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김일성동지께서는 장울화와 함께 재학기간에 대단한 일들을 해제끼시였다.
그들은 다른 동무들과 함께 교원을 구타한 야만적인 경찰을 징벌하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4권에서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서술하시였다.
《한번은 어떤 경찰이 학생들의 면전에서 별치않은 일을 트집잡아 우리 학교교원에게 심한 폭행을 가하여 쓰러뜨린적이 있었다. 교원을 하느님처럼 신성시해온 학생들은 이 놀라운 사실앞에서 눈이 뒤집혀질 지경으로 분노하였다. 나는 장울화와 함께 학생들을 발동시키는 성토연설을 하였다. 경찰이 교원을 구타한것은 학원에 대한 침해이며 교직원, 학생들에 대한 엄중한 모독이다. 자그마한 현경찰서의 경찰나부랭이가 교원을 함부로 때리다니 세상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제자들로서 마땅히 경찰당국의 사죄를 받아내야 한다. 그 무뢰한같은 경찰이 학교에 와서 매맞은 선생에게 모자를 벗고 사죄하라고 하자.
우리는 <교원을 구타한 야만적인 경찰을 엄벌에 처하라!>, <교원의 정당한 권리와 리익을 보호하자!>고 쓴 프링카드를 들고 현정부 건물앞에 밀려가서 악덕경찰의 처벌을 요구하는 롱성투쟁을 벌리였다. 그러나 현정부는 학생들의 정당한 요구를 외면하고 그들을 적당히 구슬려서 이 사건을 얼렁뚱땅해넘기려고 하였다. 투쟁은 실패하였다.
우리는 힘으로 폭행경찰을 징벌할것을 결심하였다.》
학생들은 보복행동에로 넘어갔다.
이번 행동은 아주 희극적이였다.
《어느날 밤 그 경찰이 극장으로 간다는 통보가 나한데 날아왔다, 경찰을 혼내우기에는 아주 알맞춤한 기회였다. 그런데 경찰놈을 때려준 다음 그놈들이 미처 손쓸사이도 없이 극장밖으로 몸을 빼려면 무대우에 걸려있는 가스등을 처리해야만 하였다. 누가 이 가스등을 끌수 있는가? 모두 이 하나의 문제를 놓고 론의를 거듭할 때 문득 장울화가 자진하여 이 임무를 맡아나섰다. 그날 밤 10여명의 학생들은 극장에 가서 예정대로 거사에 착수하였다. 중간휴식시간이 되자 장울화가 무대우에 올라서서 나무막대기로 가스등을 박살냈다. <때려라!>하는 나의 웨침소리와 함께 학생들은 경찰놈이 꿇어앉아서 잘못을 빌 때까지 호되게 그놈을 족치고 감쪽같이 뺑소니를 쳤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4권)
그것은 한차례의 정의와 부정의와의 싸움이였으니 정의는 승리하고 부정의는 징벌을 받았다.
이 크지 않은 투쟁과정에 김일성동지와 장울화의 마음과 마음은 더욱 가까와졌으며 두 소년친구는 갑자기 자신들이 퍼그나 성장한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그들은 아이도 아니고 감정도 취약하지 않고 리상도 더는 몽롱하지 않았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이제 더는 조국광복을 위한 일개의 독립운동자로 되는데 만족하지 않으시고 공산주의자, 공산당원이 되려고 생각하시였다.
장울화는 부유한 가정생활에 더는 만족하지 않았으며 김일성동지를 따라 공산당원이 되고싶었다.
경찰을 혼쌀낸 그날 밤 두 친구는 서로의 마음속을 터놓았다.
《그날 밤 장울화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에게 말하였다.
<생각할수록 기분이 흡족하구나. 부정의를 힘으로 다스린다는게 얼마나 흐뭇하고 통쾌한 일인가 하는걸 난 오늘 밤에 처음으로 깨달았어.>
<그런 놈팽이들은 용서하지 말아야 해. 그런 놈들과는 한하늘을 이고 살수 없어.>
내가 이렇게 말해주자 장울화는 문득 길가에 걸음을 멈추고 서서 어조를 바꾸어 심각하게 물었다.
<성주, 소학교를 졸업한 다음 어느 학교로 가겠니?>
그것은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질문이였다. 나는 소학이후의 자신의 전도에 대해서는 아직 진지하게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저 심상하게 대답했다.
