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별의 세계 20 > 통일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통일게시판

장편소설 별의 세계 20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2,409회 작성일 22-10-18 02:22

본문

20220926195540_e33c90757ccabc8c6640980780133272_afyo.jpg

제 4 장

1

흐릿한 날씨였다. 해는 자주 구름속에 잠기였다.

권형일이 탄 승용차는 송화군으로 가는 대도로를 고속으로 질주하고있었다.

마가을의 찬바람이 시창밖에서 윙윙 울었다. 먼 산등성이에 암팡지게 둘러앉은 잡관목숲이며 비탈면에 자리잡고있는 협동농장 축사와 탈곡장들이 영화화면에서처럼 재빨리 커지며 마주오다가는 어느새 뒤로 사라져버리군 했다.

권형일은 지금 송화군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찾아가는 길이였다. 여직 한번도 만나본 일이 없으나 당중앙위원회 비서인 그 자신이 직접 찾아가야 할 정도로 중요한 용무가 있었다.

권형일은 자주 시계를 들여다보며 한가지 생각만을 거듭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리재명의 수기에 왜 그리도 관심이 크실가, 물론 비전향장기수들과 관련된 문제일것이다.

하지만 그 수기는 40년전의 투쟁에 대한 기록일뿐이다. 비전향장기수들의 고난에 찬 력사는 이후에 시작되였다. 또 리재명은 해외로 빠져 귀국했으므로 자기 전우들이 후날 어떻게 살며 싸웠는지 전혀 모르고있었다. 그런데도 장군님께서는 리재명이 후에 짬짬이 수기를 썼다는것을 아시고 그것을 꼭 찾아야 한다고 하시였다. 무엇때문일가, 그 수기에서 무엇을 찾아보시려는것일가?…

리재명이 수기를 썼다는것은 로병 서산옥을 통해 알게 되였다. 그런데 그것을 오래전에 (12년전에) 어느 한 출판사의 젊은 기자가 책을 쓴다며 빌려간후 아직 반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기자를 찾는데 적지 않은 품을 들였다. 한때 소설을 지망했고 영화문학도 써보던 그 기자는 끝내 문필활동을 포기하고 행정일군으로 돌아 지금은 군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하고있다.

《좀 더 속도를 높이오.》

권형일은 벌써 세번째로 운전사를 다긋고있다. 속도계의 바늘이 파르르 떨며 수자 100을 넘어섰지만 성차지 않았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현지지도의 먼길에서 금시 돌아오실수도 있다. 사실 장군님의 현지지도로정이 모두가 신문, 방송, 통신으로 전해지는것은 아니다.

세상에 알려지는것보다 알려지지 않는것이 더 많다는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권형일이다. 우리가 처한 특수한 환경이 그렇게 할것을 요구하고있다. 특수한 환경, 준엄한 정세, 원쑤들의 끈질긴 고립압살책동… 그런속에서도 장군님께서는 어느 한시 비전향장기수들을 잊으신적이 없다.

장군님과 비전향장기수들!… 아직 세상이 다 알지 못하는 이 혈연적관계는 언제부터 시작된것일가?… 어제밤 장군님께서는 전화로 말씀하시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비전향장기수들이 몇명이나 됩니까?… 계속 알아보시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하여 어둠속에 묻혀있는 그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죽은 사람들까지 다!… 전에도 말했지만 어떤 일군들은 리인모로인을 데려오면서 시름을 놓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우리가 이겼다, 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을 시위했다! 라고 하는 립장이였습니다. 얼마나 협애한 립장인가, 제도의 우월성을 시위하기 위해 그 투쟁을 벌려왔는가?!… 이것은 우리의 도덕과 의리에 대한 문제인 동시에 조국통일위업과 결부된 의무와 책임에 관한 문제라고 내가 몇번이나 말했습니까.

생각해보시오. 우리 수령님께서 생전에 제일 마음쓰시며 괴로와하신것이 무엇이였습니까.

