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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1.5세 미 연방 종신직 판사 오른 존 리 “미국은 아직 기회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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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치열
댓글 0건 조회 6,645회 작성일 12-07-19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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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4일 출근하자마자 323건의 소송이 저에게 배당됐습니다. 넘겨받은 소송 서류에 모두 제 사인을 했습니다. 변호사에게 종신직인 연방 판사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직업입니다. 내 앞에 오는 모든 사람들을 공정하게 재판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미주 한인 역사상 3번째이자 한인 1.5세로는 처음으로 미 연방 종신직 판사에 오른 존 리(한국명 이지훈·44) 일리노이 주 북부지원 판사는 새 일에 대한 기대가 컸다. 리 판사는 1960년대 파독 광원이었던 아버지 이선구 씨(72)와 파독 간호사였던 어머니 이화자 씨(68)의 맏아들로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미국 사회의 주류로 우뚝 선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17일(현지 시간) 시카고 도심의 덕슨 연방법원 사무실에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종신직 연방판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과 소감을 차분하게 밝혔다.
 
리 판사는 “부모님은 아주 가난했지만 정말 열심히 일했다”며 “아버지는 내가 5세 때 미국으로 건너와 ‘플로샤인 슈팩토리’라는 신발공장에서 일하다가 4년 동안 보석 관련 전문학교를 다닌 뒤 시카고에 보석상을 차렸다”고 소개했다. 그는 “간호사인 어머니는 아직도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다”며 “부모의 근면과 철저한 직업윤리의식이 자신이 성장하는 동안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한국계로서 미국 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로스쿨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을 때 아시아계 미국인 변호사가 거의 없어 이 분야에서 멘토를 찾기가 너무나 어려웠다”며 “재판정에 한국계 미국인 변호사가 나 한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일하기가 힘들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치원에 다녔을 때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한 어려움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선생님이 미술 프로젝트를 한다며 집에서 깡통(a can of beans)을 준비물로 갖고 오라고 했습니다. 집에 가서 엄마에게 깡통을 달라고 해서 학교에 가져갔더니 다른 학생들은 모두 빈 시리얼 박스를 갖고 왔어요. 미국에 오는 많은 외국인들이 이런 시행착오를 겪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로서 승부를 봤다.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위대한 방법은 법이라고 믿고 로스쿨을 선택했고 변호사 자격증을 거머쥐었다. 리 판사는 “고객들은 처음엔 한국계 미국인인 나를 많이 신뢰하지 않았지만 내가 한 일의 성과와 품질을 보고 점점 인정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리 판사는 “미국은 거대한 기회의 땅”이라며 “부모님이 미국으로 온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선 열심히 일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변에서 자신을 이끌어 줄 수 있는 훌륭한 멘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하버드대 로스쿨 동문이며 2년 후배인 리 판사는 “하버드 로리뷰 편집장을 지낸 오바마는 학창시절 확실한 리더였다”며 “나는 오바마를 존경했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날 아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리 판사는 한국계 미국인 젊은이들에게 꿈과 열정을 추구하라고 강조했다. 그는 “사람들이 ‘넌 이것은 못할 것’이라거나 ‘이건 한국계 미국인들에게 적합하지 않은 일’이라고 말해도 꼭 하고 싶은 일이라면 물러서지 말고 추구해야 한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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