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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2]코리아전쟁 진실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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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
댓글 2건 조회 1,954회 작성일 13-06-24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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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공동] 제국주의자들은 자기가 침략해 놓고 항상 구실을 붙이는 것이 특징이다. 침략 대상국들의 국민들을 혼란시키고, 인류사회에 침략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였다. 미 제국주의자들은 있지도 않았던 대량살상무기(WMD)가 있다고 허위선전하여 이라크를 침략해 수십만여명의 양민들을 학생한 경우를 비롯하여  리비아, 아프카니스탄 침략도 같은 수법으로 침략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코리아 전쟁도 남북간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자주권을 지향하는 세력을 대변하는 북조선을 한 축으로하고, 다른 한축은 미제국주의 세력과 이를 추종하는 사대매국세력간의 대결이었다. 그 전쟁각본은 누구에 의해 비롯되었는가? 
 
 
 
 
[연재-2]코리아전쟁 진실을 밝힌다
 
군산복합체의 전쟁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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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공동]  제국주의자들은 자기가 침략해 놓고 항상 구실을 붙이는 것이 특징이다. 침략 대상국들의 국민들을 혼란시키고, 인류사회에 침략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였다. 미 제국주의자들은 있지도 않았던 대량살상무기(WMD)가 있다고 허위선전하여 이라크를 침략해 수십만여명의 양민들을 학생한 경우를 비롯하여  리비아, 아프카니스탄 침략도 같은 수법으로 침략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코리아 전쟁도 남북간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자주권을 지향하는 세력을 대변하는 북조선을 한 축으로하고, 다른 한축은 미제국주의 세력과 이를 추종하는 사대매국세력간의 대결이었다.
제국주의자들은 자기가 침략해 놓고 항상 구실을 붙이는 것이 특징이다. 침략 대상국들의 국민들을 혼란시키고, 인류사회에 침략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였다. 미 제국주의자들은 있지도 않았던 대량살상무기(WMD)가 있다고 허위선전하여 이라크를 침략해 수십만여명의 양민들을 학생한 경우를 비롯하여  리비아, 아프카니스탄 침략도 같은 수법으로 침략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코리아 전쟁도 남북간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자주권을 지향하는 세력을 대변하는 북조선을 한 축으로하고, 다른 한축은 미제국주의 세력과 이를 추종하는 사대매국세력간의 대결이었다.
그 전쟁각본은 누구에 의해 비롯되었는가? 
미국은 반도에서 전쟁을 수행하는데 장해가 있는 요소들을 제거하여 마침내 준비한 대륙회복의 야망을 향해 줄달음질 고속도로를 놓을 있었다. 메카시 광풍을 등에 업은 미국은 중국대륙을 향해 준비된 질주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매카시 광풍이 일어나도록 국민들을 선동한 집단은 전쟁에 목말라하는 거대 집단 ‘군산복합체(Military Indusrial Complex)’였다.
 
전쟁으로 번영을 누리는 집단은 돈이 쏟아져 들어왔던 전쟁이 없어지면 중독자가 마약이 끊긴 것처럼 견디지 못한다. 하지만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으로서 아무도 전쟁에 응해오지 않을 것이므로 멕시코 전쟁 경험한 것처럼 상대에게 전쟁을 하자고 자꾸 자극을 주어야 했다. 그리고 정작 본격적인 전쟁에 들어갔을 때를 대비해 전쟁 시나리오를 만들어 둬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강대국인 자신과 전쟁하자면 두려워 것이므로 미군도 철수. 방위선도 후퇴라는 미끼를 줘가면서 자극의 강도를 높여 나가야 했다.
 
그러면 전쟁의 시작은 공식적으로 남북 간의 전쟁이 된다. 그리고 3자인 미국은 침략자를 물리치기 위한 정의의 수호자로서 세계인의 지지와 찬성 속에 등장하여 참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각본이었다. 
 
중국 대륙에서는 1948 가을 린뱌오가 지휘하는 동북 인민 해방군이 만주에서 국민당 군을 격파하는 요심 전투를 시작으로 1949 2월에는 베이징이 함락되었고 1949 10 1 모택동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였다. , 미국이 지원하는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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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님의 댓글

한민족 작성일

이어서 계속...