조국통일문건에 마지막으로 친필을 남기실 때 어떤 심정이셨겠는지… 수령님께서 남기신 이 숙제를 결단코 해결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떤 비전향장기수의 가족은 행방불명이라고 하는데 어쩌면 이럴수 있습니까. 말로만 부르짖었지 관심은 덜했습니다. 우리의 송환투쟁은 뜨거운 사랑만이 그 밑불로 되여야 합니다. 사랑으로 뜨거워진 심장만이 그들을 구원할수 있고 분렬의 장벽도 녹일수 있습니다. 내가 왜 이것을 자꾸 강조하는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비전향장기수라는 말이 생겨나기 썩 전부터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하였습니다. 학창시절에 조국통일을 위해 한생을 바칠 결심으로 투쟁에 나선 학우들의 아버지들도 보았고 수령님께서 돌아오지 못한 전사들때문에 밤새도록 찬이슬을 맞으며 정원에 서계시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통일애국투사들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고 어떻게하든 그들의 한생을 빛내주리라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렇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수십년전부터 그들을 마음속에 안고계신것이였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사람은 물론 오래전에 희생된 사람들까지 다 찾아주고 빛내주시려 그처럼 애쓰시는것이다.

누가 말했던가.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지만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그런데 장군님을 보좌하는 일군인 그 자신은 어버이의 그 높으신 뜻을 다 따르지 못하였다. 비전향장기수문제를 실무적으로, 하나의 의무로만 생각했었다.

사랑으로 뜨거워진 심장이 없었기에 렬차가 멎어서도 할수 없는것으로, 고난이 겹친다고 뒤로 미룰수도 있는것으로 생각했었다.

지난 여름의 일을 상기하자 저도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차창밖을 내다보니 사방 한산한 풍경뿐이였다. 숲을 흔드는 바람, 떼지어 날며 재깔거리는 참새무리, 먼곳의 다락밭에서 피여오르는 가느다란 연기며 듬성듬성 널려서있는 마른 강냉이대들… 웬일인지 목이 뻣뻣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는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다시는 장군님께서 심려하시게 하지 말자.

그래서 지금도 직접 차를 달리고있는것이 아닌가!…

송화군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은 한가성을 가진 50대의 대머리였다. 당중앙위원회 비서가 직접 자기를 찾아온것으로 하여 혀가 잘 돌아가지 않는듯 했다.

《예. 전화를 바- 받았습니다. 리재명동지의 수기를 제가… 오래전에 가- 가져다보았습니다.》

책상우에는 낡은 원고꾸레미가 놓여있었다. 권형일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한땐 작가가 되기를 희망했다지요?》

《예, 좀…》

《그런데 왜 포기했소?》

《저… 아무리 보아도 글재간은 없는것 같아서… 단편소설은 두어편 냈지만…》

《그건 그렇고.》 권형일은 원고꾸레미에 손을 내밀었다.

《이게 리재명동무의 수기겠소?》

《아니 저… 비서동지.》

사나이의 얼굴이 해쓱하니 질리였다.

《이건… 이건 영화문학원고입니다.》

《영화문학? 동무가 쓴거말이요?》

《예, 제가… 10년전에…》

《그럼 수기는? 리재명동무의 수기말이요.》

《저… 그건… 잃어졌습니다. 아니, 우리 집사람이 수매소에…》

《뭐- 요?》

대뜸 권형일의 얼굴은 이즈러졌다. 깊은 주름살이 넓은 이마를 파고지나갔다. 금시 터져나오려는 분노를 참고 견뎌내려니 숨이 차올라 퍼르데데해지기까지 했다.

《그걸 수매소에 가져가? 그게 어떤거라구.》

《저… 인민학교학생들이 쓰는 공책에다가… 너무 낡은 책들이여서 집사람이 그만…》

《그만하오!》

지그시 눈을 감으며 신음소리를 내뿜었다. 낡은 공책, 수매소, 집사람이요 하는 말들을 더 이상 참고 들어줄수가 없었다.

밖에서는 바람질이 세찼다. 공기창이 열렸다가 탕! 하고 닫기며 차고도 습한 바람을 몰아쳤다.

《제가 그만…》하고 부위원장이 중얼거렸다. 《잘 건사하지 못해서… 잘못했습니다. 사실 전화를 받을 땐 제가 쓴 원고라도 참고될줄 알구… 그 수기는 별루 볼게가 없었습니다. 그저 년도들과 전투지명, 날자와 이름들, 수자들…》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려쳤다. 아직 이렇듯 분노에 몸을 떨며 아래사람들한테 험악해진 얼굴을 맞대본적이 없는 그였다. 지명과 수자들, 이름뿐이라고? 사랑얘기도 없고 흥미진진한 전투담도 없고 별로 볼게가 없었다고?… 부리부리한 그의 두눈이 가늘게 좁혀지고 거미줄처럼 눈가에 퍼져간 주름살들이 떨렸다.

