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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별의 세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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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504회 작성일 22-10-01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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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3

어느덧 시와 군소재지들에는 미군과 괴뢰군, 경찰병력이 쓸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대다수의 마을들에서는 여전히 해방을 맞던 그때처럼 사람들이 군당과 면당의 지시에 따라 부산스럽게 움직이고있었다.

김진서는 금시 조직되고있는 장흥지구유격대 사령부산하 제55부대 문화부 대대장으로 임명되였다. 진도, 해남출신의 청장년들 120명을 그가 직접 료해선발하였다. 열흘후엔 55부대를 이끌고 자기 활동구역으로 설정된 해남군 계곡면에 도착하여 해남군당과 차후 투쟁대책을 토론하였다.

무기구입, 식량비축, 아지트설치와 훈련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어느날 해남앞바다로 식량을 실은 목선 2척이 해남군소재지를 향해 떠온다는 련락을 받았다. 경찰 10여명이 두척의 배에 갈라타고 있을뿐 경비정의 호위도 없다고 했다.

김진서는 그 배들을 습격하기로 했다. 세자루의 권총과 보총 5정, 열일곱발의 수류탄뿐인 55부대였지만 경찰 10여명쯤은 얼마든지 족칠수 있을것 같았다. 중요한것은 불의적인 기습에 달려있다.

그는 비록 한번도 전투에 참가해본 일이 없지만 중앙당학교 5개월 재학기간에 받은 군사훈련지식을 밑천 삼아 모험해보기로 했다. 아직 대대장이 결원이여서 문화부대대장인 그자신이 직접 전투를 지휘해야만 했다.

그 해상전투가 김진서의 이름을 널리 떨치고 부대의 전투사기를 백배해주리라는것을 그때 그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절실한 무기와 식량구입을 위해 모험한것이였는데… 전투조직이라는것도 신통한것은 못되였다. 진도, 해남의 어부출신 대원 10여명을 선발하여 고기잡이를 나간것으로 꾸몄다. 돛배와 매생이까지 5척을 모아 길목을 지키고있다가 짐배 두척이 다가오자 김진서의 신호에 따라 일제히 수류탄을 뿌렸다. 뒤이어 칼과 작살을 든 청년들이 목선에 뛰여오르고 권총을 든 진서는 이상하리만큼 높고 찢어지는듯 한 목소리로 《꼼짝말앗! 우린 인민군대다!》 하고 웨쳤다. 기겁한 경찰들이 쌀가마니뒤에 머리를 틀어박고있다가 작살이나 들고있는 청년들이 총을 나꿔챘을 때에야 무릎걸음을 하며 기여나왔는데 놀랍게도 놈들중엔 괴뢰군장교(중위)도 있었다. 첫 수류탄벼락에 죽은 경찰 3명을 제외한 나머지 경찰들과 괴뢰군장교도 총을 빼앗고는 가까운 알섬에 내려놓았다. 경찰들에게 미국놈들의 개노릇을 하지 말라고 정치공작을 할 여유도 있었다.

권총 한자루와 엠원미식소총 1정, 보총 12정과 수류탄 100여발, 350섬의 쌀을 전리품으로 군당에 실어갔다.

얼마후 상부에서 그를 호출하였다. 장흥지구사령부와 도당 두 군데에서 즉시 부대를 인계하고 올라오라는 명령이였다. 그는 도당부터 찾아가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두번째로 수수께끼같은 처녀 하정례를 만나게 되였다.

…맑게 개인 날씨였다. 솜털같은 구름쪼각들이 하늘에 널렸는데 된추위에 얼어붙어있는듯 했다.

도당이 거처하고있는 화순군 북면에 이른것은 저녁무렵이였다. 권총을 차거나 따발총을 든 사람들이 요소요소에 삼엄한 경비를 펴고있었다.

《누구여? 워찌 여길 왔제?》

몇번이고 도민청부부장증명서를 꺼내야 했다.

한 젊은이가 그를 총사아지트로 안내했다. 그새 도당에서는 전면적인 체제개편이 있었다. 유격대체제도 전라남도유격대총사령부(총사) 산하에 1. 5. 7의 3개 련대로 편성되였는데 사령관은 김선우였다.

