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링턴=손세영/노길남 민족통신 특파원]뉴욕서 북동쪽으로 승용차로 3시간 거리에 위치한 커네티커트주의 윌링턴이라는 조그만한 도시 근교에 단 하나 밖에 없는 한식/일식 식당에서 만났다. 이 먼길을 리준무 우륵교향악단의 지휘자겸 단장 부부가 자신의 차로 동행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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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준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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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식당에는 또 커네티커트주에서 목회하는 황현조 목사도 동석해 마치도 미국 동서부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한데 모여 조금만한 규모의 부흥회를 하는 기분이었다. 황현조 목사가 만남의 시작기도를 해 주고, 장호준 목사가 자신의 목회활동에 대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참석자들은 모두 감동한 표정들이었다. 특히 아버지가 목사인 전화심 여사(리준무 선생 부인)이 은혜를 많이 받고 감동했다고 되풀이하여 감사말을 전하면서 "역시 장준하 선생님 자제분이군요"라고 말했다.
장호준 목사는 미국 오기 전에 교인들도 꽤 많은 교회에서 시무하였는데 설교하던 중 눈에 보이는 교인들이 주로 넥타이를 주고, 선물을 준 교인들만 눈에 보여 그것이 무척 마음에 안스러웠는지 그 이후 아무 이유도 없이 단순히 그것 때문에 그 교회를 떠났다고 말한다.
아마도 물욕이 날 것 같아 미리 그만 둔 것으로 생각되었다. 장 목사는 교회내에서 돈많고, 배경이 좋은 신자들 보다는 가난하고 배경없는 신자들에게 더 마음을 주며 목회활동을 해 온 지난 날들을 돌이켜 본다. 미국에서 목회활동을 하는 과정에서도 일부 신자들은 장로를 시켜 달라고 요구했으나 "우리 교회는 장로제가 없고 회중교회이다"라고 말해 일부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그는 또 동성연애자들을 반대하는 신자들에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단호하게 지적하며 그 어느 누구도 교회에 오는 것을 가로막아서는 안된다는 자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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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준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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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준 목사는 또 반드시 일요일을 주일예배로 주장하지 않았다. 어려운 환경에서 일하는 교인들의 사정에 맞추어 모이는 날자를 정하여 힘들게 일하는 이민동포들, 그리고 학교생활에 여념이 없는 학생들의 편의에 의해 교회예배 날자를 정하여 두개의 교회를 운영하며 개척해 왔다.
교회 프로그램도 형식에 연연하지 않았다. 설교 대신에 둘러앉아 주고 받는 대화로 하는가 하면 예배 장소도 교인들의 사업장이나 가정에 모여 예배를 보는 경우들이 대부분이었다. 찬송가도 부르지만 "상록수"를 비롯하여 남녘 민중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들을 찬송으로 대신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속한 미국교단(United Church of Christ, 혹은 UCC)도 대단히 진보적인 교단으로 정평이 높다고 설명한다.
교회 모임에서 특별히 금기시 하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모임에서 피자를 나누어 먹으며 서로 대화를 주고 받으며 교회모임을 운영하는가 하면 설교라는 딱딱한 형식보다는 이야기식으로 전개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한다. 교인들이 주로 학생, 힘겹게 일하며 생계를 유지해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헌금을 강조하지 않는다. 이것은 헌금할 수 있는 교인들에게도 돈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주중에 학교버스 운전을 하는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식당에서 작별하고 민족통신 취재진은 장호준 목사와 별도로 시간을 가졌다. 그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다.
장호준 목사, 그는 어떤 길을 걸어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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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준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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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2월7일 서울시 신촌에서 태어났다.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박정희의 탄압으로 살던 집에서 쫓겨 났다. 해서 신촌 집에 대한 기억은 별반 없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다.