중국 대륙에서는 1948년 가을 린뱌오가 지휘하는 동북 인민 해방군이 만주에서 국민당 군을 격파하는 요심 전투를 시작으로 1949년 2월에는 베이징이 함락되었고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였다. 즉, 미국이 지원하는 중국 국민당이 공산당과의 내전(1946~1949)에서 공산군에게 패퇴한 시기이므로 매카시 광풍이 일었던(1949~1954) 시기인데 미 정부는 그 당시의 미 국민의 요구에 역행하는 애치슨 선언을 하였다(1950.1.12). 이런 행위를 한 자들이 이후에 매카시의 색깔론을 면 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적을 속이기 위한 기만술이었기 때문이었다.
 
애치슨 선언 후 공화당 의원을 포함하여 많은 비난이 일었다. 그러나 애치슨을 향해서 쏟아지는 매카시즘의 화살에도 불구하고 애치슨은 그 당시는 물론 그 후까지도 무사할 수 있었다.
이보다 앞서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끝나면서 삼상결정에 참여한 미 국무장관 번즈도 공산주의와 내통한 불순분자로 내몰렸다. 애치슨 선언은 한국과 대만을 방위선에서 제외시킴으로써 북한과 중국을 동시에 기만하기 위한 술책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이 뒤에 밝혀졌다.
 
1947년 터키와 그리스 방위를 선언함으로써 냉전의 깃발을 올린 트루먼 정권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국은 극동의 그리스였다. 극동의 그리스인 한반도에 관심을 쏟았던 건 그 지정학적 가치 때문이었다.
 
미국의 관심은 지정학적 가치일 뿐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한반도에 관심을 쏟았던 트루먼 정권에서 애치슨 선언이 나왔던 것은 전략적 기만전술에서였다.
 
북침 명분위한 사전 시나리오
 
 
1949년 6월 29일에 주한미군 철수를 완료 했다는 발표 역시 북한이 남침을 단행하여 전쟁에 참전할 명분을 획득하기 위해 사전 시나리오에 따른 발표였다. 북한이 남침하더라도 미군이 개입해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남북이 사이에 발생한 사건으로 세계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다.  소련군의 완전 철수와는 달리 미군은 일부를 잔류시켜 한국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활동하고 있었다. 한국군은 사단마다 미 군사 고문관들이 배치되어 한국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국군 1사단의 미군 수석 고문관은 로이드 로크웰 중령이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전후에 한국에 있었고 한국군을 지휘 감독하였다.
 
연대에는 대위급을 고문관으로 배치하였다. 예를 들어 개성 12연대의 미 작전 고문관은 다리코 대위였다. 다리코 대위 역시 1950년 6월 25일 전후에 한국에 있었고 한국군을 지휘 감독하였다
 
미국이 한국을 강점하기 위해 양민 수만 명을 죽이고 세운 하수인 이승만 정부를 결사 반대하는 한국국민의 손에 맡기고 미군이 철수했다는 것은 사리에 어긋나는 소리이고 속셈을 감추기 위해 늑대가 내는 양 울음소리에 비유된다. 
 
애치슨 선언은 한국과 대만을 방위선에서 제외시킴으로써 북한과 중국을 동시에 기만하기 위한 술책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이 뒤에 밝혀졌다.
 
1947년 터키와 그리스 방위를 선언함으로써 냉전의 깃발을 올린 트루먼 정권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국은 극동의 그리스였다. 극동의 그리스인 한반도에 관심을 쏟았던 건 그 지정학적 가치 때문이었다. 미국의 관심은 지정학적 가치일 뿐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1947년 당시 조선에 급파되였던 웨드마이어가 미국대통령 트루먼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미군이 남조선에서 철수하면 남조선이 ≪적화≫되어 공산주의의 파급을 도와 주는 것으로 되기 때문에 미국이 조선에서 도모하려는 문제들을 미영중소 4개국회담에서 풀며 거기에서 성공 못하면 유엔에서, 유엔에서도 해결 못하면 미국이 단독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코리아 반도는 지정학적 잇점을 지니고 있어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미 정부의 사전 시나리오에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한 계획들이 있었다. 그렇게 세운 계획들 중 하나로 요시찰인에 대한 검거 학살 계획이 있었다. 중국대륙을 목표로 한 군사작전을 수행하는데 조금이라도 차질을 빚지 않도록 하기 위해 철저히 장해물을 제거 하였다.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경찰의 연행과 구금조치는 1950년 6월25일 전쟁 당일 시작되었다고 진실화해위는 밝혔다. 그리고 유엔에서 미국은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기 위해 6.25 전쟁발발 전에 미리 계획해둔 규탄성명을 발표하고 유엔군을 조직하는 작업을 일사천리 준비대로 신속 완벽하게 진행하였다
 
