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과 부림사건, 그리고 한 인간이 변화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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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과 부림사건, 그리고 한 인간이 변화한다는 것
2014.01.08
노무현 대통령은 1994년 펴낸 저서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은 일을 “내 삶에서의 가장 큰 전환점”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돈 잘 벌던 변호사는 인권변호사, 재야운동가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노무현재단 사료편찬사업을 통해 수집한 부림사건 피해자들의 구술 증언과 기록으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습니다. 다음은 2013년 회원소식지 <사람 사는 세상>에 게재된 전문입니다.
노무현과 부림사건, 그리고 한 인간이 변화한다는 것
[사료이야기] “나도 정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고 싶다”…그렇게 새 길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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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에 대한 저항이 확산되고, 정권이 이에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특히 당시 반독재투쟁의 중심이었던 학생들을 용공혐의로 대거 구속함으로써 이들을 대중들과 격리시키기 위해 조작한 대표적인 용공사건으로 1981년 9월 부산에서 발생하였다. 부산의 학림사건이라는 의미에서 ‘부림’이라는 명칭이 붙었는데, 부산지역 민주인사들이 이적 표현물을 학습했다는 이유로 정부 전복집단으로 매도되어 총 22명이 구속되었고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다. 이들의 변호인단으로 노무현 변호사가 참여하였다. - <한국민주화운동사3> 197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한국민주주의연구소 엮음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1981년 9월과 10월, 이듬해 4월 세 차례에 걸쳐 구속됐다. 노무현 변호사는 이 사건의 변호인단으로 참여해 1차로 구속된 고호석, 송병곤 등의 변론을 맡았다.
나는 어쩌다보니 이 사건에 손대게 되었다. 당시 부산에서 지속적으로 인권운동을 한 변호사는 이흥록, 김광일 두 분밖에 없었다. 그런데 검사가 김광일 변호사까지도 사건에 엮어 넣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변호를 맡을 수가 없었다. 손이 모자란다는 하소연을 듣고만 있을 수 없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변호를 맡게 된 것이다. - 자서전 <운명이다> 77p
예기치 않은 변화의 시작
2차로 구속된 윤연희 씨는 이후 불구속 기소로 풀려나왔다. 실제 변호를 부탁하는 일은 윤연희 씨처럼 ‘밖’에 있는 사람의 몫이었다. 구속자 가족인 송세경의 부인 구성애 씨, 최준영의 부인 홍젬마 씨와 함께 부산 부민동의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을 직접 찾았다. 윤연희 씨의 말이다.
모르는 분을 보러가는 길이라 약간 겁이 났었죠. 그랬는데 선뜻 잘 왔다고 하시고, 먼저 악수를 청하면서 고생 많다고 격려도 하시고 해서 우리가 오히려 몸 둘 바를 몰랐어요. 제가 ‘우리는 국가보안법 사건인데, 가난해서 돈도 드릴 수 없다’고 했더니 잘 알고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그러시던 기억이 납니다. ‘걱정했는데 억수로 좋다’ 우리끼리 이렇게 안도하기도 했고요.
선의로 시작한 일이었으나 이후 재판과정은 노무현 변호사에게 예기치 않은 변화를 몰고 왔다. 자신이 변론을 맡은 구속자들과 만남부터 충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에 대한 구속이 1981년 9월에 시작됐다 뿐이지, 공안당국의 강제 연행은 이미 7월부터 있었다. 교도소로 넘겨지기까지 길게는 60여 일 동안 대공분실에 갇혀 무자비한 고문과 폭력에 내몰렸다. 오죽하면 1982년 6월 ‘부림사건 구속자 가족일동’ 명의로 낸 성명서 제목이 <통닭구이가 만든 공산주의자>였을까. 다음은 그 성명의 일부다.
