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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5]제3세계의 눈으로 서구열강을 파헤친다--중세기에서 정권과 교권의 분쟁을 이르킨“성상 숭배”와 “성상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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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
댓글 0건 조회 7,169회 작성일 12-07-09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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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편집 시간 2012.07.09 02: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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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5]제3세계의 눈으로 서구열강을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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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5]제3세계의 눈으로 서구열강을 파헤친다

중세기에서 정권과 교권의 분쟁을 이르킨“성상 숭배”와 “성상파괴”

유태영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이번 5번째 연재로 "영국의 저명한 역사 학자인 베러 킬리프는
특히 중세사 전문가로서 높은 소양을 쌓은 학자 (1908-84)이었다. 하지만 베리 킬러프는 역사에 대하여 매우
실망스러은 말을 남겨 놓았다.“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비록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고 해도, 엄격히 말하면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널리 승인된 일련의 힘의 승리가 작용하고 있을 뿐아다”베러 킬리프의
말처럼 중세기에서 성상 숭배론과 성상 파괴론이 서로 대립하여 론쟁을 이르킨 것은 사실 정권과 교권사이에서
이르킨 “힘의 승리”를 위한 분쟁 그대로 이였다". 이번 5번째 연재글을 여기에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5] 제3세계의 눈으로 서구열강을 파헤친다

중세기에서 정권과 교권의 분쟁을 이르킨

“성상 숭배”와“성상파괴”




*글:유태영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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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유태영박사
영국의 저명한 역사 학자인 베러 킬리프는 특히 중세사 전문가로서 높은 소양을 쌓은 학자 (1908-84)이었다. 하지만 베리 킬러프는 역사에 대하여 매우 실망스러은 말을 남겨 놓았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비록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고 해도, 엄격히 말하면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널리 승인된 일련의 힘의 승리가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베러 킬리프의 말처럼 중세기에서 성상 숭배론과 성상 파괴론이 서로 대립하여 론쟁을 이르킨 것은 사실 정권과 교권사이에서 이르킨 “힘의 승리”를 위한 분쟁 그대로 이였다.



1. 중세기 “성상 숭배”와 “성상 파괴”의 역사적 배경



중세기의 종교적인 분쟁은 다만 부차적으로 종사한것 뿐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종교적인 분쟁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도록 기회를 허용했던 것 뿐이었다.

로마 케톨릭 교회의 성상 숭배 문제로 인하여 발생한 분쟁에 있어서 크게 분류하면 서로마 캐톨릭 교회는 “성상숭배” 찬성편 이었고 이와 반대로 동방의 비잔틴 교회는 “성상 파괴” 편이었다.

하지만 로마 캐톨릭 교회와 동방의 비진틴 교회를 엄밀히 구분할 수 없었다. 왜 냐하면 성상 숭배에 대하여 창성과 반대에 양편 모두 다 혼동된 분쟁을 수세기 동안 싸웠기 때문이다.

황제가 교체되고 또 교황이 바뀔 때마다 그리고 교회의 공의회가 소집될 때마다 성상 숭배문제는 양분되여 큰 론쟁을 서로 하면서 찬성과 반대하는 주장이 항상 혼돈되고 뒤바뀌고 있었다.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이 그때 당시 성상 숭배와 성상 파괴 운동이 어떻게 극심했는가에 대하여 살펴본다.

중세기 로마 제국의 국가제도의 요소는 기독교 이었다. 그럼으로 기독교 신앙은 로마 제국의 무게중심에 놓여져 있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절대적 권위의 위치에 눟여져 있었음으로 발생하는 문제는 이른바 그리스도교의 론쟁들 이었다.

그리스도교 론쟁은 두가지로 첫째는 “성상 숭배” 론쟁이고 둘째는 “단성론”이었다. 이 글에서는 첫번째의 “성상 숭배”론쟁의 문제에 대하여 요약하여 살펴본다.

