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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 연재-81]마샬 군도와 나우루:미국의 핵실험장과 착취대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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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슴도치
댓글 0건 조회 6,202회 작성일 11-12-11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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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81]마샬 군도와 나우루:미국의 핵실험장과 착취대상



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81번째와 82번째 나라들로서 남태평양 미크로네시아 지역의
마셜 군도와 나우루 섬을 다뤘다. 그는 이 나라들도 역시 미국의 희생물이 되었다고 지적하며 "절대 미국
협정 믿지 말라"고 강조한다. 특히 미국은 67차례나 마셜 군도에서 핵시험을 하는 동안 핵시험 주변
주민들을 번번이 완전히 대피시키지 않았으며 또 방사능이 다 사라지기도 전에 주민들이 핵시험을 진행한
고향 섬에 들어가 살 때 이를 말리지 않은 것은 핵 방사능이 사람들에게 어떤 피해를 끼치는지 관찰하기
위한 현대판 생체실험과 다를 것이 없는 잔인한 행위들도 발견되었다.미국은 그 어떤 보상도 해주지 않았고,
이곳 사람들을 실험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군을 불법적으로 주둔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유태영 박사의 81번째와 82번째 나라들에 관한 연재글을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81]

마샬 군도와 나우루:미국의 핵실험장과 착취대상



*글: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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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유태영 박사
남태평양 미크로네시아 지역에는 마샬 군도와 나우루 섬 나라를 비롯하여 팔라우, 키리바시, 미크로네시아 연방국 등 5개 나라들이 있다.이 글에서 마샬 군도와 나우루 2개 나라에 대하여 살펴본다.

마샬 군도는 화산의 폭발에 의하여 바다 수면에 가라앉은 산호섬들로 이루어진 섬나라이다.마샬 군도는 29개의 산호섬과 5개의 섬들이 국토의 주요한 부분이며 그 외에 약 1,225개의 크고 작은 유인도와 무인도 섬들이 마샬 군도의 해역 750,000km²의 광활한 해양 안에 흩어져있다.

마샬 군도는 하와이 주에서 남서방향으로 3,200km 떨어져 있고 괌 섬에 남동쪽으로 2,100km 떨어져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의 면적은 180km²에 지니지 않으며 미국의 워싱턴 DC 정도되는 땅에 인구 6만 8천명이 살고 있다.


1. 마샬 군도의 간추린 역사


BC 5000년경부터 동남아시아에서 사람들이 이동하여 마샬 군도에서 살고 있었다. BC 30 – AD 50년경의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지방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긴 카누를 제작하여 항해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마샬 군도의 고대역사에 대하여 통일된 역사적 기록이 남겨진 것은 전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광대한 해양지역에 흩어져있는 크고 작은 많은 섬들은 각 섬마다 독자적으로 추장들이 수천 년 동안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러 섬들에서 제 각기 혈통과 씨족의 집단을 형성하여 살아가고 있었다.


1494년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마샬 군도에 접근한 유럽인은 스페인의 해양 탐험가였다. 스페인 탐험가는 이른바 을 맺고 명목상 마샬 군도의 소유권자가 됐다. 하지만 그 때 당시 스페인의 무역에 있어서 주로 남미 지역을 중요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샬 군도는 스페인의 관심 밖에 있었다.


1525년에 스페인의 sala de Alonso가 마샬 군도를 스페인의 식민지로 확정하였다. 1526년에 스페인의 함선 Santa de Victoria가 상육했고 1529년에 계속하여 스페인의 함선 Florida호의 선장 Saavedra가 마샬 군도에 상륙했다.


그는 3, 4개 섬들을 돌아다니면서 섬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과 접촉하여 친밀한 교제를 하면서 선물을 교환했을 뿐만 아니라 그 섬들의 이름을 작명하기도 했다.

1530년에 스페인의 함선 Florida호의 선장인 Saavedra가 작명한 섬들의 이름은 분명히 Ujelang섬, Eniwetok섬 그리고 Bikini섬들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Bikini섬과 Eniwetok섬에서 훗날에 미국이 핵실험을 67번이나 했다는 사실이다.


스페인의 남태평양 탐험가들과 침략자들이 그 때 당시 남미의 페루와 그 외 남미의 여러 지역과 식민지 교역을 하고 있었는데 마샬 군도는 그들이 남미와 교역을 하는 통로 교차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 후부터 약 200년 동안 마샬 군도는 스페인의 식민통치하에 있었지만 특별한 역사적 자료로서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200여년의 세월이 흘러간 후에 1788년에 영국인 John Marshall이 이곳에 출현했는데 이 때 부터 이 지역의 군도를 Marshell <마샬 군도>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됐는데 아마 이때부터 영국이 마샬 군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1788-1878년에 이르는 90년 기간에 마샬 군도에서 러시아와 프랑스가 관여를 시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영국이 막대한 영향력으로 마샬 군도를 단독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국제사회(International Community)는 마샬 군도에 대한 주권은 스페인에게 있다고 인정했다. 왜냐하면 1494년에 최초의 스페인 탐험가와

원주민 사이에 을 맺은 역사적 기록이 있기 때문에 국제사회는 마샬 군도에 대한 스페인의 주권을 인정하고 스페인의 손을 들어 주었던 것이다.


