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고난의 행군”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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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학원 박사(95)는 김일성주석의 서거(1912.4.15~1994.7.8) 19주년을 맞는 시기에 북부조국에 관련된 글을 보냈다. 그는 백세를 바라보는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민족통신에 기고문을 보내면서 어려운 환경에서도 초강대국과 당당하게 맞서 대결해 온 북조선의 입장과 자세는 국제사회에서 귀감이 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그 힘이 어디에서 분출되어 왔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며 '고난의 행군' 역사를 되돌아 보았다고 술회한다. 그의 기고문을 여기에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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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님의 댓글
고슴도치 작성일
이어서~~~
이 행군은 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국경지대로 진취시키고 대부대 유동작전을 하면서 대중정치공작을 활성화시켜 인민의 기세를 높이고 파괴된 혁명조직을 재건하던 방침을 세우던 그런 시기였다.
이와같은 역사적 행군에 접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에 대해서 일본제국주의 군대는 김일성 혁명부대를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했었다. 영하 40도의 혹한 추위와 계속적인 과도한 전투속에서 식량의 결핍과 모진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속에서 김일성 주석은 적을 격파시켰고 행군을 지속하여 목적지를 돌파할 수 있었다. 일주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의 목적지가 1백여일 걸릴 정도로 일제와의 투쟁은 그야말로 난관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 역경을 이겨내고 승리의 행군을 할 수 있었다.
이런 ‘고안의 행군’과정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은 하나의 사상의지로 단결하여 불패의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당시의 역경을 그후에 ‘고난의 행군’으로하여 어떠한 역경에서도 단결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교훈을 정책운영의 본보기로 삼은 것이 북조선 최고지도자의 정치철학이었고, 정치노선을 달성하는 마음의 자세였다.
그 정치노선을 1995년부터 시작된 제2차역경에서도 ‘고난의 행군’정신으로 삼고 극복하는데 본보기로 삼았던 것이 북조선의 발자취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김일성주석께서 1932년 4월25일에 안동현 소사하에서 조선혁명군 대원과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 소속원들을 중심으로, 그리고 진보적 노동자와 농민, 청년학생으로 묶어 창건하게 된 무력부대이다. 그후 1934년 3월에 통일적 지휘를 강화하는 조직체계를 확립하고,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되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일본제국주의자를 반대하고 조국과 인민을 사랑하는 노동자, 농민, 그리고 청년학생으로 조직되었다. 인민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혁명적 무력이었다. 그 목적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파괴하고 민족적 독립과 사회혁명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김일성주석의 지휘밑에서 15성상을 항일투쟁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자들을 격멸하고 조선해방의 역사적 위업을 이룩할 수 있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두만강 연안에 해방지구를 설립하고 활약했다. 유격근거지는 무장투쟁의 군사적 근거지였고, 후방기지의 성격을 가진 동시에 전반적 조선혁명의 근거지였고, 혁명의 근거지로 중요한 곳이였다.
이 해방지구에서는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여기에는 당을 비롯하여 청년회, 농민협회, 반제동맹, 혁명호제회, 부녀회, 아동반 등 혁명조직체와 소년선봉대 등 여러 단체들이 있었다. 여러단체들이 많은 인민들로 구성되였다. 조직들의 활동은 유격대의 병영, 학교, 출판업 등 각양각색이였다.
해방지구는 민주주의 제도로 시정되였다. 근거지의 모든 공민들은 조선역사를 비롯해서 민주주의, 자유와 평등, 선거권과 피선거권에 대해서 교육을 받고 있었다. 물론일본제국주의와 친일파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해서 농민들에게 무상분배했고, 8시간 노동제, 남녀동등권, 무료의무교육제 및 무료 치료제등을 실시했다.
