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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8]김일성주석 위해 목숨 바친 중국인 장울화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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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
댓글 0건 조회 3,546회 작성일 12-09-10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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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편집 시간 2012.09.10 16:58:27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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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8]김일성주석 위해 목숨 바친 중국인 장울화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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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8]김일성주석 위해 목숨 바친 중국인 장울화열사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종합] 장울화열사는 항일투쟁 시기 김일성주석의 안위를 위해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바쳐 관심을 모아 온 인물이다. 중국인 장울화열사 가정은 5대에 걸쳐 북부조국의 지도자들과 인연을 맺고 지금도
조중친선의 상징으로 남아 있고, 이 가족들은 거의 매년 조선을 방문해 왔다. 이번에는 이 가정에서 출판한 도서
《김일성과 장울화》의 여덜번째 글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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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은 지난 해 말 중국 무송에 있는 장울화열사 아들 장금천과 만나 대담


[특별연재-8]

김일성주석 위해 목숨 바친 중국인 장울화열사




2. 친형제


《장만정은 민족의 자주권을 주장하고 자기 조국을 열렬히 사랑한 량심적인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오불관언하고 편안하게 살아갈수 있는 거부였지만 나라를 되찾겠다고 와신상담의 길을 걷는 우리 아버지를 동정하였으며 아버지가 병사하신 다음에는 뜨거운 련민의 정을 가지고 나를 독립운동자로서 지지하고 옹호하여주었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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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무송에 있는 장울하열사 아들집은 김일성주석 기념관으로도 사용한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화전의 화성의숙에서 공부하시는 기간 수많은 혁명지사들을 알게 되시였으며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시고 혁명활동을 활발히 벌리시였다. 하지만 그 학교 독립군계렬의 진부한 사상관점과 교육방식이 김일성동지께서 신봉하시는 사상과 배치되는것으로 하여 그이를 실망케하였다. 6개월간 공부하고나신 김일성동지께서는 화성의숙을 중퇴하고 길림시에 가서 공부하기로 결심하시였다.

길림으로 떠나기에 앞서 김일성동지께서는 무송으로 가시여 장울화와 다시 만나게 되시였다.

그때가 1926년 겨울이였다.

다시 만난 그 나날들에 김일성동지께서는 장울화에게 중국과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줄기차게 벌리는 공산주의운동추세에 대하여 말씀해주시였고 화성의숙에서 열혈청년들로 《타도제국주의동맹》을 조직한 사실에 대해서도 알려주시였다. 뿐만아니라 장울화를 비롯하여 무송의 일부 청년들을 《타도제국주의동맹》성원으로 받아들이고 장울화를 항일투쟁의 길로 이끄시였다.

재상봉의 나날에 김일성동지께서는 1926년 12월 15일 무송에서 혁명조직인 《새날소년동맹》을 결성하시였다. 그것은 하나의 공산주의소년조직으로서 그 목적은 일제를 타도하고 낡은 사회를 뒤집어엎으며 조국의 광복을 이룩하고 새 사회를 건설하여 광명한 새날을 맞이하는것이엿다.

다시 만난 나날들에 김일성동지께서는 강반석녀사를 도와 무송의 일부 조선녀성들을 묶어세워 12월 26일 《반일부녀회》를 조직하시였다.

강반석녀사께서는 무송현성과 부근의 농촌들에 야학을 내오고 조선녀성들에게 조선글을 가르치시였고 혁명적인 사상으로 교양하시였다.

두 젊은 친구들의 상봉기일은 짧았다.
1927년 1월 중순 김일성동지께서는 또다시 무송을 떠나 길림육문중학교로 공부하러가시였다.
그것은 두 젊은이들의 두번째 리별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 길림시에서 공부하려고 하신것은 주요하게는 당시 길림시가 조선에서 망명하여온 여러 정치세력들의 활동중심지였고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거두들이 모두 길림시에 있었으며 조선공산당의 엠엘파, 화요파, 서상파의 활동기지도 길림시에 있었기때문이다. 당시 길림시에 대하여 일본사람들은 《동 3성에서의 배일의 책원지는 길림》이라고 평했다.

