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라남의 열풍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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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편
27
벌써 1997년 여름이 되였다.
새벽 3시부터 생산직장들을 순회하기 시작한 주혁민은 6시가 좀 지나서야 계획했던 작업장들을 다 돌아보고 구내길에 나섰다.
날씨가 좋았다. 새파란 새벽하늘 한복판에 흰구름이 선녀의 치마자락처럼 길게 드리워있었다.
주혁민은 맑은 새벽바람에 수양버들가지들이 너울거리는 구내길을 걸으며 지난 한해동안 기업소가 해놓은 일들을 얼추 더듬어보았다.
그 기간 소문없이 큰 일들을 많이 해놓았었다. 25가지의 자력갱생기지들을 꾸리여 모자라던 원료자재들을 거의 다 자체로 해결할수 있게 되고 파석기를 생산하여 기업소식량문제를 풀게 되였을뿐아니라 부모잃은 아이들을 수십명이나 합숙에 데려다 키우게까지 되였다.
《HM기》개발사업에서도 아직 성공의 령마루에는 오르지 못하였으나 큰 전진이 있었다. 유압계통에서 애를 먹던 유압배관을 제작할수 있게 되였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식 전자변에 알맞는 회로도를 찾아내지 못하여 기계는 돌아가지만 제품의 정밀도를 보장하지 못하고있었다.
1997년 6월, 불퇴의 선이 뒤에 막아서고있었다.
(21세기가 눈앞에 다가오고있는데 《HM기》를 아직 한대도 완성하지 못하였으니 어찌하는가.장군님께서는 우리를 굳게 믿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걸 만들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주혁민은 날이 갈수록 걱정이 커졌다.
어제 현재로 89번째로 실패하였다.
주혁민이 집에 들어가 조반을 먹고나오니 벌써 기동예술선동대원들이 집단출근대렬을 맞이하기 위해 정문앞에 늘어서서 북을 치고 나팔을 불었다.
이윽고 집단출근대렬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방송차에서는 이날에 90번째로 《HM기》시험을 한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전체 종업원들에게 알립니다. 전체 종업원들에게 알립니다. 오늘 오후 4시부터 수봉작업장에서 또다시 〈HM기〉시험을 합니다. 90번째로 되는 시험입니다. 90번!》
(90번!)
주혁민은 그 너무도 많은 수자에 숨가쁜 중압감을 느끼며 입속으로 외웠다.
그는 기동예술선동대원들속에 뛰여들어 그들과 함께 노래도 부르고 박수도 치면서 이번 시험에서만은 부디 성공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정문앞을 지나가던 경로동직장 관리위원장이 방송차옆에 서있는 지배인에게 한마디 롱을 걸었다.
《지배인동무! 벌써 90번째요? 몇번까지 올라가겠소?》
관리위원장은 흥남기계전문학교를 다닐 때부터 오늘까지 40여년동안 지배인과 한학교, 한공장에서 지낸 딱친구였다.
《지배인, 그러다간 정말 606번까지 올라가지 않겠소?》
《여, 새벽부터 빈정거리지 말라!》
지배인이 관리위원장을 노려보며 성을 냈다.
《아니? 롱 한마디 하는데 왜 그렇게 성을 내? 정말 아침부터 기분 나쁘게.》
관리위원장의 눈빛도 사무러워졌다. 환갑나이가 다 된 사람들도 아이들처럼 별치 않은 일로 다투는 때가 있는것이다. 그것이 생활이였다. 이들은 다투다가도 3분만 지나면 성이 다 사그라져 서로 웃으며 지냈다. 이들의 말다툼은 칼로 물베기였다. 하지만 주혁민은 가슴이 아프고 걱정스러웠다. 과연 실패의 회수가 얼마까지 올라가겠는가.
주혁민은 출근집합장소로 걸어가는 관리위원장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90이라는 수자를 안타까이 곱씹어 외웠다.
주혁민은 집단출근이 있은 뒤 첫시간에 당위원회 아침모임을 마치고 단조직장으로 갔다. 단조직장의 넓은 작업장에는 북소리장단같은 쿵당쿵당하는 장엄한 장단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리였다. 650톤프레스와 3톤전기함마가 강판을 찍어내는 소리였다. 한쪽에서는 가열로가 웅, 웅 웅글은 소리를 내며 주변에 붉은 광원을 펼치고있었다. 1년전만 하여도 프레스부속이 없어 무동력으로 3톤함마를 들어올리던 단조직장이 아예 변모되였다.
주혁민은 한바탕 땀을 흘리며 일하고싶어 웃동을 벗어 벽쪽에 놓인 나무발판가름대에 걸어놓았다.
