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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3]제3세계 눈으로 서구열강을 파헤친다/오늘의 기독교 성령운동 과연 어디로 가고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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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
댓글 0건 조회 3,051회 작성일 12-06-25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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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편집 시간 2012.06.25 12:53:53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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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3]제3세계 눈으로 서구열강을 파헤친다/

오늘의 기독교 성령운동 과연 어디로 가고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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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3]제3세계 눈으로 서구열강을 파헤친다/

오늘의 기독교 성령운동 과연 어디로 가고있나?



유태영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이번 연재를 기독교 성령운동에 초점을 맞춰 세계열강과
그 식민지 나라에서 횡행해 온 비정상적인 기독교운동을 진단하고 분석하면서 미국의 세계적 교회인
수정교회가 파산되었고, 한국의 최대교인을 가진바 있었던 순복음교회가 동시적으로 파산된 문제와
그 뿌리가 되는 중세기 기독교 부조리 문제를 결합하여 다뤘다. 특히 남녘동포들과 해외동포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다. 이들에게 교훈을 주는 글로 생각된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3]제3세계 눈으로 서구열강을 파헤친다

오늘의 기독교 성령운동 과연 어디로 가고있나?




*글: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중세기 캐톨릭 교회의 문제점과
오늘의 성령운동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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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유태영 박사
오직 신만이 관심을 끌던 중세기에 들어서서 교회 내부에서 영성운동이라고 하는 관심이 증폭되고 있었다. 교회 내부에서 영성운동이 증폭되면서 로마제국의 운명과 멸망에 대하여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새로운 관점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AD 313년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한 후부터 중세기에 있어서 기독교의 고유한 특징인 교황의 교권과 황제의 정치세력이 서로 융합할 수밖에 없었다.

중세기 로마 카톨릭 교회는 막강한 정치력을 이용하면서 이 세상에서 “신국건설”을 성취한다고 주장했다. 카톨릭 교회의 고유한 사명을 강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교권이 정치력과 야합한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부패의 근원이며 종교적 타락의 온상이 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럼으로 중세기 로마 캐톨릭 교회의 영성 운동의 기원과 그 문제점에 대한 연구는 반드시 로마 제국의 통치와 전통의 맥락에 의거하여 관찰해야 한다.

로마 제국의 정치세력과 융합한 캐톨릭 교회는 세상을 다스린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 중세기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세상을 다스리기 보다는 오히려 세상을 닮아가고 있었다.

중세기 로마 캐톨릭 교회가 세상을 닮아간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ㄱ.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그리스도의 대행자”이라고 하는 권위를 악용하여 황제의 왕관을 좌우하는 권한을 주장함으로서 항상 정치적 논쟁을 이르키고 있었다.

ㄴ. 그때 당시 교황이 임명한 대주교는 감독을 억압하고, 감독은 신부들을 억압하고 신부들은 평교인들 민중을 억압했다. 교황청을 비롯하여 성직자들은 고하를 막론하고 탐욕과 강포와 음모가 횡행하여 로마 캐톨릭 교회는 틀림 없이 “악마의 회당”이었다라고 역사는 전해주고 있다.

ㄷ. 로마의 귀족들은 큰 세력을 가지고 있으며 부유한 귀족의 가문들이 교황과 황제의 임명과 계승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럼으로 교황의 영적 권한은 차츰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ㄹ. 1075년에 그레고리우스 교황 “교서”가 개인 비망록의 형식으로 하달되었다. 이 교서를 통하여 중세기 로마 캐톨릭 교회의 부패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모두 27개 항목으로 되여 있는 그 “교서”중에서 중요한 것을 간추려 소개하면 다름과 같다.

(1) 로마 교황은 지상의 최고의 권한을 가진 “보편적 권한”의 소유자 이다.
(2) 오직 교황만이 주교를 임명할 수 있고 파문할 수 있다. 일단 파문된 자와 관계를 가지거나 거처를 함께 하는것을 엄금한다.
(3) 오직 교황만이 로마 제국의 휘장을 사용할 수 있다.
(4) 오직 교황에게만 군주들은 그의 발에 입맞춘다.
(5) 오직 교황만이 황제를 폐위시킬 수 있다.
(6) 로마 교황은 결코 오류를 범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하다.
(7) 교황은 성 베드로의 권한을 이어 받았음으로 최고의 지상권을 가진다.