“성상 숭배”와 “성상 파괴”에 대한 양론의 관점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ㄱ. 신도들의 기도가 성상이나 성상의 그림을 향하여 드려지는 것은 종교적인 행위로서 절대로 잘못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성상 숭베”를 정당화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항하여 “성상 숭배”는 우상숭배의 위험이 있기때문에 반드시 성상을 파괴시켜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말은 간단하지만 그 말의 내용에는 정치적으로 관련된 복잡한 문제들이 내포되여 있기 때문에 중세기 황제의 권위와 로마 캐톨릭 교회는 수세기 동안 이 문제를 가지고 싸움을 했다.

ㄴ. 신도들이 에수의 성상과 마리아의 성상에 입마츰을 하기 때문에 역시 우상 숭배 행위로 규정했다. 신도들이 입마춤을 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성상을 높은 장소 에 설치해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찬반으로 인하여 몃세기 동안 종교와 정치적인 싸움을 했다.

ㄷ. AD 726에 동방 황제 레오 3세는 성상 숭배 문제가 끝 없이 게속되고 있는 것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각료들에게 명령을 내려 모든 성상들을 교회에서 철거시 키고 파괴하도록 명령하면서 강경책을 발표했다.

이와 같은 쓰라린 분쟁속에서 종교적인 투쟁을 비종교적인 방법으로 싸움을 게속하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로마교황 그레고리 3세는 동방 비잔틴 황제인레오 3세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성상 숭배를 오히려 더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ㄹ. AD 754년에 레오 3세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 황제 콘스탄틴 5세는 콘스탄트노플에서 대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성상 숭배는 성서에 상반되는 우상 숭배이며 반기독교적 행위라고 규정하고 성상 숭배 금지와 성상 파괴령을 강력히 내렸다.

ㅁ. AD 787년에는 제2차 니케아 종교회의 에서 로마 캐톨릭 교회는 동방 비잔틴 황제 레오 3세의 성상 파괴 정첵과 그의 아들 콘스탄틴 5세를 맹려렬히 비판했다. 왜냐하면 비잔틴 제국은 성상 숭배 반대뿐만 아니라 “성상 파괴”운동을 콘스탄틴노플 대 종교회의에서 공식적으로 결의를 했기 때문이었다.

로마 캐톨릭교회는 비잔틴 제국의 종교회의의 결의를 거부하고 로마 캐톨릭 교회독자적으로 “성상 숭배”의 전통을 절대적으로 옹호할 것을 선포했다.

제2차 니케아 회의에서 로마 캐톨릭 교회는 예수상과 마리아상 그리고 천사들과 성자들의 형상들을 적극적으로 세우도록 했으며 또 그 형상들이 예배의 대상이 될뿐만 아니라 그 형상 앞에서 분향과 제물을 드리는 것도 허락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로마 교회가 제2차 니케아 회의에서 결의한 것을 프랑스는 반대했다. 로마 케톨릭 교회에 “성상 수배”를 허락하고 장려함에도 불구하고 아주 가까히 있는 프랑스에서는 794년에 프랑크포트회를 게최하여 “성상 숭배” 를 반대하여 오히려 비잔틴 교회측에 동조를 하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종교적 교리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얼킨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프랑크포트 회의는 성상 숭배를 반대하는 결의를 하여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다” 라고 규정하고 그 외의 모든것은 다만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을뿐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라고 결의를 했다.

AD 717년에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오 3세는 성상 숭배 금지령을 처음 내렸는데 그는 구약 성경에 “우상을 짓지 말라”라고한 모세의 십게명에 근거하여 성상 숭배를 우상 숭배로 규정하고 금지했던 것이다. 그 후에 황제의 금지령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차앖이 탄압하고 한때 처형하는 일도 있었다.

한편 서로마 캐톨릭 교회는 동방 비잔틴 교회의 성상 숭배 금지령을 적극 반대함으로서 그 동안 유지해 오던 우호적 관계가 깨지고 동서교회의 적대적인 대립으로 돌변하고 말었다. 로마 캐톨릭 교회는 베드로의 전통을 이어 받은 교회라고 하는 자존심 하나만을 가지고 동방의 비잔틴 교회를 얕보는 경향이 항상 있었다.

