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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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혁명 2세대'의 대표…국가시스템의 완성자
[한반도 브리핑] 故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애
기사입력 2011-12-29 오전 8:00:58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에서 28일 열린 고(故)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결식을 끝으로 북한 역사에서 김정일 시대가 공식적으로 종언을 고했다. 29일 김일성광장에서 열리는 중앙추모대회는 김정일 위원장을 마지막으로 추모하는 자리이자 새 '영도자' 김정은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대한 충성을 맹서하는 자리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1974년 32살의 젊은 나이에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 등장했던 김정일 위원장은 1980년대 이후 사실상 북한을 통치하는 최고지도자로 활동해 왔다. 그의 일생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시간이 더 필요할 지도 모른다. 그를 바라보는 남과 북의 시각 차이가 너무 크고, 남쪽에서도 상반된 평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김정일 시대 북한이 핵 개발 등 선군노선과 남북 정상회담 등 유화노선을 동시에 구사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1989년 냉전 종식 이후 사회주의권의 붕괴,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1995년의 대홍수 , 3년간의 '고난의 행군' 등 시련 속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우리식 사회주의' 고수를 표방하며 선군노선을 통해 체제 위기를 극복하고, 강성대국 건설 구상에 따른 경제 재건을 추진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북한이 "인공지구위성의 제작 및 발사국의 자랑에 핵보유국의 존엄!", "지식경제시대의 민족의 앞날을 앞당겨주신 새 세기 산업혁명!", "피눈물로 꽉 찬 슬픔의 대하를 강성국가에로의 대진군대오로 격변시킨 민족의 정신력!" 등을 김정일 위원장의 '3대 혁명유산'이라고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1994년 김일성 사망 직후에는 김정일 체제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외부세계의 전망이 많았다. 짧으면 3일, 오래가도 3년을 넘기기 힘들다는 분석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예측은 모두 빗나갔다. 김정일 위원장은 군대를 앞세워 안보와 경제를 동시에 담당하도록 해 체제 위기에서 벗어났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고수하고자 하는 북한의 입장에서, 특히 김 위원장과 행보를 같이 해온 '혁명2세대'들의 입장에서 보면 김 위원장에 대한 평가가 남쪽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북한 역사에서 김 위원장을 객관적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김 위원장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시각 외에 북한 '2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김 위원장을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그의 성장과 권력 장악은 '빨치산 1세대'의 각별한 관심과 '혁명2세대'들의 뒷받침 속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가 걸어온 길을 몇 시기로 나눠 살펴보면 이 같은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 유년 시절
김정일 위원장은 1942년 2월 16일 김일성 주석과 김정숙 사이에서 태어나 '동북항일연군 교도려'가 있던 하바로프스크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남측 학계에서는 김 위원장이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보로실로프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지만, 북한은 백두산의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선전하고 있다. 김정일은 동북항일연군 대원들이 연해주로 이동한 후 태어난 첫 '빨치산의 아들'이었다. 당연히 빨치산 대원들 사이에서 관심의 대상이 됐다. 북한이 어린 김정일 위원장을 가장 극진히 보살폈다고 하는 리을설 원수는 아직까지 건재하다. 김정일 위원장 영결식 날 발간된 <노동신문> 기고문을 통해 리을설은 김정은 부위원장을 받들어 사회주의 강성국가 완성에 모든 힘을 다 바치겠다고 밝히기까지 했다.
김 위원장은 1945년 11월 말 여성 항일유격대 대원들과 함께 청진으로 입국해 12월에 평양에 들어와 아버지 김일성 주석과 상봉했다. 1946년 남산유치원 입학했고, 어머니와 혁명1세대의 각별한 배려를 받으며 성장했다.
◇ 학창 시절
김 위원장은 1948년 9월 남산인민학교에 입학했다. 그해 그는 사고로 동생을 잃었고, 1949년에는 생모인 김정숙이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다. 김정숙은 어린 김정일 위원장을 평양 보통강개수공사 현장을 비롯해 공장과 협동농장을 데리고 다녔다. 사망 직전에는 항일빨치산 동료들에게 "김정일을 훌륭한 지도자로 키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김정일 위원장도 2002년 러시아의 고위 인사에게 "내 인생에 가장 영향을 미친 사람은 어머니"라고 밝힌 바 있다.
