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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11신]민족통신 취재진, 김혜영 선생과 특별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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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
댓글 1건 조회 3,561회 작성일 14-05-04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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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민족통신 공동취재진]북녘을 취재중인 민족통신 공동취재진은 일간 <민주조선>에서 10여년 근무하면서 비전향장기수 선생들 63명을 차례로 모두 인터뷰하여 보도한 여성언론인 출신 김혜영 선생(현재는 해외동포사업국 부처장)과 평양호텔 면담실에서 만나 조국통일 문제에 관하여 서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며 대담했다.<?xml:namespace prefix = o />

민족통신 성원들은 평양여관 면담실에서 김혜영 선생을 맞이했다. 비전향장기수 선생들을 모두 인터뷰해서인지 남녘동포들과 해외동포들의 심정에 대해 아주 파악이 깊은 분 같다.

그는 중국과 미국관계가 대만을 내세우던 미국이 중국으로 돌아서서 국교정상화했던 그 배경에 대해 중국이 60년대 핵실험을 한 그 이후로 진단했다. 가만히 들어보면 국교관계도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뜻으로 이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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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남북공동성명에 얽힌 뒷 이야기들

 

김혜영 선생은 화제를 바꾸어 1972년 남북정치고위급회담 준비시기에 이후락이 일행을 데리고 평양에 온 배경도 말해준다. 그 해 53일 밤 12시 어딘가 가는 것에 대해 호출을 받았다. 이후락은 이거 사형장으로 가는게 아닌가라고 마음조렸다고 한다. 누군가 이후락에게 다가와 선생님 갑시다!”라고 말할때 이거 사형장이구나라고 생각하며 긴장한 마음으로 간곳이 김일성주석이 계시는 장소였다. 두 사람은 서로 만나 악수를 하였지만 이후락은 지금까지 지은 죄 때문에 눈동자를 바로 굴릴수 없었던 분위기였다. 김일성주석은 한마디로 눈빚으로 이후락을 제압했다.

인사와 대화가 시작되자 사형장 가는 건 아니구나라고 안도의 한숨을 몰아 쉰 이후락은 김일성 주석이 남북정치고위급회담을 하자면 기준이 있어야 되지 않겠소라고 기준을 거론하면서 민족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 어떠하겠오라고 묻자,  3가지가 모두 나쁜 것이 아니어서 옳습니다라고 선뜻 대답했다.김 주석이 보기에 너무 쉽게 대답하여 한번 믿어보자는 심산으로 72 53일 밤 한시간 동안 담화를 나누면서 역사적인 3대원칙을 기준으로 하자는 합의를 하게 된 것이었다고 그는 설명해 준다.

혹시나 사형장으로 가지 않을까  걱정했던 이후락은 가벼운 마음으로 서울로 돌아갔다. 북측 당국은 이후락이나 박정희가 성천에서 생산하는 연초로 만든 담배가 유명하다고 알고 있다는 말에 평안남도에 있는 성천연초로 만든 담배 100갑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후락이 돌아가서 선물로 받은 성천담배를 감추고 몇대만 꺼내 박정희에게 맛보라고 하면서 그 많은 성천담배를 두고 두고 혼자 피웠다는 후문이다. 그 당시 이후락과 박정희는 성천담배 피우는 것은 반공법 걸리는거 아니야 하며 농담하자 이후락은 나같은 사람은 반공법에 저촉되어도 문제가 안되겠지만, 대통령 각하께서는 반공법에 저촉되면 곤란합니다.”라는 농담을 주고 받았다는 이야기도 들려준다. 이러한 화제 때문에 6.15시대에 평양을 방문했던 남측 언론인대표단 성원들도 성천담배를 많이 찾았다고 한다.

그 이후 같은해 7월달 역사적인 7.4남북공동성명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적으로 발표되어 민족분단이후 최초로 남북정치고위급회담에서 합의한 7.4남북공동성명이 만 천하에 공표되었다.

이 당시 남녘의 비전향장기수 선생들은 만남의 집을 포함하여 남녘 전국에 산재해 있던 선생들이 김일성장군 만세!’를 소리높이 부르며 환희에 참 표정들을 지으며 기뻐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김혜영 선생은 비전향 장기수 선생들을 한사람 한사람 취재하며 알게되었다고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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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관련 일화

 

남북관계는 그동안 남북이 원칙을 합의하여 놓았지만 엇박자의 연속이었다. 김혜영 선생도 동감한다.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지만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남북관계가 경색으로 전환된 것도 남측의 일관되지 못한 문제점들이었다고 그는 지적한다.

박정희정권은 6.23특별성명을 통해 유엔동시가입을 발표하였을 때에도 우리는 하나라는 구호를 강조하면서 하나의 국가로 가입될 것을 갈망해 온 것이 북측의 입장이었다는 말이다. 남측의 특별성명이 발표된 4시간 이후 북측 당국은 조국통일 5대방침을 발표하면서 하나의 국가로 유엔가입을 촉구하기도 했다.