그런데 이때 최강철기사장이 느닷없이 뛰여들며 환성을 질렀다.
《책임비서동지, 경사가 생겼습니다, 대경사가.》
《경사라니?》
주혁민은 밑도끝도없는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어디 알아맞춰보십시오, 무슨 경산지.》
《여보, 답답하오. 빨리 말하오.》
주혁민은 기사장곁으로 급하게 걸어갔다.
《〈HM기〉가 성공입니다.》
《뭐요?!》
주혁민이 우뚝 굳어졌다. 눈앞이 핑 돌아갔다. 가슴이 어지럽게 뛰놀았다.
《성공입니다. 수봉에서 전화가 왔는데 제품이 완전합격입니다. 한시간동안에 나온 LK철관 12개가 다 0.001미리메터 정밀도가 보장된답니다. 기계는 계속 돌아갑니다.》
《만세!》
프레스공이 담배쌈지를 떨구면서 환호를 올리였다. 그 소리에 단조공들의 시선이 모두 기사장에게 쏠리였다.
《아니, 아까 방송에서는 오후 4시부터 시험한다더니 벌써 시험을 했단 말이요? 난 이거 믿어지지 않누만.》
《탁석준동무와 김경복동무가 밤새 〈HM기〉를 뜯어고치구 아침 8시부터 저희들끼리 조용히 시험했답니다. 그 사람들이 반년동안이나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수봉에서 고생하더니…》
기사장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지배인이 어디 있소? 이 소식을 알고있소?》
주혁민도 눈을 슴벅이며 코멘 소리를 하였다.
《지배인동진 어디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권양기직장엘 가보기요. 아까 출근모임장소에서 권양기생산문젤 제일 걱정했소.》
주혁민은 권양기직장으로 달려갔다. 짐작한대로 지배인이 천정기중기가 있는 작업장 한복판에서 무슨 일때문인지 직장장에게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해대고있었다.
책임비서가 지배인에게 성급히 소리쳤다.
《지배인동무, 성공이요. 〈HM기〉가 성공이라오.》
《성공했다고요?》
뜻밖에도 지배인은 별로 흥분하지도 놀라지도 않고 랭담히 서있었다.
주혁민은 그가 너무도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서있어 섭섭한 생각까지 들었다.
《지배인동무, 〈HM기〉가 성공했단 말이요!》
주혁민은 그의 어깨를 잡아흔들며 당장 수봉으로 가보자고 하였다.
《가봅시다.》
그는 이 한마디를 조용히 뇌이고 출입문밖으로 걸어나오더니 수봉작업장이 있는 서북쪽하늘을 바라보았다.
《지배인동무, 다 가보게 합시다. 〈HM기〉를 위해 나사 한개라도 깎은 사람은 다 가보게 합시다. 얼마나 큰 경사요.》
지배인과는 대조적으로 주혁민은 그냥 진정하지 못하고 왔다갔다 하였다.
오성오는 그동안 생산에서 모범을 보인 사람들로 매개 직장에서 15명씩 선발하여 수봉으로 보내겠다고 하였다.
그들을 위해 화물차 4대를 내게 하였다.
주혁민은 사람들을 먼저 보낸 다음 맨나중에 오성오와 함께 승용차를 타고갔다.
수봉작업장앞마당에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승용차에서 내린 주혁민은 마당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에게 《HM기》를 구경했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채탄기직장에 있는 청년이 《예, 단꺼번에 들어갈수 없어 교대제로 엇바꾸어 들어갑니다. 그런데…》하고 뒤말을 흐리였다.
《왜?》
《윤박람아바이랑 검정실동무들이 와서 측정했는데 18개는 합격이고 5개는 오작이랍니다. 처음 1시간 30분동안은 합격품이 나왔는데 그다음부터는 오작품이 나왔답니다.》
주혁민은 가슴이 무너지는듯 하여 얼핏 지배인을 돌아보았다. 오성오는 이번에도 별로 놀라지 않고 입을 꼭 다문채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는 한참 지나 주혁민에게 말하였다.
《한시간반동안 합격품이 나오다가 오작품이 나왔다는걸 보면 유압회로나 변들의 위치에는 별탈이 없고 심봉, 굴대와 같은 설비들의 재질이 아직 기술적요구대로 되지 못한것 같습니다.》
금속재질이 문제로 된다고 하자 주혁민은 윤현덕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졌다. 지난 기간 금속재질문제도 야금공학리론과 야금기술경험을 겸비한 윤현덕이 거의다 해결했었다. 금속재질을 담당한 고정순은 아직 어리다고 생각되였다.