어쨋던 비잔틴 제국의 성상 숭배 금지와 “성상 파괴” 정책은 842년 까지 140년 동안 끄 없이 계속됬다. 성상 파괴 운동을 시기적으로 나누어 제1기와 제2기로 나누어 “성상 파괴” 운동의 시기라 칭한다. 제2기 성상 파괴운동 시기는 815-842년 까지 이다. 하지만 제2시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성상을 파괴하는 대 신 다만 신자들이 성상에 가따이 접근하는것을 금지하도록하는 정도로 변화되고 있었다.

그런데 비잔틴 교회는 AD 842년 3월 11일에 “성상 수배”를 공인하는 역사적 변혁이 발생했다. 140년 동안이나 금지됬던 “성상 숭배”가다시 허용됨으로서 이 날을 보수 정통주의의 승리의 날로 지금까지 동방 교회는 축제로 지키고 있다.

그런데 비잔틴 제국의 세속정권의 황제가 어찌하여 그렇게도 엄하게 성상 숭배의 금지와 “성상 파괴령”을 내렸을가? 어찌하여 레오 3세 시대와 또 게속하여 콘스탄틴 5세에 이르기까지 장장 140년 동안이나 계속했을가?


이에 대한 배경을 살펴 본다.



ㄱ. 성상 숭배가 우상 숭배이며 성서의 가르침이 아니다라는 극히 명백한 사실을 레오 3세 자신이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의 개인적인 개혁적인 신앙고백에 근거한 처사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황제 레오 3세는 이와같은 개혁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비잔틴 교회의 대다수 교인들의 굳건한 지지를 획득하고 있음을 확신함으로서 그는 과감하게 성상 숭배 금지령과 “성상 파괴령”을 법적으로 내릴 수 있었다고 볼 수 았다.

ㄴ. 황제 레오 3세는 성상 파괴령”을 내림으로서 비잔틴 제국에서 단일 중앙 집권제도를 확립하려 했다. 즉 비잔틴 제국의 황제와 비잔틴 교회의 총대주고가 서 로 일체감으로 함께 단합함으로서 “중앙집권제도”를 창설하고 전권을 공고히 하 기를 계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극히 정치적인 계획이었다고 볼 수 있다.

ㄷ. 황제 레오 3세는 성상 숭배를 배척하는 반면에 그는 “십자가 숭배” 를 강조했다. 레오 3세는 “십자가 숭배”를 강조 하면서 “십자가 숭배”에 대하여 다음과과 같이 주장했다.

“ 황제는 십자가 아래 서서 신의 위임을 받았음으로 그리스도의 양떼를 다스리는 지상의 대리자이다” 라고 레오 3세는 주장했다. 매우 엉뚱한 주장 이었다.

황제 레오 3세가 광신적으로 성상 숭배를 우상숭배라고 비난하면서 “성상 파괴”운동을 명령했다. 레오 3세의 명령 대하여 지성적인 기독인들과 민중들은 적극 호응하고 그를 열열히 지지했으며 큰 기대를 가지고 민중은 그를 추종했다.

하지만 레오 3세의 정권은 민중이 기대했던 것보다는 오히려 엉뚱하게 정치적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말었다.

ㄹ. 서로마 제국과 동방의 비잔틴 제국을 역사적 맥락에서 비교하면 무게중심이 유럽의 서로마 쪽으로 기울어 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레오 3세는 그 무게중심이 동쪽으로 이동해 오기를 기대하면서 로마 케톨릭 교회와 정면대결을 감행하여 “성상 파괴”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ㅁ. 비진틴 제국의 황제인 레오 3세가 “성상 파괴”정책을 감행한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그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가 분명했다.



그때 당시 서구 유럽 전역에서 수도원 운동이 대대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비잔틴 제국에서도 수도원 운동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과 영향력을 가히 무
시할 수 없었다.

황제 레오 3세는 본래 시리아 출신이었다. 그는 비잔틴 주류사회에서 소수 민족출신 이었다. 황제 레오 3세는 정권의 권력을 이용하여 소수 민족의 열등의식을 극복하려고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수도원을 압박했던 것이다.