김혜영 선생은 남측 당국은 계기가 있을 때마다 사건을 조작하여 온 역사도 상기시켜 주었다. 1973년 김대중남치사건, 1979 10.26사태, 12.12쿠테타, 1980 5.18광주인민봉기, 80년대 미문화원 방화사건 등이 연속되어 온 비정상 사태들을 돌아보면 가슴 답답하다는 심정을 토로하는 한편 조국의 통일을 이루는데 서로 사상이 틀리고 이념이 다르고 제도가 다르다면서 남측 당국자들과 지식인들이 반통일 여론을 조성해 오던 그러한 시기에 김일성 주석께서는 독창적인 통일방안을 제시하셨다고 말한다.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은 이미 1973 4 16 김일성주석이  고려연방제를제안한바 있었다.  이때고려연방이라는 표현이처음 사용되었다. 이 방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남북간의 군사적 대치상태의 해소와 긴장상태의 완

·         남북간의 다방면적인 합작과 교류의 실

·         남북의 각계각층 인민들과 각 정당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되는 대민족회의 소

·         고려연방공화국을 국호로 하는 남북연방제의 실

·         고려연방공화국이라는 단일국호에 의한 유엔

그리고 이것을 구체화하여 1980 1010일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이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 제의하여 기존의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완결한 것으로 되어있다.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은 크게세가지로 구성되었다:

·         대한민국이 먼저 이행해야 할 선결조

·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정부의 성격, 

·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수립후 시행할 정책. 10대 시정방

 

10시정방침의 내용은다음과 같다:

1.   국가활동과 모든 영역에서의 자주성 견지와 자주정책의 실

2.   전 지역전 사회에서의 민주주의 실시와 민족의 대동단

3.   경제적 합작과 민족경제의 발

4.   남북간 과학문화교육분야 교

5.   남북간의 교통체신의 활용

6.   전체 근로자의 생활안정 도

7.   남북간의 군사적 대치상태의 해소 및 민족 연합군의 조

8.   해외동포의 보

9.   통일 이전의 대외관계 정

10.통일국가로서 우호적평화애호적 관계 증진

 

김혜영 선생은 조국통일은 자기 사상이나 이념, 제도 등을 주장한다면 이룰  없기 때문에 남북의 사상이념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여야 서로 다툼을 없이 이룰수 있다고 강조한다.

1989 문익환 목사가 평양을 방문하였을  김일성 주석께서 제안하신 통일방안은 정말 멋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장 실시하는데에는 남녘 당국에 불안감이 있는 실정이니 남한 당국의 입장을 고려하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러면 낮은 단계의 연방제도 일없지 않겠습니까?”라고 반문하자, 문익환 목사는 그렇다면 이해갑니다.”라고 대답하는 한편 이제 통일은 미래형이 아니라 완료형입니다.”라고 언급하였다는 일화도 설명해 준다. 다시말하면 조국통일 문제에 관해서는 어디까지나 남측 당국차원 보다는 북측당국에서 지속적으로 앞서 선도해 왔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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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님의 댓글

한민족 작성일

이어서 계속~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



김혜영 선생은1993년 4월 7일 최고인민회의 제9기 5차회의에서 총리 강성산의 보고를 통해 제시된 통일강령은 김일성주석이 직접 제기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당시의 배경에 대해 그는 80년대 말 동유럽의 위기와 90년대 들어 소련의 붉은기가 내려지고 그 후과로 미국을 비롯한 그 추종연합세력국들의 압살정책이 대두되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핵사찰 문제가 태동되었다. 그 결과 조선은 준전시상태를 선포하는 한편 핵무기전파방지조약(NPT)에서 탈퇴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때문에 미국의 종교인 빌리 그래햄 목사선생이 불야불야 조선에 파견되어야 하였고 조선의 최고지도자 김일성주석께서는 이를 우리민족끼리 해결하기 위하여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에기초하여 (1)전민족대단결을 비롯하여 (2)민족애, 자주정신에 기초하여 풀려고 노력하였고, (3)공존공영을위한 목표와 정신, (4)그 방도를 위해 민주주의와 민족대단결에 의한 개선을 고심끝에 창안해 내놓은 이래 남북당사자들이 만나야 한다는 문제때문에 당시 김영삼 남측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온정성을 다해 노력하시던 시기가 바로 서거하기 한달전인 6월이었고, 당시 조미관계가 최악의 경우에 치달을 때 미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가 방북하여 김일성주석과 접견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김 주석께서는 서해갑문 근처에서 배를 타고 담화를 나눴는데 그 때 배 속도를 낮춰라하는 지시를 하는 모습을 본 지미 카터는 물가에 낚시하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그렇게 지시하는 것을 관찰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카터는 김 주석의 인민에 대한 배려에 대한 자세를 본 이후에 “김일성주석은 미국의 유명한 3대 대통령을 다 합친것 보다 더 훌륭한 분이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 당시 주석께서는 밤잠을 주무시지 않고 고심하면서 준비하였다고 한다. 주석은 “내일이 양력으로 7월7일이지만 음력으로 7월7일은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인데 이 때에는 은하수가 다리를 놓아 한해 한번 견우직녀가 만난다는 이야기를 하며 우리 인민들의 처지는 하루 빨리 통일을 해야 한다고 염원하기 때문에 이번 정상회담을 잘 해야 한다”고 말하시며 밤잠을 이루지 않으시고 ‘남산에 푸픈하늘…’이라는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며 비장한 마음을 갖고 계셨다고 말한다. 김혜영 선생은 이 말을 잇는 순간에 눈시울을 적시며 “수령님은 이날 새벽 일생에 처음으로 아침산책을 하지 않으시고 두꺼운 문건들을 하나 하나 점검하며 즐겨하시던 산책도 다른 일과들을 모두 미루시고 자정이 넘도록 다 검토하고 보신후 김정일 장군님께 동지가 허락한다면 이 문건을…?”하고 묻자 “장군님은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준비하였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7월8일 새벽2시 전화통화가 왔는데 그 시각은 청천벽력이었다. “심장의 고동이 멈췄다”는 내부소식이었다. 그런데 7월9일 12시에 중대발표가 있다는 방송이 나왔다는 것이다. 김혜영 선생은 근무중에 이 특별방송 소식을 듣고 무심코 “아, 이제 통일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려는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상과는 뜻밖에 청천벽력의 소식이었다며 그는 민족통신 성원들과 대담중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인다. 이렇게 북녘동포들의 최고영도자에 대한 흠모와 그리움은 대단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당시북측 당국자들은 ‘북남고위급회담’은 일시중단을 발표하며 임시연기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5년 8월 한세기에 한번 있을까하는 큰물난리가 오고,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1997년 8월4일 김일성주석의 조국통일 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는 노작을 발표했고, 1998년 8월30일 광명성1호를 발사하며 고난의 행군을 승리적으로 결속하면서 세계의 눈빛을 변화시키는 한편 조국통일3대헌장을 정식화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반드시 이룩하자는 결의를 다지셨다고 김혜영 선생은 돌이켜 본다.

