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의 다람쥐들아, 어디로 간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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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유니폼 상의의 양쪽 앞주머니엔 늘 펜 두 개, 몇 장의 분홍색 종이(이것은 소포나 내용증명 우편물의 수취인이 없을 때 적기 위한 양식입니다), 매직 펜 하나, 껌 한 통, 그리고... 한 봉지의 땅콩이 들어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제 일을 위한 것이거나, 저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땅콩은 제 라우트의 다람쥐들을 위한 것입니다.
일하면서 30분의 점심시간, 그리고 10분간의 휴식을 세 번 가질 수 있습니다. 벤치에 앉아 있으면 다람쥐들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슬슬 제 옆을 둘러싸고, 저는 그러면 땅콩을 꺼내어 다람쥐들에게 줍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일부 겁 없는 다람쥐들은 직접 제 손에서 땅콩을 채 가기도 합니다. 그동안 얼굴이 익었다는 것이겠지요. 심지어(?) 저는 일부 다람쥐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다돌이, 다경이, 다혜... 이런 식으로. 신기한 건 다람쥐들이 땅콩을 안 주면 아예 길을 막아 서서 항의하듯 저를 쳐다볼 때입니다. 도심에 사는 동물들이 사람에 순치된 건 사실이지만, 이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땅콩을 달라고 졸라댑니다. 이 아이들 때문에 저는 늘 땅콩을 가지고 다니고, 그게 없을 때는 점심으로 싸온 베이글 샌드위치라도 조금씩 떼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두 주? 아니 세 주 이상 다람쥐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슴 주머니의 땅콩은 줄지 않고 그대로 작은 봉투에 담겨 고무줄로 꽁꽁 묶여 있습니다. 도대체 이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궁금합니다. 다람쥐는 시애틀에서 매우 개체수가 높은 동물이어서, 이렇게 갑자기 없어진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가끔씩 불쌍한 다람쥐들이 차에 치어 널부러져 있으면 까마귀들이 와서 그 사체를 쪼아 먹는 것도 이 동네에선 흔히 보는 일인데, 요즘은 그런 일들도 없어졌습니다.
다람쥐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추측해 보건대 요즘 개체수가 늘어난 매와 독수리 때문인가 싶기도 하고... 다람쥐들이 안 보이니 조금 섭섭하게까지도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뜻밖의 광경을 봤습니다. 다람쥐가 보여서 오랫만에 반갑게 땅콩 주머니를 꺼냈는데, 어디선가 다가온 고양이가 갑자기 다람쥐를 습격한 겁니다. 다행히 그 다람쥐는 도망가는 데 성공하긴 했는데, 이 동네에서 사는 고양이가 다람쥐를 쫓아가는 건 처음 보는 일이라 조금 황당했습니다. 고양이들은 사람들이 주는 먹이에 익숙해져 있는 동물이고, 야생동물처럼 다람쥐를 사냥하거나 하진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아니, 보통은 눈 앞에서 다람쥐가 꼬물거려도 귀찮게 여기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하는 장면들을 흔히 봐 왔는지라, 고양이의 갑작스런 이런 행동이 이상하게 여겨졌습니다.
고양이를 좀 자세히 봤더니, 털도 여기저기 빠지고, 야위어 있었습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길고양이구나. 다람쥐가 이렇게 사라져 버린 건.
제가 일하는 시애틀의 캐피탈 힐 지역은 학교들이 많고 젊은이들이 많이 사는 관계로 전출입이 잦습니다. 보통은 이곳에서 공부를 마칠 때까지 있다가, 직장을 잡고 그대로 이곳에서 살거나 혹은 타지로 떠납니다. 이런 경우, 기르던 동물들은 데려가기 마련입니다. 고양이 붐은 만화 '가필드'가 한참 유행하기 시작하던 80년대 말부터 시작됐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개를 더 많이 기르던 미국의 가정은 핵가족의 계속되는 분화, 1인 가구의 증가로 인해 개보다는 독립적이며, 혼자 집에 놔 두는 것이 더 용이한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대부분의 고양이들은 주인이 올 때까지 집에서 빈둥빈둥거리며 심심하면 창틀에 올라가 바깥을 내다보거나 하는 것으로 시간을 때웠고, 먹기도 많이 먹어 살까지 뒤록뒤룩 찐 고양이들도 많았습니다. 미국 만화 '가필드'는 바로 그 때 미국 사람들의 외로움을 달래 준 그런 고양이들을 모델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비쩍 마른 고양이들을 많이 봅니다. 짐작컨대, 일을 잡지 못한 젊은이들이 결국 이 지역의 높은 생활비를 견디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아마 그런 이들에게 기르던 고양이는 짐이 됐을 것입니다. 고양이들은 다른 이들에게 맡겨지거나, 혹은 버려졌을 것이고. 그렇게 버려진 고양이들은 거리를 점령하기 시작한 것이죠. 배고픈 고양이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아마 개체수가 많은, 만만하게 잡을 수 있는 작은 새나 다람쥐였을 겁니다. 그리고 고양이의 본능은 우선 다람쥐들을 더 잡기 쉬운 먹이로 인식하게 했겠지요. 그리고 모르긴 해도, 내가 이름붙여 주었던 그 다람쥐들은 고양이들의 밥이 되었을 가능성도 농후합니다. 불쌍한 것들.
미국의 경제상황은 이 나라가 젊은이들에게 미래가 없는 나라가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무직 세대 Jobless Generation' 라는 신조어가 유행입니다. 고급 교육을 받아도 구직이 보장되지 못하는 불안한 세대들은 그들이 길렀던 반려동물도 포기해야 할 정도로 가난해졌고, 그들의 빼앗긴 미래는 그들을 불확실성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그 바람에, 다람쥐에게 먹이를 주면서 심심파적했던, 조금 낭만적이기까지 했던 나의 망중한에서 즐거움 하나가 사라진 것입니다.
미국이 다시 '좋은 나라'가 되려면 세제를 분명히 고쳐야 합니다. 레이건 이전의 세금 정책으로 돌아가 부자들에게 대폭 올린 세금을 걷고, 그 돈을 복지의 형태로 뿌려 구매력을 높이고, 그 구매력을 통해 생산을 자극하고, 해외에 나가 있는 생산 시설들을 다시 미국 본토로 불러들여 고용률을 높여야 합니다. 이런 것이 쉽게 이뤄질리도 사실 만무하고, 이미 양극화가 이정도까지 진행된 상황에서, 또 젊은이들이 직장을 잡는 것조차 이렇게 어려워진 것만 봐도, 어떤 혁명적이고 극단적이기까지 한 조치가 없는 이상 미국의 극적 변화와 안정적 미래는 보장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 참 아쉽습니다. 좋은 미국이 오기 전까진, 제 가슴 주머니의 땅콩을 뿌려줄 귀여운 다람쥐들은 이미 길고양이들의 밥이 될 것인데... 다람쥐들과 망중한을 즐겼던 즐거운 미국을 찾아올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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