김 위원장은 한국전쟁 때 중국 길림으로 가 있다가 1952년 만경대혁명유자녀학원(現 만경대혁명학원)에 잠시 머물렀고, 전후에는 삼석인민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 1964년 2월 평양4인민학교로 전학해 졸업했다.
1954년 9월 평양제1중학교에 입학했고, 1956년 조선민주청년동맹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학습'을 받기 시작했다. 1959년 졸업반 때는 김일성 당시 수상을 동행해 모스크바를 방문하기도 했다.
◇ 대학교 시절
북의 혁명2세대들이 해외 유학을 한 것과 달리 김정일 위원장은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 시절 김일성 주석의 저작을 중심으로 1년에 만 페이지씩 읽는 '만 페이지 책읽기운동'을 발기하는 등 다양한 학내 정치활동을 폈다.
1961년 파격적으로 노동당에 입당한 그는 1세대의 지원을 받아 본격적인 정치행보에 나섰고, 김일성 수상의 지방 현지지도에도 동행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학문적으로일반 지식에 관한 전문적 고등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버지의 사상·이론을 체계적으로 습득한 것으로 전해진다.
◇ 후계자 부상
1964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노동당 중앙당의 핵심부서인 조직지도부에 들어갔다. 먼저 국가기구를 관장하는 중앙지도과에 근무하면서 당 중앙위원회 내부 사업 전반을 파악했다. 1967년 '박금철·이효순 사건'을 처리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이후 당 선전선동부 과장으로 자리를 옮겨 사상·문화예술 분야를 담당하며 〈피바다〉〈꽃파는 처녀〉등 '5대 명가극'과 예술영화를 완성해 1세대의 신임을 얻었다. 특히 주체사상의 체계화와 유일사상체계 확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1970년 당 부부장으로 승진하면서 당의 사상 사업 전반을 장악하는 실권자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73년 9월 당 조직·선전 비서에 임명되면서 사실상 후계자로 결정됐고, 1974년 2월 당 정치위원회에 임명되면서 노동당 내에서 후계자로 확정됐다.
◇ 유일 지도체제 확립
후계자가 된 그는 1973년 9월부터 1974년 중반까지는 노동당에, 1974년 후반부터 1975년 중반까지는 군대 안에, 1975년 후반부터 1976년 중반까지는 정권 부분과 대외·대남 부문에 유일 지도체제를 수립했다. 유일 지도체제란 한마디로 후계자의 지시만을 따르는 지도체계, 보고체계, 사업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는 '3대혁명소조운동'을 전개해 세대교체를 추진했다.
당·정·군에 대한 개편이 완결된 후 소집된 1980년 6차 당대회는 후계자를 위한 대회였다. 1970년대에 유일 지도체제를 완결 지은 그는 6차 당대회를 통해 후계체계를 공식화했고, 처음 공식적으로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 사실상의 최고 지도자
대중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김정일 위원장은 평양시 재건설 사업을 주도하는 한편, 1983년 6월에는 중국을 비공개 방문해 경제특구를 둘러보기도 했다.
1990년대 들어 그는 인민군 최고사령관, 국방위원장 등의 직책을 이어받아 이른바 '영도(領導)의 계승체계'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김일성 주석은 후계자 김정일이 제출한 안건과 의제를 추인해 거기에 무게를 실어 주는 일을 담당했다.
◇ 강성대국 건설 표방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후 3년상을 끝낸 그는 1997년 노동당 총비서에 취임했고, 다음해 권한이 강화된 국방위원장직에 재추대됐다. 1998년 국가목표로 '강성대국 건설'을 표방한 그는 2000년 북중 정상회담,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전방위 외교 노선으로 나왔고, 2002년에는 '사회주의경제관리개선조치'를 발표해 '경제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2007년에는 2012년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여는 해'로 만들자는 5개년 경제계획을 발표했고, 그해 10월 2차 남북 정상회담을 가졌다.