영국은 90년 동안이나 마샬 군도에서 좌충우돌하면서 주권행사를 했지만 하는 수없이 마샬 군도에서 물러나게 됐다. 영국의 어쩔수 없는 동의를 획득한 스페인은 마샬 군도에 대한 주권을 다시 회복하여 식민지 종주국의 주권행사를 하게 됐다.


1878년에 스페인은 마샬 군도에 대한 주권을 완전히 회복했다. 하지만 스페인은 그 당시 국내와 국제적으로 국력이 점점 쇠퇴해져 독일에게 마샬 군도의 주권을 1884년에 팔아 버리는 약소국이 되고 말았다.


마샬 군도의 민중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처지에서 새로운 종주국이 된 독일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마샬 군도는 1884년에 그리고 뉴기니아는 1885년에 모두 다 독일의 식민지가 됐다.


1884년에 독일의 식민지가 된 마샬 군도는 1919년에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 패전할 때 까지 35년 동안 독일의 식민지 통치를 받았다.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결과 일본이 남태평양 제도에서 기회주의적인 승전국이 됐다. 독일이 35년 동안 식민통치를 하던 마샬 군도를 포기하

고 떠니간 후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굶주린 짐승 모양 마샬 군도에 점령군으로 등장하여 주둔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친 유럽 편에 가담하여 남태평양에서 기록적인 전과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19년 6월 29일에 점령군이 되어 마샬 군도에 주둔하여 최악의 통치를 했다.


일본 본토의 좁은 땅에서 인구과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본은 1,000명의 일본인들을 마샬 군도의 작은 섬들로 이주시켰다. 마샬 군도의 작은 섬들은 외국인이 본토인보다 더 많은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일본인들이 섬에 다수가 되는 이변이 발생했다.


일본의 침략적 통치는 마샬 군도의 사회적 전통을 파괴하고 강압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적 사회제도로 개조하려함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일본 군정은 마샬 군도에서 일본식 교육방법으로 일본어와 일본 문화교육을 전국적으로 강요했다. 뿐만 아니라 마샬 군도 작은 섬들에 일본군 공군 기지를 건설하여 훗날 제2차 세계대전 때 중요한 요새로 사용하였다.


어쨌든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마샬 군도에서 1919년 6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26년 동안 식민통치를 강행하여 마샬 군도의 민중들에게 막대한 고난과 비극을 안겨 주었다.


2. 제2차 세계대전과 미국의 식민통치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공격을 시작하여 일본과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그 때 당시 마샬 군도는 일본의 통치하에 있었음으로 마샬 군도의 섬들은 일본 해군의 기지로 사용되고 있었다. 1944년에 마샬 군도는 미국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아 일본의 해군 기지들은 곧 파괴되고 말았다. 마샬 군도는 어느새 미군이 점령하여 미국의 통치지역으로 변화되고 말았다.


1942-1043년 2년 동안에 마샬 군도는 치명적 파괴를 당했으며 사람들은 부상과 식량난으로 최악의 곤경에 빠져 있었다. 1944년 1월에는 마샬 군도의 중요한 섬들은 거의 전부가 미군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1943-1944에 일본군 5,100중에서 절반 이상의 군인들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이 끝남으로 그 25년 간 가혹한 식민통치를 행한 일본인들은 씨도 없이 마샬 군도에서 살아져 없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마샬 군도는 또 다시 UN의 깃발아래서 <남태평양 전시 공동 관리구역>에 예속되어 미국의 보호령이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됐다.


마샬 군도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해방이 아니라 또 다시 35년의 기나긴 세월동안 미국의 보호령과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1979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처음으로 자치독립국이라는 명칭 하에서 <마샬 군도 공화국>이 됐다. 마샬 군도 공화국은 의회를 구성하고 선거를 실시하여 초대 대통령을 선출했는데 일본인 2세가 초대대통령으로 선출됐다.

Amata Kabua초대 대통령은 아버지가 일본인이고 어머니가 현지 원주민이었다.