김일성동지께서 아버님의 오랜 친구인 김시우와 김사헌의 소개로 공부하시게 된 육문중학교로 말하면 당시 길림시에서 비교적 진보적인 사립학교였다. 교원들가운데 비록 국민당우파분자들도 있기는 하였지만 대다수는 공산당원들이거나 아니면 국민당좌파였다. 육문중학교 교장 리광한은 주은래와 함께 천진남개대학 부속 중학교에서 공부한 동창생이였다. 리광한은 김일성동지께서 2학년에 편입되여 공부하시도록 친히 조직사업을 해주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육문중학교에서 기본과목들을 공부하시는외에 맑스, 엥겔스, 레닌, 쓰딸린의 저서들을 체계적으로 탐독하시였으며 《공산당선언》, 《국가와 혁명》,《자본론》, 《임금로동과 자본》등 맑스-레닌주의고전들을 연구하시였다.

문학교원 상월의 방조하에 《홍루몽》을 비롯하여 《어머니》, 《철의 흐름》, 《축복》, 《아큐정전》, 《압록강가에서》, 《소년방랑자》, 등 로신과 고리끼를 비롯한 진보적인 작가들의 문학작품들도 수많이 읽으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육문중학교에서 공부하시는 기간에 맑스-레닌주의리론수준과 중국어문학수준을 높이기 위한 튼튼한 토대를 닦으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육문중학교 재학기간에 혁명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시였다.
《조선인길림소년회》를 조직하시고 강연회, 예술공연 등 여러가지 활동을 벌리시였다. 또한 휴식일을 리용하여 농촌에 나가 농민계몽활동도 전개하시였다.

1927년말부터 1928년초까지의 겨울방학기간에 김일성동지께서는 진보적인 학생들로 조직된 연예대를 이끄시고 먼저 장춘으로 가시였다가 다음에는 무송으로 가시여 선전공연활동을 진행하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장울화와 또다시 상봉하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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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에도 장울화열사 유가족과 평양서 대담했다.
김일성동지께서 겨울방학기간 무송으로 돌아가계시던 나날에 두 젊은 친구는 늘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뙤약볕이 내려쪼이는 어느 무더운 여름날에 있은 일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몇몇 동무들과 함께 북산에 갔다가 길가에서 한 인력거군이 방금 인력거에서 내린 부자와 다투는 광경을 보게 되시였다. 다가가서 들어보니 일인즉 그 부자가 인력거군한데 돈을 적게 주었던것이다. 인력거군은 부자에게 지금은 《민생》문제를 좀 돌봐주어야 하지 않겠는가고 하면서 몇푼만 더 달라고 빌었다. 부자는 돈을 더 줄 대신에 도리여 《삼민주의》만 알고 《오권헌법》(원래의 뜻은 다섯가지 권리를 보장할데 대한 헌법인데 여기서는 권리라는 권자와 주먹이라는 권자가 같은 음으로 쓰이는것을 리용하여 주먹맛이라는 뜻을 나타낸다.-역주)은 모른다고 하며 단장을 들어 인력거군을 때리였다.

김일성동지께서와 학생들은 더는 보고만 있을수 없어 부자에게 달려들어 사과하고 돈을 내주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그이의 이야기는 계속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육문중학교의 진보적인 학생들로 비밀독서조를 조직하시였다. 이 조직은 얼마후에는 문광중학교, 제1중학교, 제5중학교, 녀자중학교와 사범학교에까지 급속히 확대되였다. 책을 사들일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진보적인 학생들은 일요일마다 철도공사장에 가서 침목을 메나르거나 강가에서 자갈을 져나르고 정미소에 가서 일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번 돈으로 진보적인 책들을 사들여 모두가 돌려가며 읽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혁명적인 청년들과 함께 1927년 8월 28일 길림시 북산공원 약왕묘지하실에서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결성하시였다.