◇ 후계자 결정과 급서(急逝)
2008년 갑자기 건강이 악화된 김정일 위원장은 아들인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했고, 2010년 9월 당 대표자회를 소집해 김정은 후계자를 당 중앙군상위원회 부위위장으로 임명해 후계체제를 공식화했다. 김정은 후계자 결정과 공식화 과정에는 전병호 비서, 장성택·김경희 부장, 김영춘 차수 등 혁명2세대의 지지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 위원장은 2009년부터 김일성 주석의 유훈 관철을 강조하면서 이후 3차례의 북중 정상회담과 1차례 북러 정상회담을 통해 압록강 하구의 라선 경제특구, 두만강 하구의 황금평 특구 구상을 구체화해 추진했다. 잦은 중국과 러시아 방문, 지방 현지지도 등은 그의 건강에 무리를 줬고, 결국 2011년 12월 심근경색으로 급서함으로써 북한은 김정은 영도체제로 넘어가게 됐다.
요약하면 김 위원장은 1세대들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후계자로 등장한 후 2세대들의 뒷받침을 받아 1세대들이 이룩한 성과를 사상·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당·정·군 등의 운영 지침서(매뉴얼)를 마련함으로써 현재 북한의 국가시스템을 완성했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신사고'를 내세워 변화된 세계 정세에 대응해 '북한식 개혁개방' 노선을 추진해 왔으나 그 최종 결과를 보지는 못했다.
김정일 위원장에서 김정은 후계자로의 전환은 북한에서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의미한다.
40년 전인 1972년 김일성 주석은 환갑을 맞아 혁명1세대의 노간부들과 함께 고향집을 방문해 사진을 찍었고, 이 자리에는 김정일 당시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비롯해 전병호·김기남·김국태·최태복 등 다수의 혁명2세대들도 동행했다.
이 자리에서 김 주석은 "우리가 처음으로 개척하여 40년간 해온 혁명 사업을 이어나갈 교대자들"이라며 "우리 혁명의 교대자들은 아무리 세찬 폭풍이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고 우리의 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성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1년 6개월 뒤 김정일 위원장이 후계자로 결정됐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30~40대 젊은 간부들은 이제 70~80대의 원로로 자리잡고 있다. 북한 역사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행적, 그가 남긴 공과는 북한 2세대의 공과이기도 함 셈이다.
그들은 3세대 최고지도자로 김정은 부위원장을 선택했고, 2010년 9월 28일 당대표자회를 통해 사실상 '김정은 체제'를 출범시켰다. 결국 김정일 위원장과 그의 세대에 대한 북한 인민의 최종평가는 김정은 체제가 어떤 성과를 내느냐에 달려 있을 수도 있다.
김정일 위원장은 생애 마지막 시기에 강성국가 건설의 주공노선으로 '인민생활 향상'과 '세계화'를 강조했다. 그는 2010년 준공식을 가진 김일성종합대학의 전자도서관에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는 '친필명제'를 보냈다. 주체적인 생각을 갖고 다른 나라의 우수한 것을 받아들이란 의미로, 북한이 경제회생을 위한 외자유치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가운데 나온 '김정일식 세계화'에 대한 강조였다.
김정은 부위원장은 김 위원장이 남긴 유훈을 계승할 것으로 보인다. 그와 그를 떠받들고 있는 3~4세대의 선택이 무엇이든 그 결과는 김정일 위원장과 2세대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까지 수반하게 될 것이다.