마샬 군도가 서방의 열강들의 침략과 일본의 침략을 받은 비참한 역사를 연대순으로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스페인의 침략과 Todesilraseu 조약, 1494 – 1788년 (294년간)

영국인 John Marshall 이후 영국의 참략, 1788 – 1874 (86년간)

독일의 식민지 통치, 1884 – 1919년 (35년간)

일본의 식민지 통치, 1919 – 1945년 (26년간)

미국의 핵실험과 보호령, 1945 – 1979년 (34년간)


극히 단편적인 자료이기는 하지만 독일이 마샬 군도에서 식민통치를 시작한지 2년 후인 1884-1886년에 코프라(코코넛 과육을 말린 것) 수출이 900톤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1886년 그 때 당시 마샬 군도에는 독일인 91명과 영국인 29명이 상주하면서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영국과 독일이 마샬 군도에서 막대한 착취를 행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1884-1886년에 코프라 수출이 900톤이었다는 자료 하나만을 가지고도 영국과 독일의 착취와 농노들의 고역들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3. 제2차 세계대전후 미국의 핵실험에 대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냉전시대가 시작됐다. 냉전시대의 시작은 핵무기 개발과 실험을 동반했으며 급속도로 동서 분렬과 대결의 시대가 곧 시작됐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폭탄은 이미 구시대의 산물이 됐으며 해 마다 새로운 핵무기가 개발되고 핵실험을 경쟁적으로 계속하고 있었다.


1998년에 발표한 그 때 당시의 핵실험의 통계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미국 1,030번, 러시아 715번, 프랑스 197번, 영국 45번, 중국 45번, 인도 3번, 파키스탄 2번.

1996년 9월에 UN 군축위원회는 핵실험을 금지하는 협정안을 제출하여 UN전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하지만 그 때 당시 미국의 다수당인 공화당은 UN이 채택한 핵실험금지 협정안에 대한 국회비준을 거부했다.


미국은 1945년부터 1988년까지 43년 동안에 지상과 지하 그리고 수중 핵실험을 포함하여 총 930회 이상 핵실험을 감행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지면상 제한으로 미국의 방대한 930회 핵실험에 대한 전체를 론증할 수 없음으로 다만 마샬 군도 비키니 (Bikini) 섬과 에네웨탁 (Enewetak) 섬을 비롯

하여 6개 섬에서 1946년 7월 1일부터 1958년까지 12년 동안에 67번 핵실험을 실시한 참혹한 역사적 현장에 대하여 극히 간략하게 살펴본다.


미샬 군도에서 12년 동안 67회 핵실험을 감행한 현장에 대하여 살펴보는데 있어서도 역시 너무 많은 엄청난 자료들이라 부득불 ㄱㄴㄷ 순으로 간추려서 기록한다.


ㄱ. 1954년 3월 1일에 비키니 섬에서의 첫 핵실험을 했는데 그것은 “브라보” 수소폭탄 시험이었다. 이 “브라보”의 폭파력은 15메가톤이었다. 1마일의 구덩이가 파졌으며 3마일이나 되는 큰 불덩어리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이 “브라보” 수소폭탄은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한 폭탄의 “1,000배” 에 해당하는 강력한 폭발력을 지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비키니 섬의 주민들이 3일 전에 피난하여 다른 섬으로 강제 이동을 하기는 했지만 일부 주민들이 핵실험을 하는 당일에 아직도 그 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비키니 섬에 그대로 남아 있던 주민들이 심한 화상과 머리털이 빠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도 미국의 핵실험 담당자는 “화상은 없으며 주민들의 건강은 양호하다”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의 말을 하려고 하면 “군사기밀”이라고 하여 일절 말을 하지도 못하도록 위협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건은 비키니 섬에서 뿐만 아니라 마샬 군도의 8개 섬에서 67번이나 행한 핵실험 현장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였다.


ㄴ. 마샬 군도의 8개 섬에서 12년 동안 67번 핵실험을 했는데, 마샬 군도에서 폭발된 핵의 폭발력은 총 108메가톤이었다.

이 폭발력은 히로시마의 7,200개에 해당된다. 그러면 미국 전체로 930번의 핵실험을 했는데 미국 전체의 핵실험의 총체적인 핵폭탄의 폭파력은 도대체 얼마나 되는가? 그것은 대략 174메가톤이었다.


마샬 군도에서 67번 실시한 핵실험의 폭발력은 미국 전체 930번 핵실험과 비교하면 14%정도에 불과한 소량의 핵실험이었다는 것이다.

냉전 시기 미국은 이와 같은 야만적인 핵실험을 자행하면서 세계 최대의 강국이 된 것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UN 깃발을 앞세우고 전 세계의 약소국들에게 “평화의 사도”라고 하는 위선을 선전하고 있었다.