… 밤낮도 없이 곡괭이 자루, 몽둥이로 때리며 구둣발로 온몸을 짓이겼고 벽에 기대어놓고 닥치는 대로 패면서 공산주의자임을 자백하도록 강요… 마치 통닭이 전기철봉에 매달리듯, 끈으로 손과 발을 묶은 후 손과 종아리 사이로 굵고 긴 몽둥이를 가로질러놓고는 공중에 매달아놓고 손, 발, 머리 등 닥치는 대로 때리고… 이 통닭구이로 발톱이 다 빠져 달아났고 온몸은 가지처럼 보랏빛으로 변색되어져 있었고 제대로 걷지도 못해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야 했답니다.
변호인 접견에서 노무현 변호사를 처음 만난 고호석 씨는 그러한 실상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직접 눈으로 확인시켰다.
저는 꼬박 36일을 대공분실에 감금당하면서 엄청난 고문과 폭력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가 교도소로 보내졌고 가족 면회와 변호인 접견이 허용되면서 기운을 좀 차렸지요. 그렇게 만난 사람이 노무현 변호사님이었습니다. 변호사님한테 ‘이번 사건은 엄청난 왜곡이고 사기다, 우린 진짜 개 맞듯이 맞았고 고문당했다’고 얘기했죠. 제가 ‘통닭구이’를 당하면서 발톱이 하나 죽어서 빠져버렸어요. ‘보자.’ 변호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양말을 벗었는데 발톱 자체가 없잖아요. 그런 걸 보면서 변호사님도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갑자기 나타난 눈엣가시
당시 검찰은 온갖 고문을 통해 ‘자술(自述)시킨’ 조서를 바탕으로 부림사건 구속자들이 불온서적을 읽으며 사회주의, 공산주의 실현을 도모했다고 주장했다. 검찰에서 거론한 불온서적이란 게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박현채 교수의 <민족경제론>,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셀리그만의 <경제사관의 제(諸)문제>같은 책이었다. 노무현 변호사가 직접 변론을 맡았던 송병곤 씨의 말이다.
접견에서 처음 만났을 때 솔직히 나는 변호사님이 이 방면에 대해 얼마나 알까 싶었어요. 그래서 ‘저는 변호사 필요 없습니다’는 말도 했었거든요. 그런데 이후 검찰 공소장에 나온 책에 대해 일일이 다 물어보시는 거예요. 어떤 책이냐, 무슨 내용이냐, 그런 걸 많이 물어보셨어요.
물어본 것만이 아니라, 노무현 변호사는 그 책을 하나하나 다 찾아 읽었다. 그러면서 공소사실의 터무니없음을 절감했다. 법정에서는 자신이 직접, 혹은 피해자들에게 진술 기회를 주면서 불온서적의 ‘실체’에 대해 또박또박 반박했다. 법정 밖에서는 수시로 변호인 접견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줬고,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로 찾아오는 구속자 가족들을 언제든 반갑게 맞이했다. 검찰에게 그런 노무현 변호사는 ‘갑자기 나타난’ 눈엣가시였다. 그리고 검찰은 그런 노무현 변호사의 열정에 기름을 부었다.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 된 이후 어떻게 권력을 유지해나가는지 알기나 하시오? 지금 부산에서 변호사 한두 명이 죽었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 될 줄 아시오?”
검사의 그 협박은 오히려 나의 투지에 불을 붙여놓았다. 그 일 이후 나는 감정적으로 굉장히 격앙된 상태에서 그 일을 진행했다. 대단히 정열적으로 그 사건에 매달렸다. - 저서 <여보, 나 좀 도와줘> 215p
불의에 솔직하게 반응하다
법정에서 노무현 변호사는, 그래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자신이 처음 실감한 국가권력의 폭력과 불의에 ‘솔직하게’ 반응했다. 재판과정에서 노무현 변호사를 처음 만난 사람들 모두 그런 그를 인상 깊게 기억했다. 윤연희 씨의 말이다.