미국의군사측정기는 광명성1호의 위력에 대해 백두산1호의 로케트가 만약 군사목적으로 이용된다면 그것은 사거리 8천킬로미터(조선에서 미국본토)로 날라갈 수 있다고 계산했던 것도 미국이 조선에 대한 힘의 정책에서 유화정책으로 돌아서는 자세로 만들었던 것으로 김혜영 선생은 진단한다. 그 당시 미국과 그 추종나라들은 저마다 조선과 국교를 맺자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그결과 3,3,3 붕괴설은 사라졌다고 말한다. 3일, 3달, 3년이면 조선이 망한다고 떠들어 대던 붕괴설은 소리도 없이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러한모습을 바라본 남측의 김대중 대통령도 생각이 달라져 2000년 4월8일 북에 특사를 보내고 서로 합의하게 되어 역사적인 북남정상회담을 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을 위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일성주석이후 김영삼과의 고위급회담을 잠정 연기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라고 설명해 준다. 그리하여 6.15남북공동선언의 5개항에서 2항에 명기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 방안도 좋다는 항목이 들어갔고, 이에 대해 김주석과 문익환목사 사이에 주고받은 대화에서 서로 동감하였던 내용이라고 역사적 배경을 말해준다.

김혜영선생은 6.15선언에서 언급한 북측의 연방제와 남측의 연합제의 공통점은 (1)서로 다른제도를 인정하고 초월하자는 점, (2)기본틀로 사상이나 이념 제도를 서로 용납하자는 점, (3)국가형태, 통일기구를 만들자는 점, (4)점차 낮은 단계연방제에서 높은 단계의 연방제로 지향하자는 점 등으로 합의한점들을 설명하는 한편 두 주장의 차이점은 (1)연방제에서는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개정부와 두개 제도를 말하는데 연합제에서는 두개체제, 두개 국가로 공존공영하자는 점, (2)연방제는 상설기구를 주장하는데 연합제에서는 비상설기구,(3)틀거리로 연방제에서는 두 지역자치정부이고 연합제에서는 두개 독립정부, 즉 두개조선을 말하는 것인데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차이점들은 뒤로 두고, 우선 공통점들을 찾은데 기초하여 우리민족끼리 서로 협력하여 나가자고 합의한 것이 6.15선언의 정신이고 ‘조국통일3대헌장’의 일관된 정신이라고 답변해 준다.

김혜영선생은 남녘 사람들이나 해외동포들 가운데 통일을 서두르며 군사적 방법으로 하면 안되느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물론 군사적으로 하면 간단하지요”라고 대답하면서도 평화적으로 하려고 노력하여 왔으니까 지금까지 늦어지고 있다고 답변해 주곤하였다고 설명한다.

그는마지막으로 북녘으로 송환된 비전향장기수63명을모두 인터뷰한 언론인 경력을 가진 인물로 이들 절반이 남조선 춣신인데 사상하나 동경한 나머지 북녘 땅 한번 밟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수십년 감옥살이를 하며 지조를 버리지 않고 살아온 신념의 화신들이고 평가하면서 이들이 왜 그렇게 했겠느냐고 반문하며 그 여운을 남겨주는 시간으로 민족통신 성원들과 가슴과 가슴으로 대화를 주고 받는 뜻있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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