동리 한가운데 있는 제일 큰집이 바로 총사아지트였다. 진서는 아지트라는 말을 여기서는 좀 달리 쓰고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광을 지나 널직한 온돌방으로 들어갔다. 김선우가 반갑게 그를 맞아주었다.

《아 벌써 왔소? 반갑소. 참 그거 좀 말해보소. 어떻게 해상전투를 벌릴 용단을 내렸는지. 여기선 김진서동무가 첫 전투를 벌린셈이그마. 소문이 짱짱하당이.》

진서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책상너머 한끝에 앉아 알은체도 하지 않고있는 하정례를 얼핏 스쳐보았다. 참으로 괴벽한 처녀이다. 여전히 미국제녀군복을 팽팽하게 조여입고 무엇인가 부지런히 쓰고있는데 김선우의 지나친 치하에 언짢아하는듯 한 표정이였다.

김선우가 그에게 자리를 권하였다. 이어 하정례를 돌아보며 차라도 좀 가져오라고했다. 처녀는 말없이 일어나 역시 진서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가버렸다. 회오리같은 찬바람이 처녀를 따라 문밖으로 밀려나갔다.

김선우가 뭐라고 했다. 총사에서 같이 일해보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였다.

《진서동무, 우리한텐 동무같이 리론도 있구 담이 큰 사람들이 절실히 요구되는그마. 흔쾌히 동의해주소. 장흥지구사령부에서 동물 사령부참모책으로 임명했다며 놔주질 않는디. 동무만 응하면…》

하정례가 차잔을 들고 들어왔다. 두사람사이에 차잔을 놓으며 처녀가 물었다.

《제 의견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김선우가 머리를 돌렸다. 두눈을 슴벅거리며 놀란듯 처녀를 바라보았다.

《먼(무슨) 의견을?》

《김진서부부장동지에 대한 제 개인적의견입니다. 말씀드려도 좋습니까?》

《마- 말해보우.》

《부부장동진 리론적으로는 좌익이지만 실천상에서는 우익에 속합니다. 전 경멸합니다.》

김진서는 한순간 호된 타격에 머리가 뻥해졌다. 언제 처녀가 나갔는지도 알지 못했다. 찬바람이 다시금 처녀를 따라 휙 쓸어나갔다.

김선우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끄문 좋소. 저 따벌같은 가시내!》

아마도 그는 중후하고 아량도 있는 사령관인듯 했다. 그 아량이야말로 김선우의 정신적향기인지도 모른다. 그는 웃음을 터뜨리던것처럼 돌연 정색하며 아까 하던 말을 계속했다.

현 단계에서 각 지구사령부들에서의 유격대조직사업이 급선무인바 대부분의 대대, 중대들이 한 고장, 한 고을에서 나온 사람들이여서 문벌영향이 적지 않다는것이였다. 그러므로 중앙에서 파견되여온 이북출신간부들이 정치적식견과 실무능력을 잘 따져가며 대렬을 편성하고 훈련과 정치강습을 적극 밀어주어야 한다고, 그런 리유로 김진서도 소환한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진서에게는 그의 말이 거의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경멸해요!》라고 맵짜게 부르짖던 하정례의 독기가 서려있는것 같던 얼굴이 떠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리유로 그 처녀는 좌익이요 우익이요 하고 쏘아붙였던것인가?…

김선우가 또 무어라고 했다. 이제 와서 그는 총사에서 일하겠는가 장흥지구사령부로 가겠는가 하는것을 묻지 않았다. 중요한것은 조직적수완이 있는 간부들이 부족한것이였다. 도당과 각 시당, 군당, 면당들에까지 정연한 체계로 위원장과 부위원장들, 조직부장, 선전부장, 총무부장에 무슨 수매부장, 기요과장, 숱한 과장들이 임명되여있었는데 민청과 녀맹도 같은 식이여서 수많은 간부들을 필요로 하고있었다. 그러니 유격대의 지휘관, 정치일군들을 선발배치하기가 조련치 않았던것이다.