이처럼 김일성 주석의 초기혁명시기에도 민주주의 제도를 실천하여 앞으로 해방조선의 모델로 삼았었다. ‘고난의 행군’은바로 이 시대에 창설되었고, 그 정신을 오늘도 북조선 사회에서는 중요한 사상의 본보기로 계승하여 실천하고 있다. 이 ‘고난의 행군’을본보기로 삼고 국정운영에 적용하는 자세는 앞으로 강성대국을 건설해 가는 노정에서도 필요할 것으로 본다. 이본보기는 북조선의 전통이 되였기 때문에 주체의 강성대국으로 가는 노정에서도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끝)
2013년 7월5일
*선우학원 박사에 대한 안부 전화번호:
323-267-9116 (오후2시에서 4시사이가 좋은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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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인터네트 언론 '우리민족끼리'가 2013년 7월7일자에 보도한 김일성 주석에 관한 글:
인민을 위한 144만 5천여리
144만 5천여리,
백두산에서 한나산까지 301번 왕복한것과도 같고 지구를 14바퀴반이나 돌수 있는 거리와도 같은 이 수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해방직후부터 위대한 혁명생애의 마지막시기까지 이어가신 현지지도거리이다.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생애를 뜨거운 추억속에 돌이켜보게 하는 이 수자들을 불러보며 우리 겨레는 한평생 조국의 부강번영과 인민의 행복을 위한 현지지도의 길을 끊임없이 걷고걸으신 수령님의 불멸의 로고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언제 한번 편히 쉬지 못하시고 팔순이 넘은 고령에도 공장과 농촌을 찾아 끊임없는 현지지도의 길에 계시였다. 세상에 우리 수령님처럼 혁명을 위하여, 인민을 위하여 헌신하며 생애의 마지막시기까지 초인간적인 정력으로 모든 사업을 깨끗이 마무리하고 집무실에서 순직한 위대한 혁명가는 없었다.》
현지지도는 어버이수령님의 특유의 정치방식이였다.
인민들과 함께 있을 때가 제일 기쁘다고 하시며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언제나 인민들속으로 찾아가시였다. 조국의 최북단으로부터 서해기슭의 자그마한 외진섬과 연백벌에 이르기까지 수령님의 현지지도자욱이 새겨지지 않은 곳이란 없다.
수령님께서 끊임없이 이어가신 현지지도의 자욱자욱마다에는 인민을 위한 사랑의 이야기들이 수많이 새겨졌다.
인민들이 있는 곳이라면 다 가보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진창에 빠진 승용차를 한치한치 미시며 북방의 어느 산촌을 찾으신 이야기며 한낮이 기울 때까지 여러 농장포전들을 돌아보시고 렬차에서 풋강냉이로 때늦은 점심식사를 하신 이야기, 광부들이 일하는 막장에 들어가지 않을바에야 무엇하러 광산에 왔겠느냐고 하시면서 석수가 떨어지고 바닥이 질벅한 막장에까지 들어가시여 광부들을 만나신 이야기…
어느해인가는 한해의 일요일들중에서 단 하루의 휴식도 없이 현지지도의 길을 걸으시였고 또 어느 일요일에는 온종일 도와 도의 지경을 넘으시며 10여개 단위에 현지지도의 자욱을 새기시였다.
주체59(1970)년 5월 덕천지구를 현지지도하실 때에는 평양시의 한 일군에게 그 고장의 색다른 김치를 수도시민들도 맛볼수 있게 대책을 세우도록 하시였고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시기인 주체83(1994)년 6월에는 30℃이상의 무더위속에서 여러 농촌을 현지지도하시였다.
주체83(1994)년 7월 6일 경제부문 책임일군협의회를 지도하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자신의 한평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나는 지금까지 인민을 믿고 인민을 위하여 투쟁하였으며 인민들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나의 한생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바쳐온 한생이였으며 인민들과 함께 투쟁해온 한생이였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언제나 우리 인민들과 함께 있을것입니다. …
정녕 어버이수령님은 한평생 인민을 한품에 안으시고 오로지 인민을 위해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며 그 길에서 더없는 보람과 락을 찾으신 자애로운 인민의 어버이이시였다.
하기에 우리 인민은 물론 세계 진보적인민들도 이민위천을 좌우명으로 삼으시고 인민에 대한 사랑의 력사를 수놓으신 어버이수령님의 한평생에 대하여 오늘도 끝없이 격찬하고있는것이다.
언제나 현지지도의 길에 계시며 한평생을 오로지 조국과 인민을 위해 다 바치신 위대한 수령님은 우리 인민과 온 겨레의 마음속에 자애로운 어버이의 모습으로, 영원한 태양의 모습으로 영생하신다.
본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