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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영도자들의 정치철학은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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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10] "북의 영도자들 정치철학은 사랑이다"
*글:예정웅(정치평론가)
◆ "더 잘 먹이세요.여러분들을 믿고 장병들을 맡기고 갑니다”
딱딱한 차돌맹이에 새겨진 것처럼 확고한 반북편견으로 머리가 굳어져 고생하는 성실한 사람을 만나 대화 할 때가 있다. 그들에게는 어떤 차분한 논쟁이 소용이 없다. 이기는 방법은 그저 공손하게 들어주는 것 뿐 이다. 정말 내 설득력으로 이 차돌맹이를 내처 버릴 수는 있지만 녹여낼 만한 능력이 없었다.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경험에 의하면 가장 어려운 대화상대는 꼬장꼬장한 설익은 지식인이다. 뭐 좀 안다는 사람이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헛것을 알고 있다. 내가 이렇게 말했다.“만약 나라면 반북의 믿음으로 마음을 닫는 것 보다 동족사랑의 경이감으로 마음의 문을 열어놓는 쪽을 택하겠다.”고, 그래도 대화는 차갑다.
그 차돌맹이에게 쇼킹하고 감미롭고 주목 받을 만한 얘기를 해 준다. 사랑의 예기이다. 사랑, 참으로 사랑이란 말은 정의내리기 쉬울 것 같지만 힘들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진실하고 오래 남는 경험? 두려움의 반대말, 관계의 본질.? 행복의 근원? 뭐 이렇게 시작해서 북의 최고영도자의 인민사랑과 민족 사랑의 문제로 말문의 높이를 올려놓는다.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도록 나부터 접근을 변화시킨다. 사랑, 그 속에는 깊은 진리가 있다. 사람들이 마음을 닫고 편협해 지는 것은 상대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의 일생은 이스라엘 민족과 인민사랑의 역사였고 예수의 이스라엘 민족과 인민사랑을 가장 두려워 한 세력이 유대의 원조와 로마제국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대화는 시작한다.
사랑이 가진 모든 힘과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민족과 전체인민을 참 사랑으로 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북의 최고영도자의 풍모에서 민족과 인민사랑의 정치가 얼마나 고귀한가를 배운다. 우리는 북의 최고영도자가 군부대를 방문하거나 기업소나 공장을 현지 지도하는 기사를 매일과 같이 접한다. 금년에만 김정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은 거의 4~50회 이상 현지지도사업을 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그가 군부대나 기업소 공장 같은 곳을 방문하면서 빼놓지 않고 들리는 곳이 있었으니...어머니가 외출하고 집에 돌아와 제일먼저 찾는 곳이 어디겠는가? 통속적인 표현을 빌리면 부엌이다. 식구들의 끼니를 챙겨 준비해야 한다. 밥 먹는 것도 어머니의 여러 공정을 거처야 된다.
어머니의 자식들에 대한 사랑은 내리 사랑이며 무조건적이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부엌을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꼭 찾는다. 군부대나 기업소는 규모가 크니까 가정의 부엌이 아니라 큰 주방이 되겠다.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군부대 장병들의 식사의 질과 량, 공장 노동자들의 식단에 올려 진 밥과 반찬, 후식까지 점검한다. 차림표에는 영양분석과 섭취할 칼로리까지 표시되어있다. 세계에 어느 나라 어느 정치지도자가 장병들과 자기 인민들이 먹는 식단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관심을 돌리고 있는 지도자가 있을까.
북의 일심단결의 위력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아니다. 북이 말하는 "우리 식 사회주의 위력의 원천은 일심단결이며 이 일심단결의 비결은 바로 인민사랑 속에서 나온다”는 말이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손길아래 천하무적의 강군으로 자라난 백두산 혁명 강군의 필승불패의 위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정은 동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군대생활의 나날을 이어가고 있는 인민군장병들의 열렬한 충정의 마음이 수령과 인민이 사랑으로 혼연일체를 이루는 여기에 한 나라 전체가 대가정이 되는 것이다. 그 비결은 특별한 수단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단 하나 영도자와 인민간의 사랑의 관계에서 창조되어 나온다.
사랑이 없는 일심단결은 울리는 괭가리에 다름 아니다. 바로 북의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어머니 심정과 같은 사랑의 힘으로 인민을 품고 인민은 자기의 영도자를 믿고 모든 것을 의탁하는 관계, 그것이 바로 북의 현실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랑의 공동체이며 대가정이다.
