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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10.4선언 행사에서 헨리 임 교수가 재미동포 위상관련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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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슴도치
댓글 1건 조회 5,678회 작성일 11-10-08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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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선언 4돌기념 뉴욕행사서 남북화해협력 강조

2부에 헨리 임 교수 재미동포 위상관련 강연



[뉴욕=민족통신 종합] 남북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10.4선언 제4돌을 맞아 남과 북지역은 물론 미국, 일본, 유럽, 중국 등지에서도 기념행사들이 전개되었다. 재미동포사회에서도 로스엔젤레스와 뉴욕 드이에서 각각 10.4선언 기념행사들이 열렸다.뉴욕지역은 지난 4일 오후7시30분 플러싱 열린공간에서 ‘10.4 남북정상선언 4주년 기념 한반도 평화통일 한마당'이 6.15공동실천 뉴욕지역위원회 주최로 1부에서는 기념식, 2부에는 기념강연으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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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선언 제4주년 기념 뉴욕행사에서 헨리 엄 교수가 부강연하는 모습



10.4선언 4돌기념 뉴욕행사에서 남북화해협력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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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6.15행사에서 축사하는 이행우 선생
[뉴욕=민족통신 종합] 남북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10.4선언 제4돌을 맞아 남과 북지역은 물론 미국, 일본, 유럽, 중국 등지에서도 기념행사들이 전개되었다. 재미동포사회에서도 로스엔젤레스와 뉴욕 등에서 각각 10.4선언 기념행사들이 열렸다.

뉴욕지역은 지난 4일 오후7시30분 플러싱 열린공간에서‘10.4 남북정상선언 4주년 기념 한반도 평화통일 한마당'이 6.15공동실천 뉴욕지역위원회 주최로 1부에서는 기념식, 2부에는 기념강연으로 진행되었다.

1부에서는 (1) 개회식 – 사회자 (김동균 목사), (2) 10.4 선언문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낭독 – 김준희 선생, (3) 10.4 선언 4주년 기념 <남북해외공동결의문> 낭독 – 노용환 선생, (4) 기념사 – 김명숙 선생, (5) 축사 – 이행우 선생, (6) 다 함께 부르는 통일의 노래 – “남누리 북누리” “우리의 소원은 통일", (7)폐회식 순서로 진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김준희 선생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을 낭독했다. 이 선언문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7년 10월4일 남북정상회담에서 발표한 것으로 남북간 사회·문화 분야 교류 및 이산가족상봉 확대 등의 내용을 담고 있고, 노용환 선생은 4주년 기념 ‘남북해외공동결의문’에서 “해외 각계각층의 한인단체들은 남북 간 이념과 사상 차이를 뛰어넘어 한 민족이라는 바탕 위에 평화통일을 위해 함께 논의하고 노력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고, 김명숙 선생은 기념사를 통해 노무현 전 행정부가 이룬 남북정상회담의 긍정적 성과를 설명한 후 당파적 갈등을 없애고, 통일 교육을 통해 우리 스스로 통일을 준비해 나가자고 강조했다.

2부에 마련된 ‘제9회 한반도 평화통일 토론마당’에서는 최관호 박사의 사회로 헨리 임 뉴욕대학교 동아시아학과 교수가 ‘다문화시대에서의 냉전적 사고에 직면하여-재미동포역사에서 배우기’란 주제의 강연이 있었다. 임교수는 미국이라는 제국에 사는 것, 한국과 미국에서의 6·15선언, 조국반도의 평화가 재미동포들에게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 설명했다.(임 헨리 교수의 강연내용은 아래 별도로 첨부)





다문화시대에서의 냉전적 사고에 직면하여

-재미동포역사에서 배우기

헨리 임 교수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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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하는 헨리 임 교수
안녕하십니까,
오늘 여러분 앞에서 이 발제를 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제가 한국 근대사를 가르치지만, 저는 미국에서 성장하여 여러분과는 달리 그 역사를 직접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강연을 하면 질의 응답 시간에, 미국에서는 어떻게 한국 역사를 가르치냐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질문을 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이 질문에는 몇 가지 가정이나 기대가 깔려있습니다.

많은 분들은 제가 긍정적인 한국의 모습을 미국에 있는 학생들에게 전달하면 좋겠다는 바램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들의 기대 또는 요구는 저의 한국근대사에 대한 서술이 식민시대와 한국전쟁으로 인한 아픔과 고통을 인정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분들의 기대 또는 요구는 제가 한국근대사를 역경의 극복 과정으로서, 긍정적이며 희망적인 서술로 전달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제한된 시간 때문에 저는 그러한 질문에 대해 짧게 대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한국 근대사를 미국에서 가르치냐는 질문에 대해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학생들에게 제가 한국 근대사를 가르치는 주 목적은,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제공 하기 보다는, 우리가 --- 한국계 미국인 및 미국인들이 --- 제국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제가 더 긴 답변을 할 시간이 있다면, 저는 한국에 대한 긍정적 관점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긍정적” 관점은 남한의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의 승리 및 평화, 화해와 남북통일을 이루려는 광범위한 운동의 소생에 근거합니다.

