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송환된 비전향장기수35명 애국열사릉에 안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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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시대에 송환된 63명은 2000년 9월 2일 오전 10시 판문점을 넘어 북녘으로 송환되었다. 그후 노약한 관계로 그리고 옥중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분은 63명중33명이고 2014년 2월말 현재 생존해 있는 분들은30명이다”고 밝힌 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은 “서거한 33명을 포함하여 리인모 선생과 2005년 남녘에서 서거하여 유해가 북으로 넘어간 정순택 선생을 합쳐 총35명은 모두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왔다”고 설명하고, 이어서 두번째 내용을 여기에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애국열사릉 묘지사진들 다음에 계속~)
북 송환된 비전향장기수35명 애국열사릉에 안장(2)
[로스엔젤레스/평양=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세계에서 비전향장기수로 최장기간을 감옥에 가뒀다는 일로 기네스 북에 올랐다는 것은 인류사회에서 부끄러운 일이다. 게다가 비전향장기수로 이것은 인류역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일이 될 것이다.
2000년 9월2일 역사적인 6.15선언의 혜택으로 북에 송환된 63명의 비전향장기수 선생들 가운데 세계 최장기 양심수로 김선명(1925.2.20~2011.1.15) 선생이 45년의 세월을 0.75평의 철창속에 갇혀 살았고, 이종환 선생(1922.11.21~2001.4.30)이 43년의 감옥생활, 우용각 선생(1932.11.29~2012.12.7)이 42년의 감옥생활, 윤용기 선생(1926.8.2~2001.6.13)이 40년의 감옥생활을 해야만 했다. 나머지는 대부분 30년 안팎의 감옥생활을 보내야 했다.
40년 이상 감옥생활을 하고 북에 송환된 4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은 옥중후유증과 노약현상으로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나자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이외에 서거한 비전향장기수들은29명이 되는데 이들 모두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그 밖에 북에 송환된 63명중 서거한 비전향장기수들은 김종호(서거일자:2003.11.21), 신인영(2002.1.7), 김종호(2003.11.21), 강동군(2004.2.12), 김석형(2006.8.14), 오형식(2006.9.2), 김영태(2008.1.14), 김일진(2008.7.8), 김인서(2008.8.17), 류운형(2008.11.22), 한백열(2009.5.12), 장병락(2009.10.11), 김명수(2009.10.12), 안영기(2009.10.20), 김중종(2009.10.20) 류한욱(2009.12.26), 황용갑(2010.9.25), 김우택(2010.9.13), 리종(2011.7.19), 한종호(2011.9.4), 류연철(2011.10.3), 전창기(2012.4.12), 전진(2012.4.29), 김만수(2012.8.1),리두균(2012.8.31),김창원(2012.10.3), 송상준(2013.1.25), 리세균(2013.8.1),김영만(2013.11.23),임병호(2014.1.17)로 확인됐다.
98세에 서거한 임병호 선생
가장 최근에 서거한 비전향장기수는 금년 2014년 1월17일 향년 98세인 임병호 선생(1914.9.1~2014.1.17)이다. 그는 충청남도 보령군에 있는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몹시 가난한 가정 형편으로 말미암아 힘겹고 고통스럽게 살았고 제대로 교육받지도 못했다.
10대 후반에 집을 나와 만주를 전전한 끝에 황해도의 광산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이 곳에서 반일 조직에 가입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눈뜨게 되었다. 임병호가 가입한 조직은 김일성의 조선인민혁명군과 선이 닿아 있었다.
일본 제국의 태평양 전쟁 패배로 황해도 지역에 소군정이 실시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등용되었다. 간부양성학교를 졸업하고 광산의 무역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다. 코리아 전쟁 중에도 후방에서 무역 사업에 종사했다.
이후 조국통일 사업을 위해 남녘으로 왔다가 체포되어 1959년에서 1991년까지 32년간 광주교도소를 위시한 여러 교도소에서 복역했다. 수감 중 전향 권유를 받았으나 전향하지 않았다. 석방된 뒤에는 서울의 양로원에 머물다가 2000년6·15 남북 공동선언에 의거해 1남 2녀의 자녀들이 기다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고 나서 임병호의 삶을 소재로 한 소설 《붉은 수인》이 창작되어 높이 평가받았다. 그의 수기 《새 삶의 축복》이 있다.
이들은 또한 양심수에 해장한다. 위키백과사전에는 양심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양심수(良心囚,영어: _ xml_:lang="utf-8">Prisoner of conscience)는 정치적 또는 사상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투옥된 사람을 말한다. 인권운동단체인 앰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에서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치적·종교적 신념,인종, 성별, 피부색, 언어, 성적 지향성을 이유로 구속·수감된 모든 경우'를 양심수로 규정하고 있다. 한국의 국가보안법 위반이나 양심적 병역거부로 수감된 이들, 비전향 장기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처럼 인종차별반대로 수감되었던 이들이 양심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최장기 양심수로세계기록(기네스북)에오른김선명선생은45년 세월의 철창속에서도 그어떤전향요구도단호히거부하며자신의양심, 자신의지조, 자신의사상을고히간직해왔다.
김선명 선생 그는 누구인가?
그는 1925년 2월20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에서태어났다. 만석꾼인김선명의 집안은 경제상여유가 있었으나 양반과상민의 차별을보면서 자신이 사는세상이 평등이없는 사회라는 사실을깨달았다.
양평에서 보통학교를 중퇴하고서 10대 중반인 1941년에는 집안이 경성부로 이사했다. 태평양 전쟁으로 농촌 지역에서 공출이 심해지면서 가산을 정리해 이사했으나 곧 가산이 탕진되면서 김선명은 교육받을 기회를 잃었다.
이후 태평양 전쟁 시기를 영등포에 소재한 공장에서 노동하면서 보냈다.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제국이 무조건항복을 선언하면서 출옥한 좌익 계열 운동가인 우봉수에게 지도받아 좌익 운동에 투신한 김선명은 미군정 하에서 공장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영등포특별자위대를 조직해 활동하였다.
서울에서 코리아 전쟁을 맞고서 조선인민군에 입대해 참전했다. 1951년 10월 15일에 조선인민군 정찰대원으로 철원군에서 정찰하는 도중에 포로가 되었다. 재판에서 징역 15년형과 사형을 차례로 선고받고서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어 복역하였다. 1995년 출소할 때까지 45년간 감옥에 있었다. 이 기록은 세계 최장기수 기록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올라 있다.
한편, 김선명이 조선인민군에 입대한 사이 아버지와 누이 두 명은 보복 살해되었고 다른 형제들은 연좌제로 고통받아 김선명과 연락을 끊었다. 비전향 장기수 가운데 드물게 총각이었던 김선명은 북조선으로 송환되고서 혼인하여 평양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2011년 1월15일 서거해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남녘에서는 김선명 선생과 관련하여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저항한 양심수인 김선명을 주인공으로 다큐멘터리《송환》과 극영화 《선택》이 상영된바 있었고, 북녘에서는 《내삶이 닻을 내린 곳》이라는 장편영화와 〈신념과 의리를 지킨 45년〉이라는 단편영화가 만들어졌고 소설 《조국의 아들》도 김선명 선생의 생을 다룬 작품이다. 고 문익환 목사도 지난 1993년에 김선명 선생을 주제로 한 〈45년 김선명 할아버지께 바치는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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