우리 가슴 뭉클 해 지며 눈시울이 뜨거워 질만한 한마디의 말을 떠 올려본다. 김정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은 떠나기 전 주방에서 일하는 흰 모자를 쓰고 흰 옷과 앞치마를 두룬 어머니들의 물 젖은 손을 뜨겁게 잡고 이렇게 간곡한 당부의 말을 남긴다. "더 잘 먹여주세요, 여기 초소에서 일하는 여러분들을 믿고 우리 장병들을 맡기고 갑니다”라는 그 말은 평범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찡하게 페부에 와 닿는다.
◆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애칭“회색 반 코드 잠바의 사나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하고 싶은지 물으면 놀랄 정도로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네 영원히 사랑하고 싶어요” 한다. 또는 아니오. 절대로 사랑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사랑이란 자신을 포기하고 늘 희생해야 하며 상대방을 기쁘게 해 주어야만 하는 걸요..“ 앞의 대답은 사랑하는 연인간의 낭만적인 이야기이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후자의 경우도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어마어마한 희생이라는 것이 과연 사랑의 올바른 정의일까. 그렇다 사랑은 주는 것이며, 배려이며, 사랑은 희생을 요구한다.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지배자의 지배나 정치적 속임수, 증오라고까지 생각 한다. 우리는 서방세계의 지도자들의 이기주의적 자세를 많이 보아왔다. 그리고 남한의 불행한 독재와 미국식민지체제의 정치적 환경에서 사랑이 없는 지도자들의 모습과 황금 제일주의에 좌지우지 되는 지도자들의 모습들을 많이 보아 왔다. 이러한 모습들과 북의 영도자들이 보여준 모습들은 사뭇 다르다.
북의 지도자들이 보여준 사랑은 순수했다. 이들은 오로지 민족과 인민들에게 배푸는 사랑이었다. 이들이 사랑에는 속임수가 존재하지 않는다.
북의 사회주의체제에서《수령》과 《최고영도자》와 인민과의 관계는 떼어놓을 수 없는 혈연관계이며, 정신적인 같은 유전자의 소유자이며 같은 DNA이다. 인민에 대한 사랑은 수령이 갖춰야 할 근본 덕목 중 하나이다. 북의 인민들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이렇게 높이 떠받든다. 《그이는 인민의 자애로운 어버이》《인민사랑의 위대한 화신》으로...남이나 해외에 사는 많은 동포들 중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애칭을“회색 반 코드 잠바의 사나이”로 칭하기도 한다. 이 말은 그에 대한 사랑의 애칭이고 위트이고 그에게서 받은 사랑에 대한 작은 애정의 표시이다.
지난 시기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아니 오늘도 현지지도 사업에도 회색 낡은 잠바야.!』당신은 그의 검소함과 자애로운 인민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영상을 통해 지금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북방의 추운 겨울에 10여 년간 똑 같은 회색빛 반 코드 잠바 차림으로 영하 20~30도를 이겨내었다. 그게 편하고 따뜻했던가? 너무 오래입어 탈색이 돼 희끗희끗 해 보였다. 눈과 비, 새벽녘 안개와 비바람, 폭풍에 쩔어 잠바 색이 안 변할 수 있었겠는가. “인민 사랑과 헌 반 코트 잠바?” 그게 그분의 사랑의 이미지이고 인민에 대한 무한한 헌신이 거기에 바랜 잠바 색에 담겨져 있다. 그는 전체 민족구성원들, 남녁 동포들이나 해외 동포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남김없이 베풀면서 한생을 살았다.“통일이 되면 그때 양복에 넥타이를 매겠노라”고 하면서 반 코드 차림을 그렇게 고집하였다고 한다. 사람을 감화시키는 일은 작은 감동에서 시작된다. 사람들이 삶에서 얻는 배움들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미완성의 일들을 완성한다는 뜻이다.
친구가 좋아 사귀였더니 이별이 있다 했다. 사람은 헤어졌다가도 또 다시 만나기도 한다. 이런 일은 아직 관계가 끝나지 않았고 미완의 혁명이 남아있을 때 일어난다. 그가 염원하던 조국통일을 완성하지 못하였지만 그것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만난다. 미완성의 일은 죽음이 아니라 삶에 관한 것이다, 통일애국인사들의 심장 속에는 여전히《김정일 통일관》이 그대로 숨 쉬며 살아있다. 자주, 민주, 통일의 3대원칙과 민족대단결에 따른 연방제통일론과, 6.15와 10.4의 선언들의 이행들이“김정일 통일관”의 핵이고 징표가 아니던가., 누군가 그랬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지금도 영생하고 있고 영원한 영생은 시간과 인연이 없다고...”
