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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본 평결과 해묵은 인종갈등, 그리고 배은망덕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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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종상
댓글 0건 조회 1,610회 작성일 13-07-23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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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애초에 이민으로 이뤄진 나라입니다. 원주민들을 짓밟고 살해하고 나서 그들의 시신 위에 건설한 국가라고 할 수 있지요. 미국의 독립운동이라는 것도 실지로 원주민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절대 성공하지 못했을 과제였습니다. 그리고 보면 미국의 역사는 수탈의 역사인 동시에 배은망덕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이런 미국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커다란 희생자들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흑인들이죠. 미국 남부의 플랜테이션이라 불리우는 대농장에서 면화를 재배하는 사업은 굉장히 노동집약적이었고, 애초에 백인계, 특히 천주교를 믿는 국가들 출신의 백인 초기 이민자들- 프로테스탄트인 퓨리탄(청교도)으로 시작된 미국 이민 역사에 맞게, 미국 주류는 이들이 주름잡고 있었고, 유럽에서는 이들을 '대놓고' 탄압하던 가톨릭 세력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에선 꽤 박해를 받았습니다. 아이리시나 이탈리안들은 대놓고 멸시를 받았죠 - 이 맡았던 허드렛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비교적 쉽게 '신분의 사다리'를 탈 수 있었고, 쉽게 농장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런데 흑인 노예들은 일단 '구입'하면 평생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었고, 임금이 나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증식이 가능한 재산'이었습니다.

 

이 노예 노동에 대해 말이 많았습니다. 해리엣 스토우 부인의 '엉클 탐즈 캐빈'에서 묘사된 것처럼 비참한 삶을 사는 흑인들도 많았고, 반대로 인간적인 주인을 만나 사람 대접을 받으며 사는 노예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문에 연재되던 이 소설이 흑인노예의 인권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켰고 나아가 전쟁의 원인이 됐다... 는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오지만, 그것은 전설일 뿐이고 당시 북부가 공업회되면서 필요했던 저렴한 노동력의 필요성과, 노예무역 자체를 두고 북부의 자본가들과 남부의 대농장주들의 경제적 이해가 첨예하게 다르다는 사실이 미국 연방의 근간을 송두리째 흔드는 역사적인 전쟁을 촉발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겁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미국인들의 잔인성을 두고두고 보여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요. 단일 전쟁에서, 그것도 내전을 통해, 가장 짧은 시간안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전쟁으로 역사에 기록됐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요즘 미국은 이 해묵은 인종 갈등이 다시 표면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트레이본 마틴이라는 마이애미에 거주하는 한 10대 청년이 조지 짐머먼이라는 백인에게 사살당했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면 미국에서 흔히 있는 총기사고중 하나로 보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청년 마틴은 흑인이고, 비무장이었고, 총격을 가한 짐머먼은 백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을 끼얹은 것이 최근 짐머먼에 대한 평결이었습니다. 배심원들이 전원일치로 정당방위를 인정하고 무죄를 선언한 거지요.

 

이 사태는 지금 미국을 들끓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오랜 '뜨거운 감자'가 이 사건으로 다시 전면에 등장한 거지요. 게다가 1백개가 넘는 미국의 도시에서 "트레이본에게 정의를! 정당방위법의 개혁을!"이라는 피켓을 들고 사람들이 시위에 참가했습니다. 가수 비욘세 부부도 이 시위에 참가했다는 뉴스가 전해질 정도였습니다. 여기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치유와 갈등 봉합을 위한 연설을 했는데, 여기서 "자신의 아들이 트레이본일 수도 있었다."라며 인종적인 유대감을 표시하고 "미국에 사는 흑인 남성이라면 백화점에서 누군가 따라오거나, 길을 걸을 때 차 문을 잠그는 소리를 듣는 등 불쾌한 경험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해서 논란을 증폭시키기도 했습니다.

 

제 '친구'인 조지앤 할머니는 "생각해 봐. 조셉. 만일 이게 백인이 백인을 쐈다거나, 흑인이 흑인을 쐈다거나, 아니면 가해자가 흑인이었다면 이만큼 큰 이슈가 됐을까? 이건 아직도 이 나라에 갈등이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정의가 제대로 실행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야"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이 사건에 대통령까지 등장해 말을 거든 것 역시 그만큼 사회적 갈등이 심하고, 이를 얼른 봉합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라는 것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엔 또 다른 측면도 있는 듯 합니다.

 

오바마가 추진해 왔던 몇 가지 개혁 정책 중에서 굵직한 것으로는 이민법, 의료보험, 그리고 총기 관련 규제가 있었습니다. 이중 총기 관련법 수정안은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의 반발과 총기 회사들의 로비 등으로 지난 4월 부결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으로서 이것은 집권 내내 다시 끌고가야 할 문제이고, 자신이 정치적 치적으로 남기고자 하는 개인적인 욕심이 있었던 문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번 트레이본 사건은 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고 총기 규제 문제를 다시 표면으로 끌어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계산도 분명히 섰을 것이고, 논란의 여지가 될 수 있는 인종관련 발언의 수위가 높았던 것도 이런 자신의 정책에 대한 지지를 국민의 내면에 대고 호소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역시 미국에서 문제의 해결은 이 인종차별의 직접적 뿌리가 되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과 기회의 불평등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과거보다는 좋아졌다고 하지만, 미국 내에 존재하는 이 불평등의 객관적 데이터들은 미국 안에서 흑인들이 아직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살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연방노동청, 내셔널 어번 리그, 연방통계청 등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의 백인 가정의 평균 연수입이 5만 5천달러, 흑인 가정은 3만 3천 달러입니다. 실업률은 백인이 7% 정도지만 흑인의 경우는 15%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배를 넘기는 실업률이지요.

