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승 칼럼] 금선사에 안치된 신념의 강자 동지들을 찾아서 2
페이지 정보
본문
"전국묘소답사반은 제주서 부터 시작해서 서울까지 올라왔다. 2022년 8월 28일에 답사한 서울 금선사에 우리 동지들 20명이 안치되어 있으며 동지 부인들이 3명이 안치되어 있다." 비전향장기수 김영승 선생이 동지들의 묘소를 찾아 애국자 동지들의 간고했던 투쟁의 삶을 회고하며 기록을 남기는 가운데 서울의 금선사에 안치된 동지들을 찾아 올린 글 제4신부터 제8신까지를 이어서 싣는다. [민족통신 강산 기자]
(제 4신)
신념의강자 의리의 화신 백절불굴의 애국투사 인 신현칠 선생을 그리면서
신현칠 선생은 1917년에 서울에서 출생했다.
1938년에 일본 동경유학을 했다.(20대 때 마르크스주의에 입문했다)
1942년에는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1년간 구금되기도 했다.
해방공간에는 경제 잡지 “조선경제”발간에 참여했다.
신선생은 당에 입당하여 조선산업 노동 조사 시보 등 당 외곽기관 잡지의 편집 위원으로 활동했다.
1950년 9.28 후퇴 후 북상하여 문화선전성에 소속되어 자강도 인민보 논설기자로 있다가 공작원으로 내려왔다.
체포된 후 구금되어 1962년도 봄에 10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 하였다.
그러나 세기의 악법인 사회안법이 제정되어 1975년도에 제 1차로 감호처분을 받고 청주보안감호소에 투옥되었다.
필자와 같은 사방 옆방에 있었다. 1980년 전두환 군사팟쇼정권 때 7/11일 집단단식 투쟁 할 때 20일간의 단식투쟁을 했다. 제일 마지막까지 혼자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신현칠선생은 프로레타리아 작가인 동시에 투쟁전선의 투사이며 지도자 역할을 겸비한 절대로 적과 타협을 모르는 원칙주의자였다.
그래서 사회안전법은 위헌이라는 헌법소원도 하였고, 2년갱신 감호처분은 위헌 불법부당하다는 행정소송도 제기했으나 기각 당하고 말았다.
당시 법상식을 알고 행정소송을 제기할 분은 신현칠 선생 뿐이었다.
하늘아래 하나 뿐인 세기의 악법인 사회안전법은 국내외 비난의 목소리가 들끓고 있는 상황에서 여소야대의 국회에서 폐지하고 대체 입법인 보안관찰법의 제정으로 (청주보안감호소가 없어지고 여자교도소가 되었다) 1988년도에 비전향 출옥하게 되었다.
당시 보안감호처분되어 전국 156명 중 53명이 비전향 출옥했다. 그중에 마지막 39명이 비전향출옥했다.
앞서 출옥한 동지들은 고혈압환자등 나이 많은 환자들이었다.
그래서 나온 동지들은 재야, 학생들의 우상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적들의 공안 감시가 심하기도 했다.
출옥 후 현정세를 전망하는 시나 자전적인 작품을 쓰기도 했다. 그작품중에 “변하지 않는 것을 위하여 변하고 있다”라는 시사적인 작품을 남기었다
신현칠선생은 당시 우리 동지들들 중 혁혁한 젊은 동지들이 앞장서서 출옥동지들의 모임을 선두에서 주선하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에서 임방규, 권낙기, 서준식, 이두균, 김영승 동지들이 수고를 많이 해 달라는 말씀에 의해서 의론하기도 했다.
그리고 권낙기, 김영승,이경구동지들의 결혼식에 주례를 서기도했다.
신현칠선생 가족은 사모님인 이내열님이고. 아들 범순, 딸 순자등 이다.
선생은 오랜 감옥투쟁에서 얻은 후유증으로 2012년 4/17일에 96세를 일기로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마는 아픈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불굴의 애국투사인 신현칠선생이시여!
선생의 일생은 한시도 조국과 민족을 잊지 않고 맡은바 과업을 올곧게 수행하지 못하고 체포되었으나 옥중투쟁에서 항상 힘 있는데 까지 열성을 다하였으며 출옥 후에도 마지막 생명을 다할 때까지 시나 작품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한 관점에서 기록으로 남기었으니 후대들이 두고두고 선생의 시나 작품을 읽을 것입니다.