다시 말해서, 박정희 정권하의 독재, 고문 및 억압에 대한 투쟁, 1980년의 광주 항쟁, 학생, 노동자, 종교활동가, 지식인들의 희생, 김지하의 문학, 백낙청과 강만길의 학술 활동, 문익환 목사님의 용기, 여기 계시는 많은 분들의 용기 --- 이 모두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순간과 한국 현대 문화의 가장 빛나는 면모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늘 저의 발제에서는 다음 두 가지 측면을 좀더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제국에서 산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민주주의란 미국과 한국에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와 동시에 코리아의 평화, 화해 및 통일이 젊은 세대의 한국계 미국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에 대한 생각입니다.


1. 제국에 사는 것


다수의 미국인들은 제국의 시민으로서 사는 것의 역사적 및 도덕적 함의에 대하여 사고하기를 거부합니다. 이러한 사고 거부는 그 자체가 제국주의 교육의 결과 입니다.

미국은 1871년에 조선과 조약을 맺기 위해 해군 함선을 보냈습니다. 이 조약은 난파선의 선원들의 보호와 같은 “인도적인 문제”를 다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실제로 의도한 장기적 목표는 조선의 항구를 미국의 상업상의 이익을 위해 개방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에서 출발한 미국 함선은 1,230명의 해병 및 해군을 태운 5척의 중무장한 전함이었습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출신의 신임 중국 대사 프래더릭 로우[Frederick F. Low]는 해군 함선을 끌고 조선으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함선은 윌리암 래드야드 로저스 [William Ledyard Rodgers] 제독이 이끌었는데, 이 사람은 플로리다에서 세미놀 원주민들, 멕시코-미국 전쟁에서 멕시코인들, 그리고 미국 내전에서 남부군인들과 싸웠던 인물입니다.

미국은 조선이 항구를 열지 않는 것 자체가 “야만성”을 증명하는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강제로 조선을 “문명화”된 나라들 속으로 들어 오게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the Heathen (야만인들과) 치른 작은 전쟁”의 절정은 한양으로 이어지는 수로의 진입구를 내려다 보는 광성 보루의 전투였다라고 합니다.

당시 미국해병들의 말에 따르면, 미군은 “총격, 포격, 화공 또는 칼로 모든 것을 초토화하고 한명도 살려두지 않았다...조선인들은 죽을 힘을 다해 싸웠고 불에 타고 절단된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합니다. 미군 쪽은 겨우 3명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당했을 뿐입니다

프레더릭 로우는 조선인의 필사적인 저항을 “죽음에 대한 무심”으로 해석하면서, 자신의 일기를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조선인들에게] “인간의 생명은 하찮은 것이며, 북미의 원주민들처럼 대수롭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1871년의 조-미 전쟁은 1846-1848년의 멕시코-미국전쟁 과 1898년의 스페인-미국 전쟁 사이의 50년 동안 미국이 해외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군사력이 동원된 혈투였지만, 이 1871년의 전쟁은 미국 역사책에서 언급이 없습니다.

이 전쟁으로 미군은 아시아 본토에 처음으로 영토를 점령하고 성조기를 꽂게 되었으며, 당시 미국 전역의 신문들은 이 전쟁을 광범위하게 다루었습니다. “미지의 나라와의 작은 전쟁” 또는 “숨은 왕국과 미국의 전쟁” 등의 제목으로 신문 기사와 시평들이 발표되었습니다.

이런 기사 및 시평에서는 이 전쟁의 이유를---미국의 명예를 지키는 것과 더불어, 조선의 쇄국 정책을 종료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미국의 서부 팽창 정책이 드러내는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미국의 무역을 위하여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도록 전쟁을 치른 후, 프레더릭 로우와 윌리암 로저스는 캘리포니아로 돌아가서는 중국인 (동양인) 이민을 제한하는 운동을 강력히 후원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상권을 위해 동아시아를 개방시켰지만 아시인들의 이민에는 문을 닫는 것 ---이것은 미국 제국주의 및 인종주의 문화의 한 면일 뿐입니다. 이 전쟁에 대한 완전한 망각은 미국 제국주의 문화의 또 다른 단면입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은 근대 문명의 모범으로 부상하였으며, 서양의 제국 세력 중에서 독립을 열망하는 식민지 사람들에게 가장 우호적인 나라로 여겨졌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강한 도덕적 권위를 갖고 민족 자결권의 원칙을 언급했기 때문에, 3.1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윌슨 대통령과 서구 제국세력들이 일제에 대한 조선의 자결권 및 독립투쟁을 지지할 거라고 희망했습니다.

이러한 윌슨 대통령과 미국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은 다른 식민지 민족보다도 조선인들 사이에 더 흔했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에 파견된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 뿐만 아니라, 윤치호와 이승만 같은 조선 지식인 및 정치 지도자들이 전파한 미국에 대한 오래된 긍정적인 견해 때문이기도 합니다.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많은 이집트, 인도 및 중국의 지식인들처럼 당대의 조선 민족주의자들도 미국이 식민지 착취에 의존할 필요가 없을 만큼 부유하고 강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이 미국의 묵인 하에 조선을 합병 한지 10 년이 지난 후에도 조선 민족주의자들은 미국이 조선인들의 독립투쟁을 지지 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1945년 일본이 미국에게 항복하기 바로 직전에 미국은 소련에게 한반도를 38선에서 분할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소련은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리하여 한국의 해방은 곧 바로 소련과 미국 군대의 분단 점령체제로 대체되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미국의 첫 메시지는 미국 폭격기가 뿌린, 앞.뒤 면이 각각 영어와 일어로 된 삐라를 통해 전해 졌습니다. 존 하지(John R. Hodge) 미군 사령관이 1945년 9월 2일 날짜로 서명한 메시지는 이렇게 전합니다:


조선인 여러분:

미국의 군대가 일본의 항복을 받고 항복의 조건을 집행하여 국가의 질서 있는 관리 및 복귀를 보장하기 위해 조만간 한국에 도착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임무를 단호하게 진행할 것이나, 우리보다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 온정을 베풀어 온 오래된 민주주의 전통의 국가로서 지도를 할 것입니다… 주민 여러분의 성급하고 경솔한 행동은 불필요한 죽음을 가져올 뿐 만 아니라, 여러분의 아름다운 나라를 황폐하게 만들고, 그 복구를 지체하게 만들 것입니다. 지금 처한 상황이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미래를 위해 평정을 유지하십시오… 이 지시를 그대로 준수 하면 한국의 재건이 빨라질 것이고 여러분들이 보다 더 민주주의적인 통치하에 다시 삶을 즐길 수 있는 날이 빨리 다가 올 것입니다.

이 메시지의 첫 문장은 조선에서의 미국의 목적을 설명합니다: 첫째, 일본군의 항복을 받는 것; 둘째, 일본의 항복 조건을 (일본이 식민지에 대한 모든 권한을 넘기는 것) 집행하는 것; 셋째, 한국을 질서 있게 관리하고 복구하는 것 입니다.

두 번째 문장은 미국인들이 어떤 국민인가를 설명합니다: “우리보다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 온정을 베풀어 온 오래된 민주주의 전통의 국가”라고 합니다.

이어서 한국인들이 해야 할 것을 언급합니다: 첫째, 평정을 유지하고; 둘째, 미군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미군 명령을 준수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명확히 밝힙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의 아름다운 나라를 황폐하게 만들고 불필요한 죽음을 가져올 뿐” 이라고 합니다.

이 메시지의 섬뜩하고 위협적인 어조에도 불고하고, 조선인들은 미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미군정을 수립하고 남부 코리아를 3년 동안 통치하는 점령군으로 드러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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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에 빌 클린턴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은 워싱턴 디씨에 있는 한국전쟁참전기념비 준공식을 가졌습니다. 기념비 앞에는 다음 문구가 새겨졌습니다.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국가와 민족을 지키기 위한 부름에 응한 우리의 아들과 딸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이 간단한 문구는 미국의 순수함, 그리고 미국이 남한의 국민을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구한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러면서 미국이 1945년부터 한국에 개입하고 두 개의 분리된 국가를 만든 역할의 역사는 지워버립니다. 단지 미국인들이 자신의 아들과 딸들을 희생하면서 “알지 못한 나라, 만나지 못한 민족”인 남한의 국민들을 구했다는 이야기만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북미와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미국의 팽창주의 역사는 지워집니다. 반면, 계속 반복되는 이야기는 세계 여러 지역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미국의 희생에 대한 것일 뿐입니다.

미국의 순수함, 관용, 희생, 전지구적 구원에 대한 이런 이야기들은 미국의 정치 담론에서 거듭 반복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면에서 미국의 정치 문화는 제국적 문화입니다.

이 것이 바로 제가 한국 근대사를 가르치는 주 목적은 우리가 (한국계 미국인 및 미국인들이) 제국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데 있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저의 희망은 미국이 더욱 민주주의적으로 되고 한국 및 다른 나라들에 대한 미국 정책이 덜 제국주의적으로 되도록 저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2. 재미한국인의 역사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가 제국에서 산다는 얘기를 할 때 많은 유명한 미국인들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비판하고 반대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반제동맹은 미국의 필리핀 통합을 반대하기 위해 1898년에 설립되었는데, 제인 아담스, 세뮤엘 클레멘스 (마크 트웨인), 존 듀이, 헨리 제임스 등 유명한 작가, 활동가 및 정치적 지도자들이 이 조직의 회원이었습니다.

마크 트웨인은 본인이 왜 반제국주의자가 되었는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미국의 독수리가 태평양을 향해 활기차게 날아갔으면 했다. 그저 록키산맥 정도에 만족하는 것은 지루하고 길들어져 보였기 때문이다. 내 자신에게 질문했다. 왜 필리핀 하늘 위에서 날개를 펼치지 않냐고? 그때 나는 그 것이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삼백 년 동안 고통을 받은 민족이 [필리핀사람들] 여기에 있다고 나는 내 자신에게 말했다. 그들을 우리처럼 자유롭게 만들어, 그들 자신의 정부와 국가를 세우게 해주고, 미국 헌법 축소판을 태평양에 띄워, 새로운 공화국을 시작하여 세계의 여러 자유국가들 사이에 자리를 잡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자신에게 던지는 중요한 과제로 보였다.

그러나 그 후에 더 많은 생각을 했고, 파리 협정도 주의 깊게 읽었는데, 우리의 의도는 필리핀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려고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구하러 간 것이 아니고 정복하러 갔다…

내 생각에는 우리는 그들을 해방시켜 그들 스스로 내부 문제를 다루게 하는 것을 우리의 즐거움과 의무로 삼아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반제국주의자다. 나는 독수리가 자기 발톱으로 다른 땅을 할퀴는 것을 반대한다.

