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기지 정당화하면서 내세우는 율곡 10만 양병설의 실체!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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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모 나그네 님의 글입니다)
율곡의 10만 양병설, 그 조작된 신화와 도그마
제주 기지 찬성론자들은 해군의 보편적인 작전논리를 완전히 무시한 강정 기지건설을
정당화하면서 전가의 보도처럼 ‘유비무환’을 외쳐댄다. 그러면서 율곡선생의 10만 양병설
을 들먹인다.
한마디로 기지를 반대하면 율곡처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역적이요, 국론 분열세력
이라는 소리다. 그런데 그들이 성경구절처럼 인용하는 율곡의 10만 양병설이 정작 율곡
선생은 말씀하신적도 없는 허구의 도그마요 지극히 일개 당파의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 조
작된 신화요 도그마라는 사실은 알고서 저리도 당당하게 떠드는 것일까?
모든 역사자료에서 1차 사료는 중요한 사실관계 파악의 기본이다. 우리가 역사라는 밥상
을 제대로 차려먹기 위해서는 팩트(FACT)라는 식재료, 설사 조리법(의견)을 달리하고
첨가물(견해)이 달라도 반드시 함께 공유해야 하는 최소 공약수에 해당한다. 사실을 공유
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유효한 담론도 토론도 전개될 수 없다.
그런데 율곡 이이의 저작과 학문적 견해를 모두 담은 율곡전서 그 어디에도 10만 양병설
의 양자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유명한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이 처음 역사의 사료에서 등장하는 것은 그의 제자였던
사계 김장생의 [율곡 행장]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런데 김장생이 10만 양병설을 인용한 장
에는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숨겨져 있다. 율곡이 10만 양병설을 주창하고 다가올 임란을
예견했다는 대목을 서술하면서 당대의 명재상 서애 류성룡이 ‘이 문성(율곡의 시호)은 참
으로 성인이다. 그의 말을 채용했다면 어찌 국사가 여기에 이르렀겠는가’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그런데, 율곡에게 문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것은 인조 2(서기 1624년)년이고 그보다 17년
앞선 선조 40(1607년)년에 타계했으며 더구나 김장생이 [율곡행장]을 쓴 것은 서애의 사망
보다 더 빠른 선조 30(1597)년이다. 이 얘기는 사계가 쓴 책에는 무려 27년이나 앞서서
율곡 선생의 시호가 적혀있는 것이다. 서애는 어떻게 해서 자기가 죽은지 17년이나 지나서
내려진 시호를 알았을 것이며, 그보다 제자 김장생은 어떻게 27년이나 앞서서 스승에게
내려진 시호를 예측했던 걸까.
이쯤 되면 문헌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나 사학자들과 한문학자들에 의해 율곡행장에서
이 대목의 진위에 대해 의심 받기 딱 좋다고 봐야 한다. 한문학자 이가원이 이 부분에
대해 자기모순에 빠졌다는 지적을 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후대에 기록된 율곡의 10만 양병설이 기록된 문헌들 대표적으로 [선조수정실록]과
이정구의 [시장], 이항복의 [신도비문] 그리고 우암 송시열의 [율곡연보]는 모두 사계의
행장을 그 인용처로 삼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중요한 내용이 사계의 문헌이나 수정실
록에서조차 언제 발언한 것인지 모호하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율곡의 10만 양병설은 그
때까지만 해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10만 병사를 양성하자는 것인지 명기되지 않았다. 이후
계미년 4월이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은 송시열의 [율곡연보]에서부터다. 그리고 오늘 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구체적인 양병책에 대한 서술까지 나온다. 도성에 2만 각도에 1만 총합이
10만을 양성한다는 계획... 이쯤 되면 문헌적으로 10만 양병설의 정체는 확연히 드러난다.
바로 사계 김장생과 우암 송시열의 조작이 유력해진다. 송시열은 김장생보다 훨씬 후대의
인물이며 숙종때 죽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10만 양병설은 그에 의해서 구체화된 것이다.