그리고 6.15남북공동선에 의해서 63명이 신념의 고향으로 올 갔으나 “통일사업을 위해 남쪽에 내려 왔으니 통일 못보고 북으로 올라가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앞으로 자유왕래가 되면 갈 것이라고” 했다 합니다.
그런데 자유왕래를 못보고 이 세상을 하직했으니 그 원한은 하늘을 찌르고 있을 것입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다 잊으시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유분은 금선사에 우리 동지들과 함께 안치되어 있습니다.
2022년 8/28일 전국묘소답사반 일동 올림.
그리운 정순덕 선생을 그리면서
정순덕선생은 경남 산청군 삼장면 매월리에서 출생했다.
1950년 지리산 화전민 출신으로서 1월에 결혼했다.
1950년 9.28후퇴를 맞아 남편을 찾아 지리산에 입산했다.
1952년 1/18일에 남편을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후에 남편이 전사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1953년 9월에 노영호부대에 편입되어 덕유산으로 이동하였다.
빨찌산투쟁에서 지서를 까는데 용감하게 돌격전을 전개하기도 했다. 1963년 11월에 입산 13년만에 대원골 아지트에서 적들과 총격전 끝에 다리 중상을 당하여 체포되었다.
체포 후에 다리 절단 수술을 받고 재판에 회부되어 무기형을 받았다.
대구 공주 대전감옥등에서 23년을 복역하고 1985년 8.15특사를 받아 석방되었다.
빨찌산 투쟁은 1954년에 종막을 고했으나 정순덕 소조는 죽지않고 살아남아 빨찌산 투쟁을 계속 전개했다.
적들은 정순덕 소조를 체포하려고 조직망을 포치하였으나 체포하지 못하고 무려 13년을 투쟁을 전개했다.
그 과정에서 동료들은 다 전사하고 정순덕 동지만 남게 되었다.
당시 체포된 마을 집을 찾아가 보고 동네 사람들에 물어보았다.
밤마다 내려와 밥을 먹어야 하기에 외딴 집 하나가 있는데 단칸방 하나에 부엌하나 있고 할머니 혼자 살고 있었다. 경찰정보과 놈은 이웃집 이장집에 위장하고 있으면서 땅을 뚫고 전화선을 할머니 집과 연결하여 놓고서 왔다하면 신호를 보내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달만에 밤에 정순덕동지는 내려와서 혼자 사는 할머니 집에 와 있다는 것을 연결된 전화로 알려주어 격전이 벌어졌으나 결국 중상을 당하여 생포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생포된 후 다리를 절단하여 평생 불구자로 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그 집도 이장집도 없다. 그때 살았던 마을 어른들은 다 죽고 없다.
정숙덕동지는 불구자의 몸으로 먹고 살기 위해서 앉아서 할 수 일은 다 하였다.
부산에 있을 때 서준식 동지와 함께 찾아가 서울 응암동에 방을 하나 얻어 생활 했다.
그때에 이미 강압에 못이겨 정순덕 실록이 나와 있었다. 1-2권은 비교적 인터뷰 내용이지만 나머지는 쓴자의 주관이 많이 들어간 책이었다. 그후 인천에 살게 되어 후원회 까지 만들어 후원하였다.
그리하여 인천대에서 6순잔치에 필자도 참여한 것이 국가보안법에 걸렸다.
그후에 온수동에 살았는데 권오헌 선생에게 이야기해서 낙성대 만남의 집에 와서 살게 되었다.
여기서 혈압이 터저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리하여 인천 나사레한방병원에 입원하여 한방치료를 받았다.
이병원에 있을 때 필자는 정순덕선생 록취도 했다.
정순덕선생은 국제적으로도 알려저 후원금이 들어오기도 했다.
1차 신념의 고향으로 63명이 올라 갈 때 올려보내라고 했으나 전향을 이유로 올려 보내지 안했다.
건강은 점점 나빠져 이젠 구월동 카톨릭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운명 3일전에 유언으로 내 기금 얼마 있으니 모란 공원에 땅을 사서 묻어달라고 했다.
당시 유언처럼 내맘대로 할 수 없어 들어주지 못한 것을 지금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 기금은 통일연대 사무실 얻는데 쓰였다.