여기를 관심해 본다. 사랑의 힘은 인민에 대한 무관심을 질책한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두 분 선대의 유훈을 계승한다. 그 중 제일은 민족과 인민 사랑을 더 높은 수준에서 계승한다는 의미이다. 지난 5월 9일 조선중앙통신, 조선중앙TV, 조선중앙방송, 평양방송 등 북 매체들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 1위원장이 만경대유희장 공원을 찾아 현지지도사업을 한 것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유희장 구내도로가 심하게 깨진 것을 보고 "도로관리를 잘하지 않았다“고 질책하였다.
유희장 내부에 심은 측백나무와 향나무들의 밑 정리를 잘하지 않았다며 "나무 주위에 조약돌을 박아놓으면 더 보기에도 좋지 않겠는가" 하면서 관리자들이 인민에 대한 사랑과 봉사정신이 이래서야 되겠느냐면서 특별히 부족 점을 지적하였다. "설비갱신은 몰라도 사람의 손이 있으면서 잡풀이야 왜 뽑지 못하는가" 하면서 "유희장 관리가 소흘 하다“ 고 지적한 김정은 최고영도자는 보도블록 사이로 돋아난 잡초를 직접 손으로 뽑는다. 공원관리 간부들에게“인민사랑은 말이 아니라 작은 것 하나부터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한다.
북은 1980년대부터 “인민을 위해 복무함”이라는 구호를 들었다. 지금은 `인민을 위한 좋은 일을 더 많이 하자'라는 구호가 등장하였다고 한다. "이 구호가 갖는 의미는 김정은 제1비서의 인민 사랑관이 담긴 구호"였고 이 구호의 깊이에는 인민을 더 뜨겁게, 더 극진히 돌봐주고 인민의 이익과 편의를 최우선시하며 그들에게 최상의 것을 안겨줘야 한다는 김정은 제1비서의 숭고한 인민사랑의 높은 요구성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 우리는 북의 겉만 아니라 내면의 변화를 본다. 변화, 그렇다. 민족 사랑의 변화는 늘 우리와 함께 있었지만 우리는 변화를 친구라고 생각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사랑의 변화에 겁을 먹기도 한다. 북의 민족사랑과 인민사랑은 지금까지의 익숙한 상황에 작별을 고하고 새롭고 낮선 새로운 사랑을 창조해 간다.
◆ 북은 남한을 단 한 번도《주적》이라 생각해 본적이 없다
《주적》?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주적은 없다. 사랑으로 크게 품으면 다 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주적》이란 민족 분단관계에서 사랑을 모르는 자들의 소리이고 이해관계의 갈등만 조장하는 가장 나쁜 언어이고 저급한 사고체계이다. 미국은 북을 주적으로 생각하는가? 실제로는 아니다. 미국은 북을 자기의 주적을 삼지 않았다. 그렇다면 미국의 주적은 누구일까. 대결의 논리대로 라면 당연히 북은 미국의 주적이 되어야 한다. 지난 열병식 때 《화성13》호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종이로 만든 위장품이라고 했다. 《화성13》호 로켓이 위장 품 이라면 북으로 쳐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그렇게 못한다. 북이 주적이라면 힘과 힘의 대결로 상대를 제압하면 되는데 대화로 문제를 해결 하자고 한다.
사실이지 미국의 대북관계는 자신들이 처논 봉쇄망에 자신들이 걸려든 형국이다. 북과 미국은 애증관계에 있는지도 모른다, 애증이란 상대에게 더 고통을 주고 갖기는 어렵고 놓치기는 싫은 엄격하게 말해서 과거나 현재도 미국은 북을 자기의“주적”으로 삼지 않았다. 언제인가 손을 잡고 포웅 해야 될 친구로, 미국의 동북아 전략에서 북과 동등한 힘의 지분을 인정한 바탕 우에 서로 패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되기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미국의 깊은 대북전략을 모르는 남한의 이명박 반북정권은 우리민족의 한 부분인 북을 《주적》으로 삼았다.