황제 레오 3세는 비잔틴 왕조의 정통을 튼튼히 확립하고 굳건한 정치력을 발휘 할려고 무척 애쓰고 있었다. 이와 같은 조건하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뿌리깊은 수도원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과제가 급선무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때 당시 수도원이 소유하고 있는 가장 큰 영향력은 “성상숭배”의 전통이었다.

레오 3세는 수도원의 “성상 숭배”전통의 영향력을 완전히 차단시키기 위하여 생각해 낸것이 바로 구약 성경 출애굽기 20장 이었다. 출애굽기 20장에는 모세의 명령이 기록되여 있는데 “우상 숭배를 하지 말라”라고 기록되여 있다.

출애굽기의 모세의 율법에 비추어 보면 “성상 숭배”는 분명히 비성서적이며 비신앙적인 우상숭배 이었다. 황제 래오 3세는 비성서적이며 비신앙적이라고 하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성상 숭배” 금지 뿐만 아니라 “성상 파괴”를 법으로 승인하고 강행했던 것이다.

비잔틴 교회의 중심이 되는 힘이 바로 수도원의 “성상 숭배”이었다. 그런데 이 것을 금지할 뿌만 아니라 “성상 파괴”를 명령한 것은 수도원의 개혁과 혁명을 핑게삼 수도원의 페쇠를 의미하는 처사이었다.


2. 중세기 “성상 숭배”와 “성상 파괴”의 역사적 의미



중세기 로마 캐톨릭 교회에서 성상 숭배가 제도화가 된것은 그리스도 “양성론”에 근거한 제도화 이었다. “양성론”이란 무엇인가? 양성론은 그리스도는“참 신이며 또한 참 사람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을 “양성론”이라고 한다.

이와 반대로 “단성론”이 있다. 단성론은 주장하기를 “그리스도는 오직 신격의 존제로서 이세상에 참 신으로 오셨다” 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중세기 로마 캐톨릭 교회는 “양성론”과 “단성론”으로 분렬되여 대립되고 있었다.

로마 캐톨릭 교회는 “양성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인간 예수를 상징하는 성상과 성화와 조각물들 그리고 또 많은 인간 예수를 상징하는 작품들이 파도처럼 생산 되고 있었다.

그런데 수도원에서 전문적으로 “성상 숭배”가 성행되고 있는 이유가 무었인가?

수도사들은 우선 부패된 세속정권과 타락한 교회에서 탈피하여 깊은 산이나 광야에 나가서 도피적인 수도생활을 했다. 수도사들이 수도원에서 명상과 금욕적인 삶을 훈련을 하고 있으면서 오로지 영적인 삶을 추구하고 또 추구를 계속할 수록수도사들은 “인간 예수”의 삶을 사모하고 동경하게 됬다.

“인간 에수”에 대하여 깊이 사색하고 사모하다보면 성경적인 내용보다는 오려히 인간적인 예수의 “인간성”에게 더 가까히 접근하게 됬다.

예수의 거룩한 삶, 거룩한 육체, 천상에서의 에수의 육체등을 사모하고 추구하게 되였고 그러한 “인강성”의 예수를 추구함에 의하여 “성상 숭베”의 전통이 발생하게 된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적인 예수를 인간적으로 닮고 싶은 욕망에 기인하여 예수에 관련된 성상이나 성화 또는 성물들을 간직하게 하게 됬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수도사들이 수도생활 중에서 예수의 성상과 성화를 사모하고 중요시하는 정신이 수도원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중세기의 로마 캐톨릭 교 회의 전통으로까지 발전이 됬는 이것이 문제의 시초가 되고 있었다.

그러면 중세기 로마 캐톨릭 교회는 성상 숭배 문제에 있어서 일반 평신도 민중들에게 어떻게 작용을 했는가?

중세기 로마 캐톨릭 교회는 일반 평신도 민중들을 무식하게 만들기 위해서 1400년 동안 에수에 대하여 오직 “성상 숭배”만을 허락했다. 이것은 무엇를 뜻하는말인가 하면 민중들은 오직 눈으로 성상을 바라 보는 것을 강요했다는 뜻이다.

로마 캐톨릭 교회는 일반 평신도 민중들을 위하여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것을 1,400년 동안 금지했으며 설교도 민중들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만 하고 있었다.

