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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상]재중동포사회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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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슴도치
댓글 0건 조회 1,600회 작성일 11-11-19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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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상]재중동포사회가 달라진다

3.13반일사건, 15만원탈취사건 등



[심양/연길/용정=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재중동포사회가 날을 거듭하면서 달라지고 있다. 중국의
지위와 역할이 변화됨에 따라 재중동포사회 위상도 변화하고 있다. 재중동포들도 대부분 재일총련 동포들처럼
일제침략의 희생자들이며 동시에 분단의 희생자들이다. 그래서 동북3성에 다녀보면 김일성 주석의 항일투쟁의
발자취들을 발견하는가 하면 민족주의자들의 반일투쟁 유적지들도 발견할 수 있다.하여 재중동포들은 대부분
애국자들의 후손이거나 일제식민지의 희생자, 혹은 분단시대의 희생자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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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용정에 소재한 윤동주 민족시인 생가를 방문한 노길남 민족통신 특파원


[기획-상]재중동포사회가 달라진다

3.13반일사건, 15만원탈취사건 등




남녘 당국과 기업인들은 재중동포들을 존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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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 거리에는 우리말과 중국어 2중언어로 된 간판들이 대부분
[심양/연길/용정=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재중동포사회가 날을 거듭하면서 달라지고 있다. 14억3천만명의 세계제1의 인구를 갖고 있는 중국이 이제 그 지위와 역할이 변화됨에 따라 해외동포들 가운데 최대인구를 갖고 있는 2백만명의 재중동포사회 위상도 변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재중동포들도 대부분 재일총련 동포들처럼 일제침략의 희생자들이며 동시에 분단의 희생자들이다. 그래서 동북3성에 다녀보면 김일성 주석의 항일투쟁의 발자취들을 발견하는가 하면 민족주의자들의 반일투쟁 유적지들도 발견할 수 있다.하여 재중동포들은 대부분 애국자들의 후손이거나 일제식민지의 희생자, 혹은 분단시대의 희생자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지난 방북취재 때 길림을 방문하고, 송하강이 흐르는 다리 옆에 위치한 육문중학교를 방문한바 있었다. 그래서 이번 방북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시기(2011년 11월5일~8일)에는 기차로 10시간, 비행기로 한시간 걸리는 연길의 외각지역 용정이라는 곳을 방문하여 윤동주 민족시인의 생가, 3.13반일투쟁 열사릉, 15만원탈취사건 기념비 등을 참관하며 일제 때 우리 동포들 가운데 민족주의자들이 중국땅에서 반일투쟁을 벌인 역사의 한 부분을 더듬어 보는 시간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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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동정 반일투쟁때 희생된 19명의 의사들 묘역
연길에서 30리 거리에 있는 용정은 한때 연변의 서울이라고 불린 곳으로 지금은 연길에 밀려 많이 낙후되긴 하였으나 그래도 우리 민족의 유적이 가장 많은 곳으로 윤동주의 생가, 일송정, 용두레우물, 명동교회당 건물 등 볼만한 곳이 많다.

용정시는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중남부, 곧 두만강의 중상류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북조선의 회령과 두만강을 사이로 마주하고 있다. 시 산하에 4개 가두판사처, 8개 진, 9개 향, 178개 촌이 있으며 총면적은 2,590㎢이고 인구는 30만명이 조금 못되는데 조선족이 약 70%를 차지하고 있어 면변에서는 조선족 비율이 가장 많은 도시라고 한다. 일찍 조선족이 개척한 곳이라 해방전까지만 해도 거의 조선족만 살았다고 한다.

용정은 장백산맥의 중단에 위치해 있으며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중간이 평원이다. 경내에 해란강과 부르하통강이 흘러 농업이 발달하였다. 중국에서 제일 큰 과수농장이 있으며 잎담배와 사과배, 송이버섯이 특산물로 꼽힌다. 그리고 용정시는 광산물 자원도 풍부하여 석탄, 철, 금, 아연, 대리석, 석회석 등이 풍부하며 경공업과 중공업도 상당히 발달하였으나 근년에는 좀 침체에 빠졌다고 한다.