ㅁ. 로마 캐톨릭 교회의 성직을 돈으로 팔고 사는 악행이 특히 9-10세기에 유행하고 있었다. 교황은 법으로 성직 매매의 금지령을 내렸다.

1. 중세기 캐톨릭 교회의 영성 운동의 기원


중세 시대의 로마 캐톨릭 교회는 겉에서 보는것 처럼 화려하고 위세가 당당한 교회가 아니었다. 교회가 권력과 재산은 막강하게 소유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교회 내부는 심각하게 부패하고 있었다. 교회의 교권 내부의 분렬과 그리고 유럽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 캐톨릭 교회의 부패는 전체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와 같은 교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중세기에 등장한것이 바로 교회의 영성 운동 이었다. 영성 운동만이 부패한 중세기 로마 캐톨릭 교회를 구출해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영성 운동의 등장으로 인하여 로마 캐톨릭 교회는 두 측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이 두 축은 “교황권”축과 “영성운동”축이 양립하여 서로 대립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성 운동 (일명 성령운동)의 기원과 그 문제점에 대하여 제3세계의 눈으로 관찰해 본다.

중세기 로마 캐톨릭 교회의 영성 운동은 “수도원 운동”이라고 하는 형태로 처음 로마 에서 시작되었다. 수도원 영성 운동의 위대한 창설자는 ‘베네딕트’로 기록되어 있다. 베네딕트는 529년에 해발 519m의 높은 산에 수도원을 세웠다. 베네딕튼는 옛날 250년전의 성어거스틴의 수도정신을 계승했다고 볼수 있다.

베네딕트는 로마에서 잠시 동안 수학하였으나 로마의 죄악에 실망하여 로마의 복잡한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깊은 산에 있는 동굴에 들어가 은거하기 시작했다. 베네딕트의 은거생활의 유명한 규범과 엄격한 규측은 보통 성실한 사람들이 절대로 추종하기 불가능한 과격한 은거생활과 금욕주의였다. 하지만 그 당시는 물론이고 역사적으로 베네딕트의 수도원 엄격한 전통은 수 백년동안 전설적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베네딕트 시대 이후에 많은 유사한 수도원들이 유럽 전역에 퍼져 나아가고 있었다.중세 로마 캐톨릭 교회의 수도원 운동에 있어서 헤성처럼 둥장한 사람이 또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성 프란치스코 (1182-1226)이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베네딕트 수도원운동 이후 약 700년 후에 등장한 사람인데 그는 그때 당시 로마 캐톨릭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한데 대항하여 “사랑의 개혁”운동을 전개 했다.

성 프란치그코는 부패하고 타락한 거대한 로마 캐톨릭 교회를 와르르 헐어버릴 생각을 하지 않고 그는 다만 그 거대한 로마 캐톨릭 교회의 성벽 밑에 자기의 조그마한 수도의 영적인 “오두막 암자”를 건설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그마한 영적인 오두막에 칩거하고 있는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사로서의 거룩한 모습은 교황을 비롯하여 도둑놈들과 심지어 짐승들, 새와 곤충들 까지도 그에게 감화를 받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때 당시 교황 피오 11세는 말하기를 “프라치스코는 또 하나의 예수” 라고 극찬 했으며 또 그는 프란치스코를 “예수의 거울” 이라고 하면서 존경을 표했다.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원 운동 이후 300년 후에 이번에는 독일에서 또 하나의 로마 캐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대항하여 마틴 루터 (1483-1546)의 종교 개혁운동이 일어 났다.

마틴 루터는 그때 당시 한 수도원의 수도사였는데 그는 수도원의 한 작은 고요한 방안에서 깨닮음의 체험을 했다. 마틴 루터는 로마 교황청의 권위를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개혁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교황청의 개혁을 주장함과 동시에 독일 캐톨릭 교회들의 갱신을 크게 외치면서 총체적인 종교개혁 운동을 전개하여 결국 중세기 유럽에서 기독교 “개신교”를 창설하는데 성공했다.

2. 중세기 캐톨릭 영성 운동의 후유증


중세기는 교황들의 정치싸움과 성직매매등 캐톨릭 교회의 교권이 극도로 타락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도원 영성 운동은 매마른 광야에서 한줄기 샘물이였다. 하지만 8세기 카로링커 왕조시대에 이르러서 로마 캐톨릭 교회의 수도원 영성 운동에 있어서 주객이 뒤바뀌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객이 뒤바뀌는 기이한 현상은 이 시기에 엘리트 단체들이 수도원을 지배하는 주도적인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수도원의 주객이 뒤바뀌는 꼴이 되여 유명한 교황들과 주교들이 수도원에 접근하고 탈취하여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서 수도원이 오히려 중세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가 되고 있었다.