김진서는 도와 군의 민청일군들속에서 전개력이 있는 몇사람의 이름을 적어주었다. 별다른 론의없이 그는 장흥지구사령부 참모책으로 떠나게 되였다. 김선우가 말했다.

《진서동무가 어렵사리 해놓긴 하겠지만 어쨌든 다시 부탁하는디 장흥지구사령관인 윤기남동무와 참모장사이를 잘 보필해주소. 정치위원이 임명되기까지 그런 책임을 맡아야겠소.》

그가 총사를 나섰을 때 밖은 이미 어둠에 싸여있었다. 벼짚과 소똥이 타는 냄새가 알싸하게 풍겨왔다. 키 낮은 굴뚝마다에서 꾸역꾸역 연기가 쓸어나와 하얀 박통을 굴리고있는 고삭은 벼짚이영을 핥으며 소리없이 흐트러져갔다.

그는 김선우사령관이 정해준 마을어귀의 토굴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집들이 많았다. 6. 25전 빨찌산에 동조한 집들은 모조리 불태워 없애버렸던것이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섰다. 눈앞에 하정례가 버티고 서있는것이였다. 농부들의 낡은 솜옷을 걸치고있는데 키가 작은 더벅머리소년 같아 보였다. 그러나 두눈에서는 싸늘한 적의가 번뜩이고있었다. 처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난 도당에 부부장동물 체포해서 심문할것을 제기했어요.》

《?!…》

진서는 찬공기를 들이마시며 굳어져버렸다.

《그렇지만… 허락되지 않았어요.》

《?!…》

《난 당신을 멸시해요. 당신이 비록 중앙에서 파견돼온 정치공작대원이긴 하지만… 당신은 우경을 범하고있어요. 난 그렇게 생각합니다. 알아두세요. 난 멸시해요. 그리구… 증오해요!》

진서는 추위에 몸을 떨었다. 웬일인지 혀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뭣때문인지… 그거나 좀 말해주시오.》

《그래 그걸 모르고있단 말이죠? 정말 모르고있으세요?》

《모르오.》

《좋아요. 그럼 절 따라오셔요.》

처녀가 앞서 갔다. 진서는 무슨 도깨비에라도 홀린듯 허척지척 따라갔다. 죽도록 피곤한 그였으나 막 깎은 머리를 내려다보며 (키작은 처녀의 짧게 깎은 머리) 불안스럽게 코소리를 울리군 했다.

하정례는 거의나 발자국소리도 없이 걷고있었다. 마을어귀의 앙상한 나무밑에 이르자 처녀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이밑에 57명의 해골들이 묻혀있어요.》

《?!…》

진서는 또다시 몸을 떨었다. 진정 이 처녀야말로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다.

달빛에 반사되는 처녀의 검푸른 두눈에서 파아란 불빛이 흔들렸다. 가늘고 엷은 입술이 사뭇 고통스럽게 떨리고있는것이 알렸다.

《우리가 지금 그 해골들을 밟고있어요. 누가 그들을 죽였는지 아세요? 그리고 왜 죽였는지?… 나때문에 죽었어요. 나한테 쌀을 주고 고생한다는 말을 했다구 해서…》

처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비수로 찌르는듯 그의 가슴에 박혔다. 어데선가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가 바람에 실려왔다. 아니, 딛고선 땅밑에서 울려나온 울음소리는 아닌지?… 그는 얼어붙은듯 움직이지 못하고있었다. 마치 교수대에 올라선듯 한 느낌이였다.

《로인들과 녀인들…》 처녀가 계속했다. 《영문도 모르는 애들까지… 빨찌산을 동조했다고 해서 불에 태워죽이고 구뎅이에 처넣었어요. 여긴 원래 구뎅이였어요. 그걸 시체로 다 채웠죠. 인젠 내가 왜 당신을 멸시하고 증오하는지 아시겠어요?》

진서는 헉ㅡ 하고 숨길을 내뿜었다.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몸을 떨며 거칠게 부르짖었다.