그는 "쫓겨나서 여관에서 지내던 기억만이 조금 남아있고 서대문 평동에 있는 전세집에서 자랐습니다.물론 그 때부터 시작해서 전세집 이사 전력이 시작 되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던 때는 상봉동 전세집에 살 때입니다. 신촌 집에서 쫓겨난 이후 약 십여년 조금 더 되는 사이에 대략 15번 정도 이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라고 회상한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장호준 목사는 어떻게 학교를 다녔을까? 장 목사는 이에 대해 "초등학교는 이대부국을 나왔습니다. 중학교는 청운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는 수도공고를 다니다가 중퇴 했습니다. 그리고는 검정고시를 봤습니다. 중앙신학교에서 신학을 했습니다. 중앙신학교를 졸업하고 한신대학 신학과에서 2년간 학부 공부를 다시 했습니다. 그런 후 한국 기독교 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는 그 후 1988년에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싱가폴에서 동남아시아의 여러나라들을 대상으로 선교사 생활을 하다가 1994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잠시 교회일을 하다가 그것이 탐탁하지 않아 1999년 미국교단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미국에 와서 지난 10여년 동안 개척교회를 운영해 왔다고 설명한다.
-아버지 장준하 선생님과 관련하여 가장 추억되는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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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준 목사를 포함 황현조 목사, 리준무 선생부부, 그리고 민족통신 취재진이 함께 기념촬영한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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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께서는 제게 등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산을 오르실 때 아버님은 전혀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산은 아버님께 있어 젊은 시절 일본군을 탈출하셔서 조국을 찾아 중원 육천리길을 걸으셨던 그 역사의 연장선 이셨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말씀 없이 산을 오르시던 아버님의 뒷 모습이 아버님에 대한 제 추억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재판을 받으시던 군사법정에서 “나는 법 이전의 인간이다.”라고 재판장에게 일갈 하시던 그 음성이 제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고 지금까지 새겨져 있습니다.
-어머니의 근황은 ? 어머님께서는 서울에서 살고 계십니다. 천주교 교회 일을 오래 하셨습니다만 요즘은 연세가 있으셔서 외부 활동을 거의 하시지 않습니다. 아버님 돌아가신 이후 가계를 위하여 보험 외판원 일을 하셨던 적도 있었습니다.
-아버지 형제 자매들은 ? 4남 1녀이십니다. 아버님이 장남이시고 아래로 누이와 두 삼촌은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막내 삼촌 만이 현재 뉴욕에 살고계시지만 외부 활동은 전혀 하지 않으십니다.
-장 목사님 형제 자매들은? 3남 2녀입니다. 형 둘과 작은 누이는 한국에 살고 있고 개인 사업을 합니다. 큰 누이는 씨애틀에 살고있습니다.
-장 목사님 사모에 대해 한마디.. 대학에서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자기 일에 완벽하게 충실한 사람입니다. 남편으로 인해 지금까지 늘 마음 고생을 하며 삽니다.
-자제분에 대해서 궁금합니다.딸 아이 하나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와서 고등학교 2년과 대학을 미국에서 마쳤습니다. 콜롬비아 대학 다니다가 재미없다고 그만두더니 지금은 하버드 대학에서 동아시아학 석사과정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경제능력이 없다는 것을 어려서 깨우친 덕에 아버지에게 기대봐야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음을 알고, 고등학교 때부터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지금까지 혼자 벌어서 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장목사님 좋아하는 음악은? 특별히 어떤 음악을 정해 놓고 좋아 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아무 음악이나 들리는 것이 있으면 듣습니다. 하지만 평소에 음악을 듣기위해 특별한 노력을 하지는 않습니다. 음악 소리 보다는 바람 소리를 더 좋아합니다.
-장 목사님 가장 인상깊게 읽은 책? 그저 기초 서적만 읽습니다. 해서 특별히 인상 깊게 읽은 책은 없습니다. 물론 아버님의 “돌베개”는 인상 깊은 책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이정표이며 특별히 돌베개 후기 맨 마지막 줄에 적으신 “이제 나는 살아서 50대 초반을 보내며 잠자리가 편치 않음을 괴로워 한다”라는 아버님의 말씀은 제 삶의 근간입니다.