<글쎄, 사정이 허락하면 중학교에 가겠는데 나야 어디 중학까지 갈 처지가 됐니. 울화, 그럼 넌 어느 학교로 가겠니?>
<난 심양가서 외삼촌이 다니던 사범학교를 다니고싶어.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권고하신다. 거기 가서 한학교를 다니잔 말이야. 사범학교를 마치면 대학에도 같이 가구.…>
<아청이, 말만 들어도 고맙다. 그런데 그게 과연 실현될수 있는 일일가?>
<왜? 학비때문에? 학비걱정은 안해도 돼. 내가 있지 않니.>
<그건 우리 부모님들이 허락하지 않을거다. 그리고 나도 공부만 하고있을 생각은 없다. 망국노가 됐는데 대학이 다 뭐야.>
<그러니까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독립투쟁에 나서겠단 말이지? 네가 혁명을 하러 떠날 때는 나도 너를 따라 떠나겠다.>
<심양은 어떡하고? 사범학교에 간다고 하지 않았니?>
<그건 네가 동행하는 조건에서 그렇게 한다는거구. 네가 동행하지 않는 심양행이란건 있을수 없어. 난 말이지 일평생 네곁에 있고싶어. 네가 상급학교에 가면 나도 상급학교에 가고 네가 공산당이 되면 나도 공산당이 되구.…>
그날 밤 장울화가 말하고저 한 요점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장울화의 그 말은 나를 크게 감동시키였다. 나는 장울화의 손을 꼭 잡고 귀속말로 말했다.
<아청이, 고맙다. 그런데 공산당이 뭔지 알기나 하면서 그런 말을 하니?>
<왜 몰라. 리대소나 진독수가 하는 그런 일이겠지.>
<공산당을 하면 감옥에 갈수도 있고 죽을수도 있다는걸 각오해야 해, 너 그런 각오가 돼있니?>
<그런건 겁나지도 않아. 너하구만 같이 있는다면 감옥에 가도 좋고 죽어도 좋아.>
장울화의 이 불의적인 선언은 나를 몹시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그가 무슨 충동을 받고 그런 선언을 하는지 나로서는 가늠이 잘 가지 않았다. 명백한것은 그가 그날 밤 내앞에서 한 말들이 오래전부터 마음속에서 무르익혀온 리상과 신념의 고백이라는것이다. 장울화는 나의 리상을 자기의 리상으로 만들려고 하였으며 나의 신념을 자신의 신념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는 주의를 결정한 다음 그 주의에 맞는 친구를 선택한것이 아니라 친구를 선택한 다음 그 친구가 지향하는 주의를 선택하였다. 장래를 결정하는 방법이 아주 단순한것 같으면서도 의미심장하였다. 장울화의 이런 립장은 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우정에 그 기초를 두고있었다. 장울화는 나를 진심으로 동경하고 따랐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4권)
1920년대의 모든 열혈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장울화는 김일성동지의 이끄심에 따라 공산주의운동에 적극 뛰여들기 시작하였다.
두 젊은이는 맑스-레닌주의서적들을 탐독하는외에 진보적인 학생들을 묶어세워 쏘련의 사회주의10월혁명에 대하여 토론하고 방학기간을 리용하여 농촌에 나가 사회적조사도 진행하였다.
특수한 년대 그자체가 하나의 촉매제로서 그 젊은 세대들로 하여금 일찌기 성숙되게 하였다.
비록 그들이 맑스-레닌주의의 심오한 리치에 대하여 깊이 체득한것은 아니였지만 공산주의의 싹은 벌써 그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였다.
유감스럽게도 김일성동지와 장울화사이의 우정이 점점 더 깊어지고있는 바로 그때에 하나의 뜻밖의 일이 생겨 그 우정은 일시 중단되게 되였다.(다음에 계속…)
|
|
지난해 말 중국 무송의 장울화열사 유족을 취재방문한 민족통신 특파원에게 붓글씨로 감사하는 고인의 장남 장금천선생.(장소는 장울화열사 묘지에 갔을 때 묘지 정원에서 기념촬영한 자료임) |
|
//////////////////////////////////
*관련 보도자료 보기
한국 정부가 자칭 <자유민주주의>라고 선전하면서도 알권리를 차단해 왔습니다. 남측 당국은 한국에 거주하는 독자들이 이 보도 자료들을 볼수 없도록 인터네트 열람을 봉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민족통신>은 한국 독자들이 twitter 와 facebook을 통하여 이 자료들을 열람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 주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www.facebook.com/kilnam.roh
혹은
www.twitter.com/#!/minjoktong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