결성의식은 숭엄하게 진행되였다.
김일성동지께서 사업보고를 하시였으며 의식에 참가한 전체 청년들이 어깨를 겯고 전 세계공산주의자들이 즐겨부르는 《인터나쇼날》의 노래를 소리높이 불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진보적인 학생들과 함께 자주 교정을 떠나 외지에 나가 혁명활동을 전개하시였다. 매주 토요일마다 강의가 없을 때에는 밤차를 타고 길림시교외의 교하, 카륜, 고유수 등지에 나가시였으며 지어 길림시에서 수백리 떨어진 곳까지 래왕하시며 대중을 투쟁에로 불러일으키시였고 대중운동을 직접 조직하기도 하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어찌나 생동하게 말씀하시였던지 장울화는 막 피가 끓어번지는듯 하였다. 원래부터 김일성동지를 끝없이 숭배하던 장울화로서는 이제는 그이께서 자기가 전혀 새로운 세계를 보고 악취풍기는 구석진 곳의 공기와는 전혀 다른 청신한 공기를 마실수 있도록 창문을 활짝 열어주신것만 같았다.

밤새도록 끝없이 진행된 대화과정에 장울화도 무송공산주의지하소조의 활동정형에 대하여 그이께 보고드리였다.

그후 장울화는 김일성동지를 따라다니면서 직접 혁명활동에도 참가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손수 집필도 하고 강판글씨도 쓰고 등사도 하시면서 1928년 1월 15일에 혁명적출판물 《새날》을 창간하시였다. 후에 조선로동당 당력사연구부문에서는 이것이 조선현대혁명력사에서 첫 혁명적출판물이라는것을 확언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새로운 혁명조직인 《백산청년동맹》을 결성하시고 진보적인 청년들을 묶어세워 공동으로 일제를 반대하는 혁명활동을 전개하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연예대를 이끄시고 무송현 각지에서 순회공연을 진행하시였다. 장울화도 따라갔다. 공연조건이 매우 불리하였다. 로천무대에서 석유등잔이나 가스등을 켜야 했고 소도구와 의상 등도 극히 간소한것이였다. 공연종목은 《혈분만국회》,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딸에게서 온 편지》등 혁명적인 주제의 연극이였다. 연예대는 공연을 진행하는 한편 혁명의 리치에 대하여 선전도 하고 그 과정에 혁명조직을 내오기도 하였다.

인민대중은 공연을 환영하였지만 군벌정부는 반대로 그것을 비난하였다. 연예대가 무송현성에서 며칠동안 공연을 하고있을 때 그 지방의 일부 봉건세력들은 군벌정부와 결탁하여 경찰들을 내몰아 공연을 강압적으로 중지시키고 연예대책임자 김일성동지를 체포구금하였다. 경찰은 또한 김일성동지의 집을 수색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 체포되시자 제일 안타까와한것은 장울화였다. 그는 김일성동지를 구출해야 하였고 또 경찰놈들이 그이의 집을 수색하지 못하게 해야 하였다. 김일성동지의 어머님께서 남편을 잃으신 후 또다시 그런 타격을 받게 할수는 없었다. 장울화는 아버지 장만정에게 도와줄것을 요청하였다. 그때는 장만정이 이미 무송현 상무회 부회장으로 선거되였을 때였다.

김일성동지께 특별한 호감을 가지고있던 장만정은 《그 젊은이가 장차 틀림없이 큰일을 할것》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군 하였다.

당시 현장은 장원준이였다.
자가 걸삼인 그는 료녕성 관전사람으로서 봉천사법학당을 졸업하였다. 중화민국16년(1927년-역주) 1월 무송현 현장으로 부임된 장원준은 성의회 대의원이고 성 참의원이였으며 성국민대표로서 관직이 상당하였다.