1920년 및 1930년대의 대다수 재미동포 지도자들은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시민권을 얻을 자격이 없고 백인우월주위 문화에 대처 해야 하는 상황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미국에 대한 이상화된 관점을 포용하고 제국주의 세력으로서의 미국의 세계적 위상을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찬양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미제국과 그 추정된 이상들을 포용하는 것이 향후 미국에 사는 동포들의 지위 향상으로 이어질 것이며 일제를 무너뜨리는데 미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고 2차 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진주만 공격 이후, 모든 재미 한국인들은 미국을 지지했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동맹을 맺었고, 그 전쟁의 목표는 파시즘의 타도였습니다.

일본이 미국에게 항복하고 미국이 한반도 남쪽에 군정을 세웠을 때, 많은 재미동포들이 미국의 한국정책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미군정이 친일파들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서 더욱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주요 재미동포 작가이면서 뉴욕대학교 영문학 교수였던 강용흘 (Younghill Kang/姜龍訖)이 미군정의 통역자로 한국으로 귀국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의 “뇌물, 부패 및 실수”를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그는 바로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1948년 존 하지 사령관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보고 하는 비밀문서에서 미군정이 “일본식민지 정부보다 더 미움을 받고 있다”면서 미국이 손실을 감수하고 한국을 떠나는 것을 권고했습니다.

다이아몬드 킴 같은 재미동포 좌파들은 미국의 한국점령 정책에 대해 더욱 비판적으로 되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그는 미국 OSS – 2차 대전에 만든 미국의 정보기관으로, CIA의 전신인 전략 사무국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 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또한 그는 로스엔젤레스에서 발간된 한국 이민자 신문인 코리안 인디팬던스의 공동 창간자 및 편집자였습니다.

1945년 8월까지만 해도 킴과 다른 인디펜던스 기고가들은 미국의 정책을 찬양했습니다. 수백만 명의 한국인들을 대신하여, 그들은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독립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한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코리안 인디팬던스의 기사는 “이 보편적인 기쁨의 순간“ –즉, 일제로부터의 한국의 해방 –을 “2,600만 한국인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목숨과 피를 바친 수백만 연합군들”을 환호하고” 얼마 전 생을 마감한 프랭클린 루즈벨트 (Franklin Roosevelt) 대통령과 한국인들의 “오랜 염원인 해방의 날”을 “열어준 “그의 고귀한 민주주의에 대한 이상, 비전 및 투쟁”에 대해 칭송을 했습니다.

다이아몬드 킴의 미국에 대한 지지 그리고 이어진 비판, 그의 구속 및 미국으로부터의 강제 추방은 외국계미국인들이 1948년 이후에 점점 더 반공정책의 표적이 되는 더 거대한 미국의 냉전 역사 이야기에 속합니다.

미국이 점점 더 아시아에 개입하면서, 미국 정부는 점점 커지는 미국에 사는 아시아 이민자들의 급진주의 및 민족주의 목소리에 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정부 기관들은 체제 전복의 증거를 찾기 위해 해외 서신 및 외국어 신문들은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1948년 이후, 스미스 법은 공산주의 사상을 믿는 것을 법적으로 처벌 할 수 있는 범죄로 규정했고, 시민권자가 아닌 다이아몬드 킴, 앨리스 현 및 좌파 그룹과 관련된 다른 인사들은 추방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미국 이민법이 바뀐 1972년 이후 이민은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이미 한 세대가 지났지만, 한국인들을 안정된 삶을 찾아 유럽, 남미, 그리고 미국으로 밀어낸 것은 바로 한국전쟁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지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전쟁 이후의 한국인들의 미국 이민은 “피난 이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피난 이주”는 미군과 결혼 이주, 또는 광부, 의사, 간호사들의 취업 및 전문직 이주 같은 다른 범주들의 모습으로 가려져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목전의 위험으로부터 피신하는 난민이 아닌 이주자 또는 이민자들이지만, 이들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전쟁과 전쟁의 상흔으로부터의 도피가 이들의 이주에 핵심적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피난 이주자들에게는 혼란, 불안정, 그리고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깊은 심리적 필요성이 동기부여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든지 폭발할 것 같은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서적/정신적 평온 및 안정적인 환경을 찾는 겁니다.

- 1950년에서 1989년 사이에 9만 여명의 한국여성들이 미군과 결혼해서 미국으로 이민했습니다.


- 약 20만 명의 어린이들이 미국으로, 5만 여명은 유럽으로 보내졌습니다.

일본에 거주하는 동포들에 비해, 재미동포들은 대다수가 미국 시민권을 받으려고 합니다 – 그 이유 중 하나는 미국시민권 신청이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지요. 재일동포에 비해서, 재미동포들은 신체적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고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구별되지만, 구조적으로는 교육이나 취업적인 면에서 미국사회로의 편입이 수월합니다.