-미국 생활 10년에 가장 마음아팠던 일 그리고 가장 기뻤던 일이 있다면? 미국 생활은 이제 10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1999년에 미국에 왔습니다. 글쎄, 별반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 성격 덕에 어떤 것에 집착하지도 또는 무언가 목숨 걸고 이룩해야 하는 목표도 세우지 않습니다. 하루 하루 사는 일에 뛰어 왔습니다.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리 깊이 가슴이 아프다거나 기쁘다거나 하는 것을 남겨 두지 않는 듯 합니다. 해서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이나 가장 기뻤던 일은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장준하 선생 35주기 추모회에 참석하러 로스엔젤레스 방문때 인상 그는 지난 8월 17일 오후5시부터 7시까지 '장준하선생기념사업회(대표:최진환 박사) 주관으로 열린 장준하 선생 35주기 추모회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로스엔젤레스에 방문한바 있었다.
그 당시 그는 회고발표에서 "아버지께서 생시에 전세방을 전전하는 과정에서 빨강 차압 딱지를 붙이러 온 사람들에게 저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들에게 매달려 어거지로 그렇지 말라고 하였던 8살 아이가 바로 저였습니다. 아버지는 1974년 군부독재에 대해 묵과하지 않고 영구독재를 온몸으로 막아 내섰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나는 법 이전에 사람이다'라고 당당하게 독재에 맞섰을 때 그 당시 나는 숨죽이던 어린 아이였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산에서 사고를 당하실때...아버지의 모습은 아무런 외상없이 주무시는 듯 누워계셨습니다. 그저 한없이 서러워하며 울기만 했던 그 아이가 저였습니다. 서슬퍼런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시절이었지만 김수환 추기경이 명동성당에서 장례식을 치르도록 하여 그곳에서 우리들은 마지막 고별예배를 드리며 아버지를 보냈습니다. 그 때 나는 흐르는 눈물을 훔치지 못해 눈물 두방울을 달고 장례식에 참석하였던 17살 아이였습니다"라고 돌아보며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목이 메어 잠시동안 침묵하기도 했다.
그는 "돌이켜 보면 곁에서 보아왔던 아버님 모습은 사랑이었습니다. 자기 목숨까지 아낌없이 내주는 분이었습니다. 아버지하면 그는 민주주의를 갈망하셨던 분입니다. 스스로 민족주의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박정희나 김종필이 말하는 그런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뼈속으로 체험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아버지는 민족을 팔아먹는 자들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언제나 민족주의자가 살아야 할 모습은 통일이라고 말씀하셨고, 통일이상 지상명제는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통일은 우리의 하루하루 삶이 되어야 하고, 통일은 또 우리 현실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민족관도 사랑이었습니다. 통일에 대치되는 그 어떤 것도 없다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습니다. 통일의 십자가를 내주었습니다. 임진강에 당신의 피를 뿌렸습니다. 그것이 이어져서 6.15선언으로, 그리고 10.4선언의 꽃을 피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의 반민족, 반통일적 모습을 보면서..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아버지의 뿌린 씨는 반드시 싻을 낳고 꽃을 피울꺼라고 믿습니다."라고 강조하며 그 때 마지막으로 이같은 추모식을 마련하여 준 로스엔젤레스 지역 동포들에게 감사했다.
그는 그러면서 "저는 어디를 가든지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아버지의 모습을 돌이켜 보면서 그 뜻을 붙들고 살아가겠습니다"라는 결의도 표명했다.
장호준 목사의 부친, 장준하 선생의 의문의 죽음은 아직도 그 진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어 유가족은 물론 민족을 사랑하는 해 내외 동포들은 여전히 궁금해 하고 있다. 아들 장호준 목사는 이에 대해 가족들이 아버지가 의문사를 당한이후 그 진상을 알아보려고 하는 과정에서 협박과 테러의 위헙을 받아 왔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형제들은 뿔뿔이 헤어져 해외에 나가 살다가 3남2녀 중 자신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한국으로 들어가 살고 있다고 말한다.
장호준 목사가 지난 9월부터 <민족통신>에 연재로 쓰기 시작한 종교수필(혹은 일요수필)은 해 내외 동포들의 뜨거운 반향을 블러일으켜 왔다. 그의 수필은 기독교신자 뿐만 아니라 일반 동포들에게도 애국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