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로 소환된 198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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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와 이대 등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국정원 개입 사태에 대한 규탄 선언을 하고 나선 걸 보았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아쉽기도 합니다. 과거 우리 또래가 대학생이었을 때 사회에서 변화를 선도했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요즘 학생들의 모습에선 그때 보았던 패기가 사라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늘 변화의 전위였고 변혁의 선진이었습니다. 사실, 다시 생각해보면 이 사회를 이렇게 무한경쟁사회로 만들어 버린 신자유주의의 폐해이기도 하고, 낭만이라는 것 조차도 가질 여유가 없이 경쟁사회로 내몰려버리는 지금 학생들의 현실이 반영된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속의 6월은 결국 6.29라는 이름으로 그 승리의 기억을 되새기게 해 줍니다. 1987년 1월 박종철 열사의 산화 이후, 그해 6월 말까지 대한민국을 반년동안 달궜던 이 혁명의 기간은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반민주 세력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뜻깊은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의미를 갖고 있는 대한민국의 6월입니다. 그때까지 동족상잔의 아픈 기억,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념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른 채 전장에 내몰려 동포들이 같은 동포들을 서로 죽인 그 아픔의 기억이 더 큰 한국전쟁 발발일이 어떻게든 미화되고 기념일화되어 부끄럽고 아픈 역사를 조망하기보다는 집권세력의 권력강화의 수단으로 쓰여왔지만, 1987년 이후부터 6월은 그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그것은 우리 역사 안에서 정의가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1960년 4.19 혁명 이후로 처음 보여준 사건임과 동시에, 우리 민중의 역량, 그리고 그 안에 녹아 있는 민주주의의 신념을 그대로 보여준 새로운 계기였습니다.
그런데, 역사는 때로 이렇게 뒤로 후퇴하기도 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신자유주의에의 편승은 김영삼 집권 말기엔 IMF 사태라는 이름으로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했고, 이후 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던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에서의 정책들 중 일부는 이 신자유주의가 갖고 온 가장 큰 폐해라 할 수 있는 부의 양극화를 초래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국민들에게 삶의 가장 큰 가치를 물질적인 부의 축적이라고 호도하는 결과를 낳았고, 그것은 이명박 정권 창출의 기본 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 말할 필요 없이 이명박 정권 시대의 역사 반동은 대한민국을 1987년 이전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시도였고, 그것은 어느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박근혜의 대선 당선은 5공세력들의 귀환이라는 현실을 가져왔고 그것은 당연히 그 시대에 저지른 과오들에 대한 민주정부 10년에 대한 평가를 오도하려는 저들의 다양한 방식의 반동회귀 -예를 들어 뉴라이트 교과서의 검정통과라던지- 를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히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습니다. 민주주의 이념의 기본인 삼권분립의 정신을 건드린 것입니다. 표피만이라도 '민주주의'를 말하는 저 세력들에게 솔직히 이런 것들은 무시하고 싶을 겁니다. 아직도 제왕의 시대에 살고 싶어하는, '왕'을 중심으로 자기 이익을 철저히 지키고자 하는 '봉신'들과 그 추종세력들이 똘똘 뭉쳐 절대왕권을 행사하고 싶어하는, 이 21세기에 아직도 봉건시대의 마인드로 살고 있는 저들에게 삼권분립의 민주주의란 사실 집어 치우고 싶은 불편한 짐이겠지요. 행정부의 기관이 선거중립의 의무를 어기고 선거과정에 개입한 것이 계속 드러난 것은 결국 민중의 불만의 폭발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인 삼권분립은 건드린 것은 저들의 큰 실수였습니다. 당장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불만을 불러왔지요. 미국의 대표신문인 뉴욕타임즈가 한국의 선거 과정에서 국정원이 개입한 것을 꽤 비중있게 보도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물론 저들에겐 이런 '부도덕적인'면을 강조해서 한국정부에 압박을 가하고 미국정부가 '우리가 꼭 너희 편인 것만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줘서 한국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뜯어가려는 속셈도 분명 숨어 있겠습니다만, '미국식 민주주의의 본령'을 훼손한 것에 대해서(혹은 그걸 멍청하게 걸린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겠지요.
그러나, 바로 그 흔들린 민주주의의 근간 때문에, 지금 6월은 뒤늦게 기지개를 켜고 26년전의 그 모습을 다시 보여주려 하는 듯 합니다. 그들이 아무리 사람들을 생존에만 목매달도록 만들고자 했어도, 또 대학생들은 취업에만 매달리게 만들려 했어도, 그 쌓인 분노 자체를 없앨 수는 없는 겁니다. 결국 사회적인 모순은 내적 불만의 축적을 불러오고, 그것은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분노의 성난 파도가 되어 사회를 다시 바꾸게 될 것입니다. 이 분노를 잠재울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부정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고 그것은 '이명박근혜'라고 통칭되어 불리울 수 있는 '세력'들이 단죄받는 형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학생들이 나서고, 표창원 교수를 중심으로 한 시민운동이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민주주의의 근본정신 훼손에 관한 겁니다. 21세기의 한국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지만, 이게 현실이고, 이 현실은 결국 1987년을 21세기에 다시 소환한 셈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무튼 길게 이야기했지만 결론은 이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8대 대선은, 무효입니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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