동시에, 법적으론 시민이지만, 재미동포들은 정치적으로 무력하고,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외국인으로 소외되어 있습니다. 이는 즉, 시민권 자체만으로 공동체의 정치적 참여도가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정치적 권한이 반드시 담보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재미동포들을 포함한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 아시아와 미국의 역사적 관계는 – 필리핀의 식민지화, 태평양 전쟁, 한국전쟁, 월남전쟁 – 미국 시민권이 극단적인 애국심이나 정치적 수동성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2차 대전 (대일본 전쟁) 및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미국 정부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 애국심과 복종을 요구했습니다. 긴 냉전 및 지속된 북조선에 대한 적대감과 더불어 체포와 추방의 위협 속에서 재미동포들은 정치적인 면에서 수동적으로 되어버렸습니다.

2차 대전 전에 재미동포 사회에 존재하던 좌파 조직들은 거의 완전히 파괴되고, 비정치적 활동 쪽으로의 강제적 후퇴는, 재미동포들을 법적인 시민 신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대의권을 확보하지 못하는 일종의 “시민권 불능” 상태로 귀결시켰습니다.


3. 다문화 사회와 대학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지금 미국에서 대학교를 다니는 재미동포 세대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날 미국대학들은 자신의 학교가 인종적 및 문화적 다양성을 갖고 있다고 선전합니다. 실제로 미국대학들은 다양성과 다문화주의를 기리는 것을 중요한 선전 포인트로 내세웁니다. 그리고 재미동포 학생들은 대학 진학시, 인문 교육이 그들을 포용해 줄 다인종. 다문화 공동체로의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하고 희망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재미동포 학생들이 겪는 실제 대학 경험은 그들이 인종적 및 문화적으로 다양한 공동체에 포함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문화적. 인종적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선전에도 불구하고, 미국대학들은 실제로 캠퍼스내의 인종주의나 분리를 해결하는데 많은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민권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 될 당시, 인종이란 범주는 사회정의 문제 및 미국의 해외에서의 전쟁 반대 같은 문제들과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 다문화주의는 인종이란 범주와 정치의 고리를 끊어 버리는 데 일조를 했습니다. 즉, 사회 정의와 반전의 문제로부터 분리되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다문화주의는 백인 우월주의의 직접적인 표현보다 훨씬 바람직합니다. 또한, 진보 정치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젊은 세대의 재미동포들은 인종 및 성적인 소수자의 존재가 인정되고, 그들이 사회적 및 정치적으로 참여 할 수 있는 정의로운 세상의 비전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시간상, 이 부분에 대한 제 생각을 여기서 더 전개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문제를 규정하고 이것에 대한 방향 또는 입장까지만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남북 두 코리아의 평화, 화해 및 통일 운동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인종 및 성적 소수자를 온전히 인정하는 정의의 비전에 매진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과거에는 남북의 평화, 화해 및 통일 운동에 참여했던 한국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은 동질성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바탕에 있는 논리는 한국전쟁과 반세기의 분단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 그리고 해외 코리아 디아스포라 커뮤니티의 한국인들이 공통의 역사, 문화 그리고 친족적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문화주의의 시대에 약 20만 명의 한국 입양인들을 포함한 이 사회에서, 젊은 세대의 재미동포 활동가들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동질성을 강조하는 것보다 다양성을 인정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 남북 평화, 화해 및 통일 운동의 출발점은 우리가 가족역사, 언어, 계급, 성적지향 등에서 여러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로 묶는 것은 정의에 대한 헌신과 인종주의, 성차별 그리고 계급적 억압을 반대하는 다짐이고, 미국과 한국 양쪽에서 함께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입니다.

이 마지막 부문을 깊게 다루지 못하고 간략하게 스케치한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발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여러분께 감사 드리며, 여러분의 논평과 질문을 기대하겠습니다.


Confronting the Cold War Mind-Set in the Age
of Multiculturalism: Lessons from Korean American History


It is a privilege to be speaking to you this evening. But I am also nervous about giving this presentation. Although I teach modern Korean history, I grew up in the United States and did not actually experience that history, as you did.

When I present papers in Korea, during the question and answer part of the program I am usually asked, how do you teach Korean history in the United States? It depends on the person asking the question, but usually there are several assumptions or expectations that accompany the question.

For some, it’s simply a matter of wanting me to provide a positive image of Korea to students in the United States. In other words, their expectation, or request, is that I present a narrative of modern Korean history that acknowledges some of the pain and suffering that resulted from colonization and civil war. But, their expectation, or request, is that I present modern Korean history, above all, as a narrative of overcoming adversity, and thus a positive and hopeful narrative.

In response to that question, and usually because time is limited, I provide only a short answer. To the question, how do I teach modern Korean history in the United State? I say that rather trying to provide a “positive” view of Korea, my main objective in teaching modern Korean history is to teach my students here that we (Korean Americans, Americans) live in an empire.

If I had time for a longer answer, I would say that I do provide a “positive” view of Korea, and that “positive” view has to do with the victory of the democracy movement in the 1980s in South Korea, and the resuscitation of a broad movement to achieve peace, reconciliation, and reunification of North and South Korea.

In other words, the struggle against dictatorship, torture and repression under Park Chung Hee, the 1980 massacre in Kwangju, the students, workers, religious activists, intellectuals, and their sacrifices, the literature of Kim Chi-ha, the scholarship of Paek Nak-chung and Kang Man-gil, the courage of Mun Ik-hwan moksanim, the courage of many of you here -- these, I say, are the best and proudest moment of modern Korean history, and the best part of modern Korean civilization.