본래의 수도원 정신인 “영성 운동”은 증발되여 사라져 없어지고 오히려 수도원이 귀족들과 주교들의 개인적인 출세의 도구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도원의 본래의 모습을 다시 되찾으려하는 “수도원 개혁운동”이 수도원 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수도원 개혁운동”의 대표적인 수도원은 910년에 윌리암 공작이 창설하고 주도한 클루니 수도원 이었다.

수도원들의 변질과 타락에 대한 반작용으로 시작된 클루니 수도원은 옛날 400년 전에 창설된 초기 베네딕트 수도원의 엄격한 전통을 그대로 본받아 엄격한 수도생활을 강행하고 있었다.

성직매매 반대운동, 수도사들의 독신 주의, 수도원에서 원장에게 절대복종, 엄격한 묵상과 기도 생활등 철저한 금욕을 강조하는 “수도원 개혁”을 실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클루니 수도원의 개혁운동도 모순된 한계선을 도저히 넘어 설수는 없었다. 그 모순된 한계선은 그때 당시 모든 교회들이 교황에게 복종을 하는것 처럼 클루니 수도원도 역시 교황에게 절대 복종을 해야만 했다.

이러한 모순에 봉착한 클루니 수도원의 “수도원 개혁운동”은 그때 당시 로마 캐톨릭 교회가 총체적으로 쇠퇴하고 있는 시대적 조류에 따라서 클루니 수도원의 진실된 개혁운동도 역시 벽에 부딪쳐서 쇠퇴하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초기 수도원의 영성 운동이 진실한 삶을 실천하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한 역사적인 공헌에 대하여 무조건 과소평가 해서는 안될 것이다. 초기 수도원의 영성 운동의 공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간추려본다.

ㄱ. 초기의 수도원의 “영성”이란 말은 영어로 Spirituality라고 하는 말의 뜻으로 종교적인 가치에 의거하여 사는 영적 삶의 상태를 가리킨다. 또한 초기에 영성 운동은 그 시대의 “시대 정신”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한다. 수도원 운동 초기의 영성이라는 말은 “캐톨릭의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ㄴ. 캐톨릭의 영성 운동은 예수의 삶과 인격을 본받아 예수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하여 살고 죽는것을 의미한다. 캐톨릭 영성 운동은 정신 훈련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서 인본주의적인 요소를 가질 수 있는 위험성을 지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세기 수도원의 영성 운동은 교회갱신과 교육제도 발전 그리고 위대한 종교 사상가 배출등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공헌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ㄷ. 초기 수도원 운동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초월적 존재에 의하여 달성할 수있는 사랑의 역사적 실현을 갈망하고 있었다. 영성의 체험은 인간의 행동으로 표출되는데 수도사들의 창조적 행위를 통하여 초월적 삶이 실현되다고 주장했다.

ㄹ. 성어거스틴의 영성 운동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모든 율법을 완성시킨다고 주장하면서 율법 대신 사랑을 주장하여 “믿음” 보다 “사랑”을 강조 했다.
중세기 영성 운동의 핵심적 중요성도 역시 성어거스틴의 “사랑의 공동체”의 실현을 줄곳 강조하고 있었다.

중세기 역사의 흐름속에서 중요한 역사적 맥락을 줄곧 게속하여 유지해온 수도원 영성 운동의 공헌을 망각하거나 소홀히 여겨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기 수도원 영성운동에 대하여 피할 수 없는 오점과 중세기 역사에에 끼친 해악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많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중세기 수도원들의 영성 운동이 중세기 역사에 남긴 오점이 무엇인가?

ㄱ. 중세기 캐톨릭 교회가 막강한 권력을 소유히고 있었기 때문에 제일 첫번째 오
점은 도덕적 부패로 인하여 성직자들이 개인 재산을 엄청나게 축척하고 있었다.

ㄴ. 유명한 성직자가 죽으면 그의 후계자들이 그를 기념하는 교회를 건축하기 위한 구실로 많은 헌금을 강요함으로 헌금이 오히려 부패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때 당시 주교들이 호화롭게 치장한 말을 타고 다니였는데 구걸하면서 살던 성프란체스코 전통을 이어 받은 수도사들의 참된 모습을 중세기의 수도사들에게서 찾아 볼 수 없었다.