미 죤 디 히카슨: 북침 감추고 북 남침 날조 조작
 
“유엔담당 미 국무차관보 존 D. 히카슨 증언에 의하면 미국은 북침을 감추고 북한이 침략한 것으로 날조시키기 위한 ‘유엔결의초안’까지 전쟁 전에 제 마음대로 조작해 완비하고 있었다.
 
1951년 6월 5일 미 상원세출위원회의 국무성 예산에 관한 실무적인 청문회에서 죤 디 히카슨은 코리아 전쟁 발발과 관련하여 유엔에 제출할 <결의안>이 전쟁 전에 작성되었다 고 증언하였다.
 
이는 ‘NSC-68’에 따라 수립된 계획으로서 UN군의 코리아 전쟁 참전이 전쟁 전 미국의 ‘NSC-68’에 따라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1950년 4월2일 미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비준된 ‘NSC-68’에는 한국전쟁 발발 후 유엔군을 투입하기 위한 계획이 단계 별로 명시되어 있다. ≪1964년 4월 13일자 뉴욕타임스에서≫
 
소련이 유엔에 항의하여 불참한 시기를 이용하여 미국은 전쟁 발발 날짜를 잡았다고 한다. 소련은 중국공산당의 국가수립 선포 이후에도 이유 없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는 유엔 결정에 항의하기 위해 1950년 1월부터 유엔을 보이콧 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안보리에서 유엔군의 한국전 파병이 쉽게 결정 되었다.
 
소련이 거부권 행사를 포기하고 안보리에서 기권하였기 때문에 유엔군이 파병될 수 있었다는 사람이 있다. 소련이 유엔군 파병에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미국은 유엔총회에서 유엔군참전의 결정을 이끌어 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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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년 2월26일 한국에서의 선거의 가부를 묻는 표결에서도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보이콧으로 부결되자 미국은 유엔 총회에 상정하여 우리민족에게는 발언권을 주지 않고 민족의 뜻과는 배치되는 남한만의 ((이미 천명한대로 소련과 북한이 유엔의 결정에 따르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표결이 실시된 것이므로 이 결의안이 남한에만 미친다는 것을 회원국은 이미 알고 통과시킨 것이다. )) 유엔감시하의 단독선거를 결정하였다. 
우리민족은 스스로 선거를 치를 능력이 부족하다는 전제하에 내려진 이 같은 결정을 우리민중들은 반대하여 항거하였고 많은 사람이 미군의 지령을 받은 친일반역자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자주적으로 감시가 없는 자유스런 축제분위기 속에서 해방된 조국의 첫 선거를 하고 싶었고 친일매국노가 날뛰는 분단이 확실한 반쪽 짜리 선거를 원치 않았다.
 
코리아 전쟁 발발 직후 유엔한국위원단(UNCOK)은 북한 남침에 의해 일어난 전쟁이라면서 미국이 제시한 자료를 그대로 유엔에 보고함으로써 유엔군 참전 결정을 이끌어냈다.
 1949년 대륙에서 중국공산당의 국가수립 선포 이후에도 이유 없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고 일개 섬에 불과한 국민당의 타이완 정부가 22년 동안이나 유엔에서 중국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을 대신하여 유엔의 회원국은 물론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의 지휘를 버젓이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유엔을 쥐락펴락 제 마음대로 주무르고 전횡을 일삼는 미국 때문이었다.
 미국잡지 《라이프》는 50년 8월호에서《전쟁개시에 이르러 이번 전쟁만큼 완전히 준비되었던 전쟁은 우리들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없었던 일이었다.》라고 썼다.
당시 미 극동군사령부에서 참모로 근무한 에이다는 《코리아 전쟁은 일본에 있는 미군총사령부의 직접 명령에 의하여 남한 군이 개시하였다》라고 폭로하였다.
 