 

이런 것 때문에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백인들 중 16%는 심각한 인종차별이 있다고 믿습니다. 흑인들의 비율은 무려 56% 입니다. 교육은 그런 것을 보여주는 지표일 수 있겠지요. 18-24세 미국인들 가운데 흑인의 대학 진학률은 36%, 백인은 45%입니다. 미국인들 중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13% 정도입니다. 히스패닉계가 늘어나면서 인종비율은 줄어들고 있죠. 그러나 미국 전체의 재소자 중에서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무려 37% 입니다. 이들이 사회에 나와 직업을 가졌을 때, 백인 전과자에 비해 흑인 전과자는 봉급 인상률이 21% 정도 쳐집니다.

 

실제로 이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에 역행되지 않는가 싶은 부분도 있습니다. 미국 내 11개주(주로 남부, 당연히)에서는 흑인 인구 중 10%가 투표를 아예 못합니다. 중범죄 혐의로 공민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불평등한 처벌이 중범죄자를 양산한다는 겁니다. 흑인들 중 마약 사용자의 비율은 13% 정도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마약 관련 범죄로 인해 체포된 전력이 있는 사람들은 38% 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흑인들의 종교 귀의율은 높습니다. 이 불평등한 사회에서 기댈 곳이 종교밖에 없다는 뜻일까요? 슬픔을 '흥'으로 승화시킨 흑인 영가 같은 것들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거겠지요. 흑인들 중 79%가 종교가 자신의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느끼는 반면, 백인들 중에서는 56%가 종교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유럽에 비해서는 종교에 대한 의존도랄까, 그런 것이 상당히 높지요.

 

참으로 오랫동안, 흑인들은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어 왔고, 그들이 원하지 않았던 고향으로부터의 강제 이주로 인해 벌어진 참극들은 상처가 되어 쌓여 왔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이렇게 당하며 살아온 흑인들이나, 혹은 '쿨리'라는 이름으로 수입되어 역시 비참한 환경 속에서 미국의 동서 횡단 철도를 건설하며 나중에 추방의 위기에 몰리자 이를 온몸으로 저항하며 날아와 작렬하는 대포에 맞아가며 산화했던 중국인들 덕분에 그 뒤에 이민온 사람들이 비교적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겁니다.

 

만일 제가 시애틀이 아니라 앨라배마나 아칸소의 소도시에서 이민생활을 시작했다고 하면, 아니, 그렇게 멀리까지 않아도 바로 옆 주인 아이다호에서 이민생활을 했다면 지금과는 또 많이 달랐을 겁니다. 일찍이 중국인 노동자들이 철도를 완성하고 나서 추방 통보를 받고 분노해서 싸우며 피 흘렸던 역사가 아니었다면, 지금 시애틀은 이렇게 아시안들이 물려사는 도시, 미국 어느 도시보다도 아시아 문화의 향기가 많이 흐르는 도시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흑인들도 그런 면에서 이민의 선배들이고, 나중에 이민 온 사람으로서 그들의 투쟁과 그들이 맺은 과실을 우리가 나누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이 트레이본 사건으로 술렁거리는 미국을 보면서, 우리의 처지는 뭔가 다시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70년대부터 쿼터제의 혜택을 보면서 대량으로 '수입'된 이유가 실상은 미국의 인종정책에 있어서 백인 지배층이 뭔가 '버퍼'가 필요하다고 느꼈기에 한국 등 아시아 국가에 대량으로 문호를 열어 줬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물론 한국전쟁과 월남전쟁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전쟁은 미국으로의 아시아 인구 유입을 더 촉진시킨 면이 있고, 이 덕에 쿼터도 더 커진 것이긴 합니다만.

 

미국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 중 하나인 4.29 폭동 때 미국 언론들은 이것이 한-흑 갈등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로드니 킹이라는 흑인에 대한 유죄 평결에서 촉발된 이 폭동의 실체는 사실 극단적으로 양극회되어 버린 사회에서 터져나온 불만의 표출이었다고 봐야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한인 마켓 업주 두순자씨가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즈를 사살한 사건이 크게 불을 붙인 것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때 수많은 한인 마켓 업주들이 자신의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언론은 충분히 한흑갈등으로 몰아갈 '재료'를 갖고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보도를 했습니다. 그들에게 한인들은 백인과 흑인의 갈등 한 중간에서 이를 흡수시킬 '버퍼'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백인들에게는 간을 빼 줄 듯 친절하고, 흑인들은 의심과 경멸의 눈길로 바라보는 한인들, 꽤 많은 듯 합니다. 그리고 백인들의 눈엔, 우리도 유색 인종일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이민사도, 백인들처럼 배은망덕의 역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 스칩니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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