For my presentation today, I would like to think a bit more about these two aspects: What it means for us to be living in an empire, and What democracy might means for us here and in Korea, and what peace, reconciliation, and reunification of Korea might mean for a younger generation of Korean Americans.



1.Living in an empire:


Most Americans refuse to think about the historical and moral implications of living as citizens of empire. That refusal to think about empire is itself the result of imperial education.

In 1871, the United States sent a fleet of ships to Chosŏn to negotiate a treaty with Korea, a treaty that would address “humanitarian concerns” like care of shipwrecked sailors. But the actual, long-term goal was to force Chosŏn to open ports for American commercial interests.

The U.S. fleet which sailed from China included five heavily armed warships carrying 1,230 U.S. marines and sailors. Frederick F. Low, a former governor of California and newly appointed Minister to China, had been instructed to proceed to Korea with a naval fleet. The fleet was commanded by Admiral William Ledyard Rodgers who had fought the Seminoles in Florida, Mexicans in the Mexican American War, and Confederates in the Civil War.

For the United States, Chosŏn’s refusal to open up its ports was proof of its “barbarity,” and the United States had no choice but to force Korea to join “civilized” nations of the world. The highpoint of “Our Little War with the Heathen” was the battle for Kwangsong, the main fortification overlooking the approach to the waterway that leads to Hanyang.

Accounts tell of the U.S. forces “sparing nothing that might be reached by shot, shell, fire, or sword…of Koreans who fought with desperation and piles of burning and dismembered bodies… ” American casualties were just 3 killed and 9 wounded.

Frederick Low interpreted Korean desperate resistance as “indifference to death.” Low ended his diary entry this way: [For these Koreans] “Human life is considered of little value, and soldiers, educated as they have been, meet death with the same indifference as the Indians of North America.”

The U.S.-Korea War of 1871 was the largest and bloodiest use of military forces overseas by the United States in the fifty years between the Mexican-American War of 1846-1848 and the Spanish-American War of 1898. But this war of 1871 is not mentioned in American history textbooks.

It was the first time that U.S. ground forces actually seized, held, and raised the American flag over territory on the Asian mainland. At the time the war was widely reported in newspapers all across the United States. Newspaper articles and essays were published with titles like “Our Little War with the Heathen,” and “America’s War with the Hermits.”

The articles and essays gave as the reason for this war -- aside from protecting America’s honor, because the Koreans fired the first shot -- the need to end Korea’s policy of “isolation.” For us today, what might be most revealing about this instance of American Westward expansion is that after going to war to “open” Korea’s door for American commerce, back in California both Frederick Low and William Rodgers stanchly supported the movement to restrict Chinese (i.e. Asian) immigration into the United States.

“Opening” East Asia to American commerce but closing the door to Asian immigration – this was but one aspect of American imperial / racist culture. The complete forgetting of this war is another aspect of American imperial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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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World War I, the United States led by President Woodrow Wilson emerged as the exemplar of modern civilization, and among the Western imperial powers, the country most sympathetic toward aspirations of colonized peoples for independence.

Because the American president had spoken with so much moral authority about the principle of self-determination, the organizers of the March First Movement hoped that President Wilson and the Western imperial powers would endorse Korea’s struggle for self-determination, and independence from Japanese colonial rule.

Such positive perceptions of President Woodrow Wilson and the United States were more common among Koreans than among other colonial peoples. The reasons for that had to do with not just the influence of American missionaries in Korea, but also long-standing positive views of the United States propagated by Korean intellectuals and leaders like Yun Ch’i-ho and Syngman Rhee.

In spite of the fact that the United States had colonized the Philippines, and like many educated Egyptians, Indians, and Chinese of the time, this generation of Korean nationalists had considered the United States wealthy and powerful enough not to depend on colonial exploitation.

Even ten years after Japan’s annexation of Korea, which occurred with U.S. acquiescence, this generation of Korean nationalists had believed that the U.S. would support their struggle for independence from Japanese colonial r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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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1945, just before Japan surrendered to the United States, U.S. proposed to the Soviet Union that Korea be divided along the 38th parallel. The Soviet Union accepted the American proposal, and thus Korea’s liberation from Japanese colonial rule was replaced, immediately, with divided occupation by Soviet and American troops.

The first American message communicated to the people of Korea came in the form of leaflets dropped by U.S. bombers, printed on one side in English the other side in Japanese. Signed by John R. Hodge as the Commanding General of U.S. Army Forces in Korea, and dated September 2, 1945, the message read:



To The People of Korea:

The armed forces of the United States will soon arrive in Korea for the purpose of receiving the surrender of the Japanese forces, enforcing the terms of surrender, and insuring the orderly administration and rehabilitation of the country. These missions will be carried out with a firm hand, but with a hand that will be guided by a nation whose long heritage of democracy has fostered a kindly feeling for peoples less fortunate… Hasty and ill-advised acts on the part of its residents will only result in unnecessary loss of life, desolation of your beautiful country and delay in its rehabilitation. Present conditions may not be as you would like them. For the future of Korea, however, remain calm… Full compliance with these instructions will hasten the rehabilitation of Korea and speed the day when the Koreans may once again enjoy life under a more democratic rule.

The first sentence of this message explained American objectives in Korea: 1) to receive the surrender of the Japanese forces; 2) to enforce the terms of Japan’s surrender [Japan relinquishing all claims over its former colony]; and 3) insuring “the orderly administr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The second sentence explained who the Americans were: “a nation whose long heritage of democracy has fostered a kindly feeling for peoples less fortunate.”