「유에스뉴스 앤드 리포드」1945년 12월 10일호에서 미10군단장 ‘오르몬드’ 는 『중국을 공격하는데 있어서 코리아처럼 편리한 보급로는 없다. 육, 해, 공군의 동원이 코리아보다 더 좋은 지역은 없다. 한국은 제1급의 전략적 지역이다.』라고 하였다.
 
미 경제원호처 한국과장이었던 존슨은 1950년 5월 미 하원 세출위원회에서 『한국군은 미국무기로 무장하였으며 서울의 미 군사사절단의 지도하에 미국 장교들에 의하여 훈련 받은 10만의 한국군이 모든 준비를 끝마쳤으며 언제든지 한국에서 전쟁을 개시할 수 있다』고 보고 하였다.
1949년 11월 미 상원 군사위원회 위원 ‘노랜드’가 이승만이 차린 초대연에서 이렇게 발언 하였다.
 
『나는 한국에 와서 반공태세가 정립된 것에 대해 만족하게 생각한다. 특히 국군이 잘 정비되고 훈련되어 마음이 든든하다. 이 군대를 가지고 북진 통일하기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내가 미국에 돌아가면 한국에 대한 원조를 더욱 증가하여 북진준비에 만전을 가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전쟁인 만큼 만일을 생각해서 새로 50만~60만 명의 청장년들을 준 군사적 조직에 망라하고 더 훈련시키는 것이 좋겠다.』
 
1950년 1월 미 극동군사령부 외교국장 시볼드가 이승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준비가 다 되었으면 북진은 하루라도 속히 하는 것이 유리한데 와서 보니 국군의 준비를 좀 더 빨리 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더 준비하여 개전하면 국군의 승리는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에 대처하여 미군이 원조 또는 직접 참전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1949년 10월에 있은 국군사단장회의에서 주한 미 군사고문 단장인 로버트는『38선 이북지역에 대한 공격은 나의 명령에 의하여 진행되었으며 금후에도 진행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정세를 악화시켜 전쟁 발발을 도모하기 위한 공격이 진행되고 있다는 발언이다, 6.25전쟁 당시 내무부장관 김효석은 채병덕이 다음과 같이 얘기 했다고 하였다.
 
『당시 국군참모총장 채병덕의 말에 의하면 1949년 7월부터 1950년 5월까지의 기간에 38선 일대에서 1천여 회 가까이 북한을 공격 하였으며 수백 명에 달하는 이북주민들을 살해하고 수천 호 민가를 소각했다. 이것은 「국군의 강대성을 시위하며 이북주민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주라」는 로버트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코리아 전쟁 당시 해군참모총장 이용운은 1975년 6월 일본 도쿄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1949년 8월 10일에 있은 몽금포 기습작전을 계기로 6.25전쟁으로 확대되었으며 전쟁은 한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유엔군사령관 맥아더가 1951년 5월 미 상원 외교군사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 하였다.
 
『북한군은 38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배치돼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방어를 위해서 배치돼 있기 때문이다. 공격을 위한 배치는 결코 아니었다. 반면에 한국군은 자기의 모든 물자와 장비를 38선에 집결시켰다.』
 
50년 6월 19일 미국대사와 주한미군과 이승만 정권 수뇌들과 가졌던 회담에서 덜레스는 다음과 같이 얘기하였다.
 
『내가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것은 북진준비상황을 직접 보고 미비한 점이 없으면 곧 북진을 단행하자는 트루먼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왔다. 와서 보니 준비는 이만하면 족하다. 전기는 왔다. 우선 남한에서 먼저 개전하라. 개전후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미국을 믿으라. 만일 그 기간에 전국이 불리하게 되면 방어태세로 넘어가 2주일간만 유지하라. 그러면 미국의 참전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1949년 6월 5일부 뉴욕 헤럴드 지에 실린 서울특파원의 보도에 의하면 한국주둔 미 군사사절단 단장 로버트 장군은 <5백 명 이상의 미국 군사교관들을 가지고 북한을 공격하기 위하여 남한군을 열심히 훈련시키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표현 하였다.
 