무송현이 생겨난이래 장원준은 제13대현장이였다. 그에 앞서 제12대까지의 현장들은 몇달동안, 걸어서 몇년씩 현장자리에 있었는데 장원준이처럼 오래 해먹은 사람은 없었다. 그는 중화민국시기로부터 《대동》(일제가 중국 동북지방을 다 강점한 다음 년호를 《대동》으로 고쳤다.-역주)시기에 이르기까지 더 나아가서는 강덕시기까지 10여년동안이나 현장으로 있으면서 현을 건설하고 인민들을 안착시키기 위해 뭔가 좀 하느라고 하였지만 종당에는 괴뢰만주국 현장으로 되고 말았다.

장만정이 현정부로 달려갔을 때 현장 장원준은 마침 청사에 있었다. 다부산자에 마고자를 입은 그는 당시 류행되던 팔자수염을 기르고 머리를 빡빡 깎았으며 오관이 단정하여 위엄이 있는 신사풍의 사나이로 보이였다.

장만정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였다.

《경찰들이 길림에서 온 한 학생을 체포하였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장원준은 숨김이 없이 《그런 일이 있소.》라고 하였다.
《경찰이 무엇때문에 그 청년학생을 체포합니까?》
《그는 공산당혐의가 있는 사람이요.》
《그렇게 말할 그 무슨 증거라도 있습니까?》
《그들이 공연하는 연극대본은 빨갱이사상을 선전하는것이였소.》
《현장님이 학생들이 공연하는 연극을 보기라도 하셨는가요?》
《그건…》 장원준은 말이 막혔다.

장만정은 그 틈을 타서 더 들이댔다.
《학생들이 공연한 <혈분만국회>는 조선의 애국충신 리준이 제국주의렬강들이 조선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하는데 격분하여 제국주의렬강대표들의 면전에서 배를 갈라 자결하여 독립을 요구하는 조선국민의 애국주의정신을 보여준것으로서 조선에서는 누구나 다 잘 알고있는 이야기인데 무슨 리유로 공연할수 없다는겁니까?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는 중국의 할빈역두에서 조선사람인 안중근이 자기 민족의 원쑤인 이등박문을 쏴죽이고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웨친 사실을 가지고 만든 연극입니다. 그것 역시 중국사람들모두가 다 알고있는 사실인데 무엇때문에 공연을 할수 없단 말입니까? 일본놈들은 조선사람의 원쑤일뿐아니라 장차 우리 중국사람의 원쑤로도 될것입니다. 학생들의 공연이니 좀 과격한 점도 있겠지만 비난할거야 못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장원준은 의연 제 주장을 철회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 현의 많은 신사들이 신고하였는데 나로서도 따져보지 않을수 없지 않소.…》
《그들이 신사라면 그래 나는 신사가 아니란 말입니까?》

장만정은 장원준앞에서 책상을 치고 가슴팍을 두드리면서 《그 김성주가 공산당이라면 나도 공산당을 하겠습니다. 내가 김성주를 보증하는데도 당신은 마음을 놓지 못하겠단말입니까?》고 말하였다.
바로 그때 현정부 대문밖에서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무원이 들어와서 무송에서 살고있는 조선사람들이 한 조선학생이 경찰에 체포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현정부 대문앞에 와서 항의시위를 벌리고있으며 수많은 중국사람들도 당국이 학생들을 제멋대로 잡아가두는데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조선사람들과 함께 시위를 한다고 보고하였다.

장만정은 그 틈을 타서 장원준의 요진통을 찔렀다.
《만일 무고한 한 학생을 체포한것으로 하여 백성들이 폭동이나 일으킨다면 현장나으리께서 상급이나 하급에 뭐라고 하겠습니까?》

비교적 로련한 장원준은 리해관계를 따져보고나서 종당에는 타협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석방되시였다.

출옥후 그이께서는 장울화와 함께 장씨집으로 찾아가서 장만정에게 사의를 표하시였다.
장만정은 진심으로 말하였다.