당시 운명할 때 지켜보기도 했다 (2004년 4/1일)
장례는 우리 광장을 비롯한 각 연대단체들과 인사들이 함께했다.
보광사 스님의 허락하에 들어가는 입구에 7명이 비석과 함께 묻었는데 뉴라이트 극우분자들이 “불굴의 애국투사의 묘역”이라고 쓰인 비석을보고 파헤치고 말았다.
이때 묘역 파손혐의로 고발조치 할 수도 있었으나 그냥 그대로 당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동지들이 파해친 유분함을 나누어 보관했었다. 그때 정순덕 선생 유분은 우리집 아내도 몰래 감추어 두었다가 지금의 서울 금선사에 다른 동지들과 함께 보관하고 있다.
지금 금선사에 22명의 동지들의 유분이 진열되어 있다. 동지들이 돌아가시면 갈 곳이 없는 동지들은 이곳에 안치된다.
그리운 정순덕 선생이시여!
정순덕 동지의 일생을 생각할 때 항일 빨찌산 투쟁기간 다음으로 긴 13년이었으며 이기간에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잘 투쟁한 불굴의 투쟁전사 였다는 것은 그것도 적과 총격전 속에서 중상을 당하여 불구의 여성동지었다는 것은 빨찌산 투쟁사에 길이길이 남을 것입니다.
비록 체포된 후 다소 굴절은 있었으나 조국과 인민을 위한 기본 맘은 초지일관으로 생을 마쳤다는 것은 우리 후대들에게 경험과 교훈을 남기었습니다.
동지의 투지를 받들어 미제를 몰아내는 데 가열찬 투쟁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다 잊으시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바랍니다. 매년 정순덕선생의 기일을 맞아 추모의 뜻을 표하고 있습니다.
2022년 8/28일 전국묘소답사반 일동 올림.
(제5신)
그리운 유영쇠 동지를 그리면서
유영쇠 동지는 1928년 1/30일에 전북 김제에서 출생했다.
동지는 1950년 인공시절에 김제 농고 재학 중 의용군 1기로 자원입대 하였다..
1950년 9.28후퇴로 귀향하여 농고에 복학했다.
그후 12월 입산하여 빨찌산투쟁 중 김제 왕산에서 1954년 4월에 체포 되었다.
재판에서 무기형을 선고 받고 감옥생할하다가 1960년 10월에 20년으로 감형되었다.
1975년에 만기였으나 출옥하지 못하고 비전향을 이유로 세기의 악법인 사회안전법에 의하여 보안감호처분을 받아 청주보안감호소에서 징역아닌 징역을 살게되었다.
1980년 7월에 집단 단식투쟁에도 살아남았다.
그후 적들의 탄압에 많은 동지들이 죽고 전향자도 많이 발생했다
그리하여 1983년 2/3일에 출옥했다.
출옥 후 오고 갈 때 없어 익산 원불교 자선원에 있을 때 맹렬하게 투쟁했다.
통일광장, 범민련, 평통사 등 그리고 우리 동지들 만나는 것도 적극적이었다.
특히 보령 김상윤동지가 오도바위 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작고하는그날까지 위문하는 적극적인 성의를 다하였다.
그리운 유영쇠 동지시여!
동지의 일생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정식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야학을 통해 누구못지 않게 열심히 공부하여 김제 농업학교까지 들어가 3학년 때 인공세상을 맞이 했다.
누구 못지 않게 맡은 일은 적극적인 성의를 발휘하여 기어이 해내고마는 진짜 투사의 길을 마지막 까지 초심을 잃지 않고 생을 마쳤다는 점은 길이길이 새길 것입니다.
그후 원광대 자선원에 입원에 있을 때 권오헌동지 박희성 동지 들을 모시고 유영쇠 동지를 위문했을 때 반가워 하면서 우리에게 부탁한 말은 지금도 동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때 "간호사들이 자꾸 때려 패는데 못 때리게 해 달라고”부탁한 말을 지금도 되새기고 있습니다.
동지의 평소 원칙이 언제나 부정한 일을 봤을 때 봐주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지적하는 태도에서 빚어낸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들고 있습니다.
면회도 없고 단신이 말만 무성해 육두 문자를 쓰면서 지적하는 것이 그들에게 분노를 사게 하여 빨리 죽으라고 때려 패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 웬만하면 참고 그들의 비위도 맞추어야 생활에 도움이 된다고도 했다.