≪1949년 10월 육군사령부에서 열린 사단장회의에서 로버트는 확실히 38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많은 공격은 나의 명령에 의하여 수행되었으며 또한 앞으로도 더 많은 공격이 수행될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 부대는 제 마음대로 공격하고 아무러한 성과도 없이 막대한 양의 탄약을 써버렸으며 게다가 치명적인 손해를 입었다. 앞으로는 38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국방군의 진공은 오직 미 군사절단의 명령에 의하여서만 수행되어야 한다. 라고 말하였다.≫ 일본도서 ≪미국은 패하였다≫, 14쪽 에서
 
 
38도선 시찰을 끝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덜레스는 6월 18일 이승만에게 <북조선에게 먼저 침입했다는 선전과 동시에 북조선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하라.>고 언명하였다. 일본도서 ≪미국은 패하였다. 16쪽≫
 
6월 20일 덜레스는 이승만에게 보낸 서한에서 남한에 부과된 역할은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지르기 위한 일을 조작해 내는데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위대한 사건 가운데서 당신의 나라가 맡아야 할 결정적인 역할에 대하여 나는 지극히 중대한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고 하였다. 미국도서 ≪한국전쟁은 누가 일으켰는가≫ 일문판, 41
 
1950년 6월 26일부 아사히신문에 다음과 같은 보도가 게재되었다. 한국군은 23일 밤10시 돌연히 북조선 군 진지에 맹렬한 포 사격을 시작하여 24일 오전 4시까지 105미리 포와 81미리 포 204발을 발사하였다. 계속하여 24일 오후 12시 25분부터 6시 30분까지 300발을 쏘았으며 세 번째는 25일 아침 6시부터 10시까지 사이에 200발을 북한군 진지에 쏘았다.
한국전쟁은 사실상 남으로부터의 도발로써 시작 되었다. - ≪교도통신≫ 1975년 8월 25일 북한군이 남한군으로부터 대대적인 불의의 공격을 받고 38도선 전선에서 2-3키로 미터 후퇴하였다가 반격으로 넘어갔다. 미국도서 ≪아메리카 현대사≫ 일문판, 160
 
남한이 옹진반도를 먼저 공격하고 북한이 반격할 때 일부러 계속 밀려 국제여론을 환기시킨 다음 만주지역까지 점령하려는 것이 미국의 의도이다. ≪중앙일보≫1989년6월23일
 
북한은 무려 천 회 공격에도 남침을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 발발을 위해서는 남한 군이 중화기까지 동원해서 대대적인 공격을 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었다.
 
대대적인 공격을 하도록 이승만과 일당들에게 단숨에 북한으로 밀고 올라가 통일 하자고 하였다. 이 말이 시나리오에 따른 전쟁 발발을 시키는 말인 줄도 모르고 이승만은 말 그대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게 될 줄로 알았다. 미국이 이승만을 어떻게 철저히 속였는지는 이승만이 가지고 있던 미국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전쟁이 개시 된지 3일만에 인민군대에 의하여 서울이 함락되면서 리승만의 집무실을 비롯한 남조선《정부》와 군부의 기밀실에서 극비자료들이 인민군대에 의하여 압수되게 되었다.
 
1950년6월20일 면밀한 작전계획에 따라 덜레스가 이남의 외무부장관에게 이북 침공을 지시한 내용의 문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리승만《정부》는 극비문건을 하나도 처리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인민군대한테 압수당하였다. 그것은 당시 리승만이 미군을 믿고 허장성세하여 북침전쟁을 개시하면 파죽지세로 북진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지 인민군대의 반공격에 의하여 도망칠 수도 있다는 것을 전혀 예견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에 계속…)
 
2013년 6월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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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탄님의 댓글

빙탄 작성일

한민족님 글 감사히 봅니다.
연재 3을 기다리는데 언제쯤 나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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