《동무, 그 낡은 공책에 숱한 영웅전사들의 공적이 적혀있소. 우리의 피어린 력사가 들어있단말이요. 그런데 동문 그걸 어쨌소. 주인한테도 돌려주지 않고… 그래 이따위 원고뭉치가 그 수기를 대신할수 있다고 보는가. 우리가 뭐 거기서 미문장이나 재미있는 얘기거리나 찾는줄 아는가. 피의 자취를 찾는거란말이요. 피의 력사를!… 그런데도 동문 자기가 쓴 원고는 고이 건사하면서도 그건 파지로 수매해버렸소. 어쩌문 그럴수 있소. 응?!》

손더듬으로 탁자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오한이 나는듯 어깨가 떨려났다.

《그게 언제요?》

《예?!》

《그걸 수매소에 가져간게 언젠가말이요.》

《저… 지난해 여름, 아니 가을이던지…》

《?!》

기가 막혔다. 마지막 일루의 희망도 무너져버렸다. 한손으로 가슴앞섶을 짓누르며 두툼한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당장 찾소. 수매소, 제지공장 할것없이 다 뒤지며 찾아내오. 알겠소?》

《…》

그가 무슨 대답을 할수 있겠는가. 권형일자신 그 어떤 대답도 기다리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서는 단 한번도 속도를 높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는것이다. 가슴을 우벼내는 회오와 자책의 아픔에 머리를 짓숙이고 시꺼매진 눈시울을 흠칫거릴뿐이였다.

누구를 탓한단말인가. 나는 왜 여태껏 거기에 주의를 돌리지 못했는가. 리인모로인을 데려오는 투쟁을 시작할 때 벌써 장군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비전향장기수들에 대한 자료를 모으라고, 한사람도 잊혀지거나 파묻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승용차의 발동소리와 포장길에 미츠러지는 차바퀴의 쓸림소리가운데 차창밖에서 부대끼는 바람소리만이 한동안 계속되였다. 권형일은 꽉 부르쥔 손마디들을 딱딱 소리내여 꺾으며 쓰라린 생각만 거듭하였다. 속은 그냥 떨려나고 굳어진 목대에서는 짜릿한 전률이 요동치군 하였다.

그때 굽인돌이 저쪽에서 무엇인가 번쩍이였다. 설핀 해빛에 차창이 번쩍인것이다. 그런데 고속도도로에 올라서는 승용차들이 범상치 않았다. 여러대의 차들이 울퉁불퉁한 낡은 길에서 속도높이 고속도도로에 들어서는데 보통차들이 아니였다.

《차를 세우오.》

혀를 깨문듯 한 소리였다.

차가 멎기 바쁘게 그는 밖으로 나섰다.

경적소리가 울렸다. 앞에 멎어서있는 차와 길가에 내린 권형일을 알아보는 웨침소린듯… 뒤늦게야 그는 머리숙여 달려오는 차들에 인사를 표했다.

승용차들이 아츠러운 소리를 내며 그의 옆에서 멎었다. 잠시후 어느 한 차문이 열리며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그를 부르시였다.

《비서동무, 어떻게 여기까지 나와있습니까?》

《장군님!》

그는 달려갔다. 그러다 우뚝 멎어서고말았다. 그이께서 타고 오신 승용차의 바퀴에 묻어있는 거무스레한 감탕과 거기에서 풍겨오는 알싸한 해감내를 느꼈다. 시창변두리와 차체의 여러곳에 끼여있는 뽀얀 먼지도 알아보았다.

《장군님, 노상 이렇게 험한 길로만 다니시니… 정말…》

이번에도 역시 그는 말끝을 잇지 못하고말았다. 그이께서 차에서 내려 가까이 마주 서시였다.

《왜 무슨 일이 있습니까. 신색이 좋지 않은걸 보니…》

그는 미간을 찡기며 가까스로 목에 걸린 침을 넘겼다. 그리고는 한때 작가를 희망했었다는 어느 알량한 중로배가 당에서 찾고있는 이전 지리산빨찌산 정치위원의 수기를 수매소에 가져갔다는 사실을 힘들게 말씀드렸다.