ㄷ. 그때 당시 수도원 마다 막대한 재산이 축척됨으로 수도사들이 담당하던 노동을 모두 하인들에게 떠넘기고 말았다. 수도원이 기부를 받아 소유하고 있는 비옥한 목장에서 생산되는 모피로 인하여 “황금들판”을 소유한 수도원들이 되고 있었다.

ㄹ. 중세기 로마 캐톨릭 교회는 제도권 교회로 고착되여 교리와 예전만을 강조하여 위계질서만을 유지하려고 노력할 뿐이고 평신들 즉 민의 비참한 삶에 대하여는 아예 무관심이었다.

ㅁ. 중세기 로마 캐톨릭 교회가 제도권과 물질주의로 타락한데 대하여 반항적으로 수도원 운동이 자연적으로 발생 했다. 하지만 중세기 수도원 영성 운동은 하나의 “현실 도피적인 영성 운동” 이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중세기 수도원 영성 운동은 병든 사람을 돌보는 일, 불의한 정권에 대하여 선지자적인 투쟁의 의무 따위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중세기 수도원 영성 운동의 특색은 단순히 집단적인 “은둔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영성 운동의 명분인것 뿐이었다.

ㅂ. 중세기 수도원의 영성 운동은 주로 “개인적인’ 영적 경험을 중요시 하고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개인의 영성을 지나치게 중요시 함으로서 결과적으로 반사회적이며 또 반역사적이었다. 그럼으로 중세기의 수도원의 영성 운동은 반지성적인 미신적 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방대한 중세기 로마 캐톨릭 교회의 수도원의 영성 운동에 대하여 극히 간단하게 고찰해 보았다. 중세기의 영성 운동을 오늘의 상황에 조명해 보면서 진정한 영성의 길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동기가 되기 바란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왕국의 전통을 과시하고 있는 오늘 서구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영성”이라고 하는 대명사를 그대로 여전히 이용하면서 제3세계를 지배하려고 종교적 위선을 계속 행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서구 열강들의 종교적 위선을 정당화 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언어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또는 뉴에이지(New Age)라고 한다. 이것은 중세기에 경험한 로마 캐톨릭 교회의 전통을 이어 받은 오늘의 서구 열강들이 그들의 무력함을 제3세계 앞에서
감추려 하는 또 하나의 정치적 수단인 것이다.


3. 오늘의 성령 운동은 어디로 가는가?



중세기의 “영성 운동”이라는 단어를 한국교회의 전통은 “성령 운동”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영성”과 “성령”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신학적으로나 또 성경의 해석과 기독교의 역사적으로 보아도 하등의 차이가 없다.

미국 교회의 성령 운동의 거장은 LA 수정교회의 담임 목사인 로버트 슐러 목사이다. 슐러 목사의 목회의 특징은 “성공주의 신앙”이다. 예수를 믿고 “성령의 은사”를 받기만 하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설교를 주일마다 몇십년 동안 했다.


그래서 그런지 수정교회에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대개 성공한 기업인, 정치인, 에술인과 문인들 그리고 성공한 운동선들이 예배당을 꽉 채우고 있었다.

세계의 교회 지도자들과 유명한 목회자들은 슐러 목사의 “성공주의 목회방식”을 배우기위하여 몰려들고 있었다. 슐러 목사의 “성공주의 목회방식”을 배우기 위하여 몰려든 외국인 목사들중에서 슐러 목사와 가장 친근한 관계를 맺은 목사는 다름아닌 한국의 조용기 목사로 알려져 있다.

조용기 목사가 주장하는 “성공주의 목회방식”은 이른바 <삼박자 촉복>을 주장하는 방법이다. 예수를 잘 믿기만 하면 1) 영혼이 잘되는 축복 2) 범사에 잘되는 축복 3) 건강하게 되는 축복을 강조 했다. 이것을 조용기 목사의 유명한 이른바 “3박자 축복”이라고 한다.

