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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93]북《계몽기 가요》통해 애국심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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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
댓글 0건 조회 7,447회 작성일 13-06-20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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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93]북《계몽기 가요》통해 애국심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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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준무 뉴욕 우륵교향악단 단장겸 지휘자는 민족통신 연재글 93번째에는 1920~30년대에 유행했던 《계몽기 가요》를 해설하면서  계몽기가요가 확대 보급되었던《카프(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시기부터 해방 전까지 사이에 공백이 생긴 기간에 나온 노래들을 다시 부르게 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음악정책과 함께 그 시대의 가요들에 대해 해설한다. 전문을 여기에 게재한다.[민족통신 편실]
 
[연재-93] 북 《계몽기 가요》통해 애국심 반영
 
몇 년 전 사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을 성과적으로 마무리한 재미예술단일행은 축전기간 동안 내내 수고를 해준 관현악단 수석주자들을 초청해 조촐한 자리를 마련하였다. 우리는 이분들과 어우러져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면서 그사이 공연을 하면서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도 하고 앞으로 있을 축전에 관한 의견도 나누고 싶었다.
우리는 관현악단 단원들을 위해 좀더 아늑하고 품위가 있는 곳으로 장소를 정했다. 우리가 정한 식당은 미국의 고급식당처럼 깨끗하였으며 접대원(웨이터)들의 봉사하는 솜씨도 세련된 이름있는 식당이었다. 식탁 위에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대동강맥주와 맛이 부드럽고 목을 축이기에도 좋은 송악소주가 풍성하게 차려놓은 식탁을 더 아름답게 해주고 있었다.
짧은 리허설로 좋은 공연성과를 올리기 위해, 긴장했던 오케스트라단원들과 재미예술단 성원들은 그사이 무대에서 쌓인 스트레스 털어버리려고 작심이라도 한 듯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분위기가 점차 흥겨운 정취에 젖어 들게 되자, 너도나도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나는 노래를 부르는 그들의 모습에서 평화를 사랑하며 낙천적으로 살아가는 우리민족의 따뜻한 정을 느낄 수가 있었다.
기악을 전문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모임인데도 모두다 노래 한 곡쯤은 성악가들 못지 않게 부르는 것 같았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들은 예전에는 미처 들어보지 못했던 동무생각, 눈물 젖은 두만강, 찔레꽃 흘러간 노래들이었다. 어떻게 해서 이 흘러간 노래들이 다른 곳도 아닌 평양에서 민중들이 좋아하는 노래로 되었는지 그 사연이 궁금하였다.
흘러간 노래라고도 부르는계몽기가요 대한 그 궁금한 사연들을 알아볼까 한다.
계몽기가요와 계몽가요
1920년대와 1930년대 그리고 해방 전까지의 우리나라 음악은 다른 문학예술분야와 마찬가지로 일제식민통치하 암흑기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불렀던 학도가, 금주가, 문맹퇴치가 등 계몽가요보다 오늘은 계몽가요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다행히도 찔레꽃타향살이눈물젖은 두만강등 그 시대를 원망하며 불렀던 한 많은 노래들이 오늘에 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음악사적 견지에서 볼 때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계몽기가요에 대한 민중들의 가치인식이 일반적으로 부족한데다가 음악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계몽기가요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어서 계몽기가요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편향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실태를 파악한 김정일위원장은 계몽기가요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아주기 위해 2007 3월 하순에 두 차례에 걸쳐 당중앙위원화와 문학예술부문 책임일군들을 불러서 계몽기가요와 계몽가요에 대한 명백한 인식을 가지도록 해 주었다.
김정일위원장은 계몽기가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하였다.
《계몽기가요는 1920년대부터 해방 전까지의 시기에 나온 진보적인 노래들입니다. 계몽기가요는 나라없고 돈없고 부모처자 잃은 눈물겨운 처지를 한탄하며 지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계몽기가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지 못하고 해방이 된 뒤에도 계몽기가요를 퇴폐적인 유행가라고 경멸하며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대해 김정일위원장은 아직도 일부 사람들이 덮어놓고 계몽기가요를 부르지 못하게 하는데 그것은 옳지 못한 처사라고 하면서 계몽기가요를 무시하는 편협한 태도는 자기민족이 창조한 문화유산을 무시하는 행동이며 주체성과 민족성이 결여된 편협한 태도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한때 일부 사람들이 해방 전, 일제식민지통치시기에 나온 노래가운데서 계몽기가요는 인정하지 않고 혁명가요만을 고집한 적이 있었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 하였다. 김정일위원장의 담화를 경청하던 일군들은 지난 시기 자기들이 계몽기가요가 무슨 반동노래나 되었던 것처럼 취급했던 과오를 자책하며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고 한다.
김정일위원장은 일군들을 둘러보며《계몽기가요는 나라를 빼앗긴 우리 인민들의 눈물겨운 처지와 민족적 울분을 반영한 노래이며 일제침략자들에 대한 항거의 감정을 반영한 노래입니다라고 하면서 계몽기가요를 몇 개의 주제로 나누어서 그 대표적인 노래들의 제목을 지적해 주었다.
l  빼앗긴 조국과 떠나온 고향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담은노래
고향의 봄, 고향하늘, 찔레꽃, 타향살이, 황성옛터
 