재판에서 워낙 흥분도 많이 하셨어요. 불구속 기소됐지만 저도 피고인석에 앉았기 때문에 그때 이상록, 고호석, 김재규 씨 등등 구속 중인 선배들이 같이 있었거든요. 재판하러 가면 그 선배들이 뒤로 들어오면서 “야, 연희야. 저 변호사님 너무 흥분하시는데 괜찮겠나?”, “변호사님한테 나중에 나가서 성질 좀 죽이시라고 네가 말 좀 해라” 그러기도 했었죠. 그러면 저는 오히려 기분이 좋았어요. 열정적으로 해주시니까 그런 말이 나오는 거잖아요.
고호석 씨는 그런 노무현 변호사를 “철저히 우리 편이 돼줬다”고 설명했다.
노무현 변호사님은 재판을 시작하고부터는 우리와 한 편이었어요. 거의 공범 수준이 돼가지고 변론을 한 거지요. 그러다보면 우리는 비교적 차분한데 노 변호사님이 검사의 공소사실에 대해서, 또는 판사의 언급에 대해서 “어떻게 그게 말이 됩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이러면서 격앙돼서 큰 소리를 내기도 하고 그래서 판사한테 제지당하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열변을 토하다가 자기감정을 삭이지 못해서 고개를 푸욱 숙이고 잠시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그런 장면들도 있었어요.
1981년 10월, 2차로 구속됐던 장상훈 씨는 변호인단으로 참여한 노무현 변호사를 법정에서 처음 본 경우다. 장상훈 씨가 인상 깊게 기억하는 노무현 변호사의 변론의 초점은 ‘이 젊은 학생들은 공산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아니고 휴머니스트’라는 것이었다. 노무현 변호사는 ‘이들은 휴머니즘에 입각해 세상이 좀 더 공평해지고, 바르게 나아가게 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했던 것이고, 좋은 대학 나와서 나름대로 성공이 보장되어 있음에도 그 길을 포기한 것 또한 이들의 순수성, 희생정신을 보여주는 반증’이라는 기조로 이야기했다.
그렇게 변론하시다가 이런 말을 하셨어요. ‘자기희생적이고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살려고 하는 친구들 아닌가. 나도 정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고 싶다. 그런 이들을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 바르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다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니냐’고 말이죠.
예정된 패배, 그리고 그 후
세속의 변호사는 그렇게 함께 분노하고, 행동했다. 나중엔 피해자 가족들이 노무현 변호사 때문에 판사에게 밉보여서 형량을 더 많이 선고받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걱정한 만큼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이미 정해진 결론을 뒤엎을 수는 없었다. 검찰의 공소장 그대로 법원 판결문이 되던 시절이었다.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1심에서 징역 7년에서 3년, 2심에서는 징역 6년에서 1년6월까지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더러는 만기 출소로, 더러는 1983년 광복절 특별사면을 시작으로 그해 연말까지 모두 석방됐다. 그들 대부분이 감사인사를 하기 위해 출소 이후 노무현 변호사를 찾았다. 그렇게 다시 만난 노무현 변호사의 삶은 새로운 길로 향하고 있었다. 1982년 2월 집행유예로 풀려나온 장상훈 씨의 후일담이다.
출감하고 얼마 안 되어서였을 겁니다. 제 담당변호사는 아니었지만,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인사드리러 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다고 말씀드렸더니 위로도 많이 해주시고, 기죽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셨던 것 같아요. 재판 당시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분위기가 좀 올라왔어요. 그러니까 변호사님 성격대로 지나가는 말투 비슷하게 ‘아. 나도 마, 상훈 씨처럼 젊으면 길에 나가서 한판 붙어버리고 싶어’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웃고 말았는데, 1~2년 지나니까 부산에서 싸움나면 변호사님이 최고 앞장서신다는 얘기가 들려왔지요. ‘당신이 말씀하신대로 하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글/사료콘텐츠팀장 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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