ㄷ. 핵폭탄의 방사능 위험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마샬 군도의 주민들은 핵실험 후 1969년에 그들의 고향집이 너무 그리워 모두 서둘러 귀가를 했다. 비키니 섬을 비롯하여 8개의 섬사람들은 집에 돌아와 부지런히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하고 여자들은 밭에서 채소를 심고 가꾸는 일을 열심히 하였다.


미 군부는 비키니섬에 아무 위험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군 “핵 위원회, AEC”는 핵실험을 시행한 섬에 주민들이 귀가하는 것은 핵 노출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1972년에 미군 “핵 위원회”는 발표하기를 ‘비키니 섬으로 주민들이 돌아가는 것을 반대한다. 하지만 주민들이 돌아가는 것을 강압적으로 저지하지는 않는다.’라고 매우 어정정하고 일종의 책임 회피적인 발표를 하고 있었다.


미국이 핵실험을 행한 섬들에서 방사능 노출로 인하여 사망자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당시 의과대학에서 공부하던 유학생인 제토 안제일이 고향 섬으로 돌아왔다.


제토 안제이는 치과의사가 되여 고향 섬으로 돌아왔는데, 돌아와 보니 섬 사람들이 모두 다 핵 방사능 노출로 죽음에 이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또 제토 안제이는 핵 방사능에 대하여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고 있는 미국에 대하여 분노했다.


“미국은 굉장히 큰 나라인데, 왜 자기네 나라 땅에서 핵 실험을 하지 않는가? 그것은 방사능이 사람에게 위험하기 때문 아닌가?”


제톤 안제이는 1975년에 미국 워싱턴을 방문하여 국회 의사당에서 정치인들에게 마샬 군도의 비참한 모습을 낱낱이 전달했다. 그는 또 로비스트들과 법률 전문가들을 만나 눈물의 연설로 호소를 했다.


제톤 안제이의 공로로 인하여 미국의 “핵 위원회, AEC”는 행동을 시작하였다.


핵 위원회는 <마샬 군도의 핵 방사능 오염 현황>에 대한 보고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했다. 미국 정부는 AEC가 제출한 보고서를 받고도 4년 동안 비밀로 하면서 비공개 문서로 보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4년 후인 1982년에야 비로서 AEC 보고를 공개했다. 미국정부도 상황이 급해지는 것은 느끼고 마샬 군도에 대하여 보상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욱 기막힌 사실은 마샬 군도의 대통령과 의회가 그 때까지 취하고 있던 태도이다. 마샬 군도의 대통령과 장관들과 의회의 의원들은 문제의 심각성에 대하여 전혀 인식을 하지 못하고 오직 미국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감히 보상 문제에 대해서는 토론하는 것조차도 발의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ㄹ. 마샬군도에 미국의 핵실험으로 인한 질병이 공개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1966년부터이며, 미국의 의사들이 사실을 입증을 했다.


미국 의회는 1966년에 비로소 처음으로 <호의적 지원금 95만 달러>를 마샬 군도 피해자들에 지불할 것을 결의했다 .<호의적 지원금>이란 무슨 말인가?


1973년에 이르러서 핵 실험을 행한 8개 섬뿐만 아니라 인근에 있는 여러 섬들에까지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사망자들이 대량으로 속출하고 있었다. 미국의 AEC는 마샬 군도의 토양과 바다의 고기잡이까지도 방사능 노출 위험성이 있다고 추가로 발표했다.


핵실험 후 20년이 지나 1975년에 마샬 군도 정부는 최초로 미국정부를 향하여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출했다.


1976년에 미국 의회는 섬의 방사능 “오염제거 비용”으로 2천만 달러를 승인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피해보상을 하는 문제는 아직 아무 말이 없었다.


1977년 5월에 미국은 700명의 군인을 동원하여 방사는 오염지역에서 오염제거 작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그리고 7월에는 미샬 군도의 핵실험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으로 $1million을 의회가 승인했다. 23년만에 처음이었다.


1978년에 미국은 비키니 섬의 주민 139명을 비키니 섬에서 완전히 떠나 다른 섬으로 이주하여 새 곳에 정착하도록 강요하고 그 비용으로 $6million을 책정했다.


미국의 강요로 강제로 이주를 당한 비키니 섬 사람들은 1981년 미국 정부에게소송을 제기하여 보상금 $450million을 요구했다. 미국 정부는 비키니 섬 사람들의 소송을 즉각 거부하면서 타협안으로 $2-$9million 정도의 보상을 1980년대 말에 가서 그때 고려하겠다고 회피성 답변을 했다.


뿐만 아니라 마샬 군도 전체의 피해보상을 위하여 <변호사 국제계획, Attornys for Atomic Testing Litigation Project>는 미국 정부에게 $4billion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 했다. 이와 같은 소송들이 계속 제기되어 미국은 큰 곤경에 빠지게 됐다.



