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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3]김일성주석 위해 목숨 바친 중국인 장울화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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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슴도치
댓글 0건 조회 4,084회 작성일 12-07-01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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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편집 시간 2012.07.01 12:41:23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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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3]김일성주석 위해 목숨 바친 중국인 장울화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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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3]김일성주석 위해 목숨 바친 중국인 장울화열사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종합] 중국인 장울화열사 가정은 5대에 걸쳐 북부조국의 지도자들과 인연을
맺고 지금도 조중친선의 상징으로 남아 있고, 이 가족들은 거의 매년 조선을 방문해 왔다. 장울화열사는
항일투쟁 시기 김일성주석의 안위를 위해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바쳐 관심을 모아 온 인물이다.
이번에는 이 가정에서 출판한 도서 《김일성과 장울화》의 세번째 글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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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은 중국인 장울화열사 가문의 5대손까지 친가족처럼 지내왔다.


[특별연재-3]

김일성주석 위해 목숨 바친 중국인 장울화열사




2


그야말로 감동적인 화폭이였다. 빙설로 뒤덮인 조선의 평양 만경대 갈림길에서 학생복차림의 소년이 한걸음 내디디다가는 또 다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고향의 초가집과 사립문에 손을 얹고 눈물로 바래주시는 년로하신 할머님과 작별하고 결연히 북쪽을 향하여 걸어가시였다.

그 소년이 바로 김일성동지이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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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신 특파원은 작년말 중국 무송에 있는 장울화열사 생가에서 장남 장금천선생을 만나 취재했다.
1925년 1월 평안남도 대동군 룡산면 하리 칠골(당시)창덕학교에서 공부하시던 김일성동지께서는 아버님이신 김형직선생님께서 또다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시였다는 비보를 들으시고 비록 이제 몇달만 더 있으면 소학교를 졸업하게 되시였지만 학업을 그만두고 아버님을 찾아 중국으로 가시기로 결심하시였다. 준비하신 건음식으로 끼니를 에우시고 풍찬로숙하시면서 소년 김일성동지께서는 1, 000리길을 홀로 걸어서 가시였다.

몇해전에도 그이께서는 부모님들을 따라 처음으로 평양에서부터 1, 000리길을 걸어 중국에 오시였다.

1923년 3월 16일 그이께서는 조국에 돌아가 공부하라고 하신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두번째로 1, 000리길을 걸으시였다.

소년 김일성동지께서는 근 15일동안 걸으시여 중국 길림성 압록강반의 작은 도시인 팔도구에 도착하시였다. 집에 도착하시여서야 비로소 아버님께서 이미 위험에서 벗어나 무송에 거주를 붙이고 《무림의원》까지 차려놓고 의사직업을 간판으로 하여 조선독립활동을 계속하신다는것을 알게 되시였다.

강반석어머님께서는 경찰놈들이 달려들어 박해할것을 념려하시여 그날 밤으로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김일성동지와 그이의 두 동생을 림강으로 떠나보내시였다.

그후 김형직선생님께서는 길림 신안툰에서 진행된 청년단체간부회의에 참석하시였고 회의가 끝나서야 강반석녀사께 집안식구들을 데리고 무송으로 오라고 전화로 알리시였다.
당시 김일성동지의 성함은 김성주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아드님이 장차 나라의 기둥이 되여주실것을 바라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1912년 4월 15일 만경대에서 탄생하시였다.

자제분들이 림강을 떠나 무송으로 가던중 아버님의 벗인 독립군 중대장 장철호가 보낸 말파리를 만나게 되시였다. 말파리를 몰고온 독립군의 두사람은 마치도 상가집으로 가는것처럼 상복차림새를 하였다. 그것은 김형직선생님의 가족들을 무송까지 무사히 데리고가기 위한 안전대책이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무송에서 얼마 멀지 않은 작은 도시인 대영에서 일가분들을 맞이하시였다.
동생들과 함께 아버님을 다시 뵈옵고 기쁨을 나누시던 김일성동지께서는 타고오신 말파리가까이에 서있는 한대의 큰 중국마차에 눈길이 끌리시였다. 그것은 한필의 수말이 마차의 끌채를 메고 세필의 곁말들이 마차의 멍에채밖에서 보조로 끄는 부자집 마차였다. 마차가 갈 때에는 두개의 큰 고무바퀴가 눈우에서 사각사각하는 상쾌한 소리를 내군 하였다.

그 큰 마차에는 김일성동지의 년세와 비슷한 개가죽모자를 쓴 한 중국사내아이가 타고있었는데 모자채양아래에서 한쌍의 큰 눈이 김일성동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 중국사내아이를 향하여 손을 흔드시였다. 그 사내아이도 김일성동지께 손을 흔들어보이면서 웃고있었다. 그의 웃는 모습이 마치도 아침해빛과도 같이 찬란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아버님을 따라 무송으로 오시였다.

그이의 새집은 무송현성 소남문거리에 있었다.
이제 김일성동지께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학업을 계속 할것인가 하는것이다.
그이께서는 틀림없이 아버님이 그곳 조선인학교에 다니게 할것이라고 생각하시였다. 그것은 2년전에 아버님이 그이더러 조선에 돌아가서 공부하라고 하신것은 바로 그이께서 조선의 력사와 지리 그리고 모국어를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였기때문이다. 뿐만아니라 그때는 아버님께서 무송의 조선인학교-백산학교를 한창 복구하고 계시던 때였다.

