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12신]비전향장기수 선생들 자택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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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민족통신 공동취재진] 민족통신 성원들은 이번 방북기간에는 96세의 윤희보 선생을 잠시 찾아뵙고 인사를 나눈뒤 비전향장기수 선생들 가운데 30명의 생존자들 중 김동기 선생(82)댁에서 최태국 선생(79), 최하종 선생(87)과 함께 자리를 같이하고 이러저러한 대화를 나눴다.<?xml:namespace prefix = o />
[사진]비전향장기수 선생들의 자택을 방문하여 대담하는 민족통신 성원들김동기 선생 댁에는 세상을 떠난 처의 남동생 딸(비전향장기수 김영태 선생 조카)인 김지혜씨(평양의과대학 의사)가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과일과 과자 및 음료수 등을 대접해 주었다.
최하중 선생은 1927년 3월21일 함북성진 출생으로 남녘에서 37년 옥살이를 하다가 6.15시대 덕분으로 2009년 9월 북송된 63명 중 한분이다. 김동기 선생은 1932년 10월19일 함경남도 단천 출생으로 남녘에서 34년 옥살이를 하다가 북송되었고, 최태국 선생은 1935년 평북삭주 출생으로 남녘에서 34년 옥살이를 하고 북송된 인물이다. 이 ‘신념의 화신들’이 회고하는 북송이후의 생활을 알아본다.
최태국 선생이 입을 연다. 감옥생활 34년에 출옥하지만 출옥이후 1년반 만에 6.15시대를 맞았고, 그 결과 2000년 9월에 그렇게 보고싶고 그리워하던 부인을 볼 수 있다는 꿈에 설레이는 마음이었다고 회고한다. “나는 30살이었고, 내 처는 당시 26살이었고 임신 5개월이었습니다. 살아만 있다면 업어 주리라”고 생각하며 판문점을 넘었다. 여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어렴풋이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내 처, ‘박용녀’는 한갑이 넘은 61살의 나이가 되어서인지 나를 알아 보지 못했다. 처의 뱃속에 있어 얼굴도 보지 못했던 내 딸과 내처 우리 셋은 서로 끌어 안고 울고 또 울면서 장군님(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가리킴)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인사를 올렸다고 아직도 흥분된 기분으로 그 당시의 순간을 떠올린다.
호텔에 와서 차분히 이야기를 나눈 최태복 선생은 그의 딸이 커서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 또다시 장군님에게 감사했다고 말한다. 북송 당시 9살, 10살이던 손주들이 지금 대학을 다니는데 오는 5월12일이면 건축종합대학을 졸업한다고 밝힌다. 그리고 부인은 “남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나를 기다리며 죽었어도 영원히 기다렸다는 말을 했다”고 설명하면서 “이 기쁨은 당당한 조국이 있기에 가능했고, 우리 장군님이 있었기에 이룰수 있었던 그 기쁨을 누리는 영광이었다”고 뜨거운 감사를 표명하는한편 “이 고마움을 갚은 길은 오로지 우리의 경애하는 원수님(김정은 제1위원장을 가리킴)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한몸 다 바칠 것”이라고 굳은 결의를 다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만간에 9순을 바라보는 최하종 선생은 그 토록 사랑하던 부인(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 출신)이 북송이후 기쁨의 만남으로 벅찼지만 7년만인 2007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 그의 아들은 내각에서 일하고, 딸은 외국어를 전공하고 체육성에서 훌륭한 일꾼으로 활약하고 있다. 그러나 최하중 선생은 34년의 옥중생활로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가 뇌혈증 후유증으로 고생하였고, 눈도 한쪽을 백내장 수술을 하였다고 밝히면서 “내가 고향 땅에 왔기 때문에 생존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미 죽었을 몸이었습니다.”라고 회고하면서 “위대한 주석님과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 그리고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에 대한 은덕을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라고 지난 시기의 최고 영도자들에 대한 뜨거운 배려에 대해 회상하면서 눈시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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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님의 댓글
한민족 작성일
이어서 계속~
뜨거운 배려에 대해 회상하면서 눈시울을 적시며 이야기해 준다.