《고맙긴. 얘야, 너희 학생들이 한 일은 좋은 일이고 의로운 일이였다. 경찰들이 너희들을 붙잡은것은 부당한 처사다. 성주야, 너는 울화의 가장 훌륭한 벗이다.》

겨울방학이 끝나자 김일성동지께서는 길림으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하시였다.
두 젊은 친구는 세번째로 작별하였다.

장울화는 김일성동지를 따라 길림시로 가고싶었다. 이미 김일성동지의 혁명적열정에 감화된 장울화는 자기가 사는 산골소도시를 떠나 거세한 혁명투쟁에 참가할것을 갈망하였으며 그 시대의 모든 진보적인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을 들었다놓는 큰 위업에 몸을 잠그고싶었다.

하지만 장울화의 가정은 그의 리상실현에 장애물로 되였다.
장울화의 아버지 장만정은 비록 조선독립운동자 김형직선생님과 공산주의자 김일성동지를 여러차례 도와주었지만 그 대변혁의 시대, 대동란의 시대에 중국민족주의자로서의 력사적제한성은 피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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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장울화열사 아들 장금천씨가 김일성주석과 장울화열사에 관한 도서출판
장만정은 낡은 사회에서 태여난 좋은 사람으로서 량심도 있고 돈도 있는 사람이였다. 장만정은 중국사회가 1930년대에 이른 그 특수한 시기에 출현한 특수한 인물이였다.

장만정이 일본놈들의 조선강점을 반대하면서 중국으로 망명해온 조선사람들을 동정을 하는데 그치고있은것은 1920년대까지는 일본인들의 세력이 의연 조선에 국한되여있어 어쨌든 아직 그들이 중국을 점령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고있었기때문이다.

장만정은 비록 마음속으로부터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희생되거나 영용하게 싸우는 조선청년들에 대하여 탄복하고 물심량면으로 지지하였지만 둘째 아들이 집을 떠나고 지어는 피흘리며 희생되게 하고싶지는 않았던것이다. 결국 장만정은 민족주의자, 애국자로서 중화민족의 존엄과 독립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자기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기는 했어도 공산주의사상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따라서 공산주의자는 아니였다.

그는 돈을 지나칠 정도로 중히 여기지 않았을뿐아니라 일상적으로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정의로운 일을 위해 자기 집재산을 희사하였지만 상인의 본능으로부터 가산을 늘이고싶었고 자기 아들들이 그것을 관리하고 물려받게 하고싶었다.

또한 장만정은 일반적인 봉건가정의 한개 가장으로서 세 아들의 전도에 대하여 제나름의 타산이 있었다.

세 아들의 전도에 대한 장만정의 타산은 그들의 개성을 고려한것이였다.
한날한시에 난 손가락도 길고 짧은것이 있듯이 장만정의 세 아들은 성격과 지향이 전혀 달랐다.

맏아들 장울중은 사람됨이 후하고 성실하며 극히 전통적인 관념에 사로잡힌 젊은이로서 그저 공부만 하고 인간세상에서 바야흐로 일어나고있는 천지개벽에 대하여서는 그리 리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장만정은 맏아들을 공부시키는데 관심을 두었다. 처음에는 심양에 보내여 공부시키다가 후에는 다시 산동성 연대에 보내여 미국교회가 운영하는 대학에서 영어를 배우도록 하였다. 장울중은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학업을 마치고 무송으로 돌아와 처음에는 교원으로 있다가 후에는 교장으로 되였다. 그후에는 현정부 관리로, 교육과장으로까지 승진하였다.