ㄷ. 미국은 마샬 군도 보상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 마샬 군도 사람들의 요구뿐만 아니라 세계적 여론도 피할 수 없다고 염려를 하게 됐다.

그리하여 미국은 보상을 위한 소송문제를 근본적으로 봉쇄하고 정치적으로 미국이 유리한 조건에서 보상 문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미국이 고안해 낸 해결방법을 <자유연합협정, Compact of Free Association>이라고 부른다. 이 <자유연합협정>의 골자는 다음의 두 가지가 기본이다.


1)피해보상을 적절한 방법으로 제공해준다.

2)피해보상을 위한 법정 소송을 절대로 금지한다.


미국은 우후죽순 계속 제기되고 있는 피해보상 소송을 원천 봉쇄하기 위하여 <자유연합협정>을 고안해 냈던 것이다.


어쨌든 미국은 마샬 군도 공화국에게 4가지 조건을 제시하여 <자유연합협정> 체결을 유도하여 보상문제를 해결하려고 머리를 굴렸다.


첫째, 마샬 군도 공화국을 UN에 가입시켜 준다.

둘째, 핵실험에 대한 피해보상을 적절히 제공한다.

세째, 마샬 군도 공화국의 국민들에게 “미국 여권”을 발행해 준다.

네째, 위의 세 가지 조건의 대가로 미국은 계속하여 마샬 군도에서 제한 없이 군사기지를 확보하고 미국은 마샬 군도의 국방을 책임진다.


마샬 군도 사람들은 순진한 마음으로 미국의 약속을 그대로 믿고 1983년에 국민투표로 미국이 제시한 <자유연합협정>을 받아드렸다. 하지만 <자유연합협정>은 2003년에 통과시켜 놓고 실제로 유효한 시기는 3년 후인 1986년 1월부터라고 못을 밖아 놓음으로서 미국은 지연작전을 교묘히 사용하고 있었다.


미국의 핵실험을 1945년에 시작했는데 핵실험에 대한 피해보상은 41년이 지난 후 1986년에야 비로서 처음 보상을 받게 된 것이다.


그 동안에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들은 아무 보상도 없이 방사능 오염에 희생되어 죽어갔다.


ㄹ. <자유연합협정>에 의하여 1986년부터 마샬 군도에 제공하기로 약속한 미국의 보상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1년에 $150 million를 15년 동안 제공한다. 1986-2001년까지 총 $276 million을 보상해 준다.

2. Nuclear Claim Tribunal을 창설하여 1991-2003년까지 12년 동안 1년에 $83million을 제공한다.

3. 위의 보상금을 ‘핵 오염제거, 파괴된 시설 재건, 도로와 공동 건물건설 그리고 마샬 군도 사람들을 위한 구호’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미국은 1983년에 <자유연합협정>을 맺고 1986년부터 유효한 협정을 헌신짝 버리듯 포기하고 협정을 다시 개정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은 2004년에 <자유연합협정 개정안>을 들고 나와 마샬 군도 공화국 정권을 압박하여 비열한 방법으로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미국이 강요한 <자유연합협정 개정안>에 의하면 미국에게 불리한 조항들은 모두 다 빼버리는 <개정안>이다. 그리고 마샬 군도의 민중들에게 부담이 되고 불리한 조항들은 그대로 존속시키는 악의적인 “개정안”이다.


<개정안>의 한 조항을 보면 <미샬 군도 국민에게 US 여권을 발행해 준다>라는 조항이 엄연히 있다. 그런데 이 조항을 교묘하게 개정하여 <마샬 군도 국민들은 자국의 합법적인 여권을 소지한다>라고 개정을 했다.


미국에게 유리한 조항들은 그대로 두고 미국에게 불리한 조항들은 “개정안”이라는 명목으로 2004년에 모두 다 제거했던 것이다.


마샬 군도 공화국의 제4대 대통령으로 2008-2009년에 Litokwa Tomeing 대통령이 집권을 했다. Tomeing 대통령은 미국이 <자유연합협정>을 어기고 핵실험 보상금을 3년 동안이나 전혀 지불하지 않음으로 마샬 군도 인민들은 여전히 고난 속에 빠져 있다고 분명히 밝혔다.


Tomeing은 미국의 부당한 간섭을 반대하고, 미국이 약속한 보상금 지급협정을 지키지 않는 것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리고 또 Tomeing 대통령은 중국과의 외교를 강화하여 Beijing을 친히 방문했다.


이와 같은 Tomeing 대통령을 미국은 좋아하지 않았다. Tomeing 대통령은 미국의 미움을 받아 2008년 1월 14일부터 2009년 10월 21일까지 1년 10개월간 집권을 하고 퇴임당했다.