북한의 핵 개발은 북한 주민들에게는 "자부심"이었지만, 반대로 남측에는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와 마찬가지로 현재 시점에서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평가는 남과 북에서 서로 뚜렷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분단된 상황에서 남과 북의 시각 차이는 불가피하고, 그런 점에서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영결식이 끝난 지금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김정은 체제는 우리의 대화 상대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 김정일 위원장 연보
1942년 2월 16일 출생
1945년 11월 말 귀국
1946년 남산유치원 입학
1948년 9월 남산인민학교 입학
1954년 9월 1일 평양 제1중학교 입학
1956년 12월 조선민주청년동맹 가입
1957년 9월 1일 평양 제1중학교 고급반(1959년 4월 평양 남산고급중학교로 개칭) 입학
1959년 1월 김일성수상의 모스크바 방문 동행
1960년 9월 1일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 입학
1961년 7월 22일 조선노동당 입당
1964년 3월 18일 대학졸업논문 사회주의건설에서 군(郡)의 위치와 역할 발표
1964년 6월 19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
1965년 4월 9일~21일 김일성수상의 인도네시아 방문 수행
1967년 노동당 중앙위원회 과장
1970년 9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
1972년 10월 노동당 중앙위원
1973년 9월 17일 노동당 조직 및 선전담당 비서
1974년 2월 13일 노동당 정치위원 (후계자 확정)
1975년 2월 15일 '공화국 영웅' 칭호 수여
1980년 10월 14일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노동당 중앙군사위원
1982년 3월 31 '주체사상에 대하여' 발표
1983년 6월 1일~13일 중국 비공개 방문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년 12월 인민군 최고사령관
1992년 4월 인민공화국 원수 칭호
1993년 4월 국방위원장 취임
1997년 10월 8일 조선노동당 총비서 취임
1998년 9월 5일 국방위원장 재추대
2010년 6월 13~15일 김대중 대통령과 남북 정상회담
2007년 10월 13~15일 노무현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
2008년 말 김정은 후계자 지명
2010년 9월 28일 당대표자회 개최. 후계자 김정은을 당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임명
2011년 5월 20일~27일 7박8일 중국 방문
2011년 8월 21~25일 러시아 연해주 방문, 24일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
2011년 12월 17일 사망
* 더 자세한 내용은 <김정일>(정창현 지음. 중앙북스 펴냄) 참조
/정창현 <민족21> 대표. 국민대 겸임교수
1974년 32살의 젊은 나이에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 등장했던 김정일 위원장은 1980년대 이후 사실상 북한을 통치하는 최고지도자로 활동해 왔다. 그의 일생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시간이 더 필요할 지도 모른다. 그를 바라보는 남과 북의 시각 차이가 너무 크고, 남쪽에서도 상반된 평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김정일 시대 북한이 핵 개발 등 선군노선과 남북 정상회담 등 유화노선을 동시에 구사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1989년 냉전 종식 이후 사회주의권의 붕괴,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1995년의 대홍수 , 3년간의 '고난의 행군' 등 시련 속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우리식 사회주의' 고수를 표방하며 선군노선을 통해 체제 위기를 극복하고, 강성대국 건설 구상에 따른 경제 재건을 추진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북한이 "인공지구위성의 제작 및 발사국의 자랑에 핵보유국의 존엄!", "지식경제시대의 민족의 앞날을 앞당겨주신 새 세기 산업혁명!", "피눈물로 꽉 찬 슬픔의 대하를 강성국가에로의 대진군대오로 격변시킨 민족의 정신력!" 등을 김정일 위원장의 '3대 혁명유산'이라고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1994년 김일성 사망 직후에는 김정일 체제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외부세계의 전망이 많았다. 짧으면 3일, 오래가도 3년을 넘기기 힘들다는 분석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예측은 모두 빗나갔다. 김정일 위원장은 군대를 앞세워 안보와 경제를 동시에 담당하도록 해 체제 위기에서 벗어났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고수하고자 하는 북한의 입장에서, 특히 김 위원장과 행보를 같이 해온 '혁명2세대'들의 입장에서 보면 김 위원장에 대한 평가가 남쪽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북한 역사에서 김 위원장을 객관적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김 위원장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시각 외에 북한 '2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김 위원장을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그의 성장과 권력 장악은 '빨치산 1세대'의 각별한 관심과 '혁명2세대'들의 뒷받침 속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가 걸어온 길을 몇 시기로 나눠 살펴보면 이 같은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 역사 속의 인물이 된 김정일 위원장 ⓒ연합뉴스 |
◇ 유년 시절
김정일 위원장은 1942년 2월 16일 김일성 주석과 김정숙 사이에서 태어나 '동북항일연군 교도려'가 있던 하바로프스크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남측 학계에서는 김 위원장이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보로실로프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지만, 북한은 백두산의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선전하고 있다. 김정일은 동북항일연군 대원들이 연해주로 이동한 후 태어난 첫 '빨치산의 아들'이었다. 당연히 빨치산 대원들 사이에서 관심의 대상이 됐다. 북한이 어린 김정일 위원장을 가장 극진히 보살폈다고 하는 리을설 원수는 아직까지 건재하다. 김정일 위원장 영결식 날 발간된 <노동신문> 기고문을 통해 리을설은 김정은 부위원장을 받들어 사회주의 강성국가 완성에 모든 힘을 다 바치겠다고 밝히기까지 했다.