《모르겠소. 그래 날더러 어쩌라는거요?》

《발을 굴러보세요. 그러면 그밑에서 우쩍우쩍 소리가 날테죠, 원한에 찬 울부짖음소리가!…》

《이건 뭐요, 누굴 모욕하는거요?》

《증오해요. 당신의 그 박애사상을!》 처녀가 내쏘았다. 《그 자비심!… 해남앞바다에서 포로한 놈들에게 정치공작을 했다구요? 먹을 쌀까지 안겨주면서!… 게다가 장교놈까지도… 이제 그놈들이 또 숱한 사람들을 목매달고 불태워죽이라고 그냥 놓아줬어요?… 말하지 마세요. 이 나무를 좀 보시죠. 숯검댕이가 된 이 나무를! 보세요. 눈을 똑바로 뜨고 어서 보세요!》

무엇인가 뜨끔하니 가슴을 깨무는듯 했다. 숨 쉬기가 헐치 않아 진서는 모지름 썼다.

《무서워요.》 처녀가 계속했다. 《이제 많은 사람들한테 그런 사상을 심어줄가봐 무서워요. 그래서 난 부부장동무 같은 사람을 딴데로 쫓아버렸으면 하는거예요.》

《…》

진서는 말하지 않았다. 지금 이 처녀는 극도의 멸시와 증오심까지 품고있다. 처녀의 정신상태를 한난계로 표시한다면 령하 40도를 넘을것이다. 이러한 녀자에게 국제법과 공화국의 포로정책에 대하여 말해준다는것은 반발심만 더해주는것으로 될수도 있다. 령하 40도의 저온에서 고드름처럼 얼어붙은 복수욕, 그 차디찬 의지를 자칫하면 박산이 나게 할수도 있다.

《난 부부장동무가.》 하정례가 계속했는데 이번엔 동무라고 불렀다. 《도당기관지에 써낸 글을 봤어요. 〈청년들이여, 모두다 전선으로!〉 이런 제목이였죠? 그걸 보고 감동됐더랬어요. 한데 리론과 실천은 판 다르군요. 분해요. 우릴 지도하라고 공화국에서 파견한 사람이 그럴줄은… 아이, 기막혀!…》

진서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 처녀ㅡ 하정례는 망가진 축음기나 비슷하다. 깨여진 소리만 울리는 그것을 고쳐놓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웬일일가. 그처럼 결연히 싸움터에 나섰고 남 못지 않게 몸 바쳐 싸워온 이 처녀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을가. 어째서 이 처녀와 마주 서면 불편해지고 추워지기만 하는것일가?…

어느새 정례는 몸을 돌려 가고있었다. 천천히, 맥없이 걷고있는데 늙은이처럼 잔뜩 졸아든 체구가 발도 없이 움직여가는듯 했다. 어쩐지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처녀를 따라갔다.

하정례는 증오와 멸시를 다 토해버린 뒤여서 아무 힘도 없는듯 했다. 그리하여 이번엔 맥이 진한 더벅머리소년이 그와 나란히 걷고있었다.

《정례동무.》 진서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난 동무가 이제 모든걸 스스로 알게 되리라고 생각하오. 고집부리지 마오. 동문 인테리녀성이지, 길게 말안해도 잘 알거요. 동문 지금 자기를 속이고있소. 자기를 변명하고 또 자신을 멸시하기도 하고… 내 짐작소리이긴 하지만… 그게 뭣때문인지 말해주겠소?》

처녀가 먼저 걸음을 멈추었다. 순간 진서는 처녀의 두눈에 고인 눈물을 보았다.

《그렇게 보세요?》 처녀가 맥없이 물었다. 《아무렇게 보든… 됐어요. 하지만 부부장동지는 몰라요. 너무 몰라요.》

보초소에서 누군가를 단속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걸걸한 목소리가 《인민군대여, 완도에서 오능기라!》 하고 조금 서툰 전라도말로 대답했다. 후날 김진서와 오랜 세월 피의 인연으로 얽히게 된 인민군보병중대장 정대천이 자기 대원들 10여명을 이끌고 도착한것이였다.

그러나 진서는 아직 그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정례의 눈물이 또 그를 놀라게 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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