자기의 민족, 자기의 동족을 주적이라고 하는 이 참담한 사고체계야 말로 반민족 대역적들이나 하는 소리일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2010 육군정책보고서》에 북을 주적으로 명기해 놓았다. 북에 대한 주적 표기가 2004년 《국방백서》에서 삭제 된지 6년 만에 이명박 반북정권에 의해서 부활되었다. 자기의 민족과 동족을 주적으로 삼는 나라는 이 세상에 이명박 정부밖에 없을 것이다. 북은 한반도 분단 이래 지난 67년간 남한을“주적”이라고 말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색의 중심에는 제국주의자들의 전쟁책동으로 말미아마 더욱 엄혹해지는 정세 속에서 민족의 안위와 사회주의 정치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근본열쇠가 필요했으며 사회주의 정치의 모든 문제와 현안을 다 해결할 수 있는 만능의 보검이 요구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장의 뇌리에는 언제나 '새로운 정치방식'이 섬광처럼 번쩍였다. 사랑, 단결, 힘 이세가지가 그의 사고체계를 지배하였다. 그 중 제일은 사랑이었다. 바로 선군의 힘을 바탕으로 인민이 단결해야 하며 그것을 안 받침하는 것이 사랑의 정치가 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선군, 단결, 사랑을 자신의 정치세계로 정식화 하였다. 만일 북이 사랑과 믿음의 인덕정치에 의해서 사회정치적 결속력을 강화하지 못했더라면 북은 아마도(고난의 행군)과 사회주의 강행군을 승리적으로 결속하지 못했을 것이며 거기에 더해 인덕정치에 의해서 형성된 강한 사회정치적 결속력으로 (고난의 행군)의 시련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사회주의 강행군을 승리적으로 맞이하게 된 원동력이었다.
남한 인민도 모두가 한 핏줄을 이어 온 우리민족의 형제자매이고 민족의 구성원으로 북은 언제나 남한의 인민들을 사랑하였고 지금도 우리민족 성원으로 폭 넓게 사랑으로 품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랑의 표현에서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기초로 북은 언제나 남한과 같이 손을 잡고 우리민족끼리 민족공동번영과 내일의 강성국가 건설을 위해 같이 가자고 하였다.
이는 북의 최고영도자의 선군정치가 인민사랑에 대한 또 다른 정치적 표현이다. 북은 남한이 주적이 아니라는 징표는 북의 자주철학 그 어디에, 어느 법체계나 어느 학술적 논리에서, 신문의 각종 논평에서 군사교범 어디에도 남한이“주적”으로 된다고 적시한 것이 없다는데서 잘 알 수 있다.
북의《주적》은 오로지 미 제국주의자들이지 남한이 아니다. 북은 민족 사랑과 인민사랑의 정치에는 이렇게 민족과 외세를 갈라놓고 구분해 말해왔다. 만일 북의 선군정치가 없었다면 한반도에서는 이미 열 백번도 더 전쟁이 터졌을 지도 모른다. 인민들이 피를 흘리고 인민들이 창조한 재부가 다 파괴되는 우리 민족이 미국의 핵 참화를 당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남한은 북의 선군정치에 의한 민족보위에 마땅히 감사를 해야 할 것이다.
북의 민족사랑의 정신의 바탕에는 민족적 존엄과 자주권을 옹호하고, 온 겨레의 민족적 이익을 보호해주는 선군정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전이후 지금까지 이 땅에서 평화가 보장되고 미 제국주의 침략전쟁 도발기도를 사전에 제압, 파탄 나게 만든 원초적 힘이 북의 선군정치에서 나왔다. 북의 선군정치는 온 민족의 발전과 번영을 굳건히 담보해주는 만능의 보검이 된다. 바로 여기에 선군정치가 민족 사랑의 애민애족의 정치로 되는 본질이 있다.
김정일 국방위장은 선군으로 북의 군대를 무적필승의 강군으로 만들어 민족과 나라를 보위하였으며 인민군대를 힘의 핵심, 본보기로 창조하여 혁명의 주체를 튼튼히 꾸리고 군대가 혁명의 기둥으로, 전반적인 사회주의 건설과 민족 사랑의 발전을 힘으로 담보하였다. 그 바탕은 사랑이었다. 사랑의 힘, 그래서 강한 것이다. 전체 민족을 사랑의 힘으로 품어 장악하려는 전략, 그것이 선군의 민족사랑, 애민애족 사랑의 정치를 실현시켜 《민족의 안보》를 더욱 든든하게 지켜내고 조국통일을 향해 총진군 해 나가는 것이 되리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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