율곡전서에는 군정책이라는 군사대책을 담은 부분이 있는데, 후대 율곡의 학맥을 이었다는
서인과 노론들이 그토록 강조하던 10만 양병설은 어디에도 없고 대신 공자와 자공의 유명
한 군과 물력과 인민의 신뢰에 대한 고사를 인용하며 과다한 국방비로 민생을 피폐케 하
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적혀 있을 뿐이다. 율곡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믿음
이 나라를 지키는 금성탕지(金城湯池:방비가 견고한 성벽을 이르는 사자성어)요, 군병은
족히 말할 것이 못됩니다. 이로써 보면 나라에서 마땅히 먼저 해야 할 바는 인의와 믿음
에 있지 않겠으며, 나중에 할바는 군정에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 살아생전의 율곡은
나라방위의 근간을 공자의 말씀에 입각한 민의 신뢰와 인의로 봤지 군사의 일이 처음이라
고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어리석고 용렬한 후대의 제자들과 문도들에 의해 자신
이 하지도 않은 말을 한 것으로 조작된 것이다. 스승의 얼굴에 개먹칠을 해도 분수가
있지...
문헌학과 한문학자들 중 자료를 꼼꼼히 보는 이들치고 율곡의 10만 양병설을 사실로 인정
하는 이는 거의 없다. 식민사관의 온상인 간송학파와 우암학 연구소 계열만이 이를 신봉
할 뿐이다.
간단하게 결론해보면, 서인노론이 조작해낸 10만 양병설은 동인과 북인 계열이 주도해서
극복한 임란의 공, 특히 국란극복에 공이 큰 이순신을 발탁했고 국란극복에 진력했던 서애
유성룡의 업적을 축소화하고 후세에 서인세력이 임란에서 큰 잘못이 없음을 공고히 하고자
의도된 것으로 보는 게 더 역사적으로 맥락에 부합된다.
그런데 정작 10만 양병설을 조작해낸 서인노론 세력들은 국제정세의 변화와 흐름을 제대
로 읽지 못해 두차례나 청나라 침략을 허용해 임란의 상처에서 채 아물지 않은 조선의 민
중들을 다시 전란의 도가니로 빠트려 엄청난 고통을 치르게 했으며, 삼전도의 3배 9고두
라는, 경술국치 다음가는 조선사 최대의 치욕스런 장면을 자초한 집권세력이었다. 그런
치욕을 당하고도 그들은 반성과 개혁을 하기는커녕 이후 효종과 숙종 대까지 추진되었던
북벌을 말로만 북벌에 그치게 한 장본인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소현 세자의 의문사, 사도
세자의 죽음 등 조선 전기에는 볼 수 없었던 패륜의 역사를 자행했고 주자학 외의 모든
학문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조선후기를 오직 하나의 사상만이 통용되는 경직되고 억압적
이며 폐쇄된 세상으로 몰아넣었던 장본인들이었다. 이들이 결국 국망와 매국의 주체가 되
었음은 이후 역사가 말해주지 않는가.
마치 대한민국의 건국과 현대사공간에서 제대로 된 민족주의나 북한과의 화해나 과거사
의 진상규명이나 친일부역의 청산을 이야기하면 용공친북 좌경을 운운하는 태도와 하나
도 다를 바 없는...
그렇다. 지금 그 10만 양병설을 들먹이며 제주기지 건설을 정당화하는 세력들은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고 자신들과 의견이 다르면 국론 분열 세력 혹은 종북 좌빨 그리고
사문난적으로 몰아가는 수법과 시각은 놀랍도록 과거 서인노론과 닮아 있지 않은가?
율곡 이이는 참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의 편에 서서 학문을 펼쳤으며 당파의 차이를
틀림으로 인식하지 않아 당대에도 다른 정파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았던 걸출한 학자이
자 정치가였다. 그가 신분질서의 타파를 자신의 저서에서 주장했고 공납의 폐해를 절감해
수미법을 최초로 주창했던 학자라는 점에서도 이는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호부의
견자격으로 그의 뒤를 이었다는 제자들은 스승이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가면서까지
스승을 신격화했고 후세에 와서는 그것이 들통나 도리어 스승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
그런데 이런 웃기는 짓을 지금 우리사회 10만 양병설을 들먹이는 자들이 또 하고 있다.
바로 제주 기지 건설을 반대하면 율곡의 탁월한 예언 10만 양병설을 반대하는 찌질한
서애 유성룡의 무리와 같은 용렬한 국론분열세력이 된다는 매우 단순무식한 도그마를
들이대시면서 말이다.
당연히, 제주기지 건설을 주장하는 것은 자유다. 그러나 그 근거로 10만양병설을 들어
유비무환과 ‘닥치고 따라와’ 를 누군가에게 지금처럼 강요한다면 그것은 바로 스승의
얼굴에 먹칠을 한 사계와 우암같은 일식(一識:오직 한가지만 아는)한 사문난적들이나
할 짓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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