그런데 조용기 목사가 주장하는 예수를 잘믿는 방법은 세가지 이다. “첫째” 는 십일조 현금을 철저히 받치는 것이다. “둘째”는 성수주일로 주일이다. 주일 날에는 반드시 교회에 나아와야 한다. “세째”는 목표를 정해 놓고 열심히 기도를 하기만 하면 반드시 성취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슐러 목사의 “성공주의 목회방식”으로 크게 성공한 미국의 대표적 교회인 LA의 수정교회는 “경제윤리 부재”로 인하여 재정적 파탄에 이르렀다. 슐러 목사는 14만 달러의 월급을 받으면서 또 13만 달러의 주택보조금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슐러 목사는 세금포탈하는 탈세행위를 자행하는 바람에 연방조세청(IRS)의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

이에 대한 언론들의 폭로기사가 요란했다. 슐러 목사 가정의 “돈잔치”를 폭로한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슐러 목사의 5명 자녀 모두 수정교회에서 근거 없는 월급을 받었는데 서류상 총액이 120만 불이다. 슐러 목사의 딸인 캐롤은 100만 불의 집 두 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슐러 목사의 아들도 부촌에 살고 있는데 100만 불 주택에 살고 있다. 그외에도 하와이에 거액의 투자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수정교회의 빚은 4, 850만 불이나 된다고 한다. 수정교회는 채무 불이행에 의하여 파산되였으며 수정교회 건물은 캐톨릭 교회가 사들여 그 소유권을 넘겨 받았다.

1955년에 교회를 처음 건축했는데 1981년에 다시 거대한 유리건물을 건축하여 “수정교회”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회가 되었다.

그런데 수정교회가 파산되여 교회 건믈이 캐톨릭 교회의 소유물이 된데 대하여 한 신학자는 말하기를 성령 운동을 주장하는 “성공의 복음”은 “예수의 복음”이 아니라고 했다. 슐러 목사가 반세기 동안 주장한 “성령의 역사”는 “악령의 역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4.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



한국 기독교의 근본적인 문제는 제1세계의 기독교를 무분별하게 제3세계에 강요하는 이른바 서구 열강들의 침략적 선교방법의 정책에 의하여 발생한 문제들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략이 점점 노골화되고 있는 1920-30년대에 있어서 그 당시 기독교 청년운동은 일본의 식민지 침략에 대한 항일 자주운동과 구국운동을 전국적으로 일으키고 있었다.

특히 3.1반일 독립운동은 식민지 침략에 항거하는 사회운동으로 점점 뿌리를 내리고 었었다. 이와같은 급박한 구국운동과 사회운동의 전개에 대하여 놀라움을 나타낸것은 제1세계의 기독교 선교사들이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지적 침략의 현실을 외면하도록 유도하였다. 미국 선교사들은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현세를 무시하고 “피안의 세계”를 사모하는 신앙이라고 강조했다. “저 하늘나라”를 위해서는 현세를 헌신짝을 버리듯 버리고 무시하는 신앙이 참된 신앙이라고 가르쳤다.

다시말하면 선교사들은 한국 신자들에게 현세를 포기하도록 주입시키는 선교정책을 강행하고 있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그때 당시 YMCA 운동이 항일투쟁이 아니라 우선 급선무는 한국인들의 “문맹퇴치 운동” “금주와 금연과 아편금지 운동” “공창제도 페지 운동"“사치와 낭비를 금지하고 오직 천국건설에만 공헌할것”등을 강조하고 있었다.

특히 1917년 러시아 혁명이후 한국 젊은이들과 지성인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미국 선교사들은 “사회주의는 무신론주의이다” 라고하는 왜곡된 단순논리를 주입시키고 있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이러한 선교정책이 성공하여 한국인들의 의식이 일제의 식민통치적 사회현실에 대하여 무반응의 형태를 조성하고 있었다. 한국 기독교의 탈사회적이며 몰역사적인 신앙의 형태는 이러한 과정속에서 자리매김이 되고 있었다.

한국이 8.15해방 후에도 한국 교회는 “피안의 세계”지향적인 신앙형태와 또한“저 하늘 나라” 지향적인 개인주의적 신앙형태는 조금도 변함 없이 지속되어 왔다. .

민족의 분단과 이승만 독재정권의 등장, 6.25 전쟁의 비극과 군사 독재정권에 시달리는 역사적 부조리속에서 사회를 등지는 기독교인들은 주로 보수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오늘 한국의 기독교의 현실은 어떠한가?

한국의 교회는 정치와 분리한다고 말로는 주장하면서도 정치적 권력과 결탁하여 왔다. 특히 이명박 정권은 지난 4년여 동안 이른바 “기독교 장로”라는 기독교 배경을 이용하여 반민족적이며 반역사적인 친미 보수주의 정권을 고집하며 한국역사에 유래없는 민간퍄쇼 독재정치 세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교회는 정치와 분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치에서 흘러나오는 불의한 물결을 그대로 방치하여 사회와 역사를 오염시킨다면 이는 비교회적일 수밖에 없다. 인도의 간디는 말하기를 “종교가 무조건 정치와 무관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종교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라고 했다.