셋째 장울민은 가정의 막내아들로서 어려서부터 응석받이로 자랐다. 조금만 아파도 제꺽 아편을 몇모금씩 빨아 아픔을 멈추게 하였다. 한번두번 하던 노릇이 장울민으로 하여금 아편쟁이가 되게 할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아편에 인이 배기다보니 아편생각이 나면 아무것도 할수 없어 어디 가서라도 아편을 몇모금 빨아야만 하였다. 장만정은 한때 장울화와 장울민이 함께 《형제서국》(책방)을 경영하게 하려고 생각하였다. 비록 장울민이 통화에 가서 수공업기술을 배우기는 하였어도 그가 착실히 일하지 않기때문에 사람들을 고용하는수밖에 없었다. 그는 하루종일 하는 일없이 건달을 부리며 돌아치고 아편피우는것밖에 몰랐다. 아편을 피워 돈이 다 떨어지면 집에 돌아와 훔치고 훔치다가 부모들에게 발각되면 한바탕 얻어맞군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선조들의 유훈을 명심하여야 창업의 어려움을 알게 된다》는 주련이 씌여있는 조상들의 족보책앞에 끓어앉아 벌을 받군 하였다. 마을사람들모두가 장씨집 셋째 아들은 안되겠다고 말하였다.

둘째 아들 장울화는 총명하고 속궁량이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수학을 잘하고 수판을 잘 튕겨 천성적인 장산군재목이였다. 장씨집 장사거래를 그에게 맡긴다면 그보다 더 안성맞춤한 적임자는 없을것이였다. 그런데 당자인 장울화는 장사에 대하여 흥미를 가지지 못하고 마음이 들떠있어 그를 무송현성에 잡아둘수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 김일성동지를 따라 외지에 나가려고 하였고 길림시에 가서 혁명을 하려고 하였다. 이것으로 하여 장만정은 몹시 골치를 앓았다. 아버지의 가업을 넘겨받는가 안받는가, 장사가 흥하여 돈을 많이 버는가 못버는가 하는건 제쳐놓고 둘째 아들이 정말 외지에 나가 혁명을 한다고 돌아치다가 죽으면 아버지, 어머니는 자식을 괜히 키운것으로 되지 않는가? 이것 또한 장울화가 소학교를 졸업한 다음 그가 외지에 나가 공부하는것을 반대한 리유였다.

어떻게 하면 둘째 아들의 마음을 얽어매놓을것인가. 이것이 장만정과 그의 부인 원몽린이 한가할 때면 되뇌이군 하는 화제였다.

이리저리 생각하다 못해 두 늙은이는 비록 낡은 방법이긴 하지만 아주 효과적인 방도를 택하기로 하였다. 그것은 장울화를 장가보내여 그의 마음을 얽어매고 그의 뒤다리를 잡아당기면 그가 외지에 나가 일을 저지를 걱정도 없고 그러면 그가 아버지의 가업을 계승할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것이였다.

장만정은 부자이지만 결코 둘째 아들을 부자집딸에게 장가들게 하고싶지는 않았다. 부자집딸은 호강스럽게 자란 아가씨로서 먹여살리기가 힘들어 잘못하다가는 아들이 내소박을 당할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장만정이 택한 사돈집도 역시 가난한 집이였다.

사돈집은 지난날 산동에서 함께 동북으로 넘어온 왕가성을 가진 은세공업자였다. 왕씨집은 동북으로 온 다음에도 살림이 펴이지 못하여 여전히 매우 가난하였다. 가난한 집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이면 먹여살리기가 헐한것이다.

그 처녀는 1913년 12월 26일생으로 낡은 사회의 대다수 녀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름이 없었고 당시 중국관습에 따라 시집온 다음 장왕씨로 불리웠다.

장울화는 혼사와 관련한 부모의 령을 어길수 없어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1929년초 장울화는 결혼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경영하는 천성영잡화점 점원으로 일하게 되였다. 가정의 일들이 자기의 계획에 따라 순조롭게 풀려나가는것으로 하여 장만정은 매우 만족해하였다.
그런데 결혼한지 얼마 안되여 장울화는 장만정으로 하여금 크게 놀라게 하는 일을 저질렀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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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민족통신 종합 2012-09-10]

민족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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