중세기 로마 캐톨릭 교회는 신부들이 나누어 주는 성찬의 떡만 받아 먹으면서 은헤를 받도록 헸으며 성체와 성물들에 대한 “가시적 접촉”만을 허락하여 교회의 교권중심의 체제를 만들어 놓았다.

중세기 로마 캐톨릭 교회는 평신도 일반 민중들이 성경을 배울 수 있는 길을 차단하여 민중들이 신과 직접 대면하여 깊은 대화를 할 수있는 기회를 막아 버렸다.

그럼으로 평신도 일반 민중들은 오직 신부들이 보여 주는 가시적 성체와 성상에만 눈으로 접촉함으로서 은헤를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체와 성상이라는 미명하에서 인간의 “가시적인 시각적 만족”을 채워 줌으로서 중세기 캐톨릭 교회의 제도적인 교권을 유지할 수 있 었던 것이다.

중세기 로마 캐톨릭 교회는 민중에게 “가시적인 시각만족”만을 채워 주었다.

이 말은 또 무슨 뜻인가? 이 말의 뜻은 “가시적 시각만족”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오직 시각을 통한 감각으로 물질적 재현을 하여 그것으로서 만족을 느낀게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생각은 없고 오직 눈에 보이는 형상에 만족을 느낀다라는 뜻이다. 중세기“성상 파괴”운동은 시각을 통한 감각만족의 합리주의를 배격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동양의 노자는 말하기른 “성인은 가지 않고 알며, 보지 않고 말 한다”라고 했으 독일의 칸트는 그가 태어난 집에서 50리 밖을 나가 본 적이 없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때 당시 칸트의 마음과 정신은 세상사를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보고 있었다.

시각에만 만족헤하는 현대 서구 문명과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 소리를 노자와 칸트에게서 듣는다.

중세기 로마 캐톨리 교회의 교권주의 전통이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예수와 마리아의 조각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로마 캐톨릭 교회는 현세와 내 세에 대한 관념적대상을 시각을 통한 감각적인 이미지화를 함으로서 우매한 민 중들을 오도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현대인은 분노한다.


이 글을 끝 맺으며,



레오 3세가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되기 전 20년 동안에 일곱 번이나 정부가 교 체되는 혼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AD 717년에 레어 3세가 마침내 정권을 잡게 됨으로 혼란을 이르키던 “성상 숭배”의 페단을 단호하게 처리하여 종식 시켰다.

중세기에 있어서 정치적 혼란은 다름아닌 교리싸음 이었다. 그리고 교리싸움의 대명사는“이단론쟁”이었다. “이단론쟁”을 이르키는 종교인들은 진리를 외곡하여 필요하면 선택하고 불리하면 진리를 헌신짝 처럼 버리기도 하는 사람들이다.


중세기 로마 제국과 캐톨릭 교회에서 “이단론쟁”이 극심할때 수 없이 많은 성인들이 투옥과 추방을 당했으며 또 화형에 처하기도 했다.

중세기 “이단론쟁”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자연히 떠오르는 기억은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 동서냉전의 틈바구니에 끼어 한국 교회가 “이단론쟁”을 이르킨 서글픈 우리의 역사가 생각 난다.

한국 교회는 “이단론쟁”으로인하여 사분오열로 분렬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의 “이단론쟁”은 “교리싸움”에서 부터 시작하여 “사상론쟁”으로 확대시켰다.

그리고 드디어 “친공과 용공”이라고 하는 심판과 정죄의 칼을 빼들기 까지 했다.

한국 교회가 “사상 론쟁”을 확대시켜 “용공이니 친북”이니 하면서 중세기적인 “이단론”을 벌리고 있기 때문에 오늘 한국의 지성적인 기독교인들은 교회에서 발을 붙일수 없게 되었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 학자인 에드워드 카 (Edward Carr)의 유명한 말을 인용하면서 끝 맺는다. “고약한 이단론쟁에 매달리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우표수집에 착수하거나 아니면 정신병원에서 끝을 맺어야 할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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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유태영 박사 2012-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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