오늘 한국 교회와 미국에 차고 넘친 한인교회들의 성령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간략하게나마 맹신적 오염된 성령운동을 살펴 본다.

ㄱ. 성령을 확근한 열성으로 자기 이익의 수호신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이기주의로 오염된 잘못된 신앙을 성령운동으로 정당화해서도 안된다. 자기 개인의 무분별한 확근한 성령운동은 언젠가는 곧 식어지기 마련임을 깨달아야 한다.

ㄴ. 성령 충만은 나와 이웃에게 공동이익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만일 성령의 은사를 경험한 사람이 이웃을 외면하고 자기 촉복, 자기 구원, 자신의 환희에 젖어 자기도취에 빠져서 반사회적인 사람이 되는것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ㄷ. 성령 운동과 헌금문제는 매우 민감하고 중요하다. 먼저 헌금은 봉사하는 정신으로 모든 사람에게 공동이익이 되야 한다는 인식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그러한 것이 아니면 헌금은 위험하고 해로울 뿐이다.

십일조 헌금을 강조하는 한국교회는 십일조 헌금이 개인 구원의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의 가장 위험한 것은 돈을 많이 거두어 들이는데 성공한 교회들이며 동시에 돈 때문에 사회의 부패를 조장하며 이로 인하여 교회 자체가 쇠퇴해 가고 있는 교회임을 깨닳아야 하겠다.

돈 많은 부의 물결따라 밀려나는 한국의 부자 교회들은 이제라도 가난한 예수의 참되 교회들이 민중들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본래의 기독교의 참된 모습으로 거듭나야 한다.
.

이글을 끝 뱆으며,



필자는 몇일 전에 우연히 한겨레 신문 기사를 인터네트를 통해 읽었다. 이번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바로 그 글 때문이었다.

이 신문의 기사는 “순복음 교회 C 목사 일가 355억 손해 끼쳐”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그런데 이 기사를 20여 언론사들이 공동취재를 1시간여 동안 했는데도 불구하고 다음날 보도한 언론사는 오로지 한겨레 신문뿐이었다는 사실에도 필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순복음 교회는 1959년 4월에 50여명이 천막교회 건립으로 시작하여 1979년에 교인 10만명 돌파와 1993년에는 기네스북에 세계 최대의 교회로 교인 70만명으로 발표된바 있었다.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유명한 “수정교회”의 슐러 목사는 1955년에 교회를 청립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회성공자가 되고 있었다. 한국의 C 목사(조용기 목사를 지적하는 약자)도 슐러 목사와 친근한 교제를 하면서 “성공적 목회 방법”을 서로 교환했다고 한다.

미국의 슐러 목사와 한국의 C 목사가 서로 교환한 성공적인 목회 방법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성령운동의 목회방법”이었다.

미국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이지만 영적으로 굶주린 나라이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굶주린 나라일 뿐만 아니라 남북으로 분단된 정치적 불안으로 인하여 평화와 안전에 대하여 역시 굶주린 나라이다.

슐러 목사와 한국의 C 목사는 교회 부흥의 비결은 이 굶주린 대중들에게 오직 중요하고 필요한것은 “성령운동”이며 “성령운동”의 방법으로 목회방법을 삼기만 하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비결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알게된 놀라은 사실은 거의 동시 다발적으로 두 개의 유사한 사건이 미국과 한국에서 발생했다.

미국의 슐러 목사는 교회 채무 4,850만 달러에 대한 불이행으로 인하여 그 유명한 자랑스러운 수정교회가 파산되여 교회 건물이 캐톨릭 교회에 팔리고 말았다.

한편 한국의 C 목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경제문제로 나타났다. 순복음 교회 장로들이 밝힌 C 목사와 관련되 경제 비리 의혹은 모두 11건에 이르고 있으며 우선 밝혀진것 만도 2건으로 335억원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필자가 단 한 마디 말로 이글의 끝을 맺으면서 제3세계를 대신하여 질문해 본다. 나의 물음은 오늘날 이 시대에 횡행하고 있는 성령운동이다.

“기독교의 성령운동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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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유태영 박사 2012-06-25]

민족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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