용정 3.13반일투쟁 사건과 19명 희생자 의사릉


나는 연길에서 버스를 타고 이곳에 사는 동포와 유학생과 함께 용정으로 가서 먼저 <3.13반일투쟁 의사릉>을 찾아 그곳에서 참배했다.

이 곳은 1919년 3월 13일 연변의 3만여명 군중들이 서전대야에서 전대미문의 반일대집회와 시위를 벌렸다가 일본경찰들과 반동군경들의 피비린 탄압으로 19명이 희생되고 100여명이 체포되는 끔찍한 사건으로 죽은 19명의 묘지가 있는 곳이다. 이 사건이 바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저 온 '용정3.13반일운동'이다.

<<15만원 탈취사건>>과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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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만원탈취사건 기념하는 비석에서 기념촬영
나는 또 그 근처에 있는 <<15만원 탈취사건을 기념하는 비석>>으로 다가갔다. 그 당시 반일무장단체의 창설과 함께 무기해결은 첫째가는 일로 제기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무기를 해결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자금이 있으면 무기를 구입할수 있었다. 하여 반일무장단체 “철혈광복단”성원들은 화룡현 지신사동량구(오늘날 룡정시 지신진 승지촌)골짜기에서 적들의 말바리를 습격하여 “조선은행권” 15만원을 탈취했다.

연변일보는 이렇게 보도(2009.9.28)했다.

<<1920년 1월 4일, “철혈광복단” 성원들은 매서운 추위도 무릅쓰고 이른 아침부터 저녁무렵까지 10여시간동안 동량구골짜기에 매복해있었다. 저녁 5시경 말바리에 돈을 실은 여섯명의 말바리대오가 달라재방향에 나타났다.

<<말바리대오가 “철혈광복단”의 매복권에 들어섬과 동시에 기습공격이 개시되였다. 총소리와 함께 말에 타고있던 경찰이 쓰러졌으며 나머지 호위자들은 뿔뿔이 도망쳤다. “철혈광복단”성원들은 15만원의 조선은행권이 들어있는 자루를 챙긴 뒤 두패로 나뉘여 피신했다가 이튿날 와룡동에 집합하여 무기구입에 나섰다.

<<이들은 의란구, 훈춘을 거쳐 로씨야 연해주를 바라고 떠났다. 로씨야 울라지보스또크 신한촌에 당도하여 당지의 반일단체와 련계를 갖고 무기판매상과 교섭했다. 도중 반역자의 밀고로 일본군대의 돌연습격을 당했다.

<< 네사람 행동대원중 한 사람만 도주에 성공하고 세 사람은 일본군에 체포되여 조선 서울서대문감옥에 압송되였다. 세 사람은 감옥에서 최후를 마쳤다.

<<“15만원 탈취사건”은 일본당국을 크게 놀래웠으며 “15만원 탈취사건”을 계기로 연변경내에서는 규모가 비교적 큰 반일무장투쟁이 이어졌다. “15만원 탈취사건”은 “3.13”반일시위운동이후 연변 인민들이 일제침략자와 맞서싸운 또 한차례의 반일무장투쟁으로 기록된다.-본지종합->>

윤동주 생가, 그는 누구인가?


윤동주(尹東柱)는 1917년 12월30일 당시 북간도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明東村, 지금의 지린 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 룽징시 지산진)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간도 이주민 3세로서 명촌학교, 숭실중학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가서 독립운동 활동을 하다가 잡혀 감옥살이를 했다. 그러던 중 1945년 2월16일 옥사한 민족주의 계열의 민족작가이며 시인이며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본 유학 후 도시샤 대학 재학 중,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고문 후유증으로 요절하였다.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하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본식 창씨개명은 히라누마 도오슈(平沼東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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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학교 흑판에 적혀 있던 내용들
일제 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그의 친구이자 사촌인 송몽규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처형당하였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그의 창씨개명 '히라누마'가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송몽규는 고종 사촌이었고, 가수 윤형주는 6촌 종형제간이기도 하다.