l  조국의 아름다운 산천경개나 명승고적을 결부시켜 조국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담은 노래
조선타령, 조선팔경가, 조선찬가
 
l  조국해방에 대한 념원과 확신을 담은 노래
봉선화, 눈물젖은 두만강
 
l  어린이들의 동심세계를 통하여 해방의 날을 학수고대하는 인민들의 심정을 담은 노래
그리운 강남, 반달
 
l  항일무장투쟁의 승리로 반드시 도래할 조국해방에 대한 확신을 담은 노래
감격시대, 락화유수
 
l  일제를 쳐부시고 빼앗긴 조국을 찾으려는 굳센 의지를 그대로 표현한 노래
압록강의 노래
 
계몽기가요는 우리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
계몽기가요는 음악형상에서 전통적인 민족선율을 바탕으로 한 현대적인 가요음악에 종류와 형식을 새롭게 창조함으로써 우리나라 가요예술의 발전에도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계몽기가요는 일제식민지통치시기의 특수한 사회적 환경에서 나온 노래들이기 때문에 주체적인 입장에서 보는 전문가들의 눈에는 이 노래들이 민중을 반일 투쟁으로 불러일으키고 또 사회정치적으로 우리민족 앞에 절박하게 놓여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제한성에 비판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회적 제한성과 노래가 만들어져 나온 시대적 배경을 이북의 문학예술분야의 일군들의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김정일위원장은 계몽기가요가 우리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된다고 분명하게 지적해 주었다.
김정일위원장은역사적 고찰이 없이 계몽기가요를 유행가라고 천시하면서 부르지 못하게 한다면 우리나라 음악역사에서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음악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는 것으로 되며 특히 계몽기가요가 확대 보급되었던《카프(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시기부터 해방 전까지 사이에 공백이 생기게 됩니다그래서 김일성주석의 뜻을 받은 김정일위원장은 이 노래들을 다시 부르게 하여 그 공백을 메꾸도록 하였던 것이다.
음악의 거장인 김정일위원장의 현실을 과학적으로 통찰하고 옳은 판단이 있었기에 오늘 계몽기 가요는 찬란한 빛을 뿌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계몽기에 활약한 음악예술인들
김정일위원장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품에 끌어주고 뜨거운 사랑을 안겨주는 은혜로운 품에서 계몽기가요와 더불어 한 생을 살아온 음악가들도 있다.
 