김 위원장은 1945년 11월 말 여성 항일유격대 대원들과 함께 청진으로 입국해 12월에 평양에 들어와 아버지 김일성 주석과 상봉했다. 1946년 남산유치원 입학했고, 어머니와 혁명1세대의 각별한 배려를 받으며 성장했다.
◇ 학창 시절
김 위원장은 1948년 9월 남산인민학교에 입학했다. 그해 그는 사고로 동생을 잃었고, 1949년에는 생모인 김정숙이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다. 김정숙은 어린 김정일 위원장을 평양 보통강개수공사 현장을 비롯해 공장과 협동농장을 데리고 다녔다. 사망 직전에는 항일빨치산 동료들에게 "김정일을 훌륭한 지도자로 키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김정일 위원장도 2002년 러시아의 고위 인사에게 "내 인생에 가장 영향을 미친 사람은 어머니"라고 밝힌 바 있다.
김 위원장은 한국전쟁 때 중국 길림으로 가 있다가 1952년 만경대혁명유자녀학원(現 만경대혁명학원)에 잠시 머물렀고, 전후에는 삼석인민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 1964년 2월 평양4인민학교로 전학해 졸업했다.
1954년 9월 평양제1중학교에 입학했고, 1956년 조선민주청년동맹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학습'을 받기 시작했다. 1959년 졸업반 때는 김일성 당시 수상을 동행해 모스크바를 방문하기도 했다.
◇ 대학교 시절
북의 혁명2세대들이 해외 유학을 한 것과 달리 김정일 위원장은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 시절 김일성 주석의 저작을 중심으로 1년에 만 페이지씩 읽는 '만 페이지 책읽기운동'을 발기하는 등 다양한 학내 정치활동을 폈다.
1961년 파격적으로 노동당에 입당한 그는 1세대의 지원을 받아 본격적인 정치행보에 나섰고, 김일성 수상의 지방 현지지도에도 동행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학문적으로일반 지식에 관한 전문적 고등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버지의 사상·이론을 체계적으로 습득한 것으로 전해진다.
▲ 젊은 시절의 김정일 ⓒ로이터=뉴시스 |
◇ 후계자 부상
1964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노동당 중앙당의 핵심부서인 조직지도부에 들어갔다. 먼저 국가기구를 관장하는 중앙지도과에 근무하면서 당 중앙위원회 내부 사업 전반을 파악했다. 1967년 '박금철·이효순 사건'을 처리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이후 당 선전선동부 과장으로 자리를 옮겨 사상·문화예술 분야를 담당하며 〈피바다〉〈꽃파는 처녀〉등 '5대 명가극'과 예술영화를 완성해 1세대의 신임을 얻었다. 특히 주체사상의 체계화와 유일사상체계 확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1970년 당 부부장으로 승진하면서 당의 사상 사업 전반을 장악하는 실권자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73년 9월 당 조직·선전 비서에 임명되면서 사실상 후계자로 결정됐고, 1974년 2월 당 정치위원회에 임명되면서 노동당 내에서 후계자로 확정됐다.