Tomeing 대통령이 1년 10개월 동안 집권을 하고 도중에 퇴임을 당한 이유는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항의를 한 유일한 대통령이기 때문이었다.


마샬 군도는 1979년에 독립하였는데 현재 제5대 대통령으로 Jurelang Zedkai 대통령이 2009년 11월부터 집권하고 있다. 초대 대통령과 제2대 대통령은 일본인 2세와 3세가 계속하여 마샬 군도의 대통령으로 장기 집권을 했으니 미국의 보상을 하나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샬 군도의 독립 초기부터 일본인 2세와 3세가 첫 출발부터 큰 잘못을 했으니 마샬 군도의 정권이 미국의 하수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마샬 군도의 War Games의 저자인 David Kattenburg의 글 몇 구절을 소개한다.


“마샬 군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군 기지의 화려한 Country Club에서 불과 12분 뱃길 가까이 있는 Elbye 작은 섬에는 핵실험의 희생자들이 다른 섬들에서 부터 몰려와 몇 십 년 째 함께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물도 부족하고, 전기도 물론 없고, 학교와 병원도 없으며 먹을 것도 늘 부족하여 굶주리며 겨우 살아가고 있다....
미국에 핵실험 보상금 $570million를 요청했다는 소리는 요란한데 이곳 Elbye 섬의 희생자들에게는 왜 어찌하여 아무 상관이 없을까?”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마샬 군도가 핵실험 보상금을 미국으로 부터 그 얼마를 받았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마샬 군도가 받은 그 보상금의 몇 십 배를 미국이 이스라엘에게 해 마다 제공해 주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4.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나우루의 간추린 역사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인 나우루 공화국은 면적이 8km² 에 불과하여 여의도 섬의 2.5배 되며 인구는 13,000 명이다. 남태평양 넓은 바다에서 눈에 잘 뛰지도 않는 나우루는 호주에서 비행기로 7시간 거리에 있다.


나우루 섬에 3,000년 전부터 동남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12부족들이 함께 모여 원시적으로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나우루 원주민들은 물고기와 풍성한 열매와 과일로 자급자족하면서 느긋하고 낙천적인 성향을 가지고 대대손손 싸움을 모르고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1798년에 유럽인이 중 나우루 섬에 처음 상륙한 사람은 영국인 존 페안, John Fearn 이었다. 존 페안은 고래잡이와 무역을 하는 큰 배의 선장이었는데 나우루 섬에 상륙하여 아름다운 섬의 자연풍경과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낙천적 삶의 모습에 감동되어 섬의 이름을 <기쁨의 섬, Pleasant Island> 라고 작명을 했다고 한다.


그 후로부터 30여년이 지난 후 1830년경부터 아름답고 평화로운 <기쁨의 섬>을 향하여 영국에서부터 탐욕과 방탕의 물결이 폭풍처럼 사정없이 불어 닥쳐왔다.


그 때 당시 나우루 섬 근방으로 항해하던 배들은 주로 고래잡이배와 노예무역을 하는 배들이었다. 그런데 그 많은 배에서부터 탈출한 도망자들이 무작정으로 나우루 섬에 마구 상륙하여 도망꾼들의 피난처와 안식처가 되고 있었다.


이들 도망자들의 대부분이 영국에서 범죄 전과자들이었다고 한다. 이들로 인하여 평화롭고 기쁨이 넘쳐흐르던 나우루 섬에는 10년 동안에 술과 담배와 그리고 화약을 터트리는 총포가 넘쳐흐르게 되었다.


술과 담배, 총포는 곧 나우루 섬에서 대대손손 평화롭게 살던 12부족을 4분5열로 갈라놓아 서로 싸우도록 만들어 놓았다. 뿐만 아니라 그 때 유럽인들 중에는 독일인들이 다소 있었는데 독일인들은 영국인들과의 경쟁을 위하여 독일 정부에 요청하여 많은 무기를 이 섬에 들여왔다.


여의도 정도의 8km² 좁은 땅, 작은 나라 나우루에서 내전이 발생하여 1878년부터 1888년까지 10년 동안 원주민 부족들 사이에서 치열한 전쟁이 계속됐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영국인과 독일인들이 뒤에서 부추긴 내전이었다.


이 10년간의 내전으로 인하여 그 때 당시 1,400명이던 나우루의 총인구가 900명으로 감소됐다고 한다.


나우루의 내전은 10년 후에 독일 편의 승리로 끝났다. 독일은 1888년에 나우루 섬을 마샬 군도와 합병을 시켜 놓고 식민지 통치를 자행했다.