장군님께서는 잠시 아무 말씀도 없이 분노에 떠듬거리는 그를 지켜보시였다.

갑자기 권형일은 입을 다물었다. 자기가 지금 무슨 말씀을 올리는것인지, 그 누구를 빗대고 자신의 잘못을 감싸는것인지 별안간 깨달았던것이다.

바람이 차졌다. 어느새 해가 구름속에 파묻힌듯 사위가 어두워지기까지 했다.

《그런 사람들도 있지.》 마침내 그이께서 혼자 말씀처럼 뇌이시였다.

《도덕과 의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인사나 꾸벅꾸벅하는게 도덕인줄 알고 돈이나 꿔주는게 의리인줄 아는 사람들,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는 법이지. 그렇지만 비서동무, 자신보다 사회와 집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 많습니다. 아니, 절대다수라고 하는게 옳지… 어쨌든 더 알아봅시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걸 쓸모없는 종이뭉테기나 휴지로만 봤겠는가?…》

그이께서는 머리를 저으시였다.

한순간 권형일의 머리에 번쩍이는것이 있었다.

《장군님, 알겠습니다. 제가… 제가 다시 가보겠습니다. 그 수기원고를 끝까지 추적해보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뛰여다닌다고 해서 일이 되는것은 아닙니다. 더우기 동무야 당중앙위원회 비서인데… 사람들을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모두가 다 뛰게!… 이걸 잊지 마시오. 비전향장기수들을 데려오기 위한 일도 역시 같습니다. 수백수천만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그들이 목소리를 합치게 해야 합니다. 정의와 량심의 목소리가 함성처럼 터져나오게!… 어떻습니까. 그래서 지금껏 우리가 신문과 방송, 통신에서 떠들고 가능한 모든 국제인권단체들, 남조선의 민주화운동단체들이 적극 협력하게 노력해오지 않았습니까.》

《예, 장군님.》

《자 어서 떠납시다. 가서 군당을 통해 조직사업을 하시오. 그러되 그 낡은 원고가 왜 중요한가 하는걸 잘 말해주시오. 당에서 비전향장기수들을 생각하면서 살아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력사에 묻힌, 잊혀진 사람들, 죽은 사람들도 다 저 하늘의 별들처럼 빛내주려한다는것을!…》

《예, 알겠습니다. 경애하는 장군님!》

다시 차를 달리기 시작했다. 권형일은 부처님처럼 단정히 앉아 까딱 움직이지 않고있었다. 언제면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바라시는대로 그이의 높으신 뜻을 제때에 헤아려 잘 받드는 일군이 될수 있겠는가!… 눈굽이 젖어들고 가슴은 무엇때문인지 타드는듯 했다. 그처럼 고생많으신 장군님을 잘 받들지 못하는 죄책감이 그의 가슴을 숯불로 짓태우고있었다.…

전체 송화군당이 낡은 원고를 찾는 일에 떨쳐나섰다고 할가… 권형일은 감동되였다. 금은보화를 찾는 일이라 해도 그처럼 극성스럽지는 못할것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그 수기에 관심이 크시다는것을 알게 된 가두인민반원들, 학생소년들까지 지난해 여름에 수매시킨 낡은 공책들을 찾는데 동원되였다고 한다.

드디여 실마리가 잡혔다. 수매원이 기억을 파낸 끝에 지난해 8월 어느 날 한낮쯤 중년녀인이 파지를 수매시키러왔는데 마침 한 늙은이가 낡은 공책들에 《지리산》이라고 쓴것을 보고 찬찬히 뒤져보더라는것, 자기가 가져온 파지와 바꾸었던지 녀인을 설복시켰던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 공책들을 늙은이가 가져갔다는것을 확인했다. 그러면 그 늙은이는 어떤 사람인가? 수매원의 기억에 의하면 그 늙은이가 녀인을 나무라면서 《우리 로병들은 그렇게 생각질 않네!》 하더라는것이였다.