◇ 유일 지도체제 확립
후계자가 된 그는 1973년 9월부터 1974년 중반까지는 노동당에, 1974년 후반부터 1975년 중반까지는 군대 안에, 1975년 후반부터 1976년 중반까지는 정권 부분과 대외·대남 부문에 유일 지도체제를 수립했다. 유일 지도체제란 한마디로 후계자의 지시만을 따르는 지도체계, 보고체계, 사업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는 '3대혁명소조운동'을 전개해 세대교체를 추진했다.
당·정·군에 대한 개편이 완결된 후 소집된 1980년 6차 당대회는 후계자를 위한 대회였다. 1970년대에 유일 지도체제를 완결 지은 그는 6차 당대회를 통해 후계체계를 공식화했고, 처음 공식적으로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 1981년 아버지 김일성 주석과의 평양 산책 ⓒ연합뉴스 |
◇ 사실상의 최고 지도자
대중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김정일 위원장은 평양시 재건설 사업을 주도하는 한편, 1983년 6월에는 중국을 비공개 방문해 경제특구를 둘러보기도 했다.
1990년대 들어 그는 인민군 최고사령관, 국방위원장 등의 직책을 이어받아 이른바 '영도(領導)의 계승체계'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김일성 주석은 후계자 김정일이 제출한 안건과 의제를 추인해 거기에 무게를 실어 주는 일을 담당했다.
◇ 강성대국 건설 표방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후 3년상을 끝낸 그는 1997년 노동당 총비서에 취임했고, 다음해 권한이 강화된 국방위원장직에 재추대됐다. 1998년 국가목표로 '강성대국 건설'을 표방한 그는 2000년 북중 정상회담,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전방위 외교 노선으로 나왔고, 2002년에는 '사회주의경제관리개선조치'를 발표해 '경제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2007년에는 2012년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여는 해'로 만들자는 5개년 경제계획을 발표했고, 그해 10월 2차 남북 정상회담을 가졌다.
◇ 후계자 결정과 급서(急逝)
2008년 갑자기 건강이 악화된 김정일 위원장은 아들인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했고, 2010년 9월 당 대표자회를 소집해 김정은 후계자를 당 중앙군상위원회 부위위장으로 임명해 후계체제를 공식화했다. 김정은 후계자 결정과 공식화 과정에는 전병호 비서, 장성택·김경희 부장, 김영춘 차수 등 혁명2세대의 지지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 위원장은 2009년부터 김일성 주석의 유훈 관철을 강조하면서 이후 3차례의 북중 정상회담과 1차례 북러 정상회담을 통해 압록강 하구의 라선 경제특구, 두만강 하구의 황금평 특구 구상을 구체화해 추진했다. 잦은 중국과 러시아 방문, 지방 현지지도 등은 그의 건강에 무리를 줬고, 결국 2011년 12월 심근경색으로 급서함으로써 북한은 김정은 영도체제로 넘어가게 됐다.
▲ 김정일과 그의 '후계자' 김정은 ⓒ뉴시스 |
요약하면 김 위원장은 1세대들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후계자로 등장한 후 2세대들의 뒷받침을 받아 1세대들이 이룩한 성과를 사상·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당·정·군 등의 운영 지침서(매뉴얼)를 마련함으로써 현재 북한의 국가시스템을 완성했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신사고'를 내세워 변화된 세계 정세에 대응해 '북한식 개혁개방' 노선을 추진해 왔으나 그 최종 결과를 보지는 못했다.
김정일 위원장에서 김정은 후계자로의 전환은 북한에서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의미한다.
40년 전인 1972년 김일성 주석은 환갑을 맞아 혁명1세대의 노간부들과 함께 고향집을 방문해 사진을 찍었고, 이 자리에는 김정일 당시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비롯해 전병호·김기남·김국태·최태복 등 다수의 혁명2세대들도 동행했다.