The message then stated what Koreans must do: 1) remain calm; and 2) obey the U.S. military authorities. It also clearly stated what would happen if Koreans did not obey the U.S. authorities: The result would be “unnecessary loss of life, and desolation of your beautiful country.”

In spite of the chilling and threatening tone of this message, the people of Korea welcomed U.S. forces as a liberation army. It turned out, however, that the U.S. forces were indeed an army of occupation, establishing a Military Government that governed southern Korea for three years.

In 1995, President Bill Clinton and President Kim Young Sam held the dedication ceremony for the Korean War Veterans Memorial in Washington, DC. The inscription in front of the memorial reads: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This simple inscription tells the story of American innocence, and American rescue of the people of South Korea from communist aggression. It erases the history of American intervention in Korea starting in 1945, and the role of the U.S. in creating two separate states. It tells a simple story of how American men and women sacrificed their lives to save the people of South Korea,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In this fashion, the history of U.S. expansion across North America and across the Pacific gets erased. The story that gets repeated over and over is the story of American sacrifice in rescuing peoples in different parts of the world.

Such stories of American innocence, American generosity, American sacrifice, and American rescue of people around the globe get repeated over and over in U.S. political discourse. It is in that sense that American political culture is an imperial culture.

This is why “my main objective in teaching modern Korean history is to teach my students here that we (Korean Americans, Americans) live in an empire.” My hope is to do my part to make the United States more democratic, and to make U.S. policy toward Korea and other countries less imperialistic.



2.Korean American History:


When we tell our children that we live in an empire, it is important to tell them that there were many famous Americans who criticized and opposed imperialism and colonialism. The American Anti-Imperialist League, for example, was an organization established in 1898 to oppose the American annexation of the Philippines. Members included writers, activists, and political leaders like Jane Addams, Samuel Clemens (Mark Twain), John Dewey, and Henry James.

This Mark Twain’s account of why he became an anti-imperialist:

I wanted the American eagle to go screaming into the Pacific. It seemed tiresome and tame for it to content itself with the Rockies. Why not spread its wings over the Philippines, I asked myself? And I thought it would be a real good thing to do.

I said to myself, here are a people [Filipinos] who have suffered for three centuries. We can make them as free as ourselves, give them a government and country of their own, put a miniature of the American constitution afloat in the Pacific, start a brand new republic to take its place among the free nations of the world. It seemed to me a great task to which we had addressed ourselves.

But I have thought some more, since then, and I have read carefully the treaty of Paris, and I have seen that we do not intend to free, but to subjugate the people of the Philippines. We have gone there to conquer, not to redeem….

It should, it seems to me, be our pleasure and duty to make those people free, and let them deal with their own domestic questions in their own way. And so I am an anti-imperialist. I am opposed to having the eagle put its talons on any other land.

Among Korean American leaders in the 1920s and 1930s, most did not criticize American imperialism. Ineligible for citizenship and having to cope with a culture of white supremacy, the political strategy advocated by many independence activists was to embrace an idealized view of the United States and to accept and even celebrate America’s global position as an imperial power.

In their calculation, embracing American empire and its putative ideals would lead, in time, to improved status for Koreans in the United States, and American assistance in overthrowing Japanese colonialism in Korea.

After Pearl Harbor, when the United States declared war on Japan and entered World War II, all Korean Americans supported the United States. United States and the Soviet Union were allies, and the aim of the war was to defeat fascism.

After Japan surrendered to the U.S., and the United States established a Military Government in southern Korea, a number of Korean Americans developed serious doubts about American policy toward Korea, especially when the U.S. Military Government began supporting those Koreans who had collaborated with the Japanese.

Younghill Kang, the first major Korean American writer and a professor of English at NYU, had returned to Korea as an interpreter for the U.S.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Appalled by the “graft, corruption, and error” of the American occupation government, Younghill Kang soon resigned from his position and returned to the United States.

By 1948, in a secret memo, General John Hodge, Commander of U.S. Army Forces in Korea reported to General Douglas MacArthur that the U.S. Military Government was “more hated than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had ever been,” and recommended that the U.S. cut its losses and leave Korea.

Korean American leftists like Diamond Kimm, became even more critical of U.S. occupation policies in Korea. During World War II, Diamond Kimm had served in the American O.S.S. – the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the U.S. intelligence service formed during World War II, and the precursor to the C.I.A. He was also co-founder and editor of the Korean Independence, a Korean immigrant newspaper based in Los Angeles.

In August 1945, Kimm and other Independence writers had praised the U.S. On behalf of millions of Koreans, they expressed their gratitude for enabling Koreans to realize their long-awaited dream of independence. Korean Independence articles hailed the “millions of Allied soldiers” whose “lives and blood” had made this “moment of universal exultation”—Korea’s liberation from Japanese colonial rule—possible for “26 million Korean people” and eulogized the late American President Franklin Roosevelt for providing the “lofty ideals of Democracy, vision, and struggle” that had “paved the way” for Koreans’ “long-awaited day of Liberty.”

Kimm’s story of support and then criticism of the United States, and his eventual arrest and forced deportation from the United States, belongs to a larger story of U.S. Cold War history in which foreign-born Americans were increasingly targeted by anti-Communist policies after 1948.