그리하여 군안의 전체 로병들을 장악하고 그들의 집을 찾았다. 전쟁때 근위서울 김책제4보병사단에서 싸웠다는 그 로병은 군당일군에게 어성을 높여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귀한 책을 수매소에 가져가도록 내깔려 두는 일군을 어데 쓰겠소. 그런 사람이 인민을 위해 일을 쓰게 할것 같소?》

사람들이 어서 책을 내놓으라고 하자 늙은이는 소리쳤다.

《내가 그걸 끼구 있어선 뭘하겠소.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해야지. 특히 젊은 사람들말이요. 전쟁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흘리며 싸웠는지, 어떻게 싸우다 죽었는지 알아야 할게 아니오?… 그래서 내 그걸 인민군출판사에 보냈소. 책으루 찍을가 해서… 헌데 아직두 책이 안나오는구만.》

수기는 결국 인민무력부사적관에 가있었다. 인민군출판사 편집일군들은 그것이 사적자료로 리용될 가치가 있다고 보았던것이다.

×

밤이 이슥해졌을 때 권형일은 여러 통일관계부문 일군들과 같이 경애하는 장군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서두르며 미리 준비해두었던 서류가방을 들었다. 그속엔 근래에 와서 알려지기 시작한 비전향장기수들에 대한 자료들이 있었다.

여러 일군들과 같이 서기실에 들어서자 서기가 권형일에게 조용히 귀띔했다.

《장군님께서 이제 4시간후면 초도로 떠나십니다. 될수록 시간을 지체하지 않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초도?!… 초도라면 서해상의 최전연에 위치하고있는 섬이다. 멀고 먼 현지지도의 길을 다녀오신 장군님께서 또 그처럼 멀고 위험한 최전연 바다길을 헤쳐가시다니?!… 그는 아무말도 못하고 커다란 손바닥으로 피줄이 툭툭 뛰는 이마언저리를 세차게 문질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누렇게 색이 바랜 공책들을 번져보고계시였다. 리재명의 수기가 분명했다. 오래전, 제일 어렵던 전후에 만들어진것같은 아이들의 학습장, 모두 여섯권쯤 되여보였다.

일군들이 들어서자 그이께서는 여느때처럼 반갑게 맞아주시였다.

《너무 늦게 찾아서 안됐습니다. 시간을 낼수 없어서 그리됐으니 곤하겠지만 몇가지 문제를 토론합시다.》

누구 한사람 입을 열지 못했다. 다른 일군들의 심정도 권형일 그와 다름이 없으리라.… 모두 조용히 자리잡고 앉았다.

장군님께서 드디여 말씀하시였다.

《얼마전 이 자리에서 토론하던 문제를 계속합시다. 다 알고있는것처럼 지난 19일 우리는 조선중앙통신사보도를 발표하였습니다. 다음날 20일부터 잠정적으로 판문점 우리측 련락사무소대표들을 철수하고 그 업무를 중지한다는것이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와 그 어떤 대화도 하지 않겠다는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김영삼역도의 〈남북페쇄정책〉에 대응한 실제적조치의 하나였습니다. 그새 우리는 〈대화중단〉선언을 규탄하는 드세찬 여론전도 벌렸습니다. 그런데 민족의 반역무리들은 어떻게 나오고있는가?… 오히려 더 악랄하게 전쟁도발소동을 벌리고있습니다. 서해상에서 미싸일타격훈련을 벌려놓고 미국과의 〈림팩97〉합동군사연습도 앞당긴다고 떠들고있습니다.》

그이께서는 가증스러운 역도들을 무자비하게 쓸어버리시듯 빠른 손세를 쓰시며 말씀을 이으시였다. 권형일은 사무치는 증오에 숨이 막혀버린듯 몸을 움쭉거렸다. 막 고함이라도 지르고싶은 심정이였다. 다른 사람들도 역시 분노에 질려 부스대고있었다. 손끝으로 서류철을 박박 긁고있는 사람도 있었다.

장군님께서 계속하시였다.