그는 틈틈히 서예를 한 작품들을 각도를 순회하면서 전국서예전들을 많이 해 왔다고 설명하면서 “하루라도 더 오래 살아서 그 은혜에 조금이라도 더 보답하고 싶은 것이 나의 심정”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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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비전향장기수 김동기 선생
김동기 선생은 1999년 2월 광주교도소에서 34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감한 이후 그 이듬해 9월 다른 비전향장기수들과 함께 북송되었지만 그의 부인은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그렇지만 그는 재혼하기를 거부하고 지금까지 혼자 살고 있다고 밝힌다.
1966년 남녘으로 넘어와 활동하기 전에는 평양상업대학을 졸업하고 북조선 상업성에서 경제부문 관리로 근무한바 있었는데 남녘에 가서 감옥생활을 할때에는 가족들이 없어 누가 영치금을 넣어줄 수 없었으므로 수감생활중 칫솔한개를 몇년씩 사용하고 다른 사람의 헌 내의를 주워서 입어야 했던 것으로 널리 알려진바 있었다.
북송 한 달전인2000년 8월1일에는 아침이슬 출판사를 통해《새는 앉는 곳마다 깃을 남긴다》는 수기를 발행한바 있었다. 송환후에는 조선작가동맹 소속의 정식작가로 활동해 왔다. 2003년에는 다른 비전향장기수 선생들과 《새는 조국에 대한 사랑은 나의 신념이고 의지였다》, 《신념과 의지의 강자들-비전향장기수들의 수기5》을 평양출판사를 통해 펴낸바 있었다.당시 남녘의 진보 월간지 ‘말’의 신준영기자가 그에 대한 인터뷰기사를 써 널리 알려진바 있다.
이밖에도 그의 저서들은《삶의 노래:2006년》, 《생이란 무엇인가:2004년》, 《태양가까이에서:2002년》,《조국의 품에 안겨:2010년》, 《저녁노을은 붉다:문예출판사》등이 있고, 2003년에는 박사학위 과정을 마치고 국가학위학직위원회에 논문을 제출하여 ‘사회정치학 박사학위’를 수여받은바 있다.
이들 비전향장기수 선생들과 대화를나누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이 세상 그 어디에서 이러한 신념의 화신들을 볼 수 있을까. 이들이 겪어 온 사연들이 너무나 기가 막히기 때문이다. 그 고통, 그 아픔, 그 긴긴세월을 극복해 내면서도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고 지조와 신념을 가지고 살아온 비전향장기수 선생들의 때묻지 않은 양심과 자기 영도자들을 위해 하나 밖에 없는 목숨도 민족제단에 바쳐온 이들의 나라사랑 민족사랑과 함께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애국심은 그야말로 용광로에 끓는 쇳물보다도 더 강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존경의 마음을 갖는다. 지금 6.15남북공동선언에 의해 북송된 63명의 비전향장기수 선생들 중 생존자들은 3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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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비전향장기수 선생들과 가족들이 금수산태양궁전 방문후 만나 기념촬영하는 민족통신 노길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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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비전향장기수들 63명의 모습을 담은 조선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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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비전향장기수 댁을 방문하여 대담하는 민족통신 성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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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남녘의 유명한 서예가에 선물받았다고 말하는 김동기 선생은 이 글발의 뜻은 "명예와 절개는 태산보다
무겁고, 죽고 사는 것은 기러기 털보다 가볍다는 뜻을 반영한 글인데 2000년 북송당시 선물로 받은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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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방북취재 기재기간 중 금수산태양궁전에서 만나 악수하는 민족통신 노길남대표(맨왼쪽)
*북 송환된 비전향장기수35명 애국열사릉에 안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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