김정일위원장은 담화에서 《계몽기가요의 창작보급에 기여한 창작가, 예술인들에 대해서도 정확히 평가하여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계몽기가요 창작가들 중에서 조령출, 리면상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지만 해방 후 이남에서 넘어온《번지없는주막》의 박영호나 《그리운 강남》, 《작별》과 같이 사람들 속에 널리 알려진 계몽기가요들을 많이 작곡한 안기영선생도 공화국의 품에 안긴 후 평양음악대학(당시)에서 교원으로 활동한 오랜 음악가인데 후대들에게 이들의 창작활동도 잘 알려주어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계몽기의 예술인으로 1913년에 출생하여 해방 후에 이북으로 넘어간 극작가이고 시인인 조령출을 빼놓을 수가 없다. 1982 김일성상을 수상한 그는, 1933년 첫 작품인 《서울노래》의 가사가 《동아일보》 현상모집에서 1등으로 당선되면서부터 문단에 알려진 조령출은 젊은 시절부터 재능있는 시인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진주라 천리길》, 《서귀포 칠십리》, 《락화류수》, 《꼴망태목동》, 《집없는 천사》, 《울며 헤진 부산항》 등 우리 겨레가 널리 부르던 많은 가사들을 써낸 시인이 조령출이라는 사실을 아는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진정한 예술을 창작하기 위해서도, 인간의 참된 삶을 누리기 위해서도 오래 전부터 흠모하여오던 북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을 굳힌 그는 1948년에 드디어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게 되였다.
 
김일성주석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참된 예술을 창작하려는 조령출의 소원을 헤아려보고 그가 애국의 길에서 자기의 희망과 재능을 활짝 꽃피우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었다.
 
1949 12월 어느 날 조령출이 창작한 가극 《꽃신》을 들어보고 난 김일성주석은 작품이 아주 좋다고 거듭 치하하며 앞으로 나라와 인민을 위한 작가가 되라고 격려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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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따뜻한 손길이 있었기에 조령출은 조국해방전쟁시기 《조국보위의 노래》, 《압록강 2천리》, 《얼룩소야 어서 가자》 등을 창작하여 군대와 인민을 조국수호의 성전에로 힘있게 불러일으켰고 전후 복구건설과 사회주의건설을 위한 벅찬 투쟁이 벌어지고 있던 시기에는 《조국산천에 해 둥실 떠온다》, 《모란봉》, 《해당화》와 같은 노래들과 민족가극 《금강산팔선녀》, 음악무용극 《밝은 태양아래》 등 많은 우수한 작품들을 창작하여 인민들을 부강한 조국건설에로 힘있게 추동하는데 크게 공헌할 수 있었다.
 
한편 김정일위원장은 주석님의 사랑과 믿음속에 자기의 재능을 활짝 꽃피워나가는 조령출이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이하도록 이끌어주었다. 1968 6월초 조령출을 만나 혁명가극창조에서 나서는 이론실천적 문제들에 대하여 하나하나 밝혀주고 그의 재능을 귀중히 생각하여 혁명가극 《한 자위단원의 운명》, 《밀림아 이야기하라》, 《금강산의 노래》, 《밝은 태양아래에서》 등 여러 가극대본과 노래창작을 맡겨 주었다.
 
김정일위원장의 극진한 관심 속에서 지도를 받으며 작품을 창작해온 조령출은 참으로 축복받은 행복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김위원장은 조령출선생의 창작사업을 극진히 보살펴주고도 주체71(1982) 4월에는 그에게 《김일성상》을 수여하도록 최대의 영광을 안겨주었고 그 이듬해에는 그에게 몸소 은정어린 70돐 생일상까지 차려주었다.
김정일위원장은 근로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재능 있는 작가로서 그가 조국과 민족의 융성번영을 위한 길에서 세운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그의 유해를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계몽기가요를 우리 민족의 귀중한 음악유산으로 빛내주는 김정일위원장의 크나큰 사랑과 문화예술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빛내 이려는 김정은원수의 확고한 문화예술정책으로 계몽기가요의 창작가들은 세기를 지난 오늘에도, 그들이 창작하여 민족음악사에 공헌한 많은 노래들은 오늘뿐만이 아니고, 앞으로도 후대들의 사랑을 받으며 오래도록 불리워 질 것이다
 
*계몽기 가요 감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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