《이런 조건에서 우리는 지금 들고나가는 론조를 늦추지 말고 계속 도수를 높이며 강하게 추적전을 벌려야 하겠습니다. 김영삼일당의 반민족적인 죄행을 문제시하고 폭로분쇄하는데 중점을 두면서 〈보안법〉철페문제도 강하게 들고나가 김영삼〈정권〉이 〈문민정권〉이 아니라 파쑈폭압〈정권〉이라는것, 그래서 통일에 역행하는 대죄를 범하고있다는것을 만천하에 폭로해야 합니다. 이렇게해서 놈들을 고립시키고 파멸에로 몰아가면서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을 새로운 앙양에로 이끌어올리는데 힘을 넣어야 합니다. 기어이 놈들의 대결체제에 구멍이 뚫리고 통일의 앞길에 유리한 국면이 열리도록 순간도 공세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이께서는 이어 통일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기 위한 방략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모든 일군들이 그이의 말씀을 수첩에 옮기며 눈빛을 번뜩이고있었다. 한순간 권형일은 그이께서 《적들의 힘의 정책에는 무적의 힘으로 짓눌러버려야 한다》고 하실 때 머리를 번쩍 들었다. 서기가 《4시간후》엔 장군님께서 초도로 떠나신다고 하던 말이 번개불처럼 가슴을 태우는것을 느꼈다. 비로소 그이께서 최전연섬에까지 가시는 의미가 새롭게 안겨왔다.

《바로 이것이다!》하고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내게 다 생각이 있다고하실 때 바로 무적의 총대를 생각하신것이 아니겠는가!…》

모임이 계속되는동안 그는 줄곧 이 생각을 거듭하면서 가슴을 울렁이고있었다.

모임이 끝났을 때 장군님께서는 권형일에게 좀 남아달라고 하시였다.

《이 원고를 보시오.》 그이께서 말씀하시였다. 《비서동무가 애써서 찾아낸 리재명동무의 수기입니다.》

권형일은 그이께서 밑줄까지 그으며 보시던 낡은 공책들을 눈여겨 살폈다. 펼쳐져있는 페지에 가득 깨알처럼 작게, 촘촘히 박아쓴 글줄들이 그의 눈빛을 흐리게 했다. 이 수기의 필자가 먼 후날 경애하는김정일장군님께서 몸소 보아주시리라는것을 상상이나 할수 있었겠는가?… 그는 말라드는 입술을 감빨고나서 조용히 말씀드렸다.

《장군님, 제가 이걸 가지고가서 중요내용들을 따로 타자쳐 올리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내용들을 뽑는다는데… 나에겐 다 중요합니다. 품을들여 읽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그이께서는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계속하시였다. 《이 수기의 글줄들이 나에게 힘을 주고있습니다. 사실 내가 전선에서 전선으로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는것은 군대를 기둥으로, 주력군으로 삼고 오늘의 난국을 타개해나가는 한편 수령님의 유훈인 조국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조국통일을 생각하면 또 고통받고있는 통일애국투사들을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이 수기가 절실히 필요하고 힘도 얻게 되는것입니다. 비서동무도 이제 시간을 내여 읽어보시오. 그러면 비전향장기수들의 피어린 투쟁도 더 잘 알고 기어이 그들을 데려와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질것입니다. 그래서 비서동무를 남으라고 했습니다. 그럼 들어봅시다. 비전향장기수들을 데려오기 위한 사업이 어떻게 진척되고있는지.》

권형일은 서둘러 서류가방을 열다말고 자기의 머리속에 들어있는것들을 재빨리 정리해보았다.

이어 내외에서 벌리는 사업들과 남조선인민들속에서, 당국자들내부에서 일어나는 움직임, 국제적인 반향들을 보고드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김영삼역도가 〈남북페쇄정책〉을 선언한후 민주화투쟁을 탄압하는 도수가 높아진데 있습니다. 미제놈들과 한짝이 되여 전쟁소동을 피우자 비전향장기수들에 대한 사회적여론도 즘즘해지고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예, 제 생각엔… 여기서도 괴뢰도당의 비인간적만행을 적라라하게 폭로하는데로 여론을 집중시켰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다-》

《예, 장군님!》 권형일은 열을 올리며 계속 말씀드렸다. 《온 세계가 규탄하게 놈들의 비인간상을 폭로해야 할것 같습니다. 여기에 그 자료들이 있습니다.》

권형일이 서류가방을 열려는것을 그이께서 손을 들어 막으시였다.