이 자리에서 김 주석은 "우리가 처음으로 개척하여 40년간 해온 혁명 사업을 이어나갈 교대자들"이라며 "우리 혁명의 교대자들은 아무리 세찬 폭풍이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고 우리의 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성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1년 6개월 뒤 김정일 위원장이 후계자로 결정됐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30~40대 젊은 간부들은 이제 70~80대의 원로로 자리잡고 있다. 북한 역사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행적, 그가 남긴 공과는 북한 2세대의 공과이기도 함 셈이다.
그들은 3세대 최고지도자로 김정은 부위원장을 선택했고, 2010년 9월 28일 당대표자회를 통해 사실상 '김정은 체제'를 출범시켰다. 결국 김정일 위원장과 그의 세대에 대한 북한 인민의 최종평가는 김정은 체제가 어떤 성과를 내느냐에 달려 있을 수도 있다.
김정일 위원장은 생애 마지막 시기에 강성국가 건설의 주공노선으로 '인민생활 향상'과 '세계화'를 강조했다. 그는 2010년 준공식을 가진 김일성종합대학의 전자도서관에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는 '친필명제'를 보냈다. 주체적인 생각을 갖고 다른 나라의 우수한 것을 받아들이란 의미로, 북한이 경제회생을 위한 외자유치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가운데 나온 '김정일식 세계화'에 대한 강조였다.
김정은 부위원장은 김 위원장이 남긴 유훈을 계승할 것으로 보인다. 그와 그를 떠받들고 있는 3~4세대의 선택이 무엇이든 그 결과는 김정일 위원장과 2세대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까지 수반하게 될 것이다.
북한의 핵 개발은 북한 주민들에게는 "자부심"이었지만, 반대로 남측에는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와 마찬가지로 현재 시점에서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평가는 남과 북에서 서로 뚜렷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분단된 상황에서 남과 북의 시각 차이는 불가피하고, 그런 점에서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영결식이 끝난 지금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김정은 체제는 우리의 대화 상대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 김정일 위원장 연보
1942년 2월 16일 출생
1945년 11월 말 귀국
1946년 남산유치원 입학
1948년 9월 남산인민학교 입학
1954년 9월 1일 평양 제1중학교 입학
1956년 12월 조선민주청년동맹 가입
1957년 9월 1일 평양 제1중학교 고급반(1959년 4월 평양 남산고급중학교로 개칭) 입학
1959년 1월 김일성수상의 모스크바 방문 동행
1960년 9월 1일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 입학
1961년 7월 22일 조선노동당 입당
1964년 3월 18일 대학졸업논문 사회주의건설에서 군(郡)의 위치와 역할 발표
1964년 6월 19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
1965년 4월 9일~21일 김일성수상의 인도네시아 방문 수행
1967년 노동당 중앙위원회 과장
1970년 9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
1972년 10월 노동당 중앙위원
1973년 9월 17일 노동당 조직 및 선전담당 비서
1974년 2월 13일 노동당 정치위원 (후계자 확정)
1975년 2월 15일 '공화국 영웅' 칭호 수여
1980년 10월 14일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노동당 중앙군사위원
1982년 3월 31 '주체사상에 대하여' 발표
1983년 6월 1일~13일 중국 비공개 방문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년 12월 인민군 최고사령관
1992년 4월 인민공화국 원수 칭호
1993년 4월 국방위원장 취임
1997년 10월 8일 조선노동당 총비서 취임
1998년 9월 5일 국방위원장 재추대
2010년 6월 13~15일 김대중 대통령과 남북 정상회담
2007년 10월 13~15일 노무현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
2008년 말 김정은 후계자 지명
2010년 9월 28일 당대표자회 개최. 후계자 김정은을 당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임명
2011년 5월 20일~27일 7박8일 중국 방문
2011년 8월 21~25일 러시아 연해주 방문, 24일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
2011년 12월 17일 사망
* 더 자세한 내용은 <김정일>(정창현 지음. 중앙북스 펴냄) 참조
/정창현 <민족21> 대표. 국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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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작성일객관적으로 잘 정리된 자료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