영국은 나우루 섬을 손에 넣은 지 95년만에 독일에게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나우루 섬이 95년 동안 영국의 통치를 받고 있을 때 영국의 기독교의 선교사들과 Catholic 선교사들이 이 작은 섬에서 선교활동을 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독일이 나우루에서 식민통치를 시작하는 복잡한 역사적 변동시에도 여전히 유럽의 선교사들은 나우루 섬에 상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선교사에 대한 솔직한 평가와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은 1888년에 나우루 섬을 식민지로 삼았으며 26년 동안 식민지 통치를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어 영국과 호주의 연합군이 1914년에 나우루 섬을 전격 점령하였다.


독일은 나우루 섬에서 식민통치를 26년 동안 했는데 제1차 대전이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1914년에 패전국이 되어 초라한 모습으로 나우루 섬에서 쫓겨났다.


1919년에 제1차 대전이 완전히 종식된 후 영국과 호주 그리고 뉴질랜드 3국은 전격적으로 를 만장일치로 창설했다고 한다.


이 BPC의 창설로 인하여 나우루 섬의 역사는 이른바 <나우루의 비극의 역사>로 바뀌기 시작했다.

나우루섬의 비극의 역사에 대하여 “혁명의 세계사”의 저자인 박남일 씨는 이렇게 표현했다.

“지상낙원 나우루공화국…지옥이 되기 까지”

지상낙원 나우루공화국이 지옥으로 몰락한 과정에 대하여 지면상 제한으로 대략 간추려서 ㄱㄴㄷ 순으로 살펴본다.


ㄱ. 나우루의 섬 지표면 전체에 고품질 인광석이 무진장 덮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서구의 야만인들은 무섭게 나우루 섬에서 인광석 쟁탈전을 벌리고 있었다. 나우루 섬에서 독일을 몰아내고 영국, 호주, 뉴질랜드가 성급하게 BPC를 창설한 이유도 바로 인광석을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땅을 파기만 하면 나오는 고품질의 인광석에는 핵의 원료인 우라늄과 고급비료의 원료가 포함되어 있음으로 파내기만 하면 곧 달러가 된다. 그것만을도 나우루 섬은 세계에서 쿠웨이트 다음 두 번째 부국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BPC에게 불행하게도 제2차 세계대전이 1940년에 시작됐다. 전쟁이 시작되자 독일이 다시 나우루 섬에 돌아왔으며 이번에는 1942년 8월에 일본까지 합세하여 나루섬을 완전히 점령했다.

독일과 일본은 제2차 대전이 끝남으로 1943년에 나우루 섬에서 모두 떠나 갔다.


하지만 전쟁으로 나우루 섬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일본군에게 징용으로 끌려갔던 원주민 1,200면 중에서 겨우 737명이 살아서 돌아왔는데 이들을 두 합한 1946년에 나우루 섬의 총 인구는 1,369명뿐이었다.

1947년에 UN의 깃발을 들고 BPC는 또 다시 나우루에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국이 BPC를 앞세워 놓고 나우루 섬을 UN의 보호령으로 만들어 놓았다.



ㄴ. 지령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던가? UN의 보호령이 되어 BPC에게 귀중한 자원인 막대한 량의 인광석을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을 나우루섬 사람들은 늦게라도 알게 되어 분개하였다.

교활한 영국은 시대적 변천의 흐름을 강압적으로 막을 수 없음을 인식하고 나우루 섬의 인광석을 계속하여 착취하기 위하여 차선책을 고안해냈다.


그 차선은 무엇인가?

1968년에 영국은 나우루 섬을 나우루공화국, 독립국으로 승인하는 조건으로 영국의 연방국으로 묶어 놓고 Hammer DeRoburt를 초대 대통령으로 세웠다.

독립 후에 영국 Elizabeth 2세 여왕은 나우루를 방문하여 유대를 견고히 했다.


DeRoburt 초대 대통령은 호주에서 서양식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으로 친 호주와 친 영국적 정치노선의 선구자가 됐다. DeRoburt는 대통령이 되는 조건으로 나우루의 인광석 채굴권을 영국과 호주에게 몽땅 팔아넘겼다.

채굴권을 외국에 팔아넘긴 값이 얼마인가? 호주는 $2.5million를 20년 동안 지불하기로 게약을 맺었다. 영국과 뉴질랜드는 또 별도로 거액의 $를 약속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난 100여 년 동안 인광석을 채굴한데 대한 손해 배상금도 약속을 받았다.


나우루 섬의 보물인 인광석의 채굴권을 몽땅 외국에 팔아넘김으로 나우루섬에 갑자기 거대한 달러를 얻게 됐다. 굶주렸던 나우루 민중들은 오랜 가뭄 끝에 단비를 맞은 것처럼 벼락 부자가 된 기쁨으로 어쩔 줄을 몰랐다.