《아니요. 그렇게만 생각해선 안됩니다. 비전향장기수들문제를 리념투쟁으로만 생각한다면 문제의 본질에서 탈선할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도주의적문제인 동시에 도덕의리에 관한 문제입니다. 리인모로인을 데려왔을 때에도 일부 사람들은 사회주의승리만세만 웨쳐댔는데 도덕의리문제로는 왜 생각하지 못했는가?… 진실로 뜨거운 동지적사랑이 부족했기때문입니다. 이자 비서동무도 남조선에서 비전향장기수들에 대한 사회적여론이 잦아들고있다고 했는데 이건 심중한 문제입니다. 이제 우리가 비전향장기수들문제까지 적을 폭로, 규탄하는데로만 나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명심하시오. 그런데만 열중하고 신바람이 나하면 우리의 근본립장에서 탈선하게 된다는것을!…》

권형일은 끓는 물을 들쓴듯 했다. 조국통일과 관련하여 지금껏 장군님께서 말씀하신것을 되새겨보며 머리에 꽉 차는 죄책감에 신음했다. 그렇다. 그는 하나만을 생각했었다. 민족반역의 무리를 고립시키는것과 동시에 수천만 남녘인민을 새롭게 일떠세워야 한다는것을 망각하고있었다.

장군님께서는 그의 심중에서 고패치고있는 생각을 읽으신듯 했다.

《비서동무, 우리가 판문점 우리측 련락사무소대표들을 철수하면서 왜 잠정적이라는것을 강조했는지 잘 생각해보시오. 조국통일문제는 물론 비전향장기수들을 데려오는 문제를 리념의 시위로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한시도 미룰수 없는 절박한 문제이기때문에 역도들을 때리면서도 가능한 모든 민주력량을 결속하고있는것입니다. 그러자면 최대한 국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러면 현 단계에서 우리의 국력은 어데서 과시되여야 하는가?… 총대가 든든해야 합니다. 모든것이 총대에 의하여 좌우지됩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면서 결심한 선군정치방식입니다. 아직은 내놓고 말하지 않지만 두고보시오. 우리가 선군혁명령도를 줄기차게 내미는한 비전향장기수들도 다 데려오고 〈고난의 행군〉도 승리적으로 결속지을것이며 조국통일의 그날도 앞당겨질것입니다.》

권형일은 이루 말할수 없는 격동에 휩싸여 가슴을 풀떡거리고있었다.

그때 서기가 방에 들어섰다. 그런데 그의 낯빛이 이상했다. 훤칠한 키에 굳센 아래턱으로 하여 꿋꿋한 인상을 주는 그였으나 지금은 웬일인지 괴로움에 신음하는 표정이였다.

그이께서 물으시였다.

댓글목록

profile_image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무슨 일이요?》

《저… 시간이…》 하고 서기는 입술을 깨물며 말씀드렸다. 《초도로 떠나셔야 할 때까지 한시간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아, 벌써 그렇게 됐는가?》

그이께서는 처음으로 시계를 보시였다.

서기가 또 힘들게 말씀드렸다.

《그리고 기상수문국에 알아본데 의하면 오늘 밤부터 서해상에서 폭풍이 예견된다고 합니다.》

《폭풍이? 그거 참 멋있겠구만. 정치기상도만 사나운줄 알았더니 자연계에서도 폭풍이란말이지. 그렇다면 또 뚫고나가봅시다.》

그이께서 롱조로 말씀하시자 서기는 울상이 되였다.

《장군님, 위험합니다. 이번만은 일정을 연기했으면 합니다.》

드디여 그이께서는 다시 근엄한 표정을 지으시였다. 잠시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리신후 결연히 말씀하시였다.

《내가 이미 말했지만 난 빨찌산의 아들이요. 폭풍을 헤쳐오는데 습관되여있단말이요. 걱정할건 없소. 폭풍이야 늘 있기마련인걸.》

《장군님!-》

서기와 동시에 권형일도 목메여 이렇게 부르짖었다. 흐느낌소리가 더 많은 안타까운 마음의 분출이였다. 그러나 장군님께서는 벌써 아까 보시던 리재명의 수기를 또 펼치고계시였다. 폭풍사나운 바다길을 헤쳐가실 때까지 그 수기를 마저 보시려는듯 했다. 조국통일과 비전향장기수들에 대한 아픔을 안으시고 그이께서는 어느새 깨알처럼 작게 쓴 글줄들을 더듬고계시였다.


서비스이용약관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상단으로


Copyright © 2010 - 2023 www.hanseattle1.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