백산학교는 무송으로 먼저 온 조선사람들이 세운 학교였는데 자금이 없어 운영하지 못하고있었다. 그리하여 무송으로 이주해온 수많은 조선아이들이 민족문화교육을 받을수 없게 되였다. 이제 이 아이들이 조선글도 모르고 조선지리와 조선력사도 모르게 될것이므로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마음속으로 조바심이 나시였던것이다. 다행이도 백산학교교사는 그냥 남아있어 학교를 운영할수 있는 초보적인 조건은 갖추어져있는셈이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백산학교를 다시 운영하기로 하시였다.
그런데 돈이 없었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가지고 계시던 돈을 모두 백산학교 개교준비사업에 쓰시였다.
책상과 걸상도 없었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앓는 몸으로 장철호와 함께 말파리를 몰고 무송의 목공소들을 찾아다니시며 책상과 걸상들을 마련하시였다.

조선글로 된 교재도 없었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손수 《국어독본》을 편찬하시였다. 사람들은 후에 그 조선문판교과서를 류하현 삼원포의 한 인쇄공장으로 가지고가서 대량적으로 인쇄하였다. 그리하여 그것이 당시 동북의 조선인학교들에서 통용되는 교과서로 되였다.
만사가 다 구비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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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을 위해 목숨받친 중국인 장울화열사의 묘소 입구전경
이제 현정부로부터 학교운영인가증만 받으면 되였다. 그런데 현정부에서는 김형직선생님께 학교운영인가증을 발급해주지 않았다. 리유인즉 조선사람들이 학교를 운영하면 일본사람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킬수있는 우려가 있다는것이였다.

당시 일본놈들은 식민지노예교육을 실시하면서 조선국내학교들에서 조선글을 배우는것을 금지시켰고 조선말을 하는것까지 불허하였으며 조선사람들에게 일어를 국어로 하고 창씨개명을 할것을 강요하였다. 하는수없이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또다시 장만정에게 도와줄것을 요청하시였다.
장만정은 즉석에서 수락하였다.

그는 학교를 운영하는것은 좋은 일이고 조선아이들의 문화수준이 높아지면 자기 지방에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더우기 얼마전에 갓 조직된 현교육회 위원으로 된 그에게 있어서 학교운영을 도와주는것은 직접적인 책임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현장에게 한 조선사람을 거주시켜줄것을 설복하는것과는 다른 큰 문제였다. 그래서 장만정은 현교육회 회장 사춘태와 련계를 가지고 두석화, 원몽주 등 무송현 교육계의 몇몇 이름있는 인사들과 함께 류천성현장을 찾아가 끝내 그가 백산학교운영인가증을 발급하는데 동의하도록 설복하였다.

백산학교가 개학을 하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 명예교장으로 되시였다.
개학식이 진행되는 날 장만정과 그리고 백산학교가 개학하도록 도와준 신사들이 모두 와서 축하하면서 그 즉석에서 교육비를 희사하였다.
현교육회 회장 사춘태가 연설하였다.
장만정도 자기의 독특한 서예솜씨로 다음과 같은 축하주련을 써서 기증하였다.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발전시키는것은
후손만대의 행복을 위한 길
나라를 되찾고 인민을 계몽하는 길에 쌓은 업적
만대에 길이 빛나리

학교운영을 도와주는 사업을 통하여 김형직선생님과 장만정사이의 우정은 더욱 깊어졌다. 그것은 전적으로 민간에서 벗들사이의 평범한 교제였다. 비록 한분은 중국사람이고 한분은 조선사람이지만 우정과 서예에서는 국경과 민족의 한계를 초월하는것이였다.

한가할 때면 두분께서 함께 서예에 대하여 연구도 하고 론의도 하시였으며 때로는 무림의원에서, 때로는 천성영잡화점에서, 백산학교에서, 그분들 각자의 집에서 차를 드시면서 오늘과 지난 일들에 대하여 이야기도 나누시고 때로는 붓을 들고 일필휘지로 서예솜씨도 보이고 호상 그것을 감상하기도 하시고 또 어떤 때는 책상에 마주 엎드려 글씨, 그림따위에 종이나 헝겊을 덧붙이고 꾸며만드는 표구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소년 김일성동지께서는 원래 아버님께서 자기더러 백산학교에 다니라고 하실줄 알았다. 그러나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아드님을 무송제1소학교에 보내시여 중국의 문화교육을 받도록 하시였다.
천리혜안을 지니신 김형직선생님께서 아드님이 중국의 문화교육을 받도록 하신것은 당시 조선독립운동의 근거지가 중국 동북지방이였던것만큼 아드님이 장차 계속 독립운동을 벌리자면 중국의 생활환경에 적응되는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기때문이였다.

력사발전은 김형직선생님의 그때의 결심이 옳았다는것을 실증하여주었다.
김일성동지의 류창한 중어회화와 필력은 그이께서 중국 동북지방에서 진행하신 20여성상의 혁명투쟁에 아주 큰 도움으로 되였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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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민족통신 종합 2012-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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