1880년대부터 아무것도 모루고 인광석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짓밟힌 한 세기만에 드디어 독립이 됐고 땅에 덮여있는 인광석이 황금덩어리라는 것도 알게 됐다.


나우루 사람들은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을 필요가 없고 밭에 나가 농사를 지을 필요도 없게 됐다. 음식은 모두 외국에서 수입하여 맛있는 통조림들이 창고에 가득 채워져 있고 햄, 햄버거, 콜라, 소세지 등 먹거리로 즐거운 생활에 익숙해졌다. 뿐만 아니라 섬 주위 전체 길이가 18km뿐인데도 오토바이 자동차의 물결로 가득 차게 되었다.


흘러 넘치는 달러로 외국에 투자하는 검은 돈도 날마다 늘어났다. 외국에 투자한 부동산으로 더욱 더 큰 돈을 융자도 했다. 스위스를 본받아 남태평양의 검은 돈을 보관해 주는 은행도 개업했다. 수천억 달러가 나우루에 들락날락함으로 자연히 마피아와 세계 테러리스트들의 거래와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2001년에 9.11 뉴욕테러 사건 후에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나우루 은행은 파산하고 말았다. 나우루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은 땅에 무진장 파무쳐 있는 인광석을 담보로 잡고 대통령이 되었으며 또 국가의 운명을 인광석 판매계약을 맺음으로서 집권을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DeRoburt 초대 대통령은 1968-1976년에 8년 동안 집권하고 모든 책임을 후임자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고 사망했다. 그후 나우루는 혼탁한 정권들이 계속 등장하여 건국 후부터 2011년 현재까지 29명의 대통령들이 집권을 했는데 평균 1년 5개월 동안 집권을 하는 단명의 대통령들이 교체되고 있었다.


ㄷ. 그런데 나우루 공화국의 사활이 달려 있는 문제는 정치적 불안에만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무진장으로만 알고 있던 인광석이 거의 바닥이 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강대국들이 사정없이 100여 년간 파먹은 인광석이 이제는 나우르 섬에서 거의 바닥이 나고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로 들어났다.


오늘 나우루 섬의 시급한 문제를 보는데 있어서 나우루 섬에 인광석이 많고 적음이 핵심이 아니다.


서구의 문명국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나라들의 물질적 탐욕이 자연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힘없고 순박한 민족들을 그들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운 삶을 멋대로 파괴하고도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큰 문제이다.


맺으며



이 글을 쓰면서 생각나는 것은 우리의 조국 남녁에서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미국의 FTA문제이다. 어쩌면 그렇게도 미국이 마샬 군도에서 핵실험 보상을 회피하려고 작성한 이른바 Compact of Free Association와 FTA 문건의 본질과 그 협의 과정이 꼭 같은가 하는 점이다.


수 십 페이지에 걸친 그렇게도 많은 조항들 속에 담긴 조건들을 잘 살펴보면 마샬 군도에는 불리하고 미국은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는 부당한 내용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전문가라도 다 쉽게 이해하기 곤란하게 만들어진 조약을 “얼렁뚱땅”식으로 통과 시킨 것이 바로 미국과 마샬 군도 공화국이 맺은 핵실험 보상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CFA조약인 것이다.


미국은 CFA 조약을 1983년에 마지못해 맺고 2004년에는 CFA 개정안을 또 다시 맺음으로서 끝에 가서는 마샬 군도에서 그 무시무시한 핵실험을 67번이나 행하고도 이에 대한 보상 문제를 용두사미 흐지부지 끝마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CFA 혐정을 악용하여 마샬 군도에 미군기지를 확보하여 미국군이 남태평양에 영구적으로 주둔을 할 수 있는 법적 조건을 만들어 놓았다.


한국의 젊은 법관인 김하늘 판사가 <한. 미 FTA의 불평등 조항 등 독소조항의 문제점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기사를 읽고 필자는 매우 감동적 기사라고 생각했다.


FTA의 한국-미국 관계의 문제점과, CFA의 마샬 군도-미국 관계의 문제점은 본질적으로 같은 문제이다.


또한 한국에서 지금 “선관위 디도스” 문제로 인하여 떠들썩하고 있는 것은 별개가 아니라 그것은 나우루 섬 나라 대통령들이 눈앞의 탐욕과 이익을 위하여 미래를 팔아버린 것처럼 한국의 한나라당이 눈앞의 권력욕을 위해 국가의 미래와 이익를 팔아 먹는행위와 똑 같다. 민주주의가 말살되면 한국의 역동성과 창조성은 끝난다. 별 자원도 없는 한국이 역도성마저 잃는다면 끝장 아닌가.(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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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유태영 박사 2011-12-11]

민족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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