19세기 말,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심해지자 조선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간도와 연해주 등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욱도 집안을 이끌고 1886년경 함경도에서 만주로 이주하였다.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은 함경북도 종서군 동풍면 상장포에 살다가 1886년 북간도 자동으로 이주하였으며 할아버지 윤하현은 밍둥춘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아버지 윤영석은 1910년 독립지사인 김약연의 누이동생 김용과 결혼하여 명동촌에 정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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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줄 왼쪽은 장준하, 가운데는 문익환, 오른쪽은 윤동주)
그는 어려서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고모 윤씨는 송신영에게 시집갔는데, 고모의 아들이 독립운동가이자 그의 친구였던 송몽규였다. 당숙은 윤영춘으로 후일 가수가 되는 윤형주는 그의 6촌 재종이었다.

윤동주의 중학시절은 1931년 14세에 명동소학교(明東小學敎)를 졸업하고,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학교(大拉子學敎)에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여,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敎)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35년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다. 그해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가 간행한 학우지 숭실활천(崇實活泉) 제15호에 시 공상(空想)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어, 용정에 있는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였다. 광명중에서 그는 문익환과 정일권 등을 만나게 된다.

1937년 광명중학교 졸업반일 무렵,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놓고 부친(의학과 진학 희망)과 갈등하나, 조부의 개입으로 연전 문과 진학을 결정한다. 1938년 2월 17일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京城)으로 유학, 그해 4월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숙생활을 하며 그는 저녁밤 하숙집 근처를 산책하며 시상을 떠올리고 시를 짓거나 담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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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기숙사를 나와 북아현동, 서소문 등지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이때 그는 친구 라사행과 함께 정지용 등을 방문, 시에 관한 토론을 하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 해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기도 했다.

1941년 12월 27일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이 때에 틈틈이 썼던 시들 중 19편을 골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윤동주 집안은 1941년 말 '히라누마'(平沼)로 창씨한 것으로 돼 있다. 일본 유학에 뜻을 둔 윤동주의 도일을 위해선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를 개명하게 되었다.

윤동주의 창씨개명은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 없는 것이었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윤동주가 전시의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학교 4학년을 졸업하면서 1941년 연말에 "고향 집에서 일제의 탄압과 동주의 도일 수속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했다는 것이다. 개명 후 윤동주는 매우 괴로워했다 한다.

창씨개명계를 내기 닷새 전에 그는 창씨개명에 따른 고통과 참담한 비애를 그린 시 참회록을 썼다. 윤동주의 창씨개명설은 해방 이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1990년대에 와서 알려지게 되었다.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立教大学)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중퇴하여 교토 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일본경찰의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4년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 제1 형사부 이시이 히라오 재판장 명의로 된 판결문은 징역 2년형을 선고하면서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라고 적혀 있다. 교토지방 재판소에서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뒤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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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3.13시위를 주동한 학생들이 다니던 명동학교 모습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시신은 가족들에게 인도되어 그 해 3월 장례식을 치룬 후 간도 용정에 유해가 묻혔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가 죽고 10일 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오라' 는 전보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인수, 수습하러 일본으로 건너간 후, 그런데 뒤늦게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큐슈제대(九州帝大)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 이라는 우편 통지서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후일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이를 두고 "사망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 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았다는 주장 등, 그의 죽음은 일제말의 생체실험에 의한 것이라는 의문이 수차례 제기되었다.

1947년 2월 정지용의 소개로 경향신문에 유작이 처음 소개되고 함께 추도회가 거행된다. 1948년 1월, 윤동주의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 이후 1962년 3월부터 독립유공자를 대량으로 발굴 포상할 때, 그에게도 건국공로훈장 서훈이 신청되었으나 유족들이 사양하였다. 1990년 8월 15일에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다음에 계속 기획-중은 ‘중국지위 향상에 재중동포 위상도 상승한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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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2011-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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