《책임비서동무,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고정순이 해낼겝니다. 그동안 윤현덕이한테서 많이 배웠으니까요… 90번, 어쨌든 90번째도 실패입니다. 책임비서동무, 좌우간 들어가봅시다.》
지배인은 아래입술을 꼭 깨문채 앞장서 걸어갔다.
주혁민은 90번째의 실패에도 끄떡없이 태연한 지배인의 침착성과 담찬 모습에 내심으로 감탄하여마지 않으면서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주혁민은 밤 열시가 지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공장마을에서는 벌써 《HM기》가 또 실패했다는 소문이 퍼졌었다.
주혁민은 아침, 점심을 다 번졌으나 지나치게 흥분했던탓인지 밥을 먹고싶은 생각이 없었다.
안해가 저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있었다.
주혁민의 안해 탄실은 은퇴할 나이가 되였으나 아직 건설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었다.
《오늘 〈HM기〉가 또 실패했다면서요?》
안해가 밥상우에 덮어놓은 흰 가제천을 벗기며 말하였다. 아들, 딸 두 오누이를 다 군대에 내보내고 비둘기처럼 남은 이들내외는 끼니때가 되면 더욱 호젓한 고독감을 느끼군 하였다.
《또 실패요!》
주혁민은 한숨처럼 뇌이고 상우에 얹힌 물사발을 들어 마시였다.
자그마한 네모 개다리밥상에 차린 음식은 흰쌀밥 한보시기, 조그맣게 빚은 밀가루만두 세덩이가 담겨있는 된장국, 산나물김치, 이것이 전부였다.
주혁민은 밥상을 대할 때마다 아직 이만큼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으로 음식이 목에 걸리군 하였다.
주혁민은 만두국만 비우고 술을 놓았다.
《왜 밥을 안드세요?》
《어디 밥맛이 있게 됐소.》
주혁민은 웃방으로 올라가 독한 써레기를 말아서 입에 물었다.
《어찌겠어요. 너무 속을 태우지 마세요. 그러다 앓겠어요. 이제 성공할 때가 있겠지요 뭐.》
안해는 주혁민의 어두운 얼굴을 축은하게 바라보며 위로하였다.
《나는 〈HM기〉때문에 속타하는게 아니요.》
《그럼 뭣때문에 그리 신색이 좋지 않아요?》
안해는 눈을 치뜨고 의아히 물었다.
주혁민은 이날 《HM기》시험장에서 탁석준이 혼자서 애쓰는것을 보고 잃어버린 설계조의 두사람-윤현덕, 설태섭에 대한 생각을 더 깊이 하게 되였다.
이날 시험장에는 독고소장도 와있었는데 그는 표표한 얼굴을 한채 말 한마디없이 돌아갔다.
그의 침묵이 분노의 웨침같이 느껴졌다. 윤현덕의 유서를 보고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이런 사람들이 괘씸하기보다 무서웠다.
《여보, 난 괴롭소. 우리 당원들이 어찌 그럴수 있소. 책임비서가 당원들을 어떻게 교양했으면 〈HM기〉제작단에서 두명이나 배반자, 도주자가 나왔겠소. 나는 벌써 세번이나 설태섭이와 곽경두한테 편지를 띄웠는데 곽경두는 회답조차 없고 설태섭은 윤현덕실장을 생각하면 가슴이 터지는것 같지만 라남에는 돌아갈수 없다는거요.》
주혁민은 페부깊이 들이마신 써레기연기를 입으로 확확 내뿜었다. 굴뚝처럼 뿜어나오는 흰 담배연기는 마치 주혁민의 가슴에서 타는 울화의 연기같았다.
주혁민은 물론 설태섭이와 곽경두를 라남으로 다시 데려오려는것은 아니였다. 그가 바라는것은 그들이 라남사람들앞에서 자기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는것이였다.
그런데 설태섭이의 회답편지를 보면 반성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HM기》의 유압설비와 기술자료들을 교섭하려 몇달동안 외국려행을 한 설태섭은 헛물을 켜고 돌아왔으나 여전히 《HM기》를 개발하자면 서방의 시장을 뚫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고있었다.
그의 머리는 이미 그렇게 굳어졌었다.
(이제 우리가 《HM기》를 성공시키면 설태섭의 머리가 달라질수 있을가? 곽경두는? 우리의 《HM기》는 언제면 성공할수 있을가?)
주혁민은 번거로운 생각을 톺으며 새삼스레 달력을 바라보았다. 1997년 6월, 20세기는 3년밖에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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