As the U.S. took on an increasingly interventionist role in Asia, the American government began to target growing radicalism and nationalism voiced by Asian immigrants living in the U.S.

American government agencies began to monitor overseas correspondence and foreign-language presses for evidence of subversion. After the 1948, the Smith Act explicitly made holding Communist beliefs a crime punishable by law, and non-citizens like Diamond Kimm, Alice Hyun, and others with connections to left-wing groups became targets of deportation.

The main wave of immigration to the United States came after 1972 when U.S. immigration laws changed. Already a generation after the end of the Korean War, we should nevertheless recognize that it was the Korean War that pushed Koreans to Europe, Latin America, and the United States in search of security. In other words, Korean immigration to the United States after the Korean War should be understood as a refuge [note: refuge, not refugee] migration.

This “refuge migration” is hidden in other categories, such as the marriage migration of military brides and the labor and professional migration of miners, doctors and nurses. Although ostensibly migrants or immigrants rather than refugees fleeing from an immediate danger, their life narratives demonstrate that flight from war and its consequences was a crucial factor in their migration.

Refuge migrants are motivated by a deep psychological need to leave behind chaos, and insecurity, and trauma, and they seek out emotional/mental peace and a stable environment that doesn't feel like it's always threatening to explode.



- Between 1950 and 1989, some 90,000 Korean women immigrated to America as wives of U.S. soldiers.

- Approximately 200,000 children were sent to the United States and another 50,000 to Europe.


Compared to Koreans in Japan, most Korean Americans seek naturalization (U.S. citizenship) – one reason being, applying for U.S. citizenship is relatively easy. Compared to Koreans in Japan, Korean Americans are physically visible, linguistically and culturally distinct, but structurally incorporated into American society in terms of education and jobs.

At the same time, Korean Americans are politically powerless, relatively voiceless, and marginalized as foreigners despite their legal status as citizens. That is to say, citizenship status alone doesn’t determine the degree of political engagement of a community, and citizenship status alone is not always politically empowering.

For Asian-Americans, including Korean Americans, United States’ historical relationship to Asia – colonization of the Philippines, the Pacific War, the Korean War, and the Vietnam War – created a situation in which U.S. citizenship was contingent on extreme patriotism or political passivity.

Starting with World War II (the war against Japan) and the Korean War, the U.S. government demanded patriotism and obedience from Asian Americans. With arrests and threats of deportation, along with the long Cold War and continued enmity toward North Korea, Korean Americans were rendered politically passive.

Leftist organizations that had existed in the Korean-American community prior to WW II were almost completely destroyed, while Korean American political organizations were transformed into nonpolitical groups. Forced retreat to nonpolitical activities resulted in a type of “citizenship nullification” for Korean Americans, unable to secure political representation despite their legal status as U.S. citizens.



3. The Multicultural Society / University:


Let me shift now to the present, and the generation of Korean Americans who are currently attending college in the United States. Today American universities present themselves as racially and culturally diverse. Indeed, diversity and celebration of multiculturalism is a selling point for American universities, and Korean American students go to college expecting, and hoping for, a liberal education that results in their inclusion in racially and culturally diverse communities.

But actual college experience for most Korean American students suggest that they do not experience inclusion in racially and culturally diverse communities. Despite their advertisements celebrating multicultural and multiracial diversity, American universities do very little in terms of addressing racism and segregation on campus.

During the height of the Civil Rights Movement, the category of race was fundamentally liked to the issue of social justice, and opposition to U.S. wars overseas. Today, multiculturalism has helped to de-link the category of race from politics – that is, de-linked from social justice and opposition to war.

Multiculturalism is, of course, much better than explicit expressions of white supremacy. Moreover, younger generations of Korean Americans who are active in progressive politics are fully committed to a vision of a just world where racial and sexual minorities are recognized, and where racial and sexual minorities can fully participate socially and politically.

Because of time limitations, I cannot fully develop my thoughts here. I only have time to define the problem and suggest a direction, or stance. What are the implications of participating in a movement for peace, reconciliation, and reunification of the two Koreas, while at the same time being committed to a vision of justice that fully recognizes racial and sexual minorities?

In the past, Korean intellectuals and activists involved in the movement for peace, reconciliation, and reunification of the two Koreas felt it was important to emphasize sameness (동질성). The logic here was that, despite the Korean War, and despite the half century of division, the Korean people in the North and South, and in the Korean Diaspora all share a common history, a common culture, and most importantly, common kinship ties.

Today, in this era of multiculturalism, in a society that includes almost 200,000 Korean adoptees, to work with a younger generation of Korean American activists means, I would contend, that rather than emphasizing sameness, we must recognize difference (다양성). In other words, the point of departure for the movement for peace, reconciliation, and reunification of the two Koreas should be the recognition that we have important differences in terms of family histories, language, class position, sexual orientation, etc.

What unites us is our commitment to justice, our commitment to fighting racism, sexism, and class oppression, and our will to create a community together, both within the United States and in Korea.

I apologize again that this last section of my presentation is only a sketch. I am honored to have had this opportunity to speak with you, and I look forward to your comments and questions.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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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민족통신 종합 2011-10-08]

민족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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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님의 댓글

감사 작성일

좋은 내용의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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