그 후 1년 반 지난 2016년 1/29일에 우리 모두의 곁을 더나고 마는 아픈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다 잊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바랍니다. 유분은 서울 금선사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2022냔 8/28일 전국 묘소답사반 일동 올림.
그리운 손경수 선생을 그리면서.
손경수선생은 1928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했다.
선생은 조국광복을 맞이하여 학생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1947년에 1년 6개월의 집행 유예를 받기도 했다.
1950년 6.25해방을 맞아 논산군당 조직부장을 했다.
9.28후퇴를 맞아 입산해서 빨찌산 투쟁하다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받았다.
1960년 4.19에 의해서 10월에 감형을 받아 15년이 되었다.
1966년에 출옥하여 1967년에 전남 해남 출신으로 입산하여 유치지구에서 빨찌산으로 싸우다 체포되어 징역을 살고 출옥한 오영애 여성동지와 결혼해 동지이며 동시에 부부가 되었다.
두 동지 부부는 2000년 9/2일 63명의 비전향자기수 동지들이 신념의 고향인 조선으로 송환된 후, 남은 비전향장기수들의 모임인 통일광장에 가입해 진보와 반미 자주화 통일투쟁전선에서 올곧게 투쟁했다.
손경수 동지는 딸 하나를 낳아 키웠다. 2017년 11/25일에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마는 아픈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사랑하는 손경수동지시여!
동지의 일생은 일제의 식민지에서 5.15광복을 맞이했으나 미제에 의해서 분단된 고난의 가시발길 행군에서 분투한 흔적에 파란 많은 곡절은 있으나 마지막 까지 올곧게 투쟁하다 눈을 감은 동지의 투쟁경험과 교훈은 후대들에게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다 잊으시고 반미 자주통일의 길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장례는 필자가 참가했고 그 후 몇몇 동지들과 함게 찾아 참배했다.
논산 사당에 모신 것은 따님이 가까운 근처에 살고 있기 때문에 논산 사당에 모시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후에 유분을 서울 금선사에 모셨다.
결혼해 난 따님은 지금 경기도 광주에 살고 있다.
따님은 아주 착해 지극한 효성을 다하고 있으면서 부친 묘소 참배 때 곡 오겠다고 약속했다.
부인 오영애 동지는 경기도 고양시 백마 효 요양원에서 비전향장기수 김해섭선생,박정덕여선생과 함께 있다.
코로나 때문에 면회도 못하고 있는 참으로 딱한 형편이다.
2022년 8/28일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올림
(제6신)
그리운 박정숙동지를 기리면서
박정숙동지는 1917년 6/18일에 강원도 양양에서 출생했다
박정숙동지는 1944년에 항일 지하활동하다 형부와 언니가 연행되어 박정숙동지도 체포되었다.
광복을 맞아 1949년에 전남여성동맹의 조직에 들어가 최고책임자로 지목되어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1950년에 부친만 남고 가족 전체가 북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1952년에 10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1961년도에는 최백근동지와 연루되어 6개월 감옥생활도 했다.
1975년에는 오작교 사건으로 반공법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주명순, 김선분, 박정숙등 11명이 2년간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1992년도에야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와 범민련 남측본부 준비위 결성에 참여하기도 했다.
2000년에 통일광장에 가입했으며 2001년에는 김선분동지와 같이 11월에 제7회 불교 인권상을 받기도 했다.
2011년부터 건강악화로 투병중 2020년 10/2일에 103세로 새봄 요양원에서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야 마는 기록을 남기었다.
그리운 박정숙동지시여!
박정숙동지의 일생 100년은 제국주의 일제와 미제의 점령 통치속에 조선의 자주독립투쟁의 파란 많은 투쟁 전선에서 고분 분투한 일생임을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100년 투쟁전선의 산 역사적인 증인으로 장수하는 투사로 기록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다 잊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우리 재야 투사들 중 100년 넘게 장수하며 역사의 참 증인으로 역사의 기록으로 남게되는 최초의 박정숙 여성동지임을 기록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영애로운 기록물입니까.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다 잊고 조국통일의 길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2년 8/28일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올림.
- 이전글[김영승 칼럼] 금선사에 안치된 신념의 강자 동지들을 찾아서 2-2 22.09.11
- 다음글장편소설 라남의 열풍 51 22.09.1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