되는 연극이라니 보는 동안 심란하고 무거울 것이라는 각오하고 연극을 보았다. 그러나 이 연극은 나의 기대를 배반하였다. 85분 동안을 지루하지 않게 심란하지 않게 경쾌하게 몰입시켰다. 진지한 경쾌함 또는 경쾌한 진지함이라고나 할까. 2011년 대한민국의 모습. 삼성 반도체를 포함한 산업재해, 쌍용자동차, 유성기업, 재능교육, 비정규직, 88만원 세대 등 사회 전반의 이슈가 드러난다. 이 연극을 풀어가는 중심 인물은 호스피스 병동에 근무하는 간호사 정민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그녀가 맡은 환자가 바로 반도체 소녀다. 이 연극의 모티프는 반도체 소녀 죽음이지만 줄거리는 정민이라는 배역의 주변 이야기로 이끌어 간다. 이 연극이 지루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은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무거움을 분산시키고 일상 속의 많은 사람들의 통해 세상의 아픔을 더 구석구석 살펴보게 하는 연극. 정민은 부모 대신 동생을 공부시키고 있고 자동차 회사 비정규직인 연인과 동거를 하고 있다. 그녀의 꿈은 소박하다. 소시민적인 평범한 행복을 원할 뿐이다. 대학원 공부를 시키고 있는 동생이 취직하기를 원하고 연인과 결혼하여 아이 낳고 알콩달콩 살고 싶은 그런 여인. 그러나 이 평범한 소원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 정민의 동생 세운은 번듯한 대기업에 취업하여 보란 듯이 살고 싶어 한다. 비정규직 문제도 사회주의에 대해 강연하는 교수에 대해서도 냉소적이다. 세운의 연인 혜영은 재능교육에서 근무하다 해직 당하고 해고자 복직을 위해 1인 시위 중이다. 세운은 그런 혜영을 사랑하나 혜영을 이해하지 못한다. 혜영은 속물적인 세운에게는 죽비 같은 존재다. 그러나 세운의 세속적인 집념을 깨기가 어렵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두 사람의 갈등을 통해 시대의 갈등을 보게 된다. 주어지는 장면 설정은 결코 밝지 않다. 그런데 이 연극은 밝다. 이 연극의 미덕은 억지로 웃음을 유도하지 않는데 웃음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다. 대사의 유연함과 탄탄한 구성의 힘을 느낀다. 웃음만 있느냐고. 아니다 가슴 찡한 그래서 감동 잘 받는 관객은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는 장면도 있다. 나 역시 그런 순간을 맞이했고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으려 눈을 깜빡거려야 했다. 그래도 기어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
자연스럽게 웃음과 눈물이 나오게 하는 연극. 개념 가득한 이 연극 보고 나오면서, 이 연극 다른 사람들이 꼭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추천하고도 욕 안 먹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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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체 소녀' 공연의 한 장면 '반도체 소녀'를 맡은 배우(김찬미)가 투명한 상자 안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대사를 읊조리고 있다. |
ⓒ 문화창작집단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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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극은 관객을 몰입시킨다.무거운 주제를 공중부양하는 허경영(!) 같은 배우 오주환. 택배직원, 의사, 근로복지공단 직원, 교회 장로, 도둑 등 1인 14역을 맡으며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그리고 오세철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님이 연기를 하신다. 연극 관람을 간 그 날 꽃분홍 티를 입으셨는데 그 티셔츠의 색상만큼 오세철 교수님의 인생과 연극에 대한 열정이 느껴졌다. 배경음악으로 김호철의 '다시는 아프지 말자' '선택' 등 노동가요가 깔리며 분위기를 북돋웠다.
배우로는 오세철, 맹봉학, 서민균, 문호진, 오주환, 한다현, 박해영, 김찬미, 최준혁 등이 함께한다.
대학로 선돌극장에서 7월 17일까지 공연을 하니 얼마 남지도 않았다. 꼭 관람을 권한다.
지금도 백혈병으로 죽어간 반도체 소녀와 정민의 연인이고 과로로 인해 급성심장마비로 죽어간 동용의 대사가 계속 귓가를 맴돈다.
"살아서 존중받고 싶었어."
"살아서 행복하고 싶었어."
2011년의 우리나라를 둘러본다. 자연과 사람이 함께 죽어가고 있다. 4대강으로 훼손되는 자연에서부터 교육현장에서는 초등학생부터 카이스트 명문대생까지 경쟁으로 오는 스트레스에 목숨을 끊고 있다. 넘쳐나는 청년 실업, 비정규직 문제, 열악한 노동현장. 어디서부터 해결될 수 있는지?
이 연극에 부제 하나를 붙이고 싶다. "더 이상 죽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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